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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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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근석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출신으로, 일본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사변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공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으며, 한국 전쟁 중 F-51 전투기 인수단장으로 활동하다 1950년 7월 4일 안양 상공에서 전사했다. 사후 공군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특수비행훈장을 받았다. 이근석의 전사 원인과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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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석
기본 정보
이근석
이근석
본관경주 이(李)씨
생년월일1917년 1월 17일
사망일1950년 7월 4일 (향년 33세)
출생지평안남도 평원군
사망지경기도 안양시
묘소국립서울현충원 장군 묘역 2호
병역
소속
최종 계급소위 (일본 육군)
준장 (한국 공군)
이름
한글이근석
한자李根晳
로마자 표기I Geun-seok

2. 생애

300x300픽셀


이근석은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원군 청산면 구원리 출신으로, 1933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구마다니 비행학교에 소년비행병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1934년 만주사변 당시 구마다니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요시오카 전투비행부대에 배속되었으며,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77전대에 배속되어 랑군 비행장 폭격에 참여했다가 영국군에게 격추당해 포로가 되었다.

해방 후 최용덕, 김정렬,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영환 등과 함께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1946년 4월 1일 최초의 항공부대가 조선경비대 내에 창설되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육군 소위로 임관, 1949년 7월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949년 10월 육군으로부터 공군이 독립됨과 동시에 초대 공군사관학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5월 공군 비행단장에 임명되었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F-51전투기 인수단장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미 극동공군이 양도한 10대의 최신 전투기를 성공적으로 인수했다. 1950년 7월 3일 대한민국 공군 사상 최초의 전투기 출격을 감행하였으며, 7월 4일 안양 상공에서 지상 목표물 공격 중 전사했다.

1951년 9월 19일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공군 준장으로 특진 추서되었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특수비행훈장을 받았다. 유해는 1957년 4월 28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2에 안장되었다.[17]

2. 1. 일제 강점기 활동

1933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구마다니(態谷) 비행학교에 소년비행병 제2기생으로 입교한 이근석은 쾌활하고 과단성 있는 호남아로 명성을 떨쳤다. 진취성과 적극성을 겸비한 학생으로 평판이 높았으며, 민족적인 울분으로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강했다. 또한, 천재적인 조종술을 가진 뛰어난 조종사였다.[17]

1934년 만주사변 당시 구마다니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요시오카(吉岡) 전투비행부대로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는 육군항공부대 중에서도 최정예 조종사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근석은 첫 출격부터 적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비행 제77전대에 배속되어 랑군 비행장 폭격에 참여했다가 영국군 67비행대 소속 부르스터 버팔로 전투기에게 격추당해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되기까지 올린 전과는 18대 혹은 23대 격추였다. 포로 생활 중에는 다른 일본군 포로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설욕을 다짐했었다고 하며,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일어난 항명 사건에도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2월 1일, 육군 소년 비행병 2기생으로 도코로자와 육군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조종 학생은 제1중대에 소속되었고, 이 중 2기생은 3구대, 4구대에 배속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신설된 구마가야 육군 비행학교로 이주했다. 동기인 후지와라 다케히코는 "이근석은 매우 성격이 좋은 소년이었습니다. 군인 칙유를 좀처럼 외우지 못해서 반장에게 팔굽혀펴기를 하라고 시켜 울고 있었지만, 기계 체조는 발군으로 뛰어나, '너는 곡예사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한편, 같은 동기인 계원이에 따르면 검도는 서투른 것 같아서, 죽도로 맞으면 "아프다, 아프다"라며 도망 다녔다고 한다.

1936년 11월 30일에 실시 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2월 27일 실시 학교를 졸업하고, 7월 1일 병장으로 임관했다. 1938년 8월에 설립된 비행 제64전대에 속해 중일 전쟁이나 노몬한 사건에서 활약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한 점이 많다.

태평양 전쟁 초기, 비행 제77전대 제2중대에 소속되어 1941년 12월부터 버마의 라헨 비행장에 전개했다. 미우라 요시오(가명)에 따르면, 이근석은 머리가 좋고, 마음이 밝고, 농담을 하거나 큰 이야기를 해서, 그가 가는 곳은 항상 봄바람이 부는 듯한 부대의 인기인이었다고 한다.

