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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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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1763년에 태어나 1813년에 사망한 폴란드의 귀족이자 군인이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하다가 폴란드군으로 전향하여 1792년 폴란드-러시아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코시치우슈코 봉기에 참여했으며,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바르샤바 공국의 전쟁 장관 및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특히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엄호하다가 사망했다. 그는 폴란드 독립의 상징으로 추앙받으며, 그의 군사적 업적과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폴란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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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제프 그라시에 의한 요제프 포니아토프스키 왕자, 약 1810년
요제프 그라시의 초상화, 1810년경
출생일1763년 5월 7일
출생지팔레 키스키, , 합스부르크 군주국
사망일1813년 10월 19일
사망 장소화이트 엘스터 강, 작센 왕국
별칭폴란드의 바야르
서명
경력
소속합스부르크 군주국
1764
프랑스 제1제국
바르샤바 공국
복무 기간1780년–1813년
최종 계급프랑스 원수
훈장image_file: POL Order Świętego Stanisława BAR.svg
image_file: Order of the Black Eagle - Ribbon bar.svg
image_file: PRU Roter Adlerorden BAR.svg
image_file: Order of White Eagle Poland-Order Star.jpg
image_file: Virtuti Militari Grand Cross Order Star.jpg
image_file: Lint en ster van het Erelegioen (2).jpg
기타 정보
언어

2. 초기 생애 및 오스트리아군 복무

베르나르도 벨로토의 ''쾨니히스펠스 대령이 포니아토프스키 왕자에게 승마를 가르치는 모습''(1773)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1763년 오스트리아 의 킨스키 궁전에서 태어났다.[3] 그는 빈의 스코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형제이자 오스트리아의 원수였던 안제이 포니아토프스키였다. 그의 어머니는 구 오스트리아-보헤미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궁정 부인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친구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킨스키 폰 브치니츠 운트 테타우 백작부인이었다.[4] 아버지 사후, 유제프가 열 살이 되자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고, 두 사람은 평생 동안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빈에서 성장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프라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나중에는 바르샤바에서 삼촌인 국왕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어머니와 그 언어로 대화했다. 또한 폴란드어, 독일어를 배웠고, 나중에는 러시아어까지 배웠다. 어린 시절 그는 "페피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요셉의 체코식 애칭이다.

그는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건반 악기를 연주하는 법도 배웠고, 나중에는 군사 작전 중에도 휴대용 악기를 가지고 다녔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스스로를 폴란드 시민으로 여기기로 선택한 것은 스타니스와프의 영향 때문이었고, 26세에 폴란드 군대로 전속되었다. 빈에서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례식에 국왕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1787년 그는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와 함께 카니우와 키예프를 여행하며 예카테리나 2세를 만났다.

군사 경력을 선택한 포니아토프스키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입대하여 1780년 중위로 임관되었고, 1786/1788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788년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을 때 요제프 2세 황제의 부관이 되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그 전쟁에 참전하여 1788년 4월 25일 샤바츠를 공격할 때 두각을 나타냈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샤바츠에서 그는 또한 젊은 동료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의 생명을 구했다.

3. 폴란드군 복무 및 1792년 폴란드-러시아 전쟁

1789년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와 폴란드 의회의 요청으로 폴란드군 소장(major-general)으로 임관했다.[5] 그는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를 비롯한 폴란드인 동료들과 함께 폴란드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방면 폴란드군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군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5월 3일 헌법 제정을 지지하며 개혁을 추진했다.[5] 그는 헌법의 친구들 협회 회원이었으며, 헌법 통과를 위해 군대를 동원하기도 했다.

