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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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리호 전투는 1813년 9월 10일, 미영 전쟁 중 이리 호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미국 해군과 영국 해군 간의 중요한 교전이었다. 영국군이 이리 호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미국 해군은 올리버 해저드 페리 제독의 지휘 아래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리 호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이 승리로 미국은 디트로이트와 애머스트버그를 탈환하고, 템스 전투에서의 승리로 이어지는 등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미국은 수적 우위와 더 강력한 무장을 갖춘 반면, 영국은 숙련된 선원 부족과 지휘관의 조기 전사 등으로 인해 패배했다. 전투 결과, 영국군은 모든 함선을 잃었고, 미국군은 일부 피해를 입었지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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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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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일부 | 미영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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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813년 9월 10일 |
장소 | 이리호, 오하이오주 풋인베이 근처 |
결과 | 미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
교전국 2 | 영국 |
지휘관 | |
미국 | 올리버 해저드 페리 |
영국 | 로버트 헤리엇 버클리 |
병력 규모 | |
미국 | 스쿠너 5척 브리그 3척 슬루프 1척 540명 1,536 lb 브로드사이드 |
영국 | 횡범선 2척 브리그 1척 스쿠너 2척 슬루프 1척 450명 804 lb 브로드사이드 |
사상자 | |
미국 | 27명 사망 96명 부상 브리그 1척 심각한 손상 |
영국 | 41명 사망 93명 부상 306명 포로 전체 함대 포획 |
2. 배경
미영 전쟁이 발발하면서 오대호, 특히 이리호의 제해권 확보는 양측에게 중요한 전략적 과제가 되었다. 전쟁 초기 영국은 이미 이리호에 소규모 함대를 운용하며 주 해군(Provincial Marine)을 통해 호수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해상 우위를 바탕으로 영국군은 디트로이트 공성전에서 승리하는 등 초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에 미국은 이리호의 제해권을 되찾기 위해 새로운 함대 건설에 착수했다. 펜실베이니아주 이리의 프레스크 아일 만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함선 건조를 시작했으며, 올리버 해저드 페리가 함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영국 역시 미국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로버트 헤리엇 버클리를 새로운 지휘관으로 파견하고 기존 함선을 보강하며 HMS 디트로이트와 같은 새로운 군함을 건조하는 등 해군력 증강에 힘썼다.
양측 모두 이리호의 통제권 확보를 위해 함대 건설과 병력 충원에 집중하면서, 호수에서의 군사적 긴장감은 점차 고조되었다. 특히 영국군은 보급 문제에 직면하면서 미국의 봉쇄를 돌파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고, 이는 결국 이리호의 제해권을 둘러싼 양측 함대의 결정적인 충돌로 이어지게 되었다.
2. 1. 1812년
미영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은 신속하게 이리호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영국은 이미 슬루프 ''퀸 샬럿'' (Queen Charlotte)과 브리그선 ''제너럴 헌터'' (General Hunter) 등 소규모 군함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함선들은 주 해군(Provincial Marine) 소속으로, 해전보다는 수송 지원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미국은 이에 맞설 마땅한 해군력이 없었다. 건조 중이던 스쿠너 ''레이디 프레보스트'' (Lady Prevost)도 전쟁 발발 몇 주 후 전력에 가담했다.미국 측의 유일한 군함이었던 브리그선 ''애덤스'' (Adams)는 전쟁 시작 시 운용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윌리엄 헐 준장이 이끄는 미 육군이 캐나다 침공을 포기하면서 디트로이트에서 영국 포대의 공격에 발이 묶였다. 영국군 아이작 브록 소장은 이러한 이리호의 제해권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미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병력을 신속하게 앰허스트버그로 이동시켜 디트로이트 강 미국 측에 성공적으로 상륙했고, 결국 디트로이트 공성전에서 헐 장군의 미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디트로이트가 함락되면서 미국은 ''애덤스'' 호마저 영국군에게 빼앗겼다. 영국군은 이 배를 HMS ''디트로이트'' (Detroit)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1812년 10월 9일, 제시 엘리엇 중위가 지휘하는 미 해군과 육군 병력은 포트 이리 근처에서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HMS ''디트로이트''와 노스웨스트 컴퍼니에서 징발한 브리그선 ''칼레도니아'' (Caledonia)를 나포하는 데 성공했다. HMS ''디트로이트''는 나이아가라강의 한 섬에 좌초되었고, 영국군에게 재탈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반면 ''칼레도니아''는 블랙 록의 해군 기지로 예인되어 미국 해군에 편입되었다.[4]
''칼레도니아'' 외에도 블랙 록에는 미국 해군이 상선들을 구입하여 건보트로 개조한 스쿠너 ''소머스'' (Somers)와 ''오하이오'' (Ohio), 슬루프 ''트리피'' (Trippe) 등이 있었다.[5] 하지만 영국군이 포트 이리와 나이아가라 강을 통제하는 인근 포대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함선들은 블랙 록 항구에 갇혀 이리호로 나아가지 못했다.