12월 23일, 랑군 비행장의 제1차 폭격에 참가했다. 이근석이 소속된 편대는 폭격기대의 엄호로, 랑군 근처에서 허리케인과 버팔로 부대와 조우하여 교전했다. 이를 격퇴한 편대의 전과는 8기였으며, 이근석도 2기를 격추했다.

12월 25일, 비행 제31전대, 비행 제62전대를 엄호하여 전대 총력을 다해 실시된 랑군 비행장의 제2차 폭격에 참가했으나 피탄되어 낙하산으로 탈출했지만 나무에 걸려 영국군에게 붙잡혔다. 이근석은 인도차이나 방면의 포로 제1호가 되었다. 이때, 이근석 외에 포로가 된 폭격기 탑승원 4명과 인도로 보내져, 델리 교외의 프라나키라의 민간 재류 일본인 수용소에 일단 수용되었으며, 이후 5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 한편, 이근석이 미귀환된 제77전대에서는 전대장 요시오카 소좌가 "혹시 포로가 되었을까"하고 걱정했지만, 이듬해 3월 랑군 함락 후 논에서 이근석의 기체 잔해가 발견되어 전사로 인정되었다. 격추 수는 18기였다. 마침 미귀환이 된 날에 기지에 준위 진급 사령이 도착했고, 전사 확정 후 소위로 진급했다.

1942년 6월, 5명의 포로들은 비행 제64전대의 시미즈 타케시 준위와 함께 뉴델리 레드포트의 영국 육군 심문 센터에서 조사를 받고, 같은 해 가을 신설된 비카네르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처음에는 가족적인 분위기였지만, 1944년 제2차 아라칸 작전, 후콩 전투나 임팔 작전으로 수용자가 격증하면서 부화뇌동적인 군중 심리가 작용하고 규율이 문란해지자, 이근석이 제1 캠프장, 시미즈 타케시가 제2 캠프장으로 자치 체제를 정비했다. 계급과 출신이 천차만별이어서 통제가 쉽지 않았지만, 1945년 7월 수용소에 온 미즈이 이치 상등병에 따르면, 이근석은 사투리가 섞인 말투이면서도 군인 정신이 넘쳐흘렀고 통솔력은 발군이었다고 한다. 매일 아침 이근석이 궁성 요배를 주관하며, "야마토 정신을 잊지 마라. 살아남아 포로의 치욕을 씻어라"라고 훈시하는 것이 일과였다.

영국군에게는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대전 말기에 일어난 경례 거부 사건이다. 제네바 조약 18조에는 포로가 포획국 장교에게 경례를 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경례의 종류까지 특정하지 않았다"라며 전 경폭격기 파일럿이자 장교 캠프 선임자인 이이지마 카즈요시 중위를 중심으로 군대식 경례를 거부하고 탈모 또는 묵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이지마가 시찰을 온 루이스 마운트배튼 앞에서 목숨을 걸고 맞붙으려는 의사를 보이자, 허친슨 소장은 수용소 전체에 인원 점호와 군대식 경례를 철저히 시행하려 했다. 이근석 등 제1 캠프는 철저하게 거부를 관철했고, 수용소 측은 1주일 안에 답변이 없을 경우 공격하겠다는 통지를 했다. 이근석 등은 단식 투쟁으로 저항했고, 무기를 만들어 1주일 후에 담을 넘어 돌격하기로 합의했다. 도중에 식량을 받은 1명이 매달려 자결하는 비극이 있었지만, 1주일 후, 허친슨은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군의 함정이었고, 축배를 한 포로들이 잠이 든 틈을 타 박 싱 중령이 이끄는 번왕국군 위병대가 곤봉으로 습격했다. 무기로 응전하려 했지만, 이근석은 위병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기다려라. 성급하게 굴지 마라. 야마다 중위의 명령이다"라고 캠프의 각 반을 돌며 제지했다. 그렇게 잠잠해진 포로들은 운동장으로 끌려 나와 경례 여부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이근석은 소외무라 조장, 하마 조장, 카와카츠 나가노스케 일등병 등과 함께 거부조에 들어가 곤봉으로 맞고, 뙤약볕 아래 세 시간 넘게 서 있게 된 후, 장교 캠프에서 1주일간 격리되었다. 한편, 경례조에서도 같은 날 3명이 분신 자살을 했다.