1792년 포니아토프스키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우크라이나 방면 폴란드군을 지휘하며 러시아 제국의 침공에 맞섰다.[5]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지엘렌체 전투에서 승리하고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을 받았다.[5] 두비엔카 전투에서도 선전했으나, 결국 바르샤바까지 후퇴해야 했다.[5]

1792년의 포니아토프스키


폴란드 국왕이 러시아의 보호령인 타르고비차 연합에 가입하자, 포니아토프스키는 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실행하지 않고 군을 떠났다.[5] 그는 마르쿠슈프에서 벌어진 전쟁의 마지막 교전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5]

4. 코시치우슈코 봉기 (1794년)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휘하에서 1794년 봉기에 참여한[6] 포니아토프스키는 1794년 봄, 숙부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편지를 받고 코시치우슈코에게 합류했다. 그는 5월 27일 코시치우슈코 진영에 도착하여 임무를 보고했고, 코시치우슈코는 포니아토프스키에게 리투아니아 봉기를 이끌 것을 제안했지만, 숙부와 멀리 떨어지기를 원치 않아 거절하고 다른 장교를 추천했다.[6]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이후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주변 전투에 참전했다. 사단장으로서 7월 7일부터 10일까지 브워니에서, 7월 26~27일에는 마리몬트에서 프로이센 기병대를 상대로 전투를 지휘했다. 프로이센군의 바르샤바 포위 공격 중 스타니스와프 모크로노프스키가 리투아니아로 파견되자, 포니아토프스키가 바르샤바 방어 임무를 넘겨받았다.[6]

8월 5일부터 10일 사이, 포니아토프스키는 고리 슈베츠키 지역을 프로이센군에게서 탈환했으나, 몇 주 뒤 반격으로 상실했다. 그는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으려다 부상을 입었다. 10월에는 브주라 강에서 프로이센군 참호 공격을 지휘하여 프로이센군을 묶어두고 융프라니에크 돔브로프스키 군단의 바르샤바 귀환을 도왔다.[6]

마치요비체 전투에서 코시치우슈코가 포로로 잡히면서 봉기가 실패하자,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에 머물렀다.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지만, 러시아군의 직책 제안을 거절하고 1795년 4월 빈으로 이주했다. 코시치우슈코 봉기는 폴란드의 3차 분할을 초래했다.[6]

5. 바르샤바 공국 및 나폴레옹 전쟁

인장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바르샤바 공국의 전쟁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라신 전투에서 포니아토프스키


포니아토프스키가 1809년 7월 크라쿠프에 입성


장샤를 랑글루아의 ''스몰렌스크 전투''. 불타는 스몰렌스크 앞에서 나폴레옹과 포니아토프스키. 포니아토프스키는 황제에게 충성하며 특히 러시아 원정에서 그의 군단이 스몰렌스크와 보로디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796년 예카테리나 2세 사망 후, 파벨 1세는 포니아토프스키의 영지를 돌려주고 그를 러시아군에 복귀시키려 했으나, 포니아토프스키는 요양을 핑계로 이를 거절했다.[6]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프로이센을 격파하자, 포니아토프스키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부터 바르샤바의 행정책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했다. 그는 또한 지역 주민들이 조직한 도시 방위군과 시민 민병대 사령관도 맡았다.[6]

그해 말 조아생 뮈라와 그의 부대가 바르샤바에 입성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뮈라와의 오랜 협상과 유제프 비비츠키의 설득으로 프랑스군에 임관하게 되었다. 1807년 7월, 나폴레옹에 의해 바르샤바 공국이 수립되자,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공국의 전쟁 장관 겸 바르샤바 주 방위군 사령관에 취임했다.[7] 1809년 3월 21일, 포니아토프스키는 공식적으로 총사령관이 되었다.

1809년 봄, 포니아토프스키는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요제프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침공에 맞서 폴란드 군대를 이끌었다.[5] 라신 전투에서 그는 직접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보병 총검 돌격을 감행하여, 폴란드군은 두 배나 많은 오스트리아군과 대등하게 싸웠다. 이후 바르샤바를 방어하지 않고 비스툴라 강 동쪽 둑으로 후퇴하였고, 오스트리아군은 이곳을 공격했지만 그로호보에서 패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사단이 다시 비스툴라 강을 건너 폴란드군을 추격하려 했지만, 미하우 소콜니츠키 장군이 이끄는 공격으로 구라 칼바리아에서 격파되었다. 그 후 포니아토프스키는 비스툴라 강을 따라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여 갈리시아의 넓은 지역을 점령했다. 5월 14일 루블린이 점령되었고, 18일에는 산도미에시가, 20일에는 자모시치 요새가 함락되었으며, 5월 27일에는 르비우가 점령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전개는 오스트리아군에게 바르샤바에서 철수할 것을 강요했다.[5]

