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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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주읍성은 고구려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으로, 고구려, 발해, 고려 시대를 거치며 서북 방어의 요새로 활용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성곽을 보수하고 용만현 또는 화의로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1520년 평안도 관찰사 안윤덕에 의해 대대적인 개축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17세기 초 임경업이 지휘했으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2015년에는 1723년에 제작된 의주읍성 그림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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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읍성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명칭 | 의주읍성 |
원어명 | 義州邑城 |
이칭 | 의주성(義州城) |
유형 | 읍성 |
시대 |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 |
위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주군 |
주요 전투 | 의주성 전투 |
역사적 맥락 | |
16세기 | 16세기에 축조됨 |
위치 | 북한 평안북도 의주 |
다른 성과의 관계 | 룡삭성과 함께 언급됨 |
2. 역사
의주읍성은 의주군을 둘러싼 성으로, 현재는 성곽은 남아있지 않고 성벽이 축조되었던 터만 남아 있다. 둘레는 약 8.3km에 달하며, 동, 서, 남, 북에 성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성 안에는 연못 1개와 우물 43개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의주읍성을 국가지정문화재 보존급 제153호로 지정하였다.
고구려 때 쌓은 성곽이지만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고려 초기까지 서북 지역의 방어를 위한 요새와 초소로 활용되었다. 고려는 고토 수복 사업으로 의주를 회복한 후 성곽을 보수했고, 용만현 또는 화의라고 불렀다. 15세기 중엽 의주에 진이 설치되었고, 1520년(중종) 평안도 관찰사 안윤덕에 의해 대대적인 개축 및 확장 공사가 진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520년 무렵 개축된 성벽의 둘레는 2만 7,531자로 이전 성 둘레의 거의 2배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여 종묘의 신주를 가져갔으며, 1593년 10월 서울로 돌아왔다.[3] 17세기 초 임경업이 이 성을 지휘했으며,[1]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배수구를 통해 성에 잠입하여 성문을 열었다.[4]
2015년 6월, 야마구치 현립 대학 소장품에서 1723년 제작된 이 성을 묘사한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대중에게 공개된 적이 없었다. 이 그림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일본으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5]
2. 1. 고구려와 발해 시기
고구려 때 쌓은 성곽이지만 정확히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고려 초에도 서북을 개척한 북방 방어의 요새, 초소로 활용되었다.2. 2. 고려 시대
고구려 때 쌓은 성곽이지만 정확히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고려 초에도 서북을 개척한 북방 방어의 요새, 초소로 활용되었다. 고려는 고토 수복 사업의 일환으로 의주를 회복한 뒤 성곽을 보수하였고, 용만현 또는 화의로 불렸다.[1]2. 3. 조선 시대
고려 초 의주읍성은 서북 지역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북방 방어의 요새이자 초소로 활용되었다. 고려는 고토 회복 사업의 일환으로 의주를 되찾은 뒤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용만현 또는 화의라고 불렀다. 15세기 중엽 의주에 진이 설치되었고, 1520년(중종) 평안도 관찰사 안윤덕에 의해 성의 대대적인 개축, 개보수 및 확장 공사가 진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520년 무렵 개축된 성벽의 둘레는 2만 7,531자로, 이전 성 둘레의 거의 2배에 달했다.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여 종묘의 신주를 가져갔으며, 신주는 1593년 10월 서울로 돌아왔다.[3]
17세기 초 임경업은 이 성을 지휘했다.[1]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는 배수구를 통해 성에 잠입하여 성문을 열었다.[4]
2. 4.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의주읍성에는 성곽은 남아있지 않고 성벽이 축조되었던 터만 남아 있다. 의주읍성은 의주군을 둘러싼 성으로 둘레는 약 8.3km에 달하며, 동, 서, 남, 북에 성문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성 안에는 1개의 연못과 4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의주읍성을 국가지정문화재 보존급 제153호로 지정하였다. 현재는 성터만 남아 있다.[3]3. 구조
현재 성곽은 남아있지 않고 성벽이 수축되었던 터만 남아 있다. 의주읍성은 의주군을 둘러싼 성으로 둘레 약 8.3km에 달하며, 동, 서, 남, 북에 성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성 안에는 1개의 연못과 4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1]
고구려 때 쌓은 성곽이지만 정확히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고려 초에도 서북을 개척한 북방 방어의 요새, 초소로 활용되었다. 고려는 고토 수복 사업의 일환으로 의주를 회복한 뒤 성곽을 보수하였고, 용만현 또는 화의로 불렸다. 1520년(중종 15) 평안도관찰사 안윤덕에 의해 성의 대대적인 개축, 개보수 및 확장 공사가 진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20년 무렵 개축된 성벽의 둘레는 2만 7,531자로서 종전 성 둘레의 거의 2배가 되었다고 한다.
완공 당시 읍성의 둘레는 약 8.3km에 달했다. 성벽은 높이가 5m에 달하는 거친 사각형 돌로 쌓았다. 성에는 사방위에 각각 문이 있었고, 43개의 우물이 있었다.[1] 성의 상당 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지만, 남문 터는 잘 보존되어 있으며, 웅장한 용문 양식의 유교적 중국 건축물이다.[1] 특히 동군정은 읍성의 북쪽 누각이었는데, 이 누각은 관서 지방의 8대 명승지 중 하나로 꼽힌다.[2]
참조
[1]
웹사이트
'[Article] Castles in North Korea #2: Ryŏngsak Castle and Ŭiju Castle in North Pyongan'
https://schmitztimo.[...]
2019-09-13
[2]
웹사이트
Eight scenic spots in Kwanso area
quoting article in the Pyongyang Times
2015-03-15
[3]
서적
EXPLORING KOREAN HISTORY THROUGH WORLD HERITAGE, Second Edition
http://intl.ikorea.a[...]
Academy of Korean Studies Press
2010
[4]
웹사이트
A weakness of an impregnable fortress
http://www.donga.com[...]
2019-03-26
[5]
웹사이트
Exhibit unveils artifacts smuggled from Korea
http://mengnews.join[...]
201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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