1812년 말, 미국 해군 장관 폴 해밀턴은 디트로이트에서 탈출하여 이리호의 영국군 상황에 대한 정보를 가져온 숙련된 호수 선원 대니얼 도빈스를 만났다. 도빈스는 펜실베이니아주 이리의 프레스크 아일 만(Presque Isle Bay)을 새로운 해군 기지로 추천했다. 도빈스는 그곳에서 네 척의 건보트를 건조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엘리엇 중위는 시설 부족 문제를 제기했다.[6] 프레스크 아일 항구 입구의 모래톱 또한 새로 건조될 함선들을 호수로 진수시키는 데 어려움을 줄 수 있는 문제였다. 9월부터 도빈스는 벌목 작업을 지휘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숙련된 조선공 에베네저 크로스비를 고용하여 건보트 건조에 착수했다.[7] 한편, 1812년 9월 아이작 챈시 제독이 대호수 지역 미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13년 1월 1일 이리를 잠시 방문하여[8] 도빈스의 작업을 승인하고 더 큰 함선 건조를 위한 자재 확보를 독려했지만, 이후 온타리오호의 작전에 더 집중했다.
2. 2. 1813년
1813년 1월, 전임 해밀턴을 대신하여 미국 해군 장관이 된 윌리엄 존스는 프레스크 아일(현재 이리 시에 위치한 반도의 프랑스어 이름)에서 두 척의 브리그급 코르벳과 여러 척의 다른 함선 건조를 명령했다.[40][9] 건조 책임자로는 온타리오호의 사케츠 항구에서 활동하던 조선장 노아 브라운이 임명되었다. 못이 부족하여 나무못을 사용하는 등 건조 환경은 열악했지만, 두 척의 브리그는 당시의 USS 호넷과 비슷한 규모로 건조되었다.[40][9] 함선에 실릴 가장 강력한 무장은 체사피크 만의 주물 공장에서 제작되어 어려운 과정을 거쳐 프레스크 아일로 운반되었다. 다행히도 조지 칵번 제독 휘하 영국군 습격대가 동부 해안 프렌치타운의 주물 공장을 파괴하기 직전에 대포 일부가 먼저 옮겨진 상태였다.[40][9] 미국은 또한 제조업 중심지로 성장하던 피츠버그에서 다른 자재와 부품을 조달했으며, 소형 총기는 육군에서 빌려왔다.[9]올리버 해저드 페리 해군 대령은 로드아일랜드 상원 의원 제레미아 B. 하웰의 추천 등으로 이리호 함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어[10] 3월 말 프레스크 아일에 도착했다. 페리는 즉시 기지 방어 준비에 착수하는 한편, 온타리오호로 가서 함대 사령관인 아이작 초운시 해군 준장에게서 수병 지원을 요청했다. 이후 페리는 포트 조지 전투에서 미국의 스쿠너와 포함들을 지휘했으며, 5월 말 영국군이 포트 이리를 포기하자 블랙 록에 묶여 있던 미국 함선들을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페리는 소를 이용하여 함선들을 나이아가라강 상류로 끌어올리는 힘든 작업을 6일간 진행한 후,[5] 프레스크 아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한편, 영국 해군에서는 로버트 헤리엇 버클리 중령이 이리호 함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다른 장교가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임명을 거부한 자리였다.[11] 버클리는 육로를 통해 힘든 여정을 거쳐 6월 10일에야 앰허스트버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데려온 장교와 수병은 소수에 불과했다. 부임 당시 그의 함대 승조원은 영국 해군 수병 7명, 캐나다 주 해병대 장교와 병사 108명 (버클리는 이들의 자질에 대해 낮게 평가했다), 로열 뉴펀들랜드 펜서블스 소속 54명, 그리고 사실상 육상 근무에 익숙한 제41 보병 연대 병사 10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2] 그럼에도 버클리는 즉시 HMS 퀸 샬럿과 HMS 레이디 프레보스트 두 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항했다. 