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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수 (1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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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공수(1340년 ~ 1366년)는 고려 말의 문신으로, 충혜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충목왕, 공민왕 대에 걸쳐 지신사, 감찰대부, 찬성사 등을 역임하며 홍건적의 난과 원나라의 간섭 등 격동기 외교에서 활약했다. 특히, 공민왕 폐위 시도에 맞서 원나라에 파견되어 외교적 노력을 펼쳤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았다. 1366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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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수 (14세기)
기본 정보
본관평산 이씨
생몰 기간14세기
자허(子虛)
배우자정부인(貞夫人) 변씨(邊氏)
관력
주요 관직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지신사(知申事)
좌상시(左常侍)
우상시(右常侍)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밀직부사(密直副使)
계림윤(鷄林尹)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판도판서(版圖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
지공거(知貢擧)
찬성사(贊成事)
판삼사사(判三司事)
벽상삼한익대공신(壁上三韓翊戴功臣)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상호군(上護軍)
생애
생애고려 말기의 문신
이원령(李元령)의 아들
이존오(李存吾)의 손자
이규보(李奎報)의 증손
음보(蔭補)로 출사
여러 관직을 거쳐 계림윤(鷄林尹)을 지냄
공민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함
신돈전민변정도감에 반대하다가 삭주로 유배됨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등용되어 찬성사(贊成事)를 지냄
이성계를 도와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
벽상삼한익대공신(壁上三韓翊戴功臣)에 책록됨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이름
평산부원군(平山府院君)에 봉해짐
시호는 문정(文貞)
가족 관계
아버지이원령(李元령)
할아버지이존오(李存吾)
증조할아버지이규보(李奎報)
부인정부인 변씨(貞夫人 邊氏)
형제이감(李敢)
아들이백령(李伯齡)
이천령(李千齡)
이만령(李萬齡)
손자이조(李肇)
이길(李吉)
이탁(李蘀)

2. 생애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이공수는 1340년(충혜왕 복위 1년) 낭장 겸 감찰규정(郎將 兼 監察糾正)으로써 지공거 김영돈과 동지공거 안축이 주관하는 과거에서 급제하였으며[3] 1341년 전의주부(典儀注簿)에 임명되었다.[1] 여러 관직을 거쳐 전교부령(典校副令)이 되었으며, 충목왕 때 지신사(知申事)와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냈다. 충목왕 즉위년(1344년) 6월, 서연 설치와 함께 신료로서 시독에 참여했다.[4]

당시 환관 김용장(金龍藏)의 연줄로 대언(代言)이 된 김용겸(金用謙)이 비리로 탄핵을 받게 되자, 왕이 팔관회(八關會) 도중에 김용겸을 불러오게 명하자 이공수는 탄핵을 받은 사람은 조정의 반열에 나란히 설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또한 녹사(錄事) 김용기(金龍起)의 비리에 대해 충목왕이 김용기를 석방하라고 명하자, 이공수는 김용기를 석방하면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권장하는 꼴이라며 말렸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2]

2. 2. 공민왕 대의 활약

1361년 홍건적이 고려로 쳐들어오기 직전, 고려 조정은 이공수와 호부상서 주사충, 환관 방도적을 원에 보내 홍건적의 정세를 살피게 하였다. 이들은 탕참에 이르러 길이 막혀 돌아왔고, 왕은 "죽어도 물러서지 말라"며 다시 보냈지만, 심양에서 몇 달 지나지 않아 연경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8] 1362년 3월, 홍건적에 대한 방비로 평양 근교의 죽전에 주둔하였으며, 개경 수복 후에는 참정 황상, 추밀원사 김희조 등과 함께 개경을 지켰다.[9]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고 개경이 수복된 뒤, 이공수는 다른 재상들과 함께 개경 복구에 힘썼다. 이색이 쓴 이공수의 묘지명에는 "인재와 일의 완급을 헤아려 방략을 지시"했고, "정치가 폐지된 것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돌아온 자에게 안집할 수 있도록 양식과 종자를 나누어 주어 들에는 노는 백성이 없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를 드리고 생도들을 국고의 양곡으로 먹여 내외의 학교가 다 넉넉하여 도로써 예절과 풍속을 이루고 인재를 양육하였다"고 적고 있다.[1]

1363년 3월, 찬성사로서 원에 파견되었다.[10] 당시 기철이 제거된 데에 대한 원한이 있던 기황후는 최유의 부추김을 받아 원 순제에게 공민왕을 고려왕에서 폐위하고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왕으로 추대할 것을 건의했다. 이공수는 왕명을 받고 밀직제학 허망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으로 향했다. 그는 서경(평양)에서 태조의 원묘에 참배하고, "우리 왕이 복위할 수 없다면 나는 죽어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1][2]