그동안 포니아토프스키는 비스툴라 강 서쪽으로 이동했고, 바그람 전투가 벌어진 7월 5일, 라돔에서 크라쿠프를 목표로 남쪽으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그는 7월 15일 그곳에 도착했고, 오스트리아군은 크라쿠프를 러시아군에게 넘기려 했지만, 포니아토프스키는 이를 저지했다. 해방된 대부분의 지역은 르비우 지역을 제외하고 1809년 10월 14일 평화 조약을 통해 공국에 편입되었다.

1811년 4월, 포니아토프스키는 작센 왕국의 국왕이자 바르샤바 공작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를 대표하여 나폴레옹 2세의 세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4개월 동안 머물면서 황제와 그의 장군들과 함께 러시아 원정 계획을 세웠다. 그는 프랑스 지도자들에게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남부 경로가 가장 큰 이점을 제공할 것이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은 이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포니아토프스키는 대육군의 제5군단 사령관이 되었다.[8]

모스크바 진격을 위한 전위 부대에서 싸우면서 그는 여러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8월 17일 스몰렌스크에서 그는 직접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도시를 공격했다.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제5군단은 우티차 언덕을 놓고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다. 9월 14일 폴란드 군인들은 러시아 수도에 처음으로 진입한 사람들이었다. 그 후 폴란드 군단은 9월 29일 치리코보 전투와 10월 18일 빈코보에서 전투를 벌였다.

대육군의 퇴각을 엄호하면서 포니아토프스키는 뱌즈마 전투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그는 며칠 동안 현역으로 복무했지만, 그의 상태는 그가 그의 지휘권을 유제프 자욘체크에게 넘기도록 강요했다. 그 후 그는 부상당한 두 명의 보좌관과 함께 마차를 타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베레지나 도하에서 간신히 러시아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을 피했지만, 12월 12일 바르샤바에 도착했다.[6]

6. 라이프치히 전투와 죽음

1813년, 부상에서 회복한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군을 재정비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다른 폴란드 지도자들이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고 있을 때도,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사면을 제안하고 협력을 제안했지만 거절하였다.[6] 2월 5일 러시아군이 침공해오자, 포니아토프스키는 군대를 이끌고 바르샤바를 떠나 크라쿠프로 이동했고, 결국 보헤미아로 갔다.[6]

보헤미아에서 프랑스군과 합류한 포니아토프스키는 라이프치히를 향해 이동, 뢰바우와 제들리츠에서 파흘렌 장군이 이끄는 동맹군을 격파하며 이동했다.

그간의 공로로, 라이프치히 전투 중 제국 원수로 임명되었고 전투 종반에는 프랑스군의 후퇴를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후퇴를 엄호했으며, 그 와중에 폴란드군 병력을 상당수 잃었다. 반수 이상 줄어든 폴란드군을 지휘하면서, 공세가 완화되었을 즈음 천천히 철수를 감행했다. 그러나 엘스터 강의 다리가 붕괴되면서 다수의 프랑스 병사들과 함께 그는 강에 빠져 익사하였다.[9][10]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크도날은 헤엄쳐서 살아남았다. 다리가 끊겨 고립된 우디노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퇴각 시 모두가 엘스터 강을 건너고 다리를 끊게 되어 있었다. 다리를 끊는 것을 담당한 몽포르 대령이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 그는 계속 기다렸지만, 병력이 계속 오고 있는 것을 보고 우물쭈물하다가 "작전대로 가야지"라는 생각에 아직 '''포니아토프스키가 다리 위에 있는 상태'''에서 다리를 끊어버렸다. 그 위에 있던 포니아토프스키는 추락해서 엘스터 강에 빠져 익사했고, 그 뒤를 따르던 5000명이 넘는 폴란드 병사들은 전부 포로로 잡혔다. 향년 50세.[9][10]