그는 먼저 프레스크 아일의 페리 기지를 정찰하여 2,000명의 펜실베이니아 민병대와 포병, 요새로 방어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이리호 동쪽 끝으로 이동하여 블랙 록에서 오는 미국 함선을 요격하려 했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놓치고 말았다.[13]
7월과 8월 동안 버클리는 함대 전력 증강에 힘썼다. 템스 강의 채텀에서 재건된 스쿠너 HMS 치페와와 슬루프 HMS 리틀 벨트를 인수받았고, 앰허스트버그에서는 코르벳 HMS 디트로이트의 건조를 서둘렀다.[14] 그러나 1813년 초 미국이 온타리오호를 장악하고 나이아가라 반도를 점령하면서, 버클리에게 필요한 물자는 요크에서 육로로 운송되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초 요크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하면서 HMS 디트로이트에 장착될 예정이었던 24파운드 캐로네이드 포가 미군에게 넘어가 버렸다.[15] 결국 HMS 디트로이트는 앰허스트버그 요새에 있던 잡다한 종류의 대포들로 무장해야 했다. 버클리는 군사 재판에서 이 대포들에는 플린트락 발사 장치나 성냥이 없어서, 통풍구에 화약을 쌓고 플린트락 권총을 격발시켜 발사해야 했다고 증언했다.[16]
버클리는 온타리오 호의 영국 함대 사령관인 제독 제임스 루카스 예오에게 병력과 물자 지원을 반복적으로 요청했지만, 거의 받지 못했다. 디트로이트 전선의 영국 육군 사령관인 헨리 프록터 소장 역시 상관들로부터 병력과 탄약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프록터는 증원 없이는 프레스크 아일 공격을 거부했고, 대신 인디언 동맹 부족의 권고에 따라 감행한 포트 스티븐슨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17]
7월 중순, 미국의 함대는 거의 완성되었지만 페리는 전투 가능 인원이 120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했다. 영국 함대는 7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간 프레스크 아일 항구를 봉쇄했다. 하지만 항구 입구의 모래톱 때문에 수심이 약 1.52m에 불과하여 버클리의 함선이 항구 안으로 진입하여 공격할 수 없었고, 동시에 미국 함선들이 전투 대형을 갖추고 나오는 것도 막았다. 버클리는 7월 21일 해안 포대와 잠시 교전하기도 했으나, 결국 보급품 부족과 악천후로 인해 7월 29일 봉쇄를 풀 수밖에 없었다. 일설에는 버클리가 자신을 위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거나, 혹은 미국 함선들이 모래톱을 넘다가 혼란에 빠지기를 기대하며 일부러 철수했다는 주장도 있다.
버클리가 떠나자 페리는 즉시 함선을 모래톱 너머로 이동시키는 고된 작업을 시작했다. 모든 함선의 대포를 제거하고, 가장 큰 두 척의 브리그는 "카멜"(물을 채워 가라앉혔다가 배 밑으로 넣어 물을 빼내 배를 들어 올리는 평저선 또는 바지선)을 이용해 들어 올려야 했다. 버클리가 4일 후 돌아왔을 때, 페리는 이미 작업을 거의 마친 상태였다. 페리의 두 주력 브리그는 아직 전투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포함들과 작은 브리그들이 자신감 있게 전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버클리는 HMS 디트로이트의 완성을 기다리기 위해 앰허스트버그로 철수했다.