이공수는 원의 수도인 대도에 도착해서 원의 황후 및 태자에게 환대를 받았고, 흥성궁에서 전서원사 울제이투의 환영 연회를 받았다.[1] 기황후의 외가 인척이기도 했던[11] 이공수는 기황후가 특별히 베푼 연회 자리에서 기황후를 설득하였으나, 기황후는 듣지 않고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공수는 "이 노신(老臣)이 목의 피로써 덕흥군의 수레에 뿌리지는 못할 망정 어찌 이를 참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라며 자신의 병을 핑계로 체류하기를 요청했다.[2] 원은 고려인으로서 조정에 있는 자는 이공수를 제외하고 모두 덕흥군을 따라가라 하였다.[2]

4월 21일, 원의 태상예의원사직을 제의받았으나, 이공수는 "중국말에 익숙하지 못하고 중국 예절을 익히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총애를 무릅쓰고 비난을 받겠습니까?"라며 사양하였다. 그러나 원 조정이 이를 들어주지 않아 이공수는 그 자리를 맡게 되었고, 자정원에서 명령을 받들어 음식을 성대하게 베풀어 동료들에게 향응하였다.[1] 이공수는 태상경이 되어 예를 지키고 어김이 없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고,[2] 원 조정은 이공수의 3대조 부모까지 관직을 추증하였다.[1]

요양에 다다른 덕흥군을 호종하던 최유는 이공수가 대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토루테무르와 박불화에게 뇌물을 주어 이공수의 귀국을 원 조정에 요청하고자 하였다. 이공수는 서장관 임박에게 "나는 이미 부모가 없고 또 후사도 없으며 지위 또한 높이 올랐으니 어찌 다시 터럭만큼이라도 남에게 기댈 뜻이 있겠는가? 마땅히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더라도 결코 그를 따르지 않겠다."라고 하였다.[2]

7월, 보루테무르가 군사를 이끌고 대도로 들어와 최유에 호의적이던 승상 초스간을 내쫓고 국정을 장악했다. 이때 토겐테무르와 평장 로디샤는 "고려의 왕이 공이 있고 아무 죄가 없는데도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으니 이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원 순제는 공민왕의 왕위를 회복시키고 최유는 붙잡아 고려로 보냈다. 이공수도 자신의 귀국을 청했고,[2] 10월 25일 개경에 도착하여 사신으로서 복명하였다.[1]

고려에서는 이공수를 도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에 임명하였는데,[13][1] 통역관 이득춘이 덕흥군이 이공수를 우정승에 임명하였다고 거짓을 아뢰어 파직되었었다.[14] 덕흥군과 최유가 거느린 원의 군대가 최영, 이성계가 거느린 고려군에 패배한 뒤, 이공수는 홍순, 허강, 이자송, 김유, 황대두, 장자온, 임박 등과 함께 글을 써서 대나무 지팡이 속에 넣고 몰래 하인 정량과 송원을 보내어 "최유가 다시금 대군을 일으켜 우리나라로 가려고 모의하고 있으니, 덕흥군이 이미 패배하였다고 안심하지 말고 신중히 대비해야 한다"고 고려 조정에 아뢰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야 이득춘이 했던 말이 거짓임이 밝혀져, 공민왕이 이공수를 영도첨의에 임명하고[15] 벽상삼한삼중대광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에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 칭호를 하사하여 표창하였다.[2][1] 이공수가 귀국하였을 당시 고려에서는 국학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이공수는 원 순제가 하사한 금대를 풀어서 그 비용에 보탰다.[2]

2. 3. 최유의 난과 외교적 노력

1363년(공민왕 12년) 최유가 기황후를 부추겨 공민왕을 폐위하려 하자, 이공수는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10][1][2] 서경(평양)에서 태조의 원묘(原廟)에 참배하고, "우리 왕이 복위할 수 없다면 나는 죽어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하고 원으로 향하였다.[1][2]

원의 수도인 대도에 도착한 이공수는 기황후의 외가 인척으로서[11] 황후 및 태자에게 환대를 받았고, 흥성궁(興聖宮)에서 연회를 받았다.[1] 이공수는 기황후에게 "(周)의 강원(姜嫄)과 임사(任姒)는 성인을 길러 교화의 기초를 닦았고... 우리나라는 대조(大朝, 원)의 융신(戎臣)으로 이미 형제 관계를 맺었고..."라며 비유와 역사적 사실을 들어 설득하였다.[2][1] 그러나 기황후는 듣지 않고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공수는 "이 노신(老臣)이 목의 피로써 덕흥군의 수레에 뿌리지는 못할 망정 어찌 이를 참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자신의 병을 핑계로 체류하기를 요청하였다.[2]