7. 사후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포니아토프스키 기념비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공의 죽음, 오라스 베르네의 작품, 1816


베르텔 토르발센의 바르샤바 대통령 궁 앞에 있는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의 기마상


포니아토프스키는 사망 이후 나폴레옹 전설의 폴란드 버전으로 숭배되었다.[5] 그의 유해는 1817년 폴란드로 이송되어 크라쿠프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와 얀 소비에스키 옆에 묻혔다.[7][11][12]

1829년 바르샤바에 베르텔 토르발센이 제작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파괴되었지만, 최근에 복제된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공 기념비가 바르샤바 대통령 궁 앞에 여전히 서 있다.

그는 얀 마테이코1891년 그림 ''5월 3일 헌법''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14]

포니아토프스키는 11월 봉기(1830년) 등 여러 무력 충돌에서 폴란드 독립 투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봉기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나폴레옹 전쟁 동안 그의 지휘하에 복무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창설하고 포니아토프스키가 방어했던 바르샤바 공국은 분할 시대가 끝날 때까지 폴란드의 잔여 국가로 남아 있었다.

일본 만화 ''텐노 하테 마데 – 포란드 히시''는 1991년 이케다 리요코에 의해 쓰여졌으며,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의 삶을 기념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폭격기 비행대는 포니아토프스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주로 페어리 배틀, 비커스 웰링턴, 비커스 워윅, 핸들리 페이지 할리팩스 폭격기를 운용했다.

웨일스계 폴란드인 역사학자 노먼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8. 유산 및 평가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 독립을 위해 헌신하여, 폴란드인들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5] 그의 애국심과 용맹함은 폴란드 역사에서 빛나는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오스트리아 군에서 복무를 시작하여 1780년 대위, 178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요제프 2세의 막료로 종군하며 공적을 세웠으나, 같은 해 4월 25일 사바크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5]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승리하자, 포니아토프스키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부터 바르샤바 행정을 위임받아 바르샤바와 인근 지역 주둔군을 강화했다.[7]

1807년 나폴레옹에 의해 바르샤바 공국이 탄생하자,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공국의 전쟁 장관 겸 바르샤바 주 방위군 사령관에 취임했고, 1809년에는 총사령관이 되었다.[7]

1809년 봄 오스트리아 전쟁에 참가,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요제프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라쉰 전투에서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보병 총검 돌격을 감행하는 등 분전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버텨냈다. 전략적인 기동으로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남부 폴란드를 해방시켜 나갔다.[5]

1813년 부상에서 회복된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군을 재정비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러시아알렉산드르 1세가 사면을 제안했음에도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다했다. 러시아군이 침공하자,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 왕국을 거쳐 프랑스군과 합류했다.[5]

라이프치히 전투 중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전투 종반 프랑스군 후퇴를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다리가 붕괴되면서 백색 엘스터 강에 빠져 익사했다.[9][10]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를 부하 장군이 아닌, 자신과 동등한 황제로서 대우했다.[16] 또한 부하들에게도 포니아토프스키에게 자신과 동일한 충성과 예우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이에 감동받은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의 용맹은 조아생 뮈라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노먼 데이비스는 포니아토프스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파리의 마레쇼 대로(Boulevard des Maréchaux)에는 26명의 원수 중 한 명인 포니아토프스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8. 1. 폴란드 독립의 상징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는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폴란드인들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5] 그의 순수한 애국심과 용맹함은 폴란드 역사에서 빛나는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죽음은 당시 폴란드인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그의 이름을 딴 폴란드 공군 폭격기 편대가 창설되어 활약하기도 했다.[5]

그의 유해는 1817년 폴란드로 운구되어 크라쿠프의 바벨 언덕에 있는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얀 소비에스키와 함께 묻혔다.[7]

1829년 바르샤바에는 베르텔 토르발센이 제작한 포니아토프스키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되었으나, 복제품이 바르샤바 대통령 궁 앞에 다시 세워졌다.[11][12]