이후 초운시 제독은 제시 엘리엇 중위가 이끄는 130명의 추가 선원을 프레스크 아일로 파견했다.[18] 페리는 이들 중 일부를 "형편없다"고 평가했지만, 최소 50명은 보스턴에서 수리 중이던 프리깃함 USS 컨스티튜션에서 차출된 숙련된 선원들이었다.[19] 페리는 또한 펜실베이니아 민병대에서 자원병을 모집하고, 샌더스키로 이동하여 윌리엄 헨리 해리슨 소장이 이끄는 북서부 육군으로부터 추가 자원병을 받았다.[20]
페리의 함대는 앰허스트버그 앞에서 두 차례 무력시위를 벌인 후 풋-인-베이에 닻을 내렸다. 이후 5주 동안 버클리 함대는 사실상 봉쇄되어 앰허스트버그로 물자를 수송할 수 없게 되었다. 버클리의 선원들, 프록터의 군대, 그리고 앰허스트버그에 집결해 있던 수많은 인디언 전사들과 그 가족들은 심각한 보급품 부족에 시달렸다. 퀘벡에서 파견된 해군 장교 2명, 준사관 3명, 수병 36명의 마지막 증원이 도착한 후,[21] 버클리는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항하여 페리와의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전투 며칠 전, 페리는 그의 친구이자 비서인 사무엘 햄블턴에게 전투 시 함대에 보낼 신호용 전투 깃발 제작을 요청했다. 햄블턴은 페리의 친구이자 프리깃함 USS 체서피크의 함장이었던 제임스 로렌스의 마지막 말인 "배를 포기하지 마라(Don't Give Up the Ship)" 문구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햄블턴은 이리 시의 여성들에게 이 문구를 수놓은 깃발을 만들게 했고, 전투 전날 페리에게 전달했다. 이 깃발은 이후 미국 해군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물이 되었다.
3. 전투의 전개
1813년 9월 10일 아침, 오하이오주 Put-in-Bay 근해에서 올리버 해저드 페리가 이끄는 미국 함대와 로버트 헤리엇 바클레이가 지휘하는 영국 함대가 조우했다. 처음에는 영국 함대가 바람을 등져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곧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미국 함대가 공격 기회를 잡았다.[22]
전투 초반, 페리의 기함인 USS ''Lawrence''는 영국 함대의 집중 포화를 받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승무원의 5분의 4가 사상하고 함선의 전투 능력이 거의 상실되자, 페리는 포화를 뚫고 작은 보트를 타고 USS ''Niagara''로 기함을 옮겨 전투를 계속 지휘했다.[26] ''Lawrence''는 잠시 영국군에게 항복했으나, 페리는 ''Niagara''를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격에 나섰다.
페리의 지휘 아래 ''Niagara''와 다른 미국 함선들은 영국 함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했다. 영국 기함 HMS ''Detroit''와 HMS ''Queen Charlotte''는 큰 손상을 입고 서로 충돌했으며,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29] 결국 오후 3시경, 영국 함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모든 함선이 항복했다.[30] 페리는 ''Niagara''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영국군의 항복은 원래 기함이었던 ''Lawrence''의 갑판에서 받았다.
3. 1. 전력 비교
해군 | 이름 | 함종 | 톤수 | 승무원 | 무장 | 지휘관 | 비고 |
---|---|---|---|---|---|---|---|
영국 해군 | 치페와 | 스쿠너 | 70 톤 | 15 | 1 × 9 파운드 장포 | Master's Mate J. Campbell | 포획 |
디트로이트 | 군함 | 490 톤 | 150 | 1 × 18 파운드 (회전식) 2 × 24 파운드 장포 6 × 12 파운드 장포 8 × 9 파운드 장포 1 × 24 파운드 캐러네이드 1 × 18 파운드 캐러네이드 | 사령관 로버트 헤리엇 바클레이 | 포획 | |
제너럴 헌터 | 브리그 | 180 톤 | 45 | 4 × 6 파운드 장포 2 × 4 파운드 장포 2 × 2 파운드 장포 2 × 12 파운드 캐러네이드 | 중위 조지 비그날 | 포획 | |
퀸 샬럿 | 군함 | 400 톤 | 126 | 1 × 12 파운드 장포 2 × 9 파운드 장포 12 × 24 파운드 캐러네이드 | 사령관 로버트 피니스 | 포획 | |
레이디 프레보스트 | 스쿠너 | 230 톤 | 86 | 1 × 9 파운드 장포 2 × 6 파운드 장포 10 × 12 파운드 캐러네이드 | 중위 에드워드 부찬 (치명상); 지휘는 중위 프레데릭 롤레트에게 넘어감 | 포획 (방향타 손실) | |
리틀 벨트 | 슬루프 | 90 톤 | 18 | 1 × 12 파운드 장포 2 × 6 파운드 장포 | 중위 존 F. 브레만 | 포획 | |