이후 이공수는 원의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직을 제의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원 조정이 이를 들어주지 않아 그 자리를 맡게 되었고, 태상경(太常卿)으로서 예를 지킴에 어김이 없어 칭송을 받았다.[2][1] 한편, 요양(遼陽)에 있던 최유는 이공수가 대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이공수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황제는 따르지 않았다.[2]

1363년 7월, 보루테무르(孛羅帖木兒)가 군사를 이끌고 대도로 들어와 최유에 호의적이던 승상 초스간(搠思監)을 내쫓고 국정을 장악했다. 이때 토겐테무르(禿堅帖木兒)와 로디샤(老的沙)가 공민왕의 무죄를 주장하여, 원 순제는 공민왕의 왕위를 회복시키고 최유는 고려로 압송했다. 이공수는 귀국을 청했고,[2] 1363년 10월 25일 개경에 도착하여 복명하였다.[1]

귀국 후 이공수는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임명되고[15]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등의 칭호를 받으며 공로를 인정받았다.[2][1]

2. 4. 만년과 죽음

1365년 3월 11일에 왜구가 고려 왕실의 능침인 창릉으로 쳐들어 와서 세조의 어진을 훔쳐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21일에 이공수가 왕명으로 창릉으로 가서 세조의 위판을 다시 안치하였다.[16]

5월에 공민왕의 사부가 된 신돈이 정권을 잡은 뒤에 이공수는 스스로 두문불출하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는데[2] 신돈은 그를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으로 봉해 정치 실권을 빼앗았다.[17][2][18]

1366년 사망하였다.[1][19] 향년 59세. 왕이 애도하면서 관비(官費)로 장사를 치르도록 명령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으며,[2] 24일에 덕수현의 별장 서쪽 기슭에 안장하였다.[1]

1376년에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3. 관직 연혁

이공수는 고려 시대에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340년(충혜왕 복위 1년) 감찰규정[2]을 시작으로, 1341년(충혜왕 복위 2년)에는 전의주부와 성균직강[1]을 역임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년) 봉선대부 성균사예 예문응교 지제고[1]를 거쳐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봉상대부 전교부령[1]과 춘추관수찬관을 역임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6월 이전에 우부대언을 역임했고, 1345년(충목왕 원년) 1월 22일에는 지신사[1]와 정방제조[20][1]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겨울 이후 전리판서[1]를 역임하고, 1346년(충목왕 2년) 감찰대부[1], 1347년(충목왕 3년) 7월 밀직부사[1]를 거쳐 1348년(충목왕 4년) 정월 광정대부 판밀직사사[1]에 올랐으며, 같은 해 6월 감찰대부를 겸임했다.[1]

1349년(충정왕 원년) 윤7월 10일 판밀직사사를 거쳐, 같은 해 10월 1일 정당문학이 되었다. 1350년(충정왕 3년)에도 정당문학[1]을 역임했으며, 1351년(공민왕 즉위년) 11월 29일에도 정당문학 직에 있었다. 1352년(공민왕 원년) 윤3월 첨의평리[2] 겸 감찰대부[1]를 거쳐, 같은 해 10월 6일 삼사우사[21]에 임명되었다. 1353년(공민왕 2년) 1월 19일 도첨의[1] 찬성사[22], 1355년(공민왕 4년) 정동행성도사[1]를 역임했다.

1361년(공민왕 10년) 11월 13일 이전에 평장사를 역임했고, 1362년(공민왕 11년) 6월 찬성사, 판판도사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1]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년) 4월 18일부터 5월 25일까지 좌정승[13]을 역임했다. 1364년(공민왕 13년) 10월 17일 영도첨의[15]에 임명되었고, 1365년(공민왕 14년) 6월 3일 익산부원군에 봉해졌다.