1945년 8월 종전 후에도 포로가 급증했기 때문에, 이근석은 다른 강경파 500명과 함께 신설된 퀘타 수용소로 보내져 제2 윙장이 되었다. 퀘타 수용소의 경비는 삼엄했지만, 수용자들은 일부러 판자를 떨어뜨려 깨뜨리거나 경비병인 인도 병사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반항을 계속했다.

이듬해, 귀환이 결정되어 퀘타의 포로들도 카라치로 향하는 귀환선에 태워졌지만, 말라카 해협에 접어들 무렵 포로들 사이에 시잭 이야기가 나왔다. 데오리 수용소에서 동승했던 민간인을 휘말리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결의파와 신중파 사이에 소란이 일었지만, 이근석은 중재에 나서 민간인의 의견을 들을 것을 제안했다. 같은 날 밤, 이근석이 직접 교섭에 나선 결과, 민간인의 반대로 결의는 무산되었지만, 강경파 한 명이 비분강개하여 자살했다.

5월 중순경 렌팡 섬에 상륙했을 때에도 이근석은 매일 아침 궁성 요배를 계속했지만, 며칠 후 영국군 여성 장교에게 발각되어 소동이 일어났고, 다른 포로들로부터 격리되었다.

2. 2. 해방 이후 ~ 한국 전쟁 발발 이전

해방 후 이근석은 귀국하여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최용덕, 김정렬,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영환 등과 함께 공군 창설의 7인 간부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17] 1946년 4월 1일 조선경비대 내에 최초의 항공부대가 창설되었는데, 이근석은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48년 이근석은 수색의 조선경비대 보병학교를 거쳐 5월 14일 태능의 경비사관학교를 간부후보생 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항공총감부와 육군항공기지사령부에서 비행단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949년 7월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2. 3. 한국 전쟁 참전과 전사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이근석은 F-51 전투기 인수단장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미 극동공군이 제공한 10대의 최신 전투기를 성공적으로 인수했다.[17]

1950년 7월 3일, 이근석은 대한민국 공군 사상 최초로 전투기 출격(작전명령 제25호)을 감행했다.[17] 7월 4일에는 김영환, 박희동, 강호륜과 함께 4기 편대로 출격, 안양 상공에서 적 지상 목표물을 공격하던 중 전사했다.[13]

이근석의 전사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증언과 기록이 있다.

  • 딘 헤스 회고: 딘 헤스 소령은 저서에서 "미군기를 과거에 다수 격추시켰었다는 자신감에 배움에 있어서 회의적이었다"고 회상하며, 이근석이 일본군 시절 조종하던 Ki-27과 달리 중량이 무거웠던 F-51기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해 저고도 급강하 공격 중 지면에 추락했다고 기록했다.[17]
  • 박희동 증언: 함께 출격했던 박희동은 안양 상공에서 적 전차를 발견, 공격하던 중 이근석이 대공포탄에 맞아 애기와 함께 적진에 돌입하여 전사했다고 증언했다.[13]
  • 김두만 견해: 김두만은 이근석이 일본군 시절 조종했던 하야부사 전투기와 F-51D 전투기의 무게와 성능 차이를 언급, 최저 한계 고도 판단 착오보다는 다른 요인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13]


장지량은 이근석이 태평양 전쟁에서 포로가 된 이후 한국 전쟁까지 전투기를 조종하지 않았으며, 일본에서 단 한 번 훈련을 받고 실전에 투입된 것은 무리였다고 평가했다.[9]

1951년 9월 19일, 이근석은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공군 준장으로 특진 추서되었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특수비행훈장을 받았다.[17] 유해는 1957년 4월 28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2에 안장되었다.[17]

3. 사후

1951년 9월 19일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고 공군 대령에서 공군 준장으로 특진되었다.[14] 미국 정부는 특수비행훈장을 증여했다.[14] 유해는 1957년 4월 28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2에 안장되었다.[14]

2011년 6월 30일, 국가보훈처는 "7월의 6.25 전쟁 영웅"으로 선정했으며,[15] 2015년에는 6.25 전쟁 호국의 영웅 10인의 우표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16]