얀 마테이코의 1891년 작품 ''5월 3일 헌법''에는 포니아토프스키가 등장한다.[14]

그는 1830년 11월 봉기를 비롯한 여러 독립 투쟁에서 폴란드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많은 봉기 지도자들이 나폴레옹 전쟁 당시 포니아토프스키의 지휘 아래 복무했던 경험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창설하고 포니아토프스키가 지켰던 바르샤바 공국은 폴란드가 분할된 시대에도 독립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1991년 이케다 리요코는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의 삶을 기리는 만화 ''텐노 하테 마데 – 포란드 히시''를 발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포니아토프스키의 이름을 딴 폴란드 폭격기 비행대는 페어리 배틀, 비커스 웰링턴, 비커스 워윅, 핸들리 페이지 할리팩스 등의 폭격기를 운용하며 활약했다. 이 부대의 정식 명칭은 304 Sqn. RAF "실레지아의 땅" 폴란드 폭격기 비행대(Ziemi Śląskiej im. Ks. Józefa Poniatowskiego)였으며, RAF 치베너를 주요 기지로 사용했다.

8. 2. 군사적 업적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는 그의 조카가 폴란드 군에 복무하도록 장려했다.


thumb의 1912년 작품 ''라이프치히에서 포니아토프스키의 마지막 돌격'']]]

포니아토프스키는 오스트리아 군에서 복무를 시작하여 1780년 대위, 178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요제프 2세의 막료로 종군하며 공적을 세웠으나, 1788년 4월 25일 사바크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5]

1789년 숙부인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와 폴란드 의회의 요청으로 폴란드군 장교로 임관,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등과 함께 폴란드로 이주하여 폴란드군 소장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방면 사단장으로 부임하며 폴란드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5]

1792년 5월 6일 중장으로 진급, 우크라이나 방면 폴란드군을 담당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 오스트리아군 출신 폴란드인 동료들과 함께 분투했으나, 수적, 물적으로 열세하여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젤렌체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유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5]

1792년 폴란드-러시아 전쟁 이후 제2차 폴란드 분할이 뒤따랐다.[6]

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에 참여, 바르샤바 주변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밀고 당기는 싸움을 했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포니아토프스키는 1795년 빈으로 이사했다.[6]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승리하자, 폴란드 내 프로이센 점령지가 해방되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부터 바르샤바 행정을 위임받아 바르샤바와 인근 지역 주둔군을 강화했다.[7]

1807년 7월 나폴레옹에 의해 바르샤바 공국이 탄생하자,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공국의 전쟁 장관 겸 바르샤바 주 방위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1809년에는 총사령관이 되었다.[7]

1809년 봄 오스트리아 전쟁에 참가,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요제프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라쉰 전투에서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보병 총검 돌격을 감행하는 등 분전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버텨냈다. 전략적인 기동으로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남부 폴란드를 해방시켜 나갔다.[5]

1811년 4월 파리에서 나폴레옹 2세 세례식에 참관, 4달간 머무르며 황제와 장군들과 함께 러시아 공략 준비에 참여했다.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남부 루트를 건의했으나 기각되었지만, 폴란드 군단이 이 루트를 통해 당초 계획을 보조하도록 허가받았다.[7]

폴란드군은 포니아토프스키가 이끄는 10만 군대를 파견,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 지휘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계획이 틀어져, 대육군 좌익을 맡게 되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군은 전위대로서 훌륭히 싸웠고, 보로디노 전투 등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모스크바에 가장 먼저 입성한 것도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 병사들이었다.