4. 평가와 의의

이공수는 총명하고 신중하여 사소한 재물에도 연연하지 않았으며, 강직하고 의연하게 일을 처리했다.[2] 풍류를 즐기며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을 좋아했고, '남촌선생'이라 자칭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2]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자란 탓에 자신을 키워준 처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장인과 장모 사후에도 제사를 직접 받들었다.[2][1]

1362년 홍건적의 난으로 파괴된 개경 복구에 힘쓸 때, 다른 재상들이 자신의 친척들을 능전 관리직에 추천하는 와중에도 "나라의 명령이 어찌 우리 자손, 동생, 조카들을 위한 것이겠느냐?"며 단 한 명도 추천하지 않았다.[2]

원나라에서 태상예의판서로 있을 때, 원 태자가 '인지(仁智)'의 뜻을 묻자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을 지(智)라고 합니다. 제왕이 이를 써서 세상을 다스리면 태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또한, 금과 옥으로 장식한 기둥을 본 적 있냐는 질문에는 "제왕이 정사를 펴면서 인을 베풀면 거처하는 집이 비록 썩은 나무라도 쇠나 돌보다 견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과 옥이라도 도리어 썩은 나무보다 못합니다."라고 답하여 제왕의 도리를 강조했다. 원 황제는 이공수의 현명함을 칭찬하며 "네 외가(外家)에는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말했다.[1]

기철이 참화를 당한 이유를 묻는 황후에게 "재물을 탐하여 원망을 모으면 화를 면하는 자가 드뭅니다. 형세가 심하여 그렇게 된 것이고 왕의 마음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황후의 부름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1]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는 가난한 백성의 먹을거리를 빼앗지 않으려 했고, 버려진 곡식이라도 반드시 값을 치르려 하는 등 청렴하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다.[1]

4. 1. 긍정적 평가

이공수는 총명하고 신중하여 사소한 재물에도 연연하지 않았으며, 강직하고 의연하게 일을 처리했다.[2] 풍류를 즐기며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을 좋아했고, '남촌선생'이라 자칭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2]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자란 탓에 자신을 키워준 처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장인과 장모 사후에도 제사를 직접 받들었다.[2][1]

1362년 홍건적의 난으로 파괴된 개경 복구에 힘쓸 때, 다른 재상들이 자신의 친척들을 능전 관리직에 추천하는 와중에도 "나라의 명령이 어찌 우리 자손, 동생, 조카들을 위한 것이겠느냐?"며 단 한 명도 추천하지 않았다.[2]

원나라에서 태상예의판서로 있을 때, 원 태자가 '인지(仁智)'의 뜻을 묻자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을 지(智)라고 합니다. 제왕이 이를 써서 세상을 다스리면 태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또한, 금과 옥으로 장식한 기둥을 본 적 있냐는 질문에는 "제왕이 정사를 펴면서 인을 베풀면 거처하는 집이 비록 썩은 나무라도 쇠나 돌보다 견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과 옥이라도 도리어 썩은 나무보다 못합니다."라고 답하여 제왕의 도리를 강조했다. 원 황제는 이공수의 현명함을 칭찬하며 "네 외가(外家)에는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말했다.[1]

기철이 참화를 당한 이유를 묻는 황후에게 "재물을 탐하여 원망을 모으면 화를 면하는 자가 드뭅니다. 형세가 심하여 그렇게 된 것이고 왕의 마음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황후의 부름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1]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는 가난한 백성의 먹을거리를 빼앗지 않으려 했고, 버려진 곡식이라도 반드시 값을 치르려 하는 등 청렴하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다.[1]

4. 2. 부정적 평가

4. 3. 종합적 평가

이공수는 고려 말의 혼란한 시대에도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 그는 총명하고 신중하며 강직하고 의연하게 일을 처리했다.[1] 특히 재물에 청렴하여 함부로 주고받지 않았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1]

이공수는 외교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황태자에게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 인(仁)과 지(智)라고 설명하며, 제왕의 도리를 강조했다.[1] 또한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참화를 당한 이유에 대해 묻자, 재물에 대한 탐욕이 원인이었다고 지적하며 왕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호했다.[1]

그는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으로 파괴된 개경 복구에 힘썼다. 당시 다른 재상들이 자신의 친척들을 능전 관리직에 추천하는 상황에서도 "나라에서 그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 어찌 우리 자손 · 동생 · 조카들을 위한 것이겠느냐?"며 단 한 명도 추천하지 않았다.[1]

귀국길에는 가난한 백성에게서 콩을 빼앗은 하인을 질책하고 면포로 값을 치렀으며, 버려진 곡식을 사용한 후에도 포를 잘라 값을 지불하는 등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다.[1] 이러한 강직함, 청렴함, 그리고 외교적 역량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된다.

