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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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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관회는 신라와 고려 시대에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열린 종교 의식이다. 신라의 팔관회는 불교의 팔계 수행을 기본으로, 전몰 장병의 위령과 국가 수호를 위한 호국적 성격을 띠었다. 고려의 팔관회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호국 사상과 미륵 신앙을 결합한 형태로 발전했으며, 국가적 행사로 거행되었다. 팔관회는 연등회와 함께 고려 시대의 중요한 명절이었으며, 다양한 백희(百戱) 공연을 통해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2. 신라의 팔관회

팔관회는 불교의 팔계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 의식으로, 신라에서는 전몰 장병을 위령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발전하였다.

신라 팔관회는 진흥왕 12년(551년) 고구려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시작되었다.[3]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이 전몰 장병을 위해 팔관법회를 7일 동안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3]

이후 자장선덕여왕 12년(643년) 황룡사 9층탑 건립을 건의하면서, 팔관회는 황룡사에서 개최되어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3]

신라의 팔관회는 선랑, 국선, 선가가 주재하였고, 백희가무를 통해 용천을 기쁘게 하여 복을 비는 의식을 행하였다.[4]

2. 1. 신라 팔관회의 성격

팔관회는 불교의 계율인 팔계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 의식이다.[3] 근본 5계인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불음주와 부좌고대광상, 부착화만영락, 불습가무희악을 지켜 행하려는 종교적인 의식이며, 매월 7일과 15일에 포살, 설경하는 윤리적 덕목이다.[3] 이러한 종교 행사는 신라에서 중국 양무제(재위 502-549) 때의 무차대회 형식을 넘어 전몰자 위령제로 변용되었다.[3]

신라 팔관회는 백고좌법회와 같이 고구려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한 진흥왕 12년(551)부터 시작되었다.[3]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조에는 진흥왕이 전몰장병을 위해 팔관법회를 외사에 7일 동안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3]

신라는 영토 확장을 위해 고구려와 백제를 항상 침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신라 장병들이 전몰하였다.[3] 이 전몰장병 추모를 위해 팔관회 의식이 호국적이고 군사적인 행사로 변용된 것이다.[3]

자장(慈藏)이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하여 황룡사에 9층탑 건립을 건의했는데, 이 탑은 국방과 호국을 상징했다.[3] 이 탑이 건립된 후 팔관법회를 황룡사에서 개최하여 이웃 9개국이 신라에 조공을 바칠 것을 널리 알렸으며, 이 탑으로 신라가 영원히 평안할 것을 선포하였다.[3]

이처럼 신라 팔관법회는 불교적 팔계수행뿐 아니라 국가 수호와 전몰 장병 위령제 형식이 더해진 것이었다.[3] 신라 팔관회는 10월에 개최되었는데, 이는 고대 한국에서 10월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과 같이 민족 고유의 무속적인 면과 불교, 호국, 장병 위령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신라 의식이었다.[3]

2. 2. 신라 팔관회의 의식

신라의 팔관회는 하늘을 섬기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고풍(古風)으로 선랑 '''·''' 국선 '''·''' 선가(仙家)가 주재하였다.[4] 이 팔관회 의식에서는 국선이 가무를 아뢰어 용천(龍天)을 기쁘게 하여 복을 비는 제도였기 때문에 백희가무(百戱歌舞)를 성대하게 하였다.[4] 신라 진흥왕 때에 생겨서 숭상받은 국선 또는 화랑(花郞)은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 때에도 성행하다가 고려 예종 때부터 점점 쇠퇴하였다.[4]

3. 고려의 팔관회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의 팔관회를 계승하여 매년 11월에 팔관회를 개최하였다.[2][5] 고려의 팔관회는 궁궐 안과 법왕사에서 주로 열렸다.[5] 팔관회는 국가를 위한 법회였지만, 국가 경제를 어렵게 하여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다.[5] 팔관회 개최를 위한 행정적 조치로 '''팔관보'''와 '''팔관사'''를 두었다.[5]

3. 1. 고려 팔관회의 성격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의 팔관회를 계승하여 매년 11월에 팔관회를 개최하였다.[2][5] 이 법회는 고려 멸망 때까지 한결같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성대한 국가적 행사로 거행되었다.[5] 고려 팔관회는 신라나 후삼국의 영향을 받아 호국사상이나 미륵신앙 등 고대 종교 제례 형식이 포함되었다.[5]

고려의 팔관회는 궁궐 안과 사찰에서 열렸는데, 사찰의 경우 대개 법왕사에서 진행되었다.[5] 팔관회가 법왕사에서 열린 것은 팔관회 법회의 중요성과 법왕사의 위상 때문이었다.[5]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하여 가장 먼저 세운 사찰이 법왕사였으며, 그는 국가를 보호하고 지키는 길은 팔관회를 잘 모시는 것이라고 훈요십조에 명시했다.[5]

