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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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춘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34년 생원이 되고 1543년 문과에 급제했다. 을사사화 때 윤원형에게 아부하여 권력을 얻었고,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청백리로 선정될 만큼 청렴한 면도 있었으나, 윤원형의 서얼허통론을 공박하지 못해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불교와 노장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1999년에는 윤춘년이 필사한 《금오신화》 필사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정한헌이 윤춘년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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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윤춘년 |
한자 이름 | 尹春年 |
자 | 언구(彦久) |
호 | 학음(學音)·창주(滄洲) |
본관 | 파평 |
국적 | 조선 |
성별 | 남성 |
출생일 | 1514년 |
사망일 | 1567년 |
매장지 | 미상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윤안인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친인척 | 미상 |
관직 및 활동 | |
분야 | 미상 |
스승 | 미상 |
주요 제자 | 미상 |
주요 저작 | 미상 |
서훈 | 청백리 녹선 |
2. 생애
윤춘년은 1534년(중종 29)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소윤의 핵심 인물인 친족 윤원형에게 적극 협력하여 반대파인 대윤 세력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이를 통해 윤원형의 신임을 얻어 이조정랑,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빠르게 역임하며 출세하였다.
1558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나, 1565년(명종 20) 정국의 변화로 윤원형이 실각하자 그 역시 관직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성격이 경박하고 공명심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사생활에서는 주색을 멀리하고 비교적 청렴하여 청백리에 선정되기도 하였다.[1] 또한 당시 주류였던 성리학 외에도 불교나 노장 사상 등 다양한 사상에 관심을 보이는 유연한 태도를 지녔으며, 김시습이나 유응부 같은 인물들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2]
2. 1. 관직 생활과 정치 활동
1534년(중종 29)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문한직(文翰職, 글을 다루는 관직)을 거치다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이었던 소윤의 핵심 인물 윤원형에게 의탁하여 대윤 세력을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다음 해인 1546년에는 병조좌랑이 되어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를 제거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이러한 활동을 통해 윤원형의 깊은 신임을 얻게 된 윤춘년은 빠른 속도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조정랑, 장령, 교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한 뒤 1553년(명종 8)에는 대사간에 발탁되었다. 2년 뒤인 1555년에는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윤원형이 추진한 서얼허통론(서얼의 관직 진출 제한을 완화하자는 주장)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면서 많은 선비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에는 동지사 겸 주청사(冬至兼奏請使)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귀국 후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565년(명종 20) 예조판서로 재직하던 중, 그를 후원하던 윤원형이 정치적으로 몰락하자 윤춘년 역시 파직당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성격이 경박하고 자부심이 강하여 일찍부터 스스로를 대학자라고 칭하는 등 공명심이 많았다는 지적이 있다. 반면, 사생활에서는 주색을 멀리하고 비교적 청렴하고 결백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 선정되기도 하였다.[1]
윤춘년은 김시습이나 사육신 중 한 명인 유응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이를 두고 '기이하고 허황되며 속된 이야기를 좋아하였고, 김시습과 유응부를 공자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며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2] 그는 또한 불교 사상이나 노장 사상에도 관심을 보여, 당시 조선의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성리학의 학문에만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2. 2. 사상과 학문
윤춘년은 김시습, 유응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이를 두고 '요사하고 허탄하며 속된 전설 같은 것을 말하기 좋아하였고, 김시습과 유응부를 추존하여 공자(孔子)에 비유하기도 하였다'고 비판적으로 기록했다.[2] 그는 불교 사상과 노장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당시 조선의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 성리학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지는 않았다.3. 《금오신화》
1999년 9월, 16세기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윤춘년[4]이 직접 필사한 《금오신화》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이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전해지던 1884년 간행 목판본[3] 외에 국내에서 발견된 중요한 판본이다. 윤춘년의 필사본은 기존 목판본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추정되어, 김시습 원작의 모습을 파악하고 《금오신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3. 1. 필사본 발견
김시습이 지은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 중 하나인 《금오신화》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전해지던 목판본만이 알려져 있었다. 이 목판본은 1884년 동경에서 간행된 것으로, 최남선이 발견하여 1927년 잡지 《계명》 19호에 소개해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3]그러나 1999년 9월, 16세기경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윤춘년[4]이 직접 손으로 베껴 쓴 《금오신화》의 필사본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이 필사본은 기존에 알려진 1884년 일본 목판본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어, 《금오신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3. 2. 일본 및 중국 전래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일본에 전래되어 1884년 도쿄에서 상하 두 권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3] 이 작품은 일본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어 여러 차례 일본어 인쇄본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5][6] 최남선은 1884년에 간행된 이 목판본을 발견하여 1927년 잡지 《계명》 19호에 소개하며 한국에도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3]또한, 《금오신화》는 일본을 통해 중국에도 전해졌다. 19세기 초반 일본에 유학했던 중국인 윤온청(尹蘊淸)은 1914년 자신이 펴낸 《동해유문(東海遺聞)》이라는 책에 《금오신화》의 일부를 각색하여 수록했다. 여기에는 《금오신화》 단편 5편 중 〈이생규장전〉을 각색한 ‘이생(李生)’과 〈만복사저포기〉를 각색한 ‘양생(梁生)’ 두 편이 실려 있다. 윤온청의 각색본은 원작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유지하면서도 원문 내용을 대폭 줄이고, 중국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부가 설명을 덧붙인 점이 특징이다.[5][6]
4. 미디어에서
참조
[1]
간행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서적
선조수정실록 1권, 1567년(선조 즉위년, 명 융경 1년) 10월 5일 병술 10번째기사
[3]
웹인용
금오신화
http://www.seelotu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8-11-13
[4]
문서
문정왕후, 윤원형, 윤원로의 친척 조카이다.
[5]
뉴스
중국서 '번안'된 「금오신화」 공개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3-09-23
[6]
뉴스
김시습 '금오신화' 중국어 각색본 발견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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