5. 가족 관계

이공수의 아버지 이애(李崖)는 통직랑중(通直郞中)인 송탐(宋耽)의 딸과 혼인하여 이공수와 딸 한 명을 낳았다. 이공수의 누나는 전사의(全思義)에게 시집갔는데, 이공수의 어머니 송씨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전사의 부부가 이공수를 길렀다.[1]

이공수는 원 순제의 황후인 기황후와 외가 인척으로, 기황후의 어머니는 이행검의 딸인 영안왕부인(榮安王夫人) 이씨로 이공수에게는 고모이다.[23] 기황후는 이공수가 원에 도착했을 때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아들처럼 모셨으니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내 친오빠와 같다"며 환대하였다.[2]

이공수의 부인 김씨는 삼중대광 의흥부원군(三重大匡 義興府院君) 김상기(金上琦)의 딸이다.[1] 이공수가 병이 들자 친척들이 부인 김씨에게 부처에게 쾌유를 빌 것을 권하였으나 김씨는 남편은 평생 한 번도 부처에게 무언가를 기도한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그의 도를 어길 수는 없다며 듣지 않았다.[2]

이공수는 아들이 없었고, 족인의 딸을 길러 성균생원 안속(安束)에게 시집보냈다.[1][2]

6. 기타

6. 1. 일화

이공수는 총명하고 신중하여 재물을 함부로 주고받지 않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강직하고 의연하였다.[2] 풍류를 즐기며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을 좋아했다.[2]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자부(姉夫)인 전공의의 집에서 자랐으며, 훗날 그와 그의 아내를 부모처럼 섬겼다.[2][1]

1362년 홍건적의 난으로 파괴된 개경을 복구할 때, 다른 재상들이 자신의 친척들을 능전 관리직에 천거한 것과는 달리, 이공수는 "나라에서 그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 어찌 우리 자손 · 동생 · 조카들을 위한 것이겠느냐?"며 한 사람도 추천하지 않았다.

원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나라 태자가 만수산(萬壽山) 광한전(廣寒殿) 액자에 쓰인 '인지(仁智)'의 뜻을 묻자, 이공수는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라 답하며, 제왕이 이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금옥으로 장식한 기둥을 본 적 있냐는 태자의 질문에는, 제왕이 인을 베풀면 썩은 나무로 지은 집도 쇠나 돌보다 견고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금과 옥도 썩은 나무보다 못하다고 답했다. 광한전에서 나와 태자가 비파 연주를 하다 곡을 잊자, "백성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뿐이지, 거문고의 한 두 곡조 잊어버린들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황제는 "짐은 본래 그 늙은이의 현명함을 알고 있었다. 네 외가(外家)에는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말했다.[1]

하루는 황후가 오빠 기철이 참화를 당한 이유를 묻자, 이공수는 재물을 탐하여 원망을 사면 화를 면하기 어렵다고 답하며,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이지 왕의 마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려인 환관 박불화가 황후에게 이공수가 자기 임금만 위한다고 모함하여, 황후는 오랫동안 그를 찾지 않았다.[1]

최유의 난이 평정된 후 고려로 귀국할 때, 이공수는 연경(燕京)의 제화문(齊化門)을 나서며 하인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천하의 즐거움이 다시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도중에 말이 지치자 하인이 화살로 콩 한 단을 사서 말에게 먹이려 하자, "가난한 백성의 먹을거리를 빼앗느냐?"며 면포(綿布)로 콩 값을 치렀다. 여산참(閭山站)에서 곡식을 가져다 말을 먹인 종자에게는 곡식 한 단 값을 포로 환산하여 쪽지와 함께 곡식 더미에 두게 했다. 종자가 다른 사람이 가져갈 것이라 하자,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 내가 편하겠다."라고 답했다.[1]

6. 2. 자칭

참조

[1] 서적 유원 자선대부 대상예의원사 고려국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익산부원군 시문충 이공묘지명 병서
[2] 역사서 고려사
[3] 역사서 고려사
[4] 역사서 고려사 1344
[5] 역사서 고려사 1348
[6] 역사서 고려사
[7] 역사서 고려사
[8] 역사서 고려사 1360
[9] 역사서 고려사 1362
[10] 역사서 고려사 1363
[11] 역사서 고려사
[12] 문서 1356
[13] 역사서 고려사 1363
[14] 역사서 고려사 1363
[15] 역사서 고려사 1364
[16] 역사서 고려사 1365
[17] 역사서 고려사 1365
[18] 논문 공민왕의 신돈 등용의 배경 경남사학회 2014-06
[19] 역사서 고려사 1366
[20] 역사서 고려사 1345
[21] 역사서 고려사 1352
[22] 역사서 고려사 1353
[23] 역사서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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