1813년, 부상에서 회복된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군을 재정비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사면을 제안했음에도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러시아군이 침공하자,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 왕국을 거쳐 프랑스군과 합류했다.[5]

라이프치히 전투 중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전투 종반 프랑스군 후퇴를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다리가 붕괴되면서 백색 엘스터 강에 빠져 익사했다.[9][10]

8. 3. 나폴레옹과의 관계

1806년, 나폴레옹프로이센 왕국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격파하는 것을 본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이 조국 폴란드를 재건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폴란드군을 이끌고 나폴레옹 휘하로 들어갔다.[16] 1807년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건국하자 포니아토프스키는 그 군사령관이 되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바르샤바를 일시적으로 점령당했지만 탈환하고, 오히려 폴란드의 옛 영토 크라쿠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 군단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자 바르샤바 공국의 존립도 위태로워졌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렸지만, 포니아토프스키는 끝까지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다. 1813년, 스스로 13,000명의 폴란드군을 조직하여 Battle of Lützen (1813)|뤼첸 전투|뤼첸 전투영어에 참가했다. 라이프치히 전투 중에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그 3일 후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군의 퇴각을 후위 부대로서 지원하며 분전했지만, 엘스터 강을 건너던 중 익사했다.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의 부하 장군이 아닌, 자신과 동등한 황제로서 대우했다.[16] 더불어, 부하들에게도 포니아토프스키에게 자신과 동일한 충성과 예우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이에 감동받은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 죽을 힘을 다했고,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도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참가하여 나폴레옹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의 용맹은 조아생 뮈라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8. 4. 문화적 영향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인들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여겨지며, 그의 죽음은 당시 폴란드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5] 그의 유해는 1817년 폴란드로 운구되어 크라쿠프의 바벨 언덕에 있는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와 얀 소비에스키 옆에 묻혔다.[7]

1829년 바르샤바에 베르텔 토르발센이 제작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파괴되었지만, 최근에 복제된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공 기념비가 바르샤바 대통령 궁 앞에 서 있다.[11][12]

그는 얀 마테이코의 1891년 그림 ''5월 3일 헌법''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14] 1830년 11월 봉기를 비롯한 여러 무력 충돌에서 폴란드 독립 투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봉기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포니아토프스키의 지휘 아래 복무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포니아토프스키의 이름을 딴 폴란드 폭격기 비행대가 창설되어 공중 작전에 참여했다.

일본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는 1991년 포니아토프스키의 삶을 다룬 만화 ''하늘의 끝까지 – 폴란드 비사''를 발표했다.

파리의 마레쇼 대로(Boulevard des Maréchaux)에는 26명의 원수 중 한 명인 포니아토프스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참조

[1] Britannica Józef Antoni Poniatowski
[2] 웹사이트 Józef Poniatowski: "Greater Than The King, This Prince" https://polishhistor[...] 2020-03-26
[3] 서적 Prince Józef Poniatowski
[4] 서적 Napoleon: his court and family, Memoir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5] 웹사이트 Józef Antoni Poniatowski https://www.ipsb.nin[...] 2017-02-05
[6] 웹사이트 Józef Poniatowski: człowiek, który mógł być królem http://dzieje.pl/akt[...] 2018-07-30
[7] 웹사이트 Poniatowski, Józef https://www.napoleon[...] 2020-03-26
[8] 뉴스 Książę Józef Poniatowski w Krakowie. Miasto na dziewięć tygodni stało się faktyczną stolicą państwa https://plus.dzienni[...] 2020-01-30
[9] 웹사이트 Poniatowski, Józef Fürst http://www.leipzig-l[...] 2015-05-24
[10] 웹사이트 Książę Józef Poniatowski - symbol żołnierskiego męstwa i honoru https://www.polskier[...] 2020-10-19
[11] 서적 Pomnik Poniatowskiego PWN 1971
[12] 뉴스 Napoleon's Polish marshal Prince Poniatowski honoured https://archiwum.the[...] 2013-05-08
[13] 뉴스 Elena Poniatowska, królowa meksykańskiej literatury. Perła spadła gdzieś w kurz https://wyborcza.pl/[...] 2017-03-02
[14] 뉴스 Konstytucja 3 Maja - Jana Matejki: Kto jest na tym obrazie? https://www.pb.pl/ko[...] 2018-05-02
[15]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Columbia University Press
[16] 문서 名家であるポニャトフスキ家は大公家系、侯爵家系、伯爵家系など複数の分家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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