4. 평가

이근석은 뛰어난 조종술과 불굴의 의지로 일제 강점기 억압받던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인 인물이다. 일본 구마다니 비행학교에서 뛰어난 조종술로 명성을 얻었으며,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18기(혹은 23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17] 그러나 영국군에게 격추되어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크게 기여했다. 최용덕, 김정렬 등과 함께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1946년 4월 1일 최초의 항공부대 창설에 참여했다.[17] 1949년 10월에는 공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이근석은 F-51 전투기 인수단장으로서 10대의 전투기를 성공적으로 인수하여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전투기 출격을 감행했다.[17] 그러나 1950년 7월 4일, 안양 상공에서 저고도 급강하 공격 중 추락하여 전사했다.[17] 당시 미군 딘 헤스 소령은 이근석 대령이 과거 미군기를 다수 격추했었다는 자신감 때문에 (새로운 기종에 대한) 배움에 소극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사후 1951년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공군 준장으로 추서되었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특수비행훈장을 받았다.[17]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이근석의 업적은 대한민국 공군사에 길이 남아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이근석 대령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며, 그의 애국심을 본받아 굳건한 안보 태세를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5. 논란

이근석 대령은 전사 원인과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다.[17]

5. 1. 전사 원인 논란

이근석 대령의 전사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딘 헤스는 이근석 대령이 일본군 시절 몰던 전투기와 F-51의 기체 특성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무리한 저공비행을 시도하다 추락했다고 주장했다.[17] 반면, 당시 함께 출격했던 박희동은 이근석 대령이 적의 대공포에 피탄된 후 적진으로 돌입했다고 증언했다. 김두만은 F-51D 전투기의 최저 한계 고도가 하야부사 전투기보다 높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비행 감각의 차이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다양한 주장은 당시 상황이 급박했고, 정확한 기록이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5. 2. 친일 행적 논란

이근석 대령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 조종사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17] 1934년 만주사변 당시 구마다니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요시오카 전투비행부대에 배속되었으며,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77전대에 배속되어 랑군 비행장 폭격에 참여했다가 영국군에게 격추되어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포로수용소에서 다른 일본군 포로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설욕을 다짐했고, 영국군 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난 항명 사건에 가담하기도 했다.[17]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주력하여 최용덕, 김정렬,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영환 등과 함께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근석 대령의 일본군 복무 경력만으로 친일 행적을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 진보 진영에서는 이근석 대령의 항일 정신과 대한민국 건국 기여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공적을 중심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釜山日報昭和10年2月4日朝刊「でかしたり李根哲少年」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2018-03-04
[2] 서적 日本陸軍戦闘機隊 付: エース列伝 酣灯社
[3] 간행물 官報 1942年07月28日 https://dl.ndl.go.jp[...]
[4] 웹사이트 李根晳将軍の銅像 http://mfis.mpva.go.[...] 国家報勲処顕忠施設サービス 2018-03-04
[5] 웹사이트 平安南道平原郡の概要(평안남도 평원군 역사) http://www.cybernk.n[...] 北韓地域情報ネット 2018-03-04
[6] 웹사이트 대한민국 50년... 1948~1998 http://www.doopedia.[...]
[7] 웹사이트 飛行第77戦隊戦闘詳報 昭16.12.11~16.12.25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6120056400、飛行第77戦隊戦闘詳報 昭16.12.11~16.12.25(防衛省防衛研究所) 2017-11-03
[8] 문서 "#秦(1998)"
[9] 뉴스 "<285>제3話 빨간 마후라 -35-첫 출격과 첫 전사" http://kookbang.dema[...] 2018-02-03
[10] 웹사이트 6·25 전쟁사 제1권- 전쟁의 배경과 원인 http://www.imhc.mil.[...] 韓国国防部軍事編纂研究所 2018-07-06
[11] 웹사이트 現代韓国口述資料館―ペ・サンホ/ 1929.03.27 https://mkoha.aks.ac[...] 韓国学中央研究院 2018-03-02
[12] 웹사이트 戦闘機を手で回したときの話 http://afplay.kr/91 空軍空間 2018-03-02
[13] 서적 항공 징비록 21세기북스
[14] 뉴스 空軍第11戦飛、故李根晳将軍将軍追悼行事開く(공군 11전비, 故 이근석 장군 추모행사 열어) http://www.ohmynews.[...] 2018-03-01
[15] 뉴스 「7月の6・25戦争英雄」李根晳空軍准将 http://www.yonhapnew[...] 2017-11-03
[16] 뉴스 「6.25戦争護国の英雄10人」のスタンプ出てくる http://news1.kr/arti[...] 2018-03-01
[17] 웹인용 공군의 최초 전투기 F-51 인수.출격 재연식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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