고려에서 팔관회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지리풍수도참이나 오행사상에 기인하는데, 동방은 목(木)의 위치이고, 목의 색은 청색이며, 이를 수로 변환하면 8이 된다고 하였다.[5] 이 "8수의 사상"은 이미 존재했던 팔관회의 8이라는 숫자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5] 이러한 8수사상은 인종 때 묘청이 팔성당을 설치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5] 여기서 8성은 국내 명산 8곳을 선정하여 8산이라 칭하고, 그 8산에 살고 있는 신선과 부처가 나라를 돕는다는 팔관회의 발전된 형태를 보였다.[5]

팔관회는 국가를 위한 법회였지만, 국가 경제를 어렵게 하여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다.[5] 팔관회 개최를 위한 행정적 조치로 '''팔관보'''가 마련되어 있었다. 팔관보는 《고려사백관지》, 《제사도감각색》에 나타나는데, 팔관회 운영에 관한 재정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추정된다.[5] 팔관보와 함께 팔관회 관련 관직 또는 관청으로 '''팔관사'''를 두었다. 이처럼 고려의 팔관회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 법회였다.[5]

고려 사회에는 시민들을 위한 고정된 오락 시설은 없었지만, 국가 명절과 다양한 불교 행사가 열려 음악, 가무, 백희 등으로 부처와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고, 국가와 왕실의 평안을 기원했다.[6] 이러한 국가적 행사를 통해 왕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하고 일반 백성까지 즐겼다.[6]

고려에는 아홉 가지 명절 (원정, 상원, 한식, 상사, 단오, 추석, 중구, 동지, 팔관)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성대한 행사가 상원에 행하던 연등회(나중에는 2월 연등으로 변경됨)와 중동에 행하던 팔관회였다.[6]

연등회는 불사에 관한 것이고, 팔관회는 토속신을 위한 것으로 대상은 달랐지만 의식 절차는 비슷했다.[6] 고려 태조는 신라의 풍습인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선풍인 팔관회와 불교를 섬기는 연등회를 명확히 구분했다.[6] 이후 유교주의를 선택한 성종은 이를 폐지했지만, 현종 때 회복되어 13세기 말 쇠퇴할 때까지 이어졌다.[6]

300년 동안 의식의 내용이 변화하여 신라 팔관회의 풍습이던 의식의 중심인 국선이 사라지고, 양반과 재산이 넉넉한 자가 대신하게 되면서 종교적인 제례에서 일반 백성의 백희를 포함하는 의식으로 변모하며 점차 세속화되었다.[6] 백희는 죽방울놀리기, 장대타기, 줄타기, 땅재주, 사발돌리기, 광대탈, 꼭두각시놀음 등 신라 때의 가무백희, 5기 등의 전승으로 볼 수 있는 놀이들인데, 채붕이라 불리는 오색 비단 장막을 늘인 다락 위에서 공연되었으며, 팔관회와 연등회 등 국가적인 경사 때 상연되었다.[6]

3. 2. 연등회·팔관회·백희

고려 사회에는 시민들을 위한 고정된 오락 시설은 없었지만, 국가 명절과 다양한 불교 행사가 열려 음악, 가무, 백희(百戱) 등으로 부처와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고, 국가와 왕실의 평안을 기원했다.[6] 이러한 국가적 행사를 통해 왕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하고 일반 백성들도 참여했다.[6]

고려에는 아홉 가지 명절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성대한 행사가 상원(上元)에 열린 연등회(燃燈會: 나중에는 2월 연등으로 변경됨)와 중동(仲冬)에 열린 팔관회였다.[6]

연등회는 불교 행사인 반면, 팔관회는 토속신(土俗神)을 위한 행사로 대상은 달랐지만 의식 절차는 비슷했다.[6] 고려 태조는 신라의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명확히 구분했다.[6] 이후 유교를 중시한 고려 성종은 이를 폐지했으나, 고려 현종 때 다시 부활하여 13세기 말까지 이어졌다.[6]

300년 동안 의식의 내용은 변화하여, 신라 팔관회의 중심이었던 국선(國仙)이 사라지고 양반 등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제례에서 속인의 백희(百戱)를 포함하는 의식으로 변화하며 점차 세속화되었다.[6] 백희는 죽방울놀리기, 장대타기, 줄타기, 땅재주, 사발돌리기, 광대탈, 꼭두각시놀음 등 신라 시대의 가무백희, 5기(五伎) 등에서 이어진 놀이들이다. 채붕(綵棚)이라 불리는 오색 비단 장막을 늘인 다락 위에서 공연되었으며, 팔관회와 연등회 등 국가적인 경사 때 상연되었다.[6]

참조

[1] 백과사전 팔관회(신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백과사전 팔관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3] 백과사전 팔관법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4] 백과사전 신라의 선풍과 국선의 음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 백과사전 팔관회(고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6] 백과사전 연등회·팔관회·백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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