합계 | 6 척의 군함 | 1,460 톤 | 450 | 330 lb 장포탄 474 lb 캐러네이드탄 | |||
미국 해군 | 스콜피온 | 스쿠너 | 86 톤 | 35 | 1 × 32 파운드 장포 1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 항해사 스티븐 챔플린 | 장포 해체 (과충전)[16] |
아리엘 | 스쿠너 | 112 톤 | 36 | 4 × 12 파운드 장포 | 중위 존 H. 패킷 | 총기 1정 폭발 (과충전)[16] | |
로렌스 | 브리그 | 480 톤 | 136 | 2 × 12 파운드 장포 18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 마스터 사령관 올리버 해저드 페리 | 항복했지만 탈환 | |
칼레도니아 | 브리그 | 180 톤 | 53 | 2 × 24 파운드 장포 1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 중위 다니엘 터너 | 1812년 10월 9일 영국으로부터 포획 | |
나이아가라 | 브리그 | 480 톤 | 155 | 2 × 12 파운드 장포 18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 마스터 사령관 제시 엘리엇 | ||
소머스 | 스쿠너 | 94 톤 | 30 | 1 × 24 파운드 장포 1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 중위 A. H. M. 콘클린 | ||
포큐파인 | 스쿠너 | 83 톤 | 25 | 1 × 32 파운드 장포 | 임시 마스터 조지 세랏 | ||
타이그리스 | 스쿠너 | 82 톤 | 35 | 1 × 32 파운드 장포 | 항해사 토머스 C. 애브니 | ||
트립 | 슬루프 | 60 톤 | 35 | 1 × 24 파운드 장포 | 중위 토머스 홀드업 스티븐스 | ||
합계 | 9 척의 군함 | 1,657 톤 | 540 | 288 lb 장포탄 1,248 lb 캐러네이드탄 |
(그림)토머스 버치(c.1814)
3. 2. 전투 경과

1813년 9월 10일 아침, 올리버 해저드 페리가 이끄는 미국 함대는 로버트 헤리엇 바클레이가 지휘하는 영국 함대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Put-in-Bay의 정박지를 떠나 출항했다. 바람은 약하게 불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클레이 함대가 풍상을 차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곧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페리 함대가 접근하여 공격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양측 함대는 전열을 형성했으며, 각 함대의 가장 강력한 함선들이 전열 중앙에 자리 잡았다.
오전 11시 45분, 영국 기함 HMS ''Detroit''에서 첫 포탄이 발사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22] 페리는 자신의 기함인 ''Lawrence''와 제스 엘리엇이 지휘하는 ''Niagara'' 등 두 척의 주력 브리그함을 신속하게 카로네이드 포의 유효 사거리 안으로 진입시키려 했으나, 약한 바람 때문에 함대의 이동 속도는 매우 느렸다. 이로 인해 ''Lawrence''는 효과적인 반격을 가하기까지 최소 20분 동안 ''Detroit''의 장거리 포화에 노출되었다. 마침내 12시 45분경 ''Lawrence''가 카로네이드 사정거리에 도달했을 때, 그 포격은 페리가 기대했던 만큼 효과적이지는 않았는데, 이는 포수들이 카로네이드에 포탄을 너무 많이 넣었기 때문으로 보인다.[23]
한편, ''Lawrence''의 뒤를 따르던 엘리엇의 ''Niagara''는 전투 참여가 늦어지며 효과적인 카로네이드 사정거리 밖에 머물렀다. 엘리엇이 자신의 상대인 HMS ''Queen Charlotte''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고, 기동이 까다로운 ''Caledonia''에 의해 진로가 방해받았을 수도 있다.[24] 그러나 엘리엇의 이러한 행동은 이후 수년간 페리와 엘리엇 사이의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Niagara''와 대치하던 영국 함선 ''Queen Charlotte''에서는 함장 로버트 피니스와 부함장이 모두 전사했다. 지휘를 맡게 된 어바인 중위는 ''Niagara''와 미국의 포격선들이 사정거리 밖에 있다고 판단하고, HMS ''General Hunter''를 지나쳐 페리의 기함 ''Lawrence''와의 근접전에 집중하도록 함선을 이동시켰다.[23]
미국 전열 후방의 포격선들은 장거리 포를 이용해 영국 함대의 중앙부를 꾸준히 공격했지만, ''Lawrence''는 두 척의 영국 함선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아 심각하게 파손되었다. 승무원의 5분의 4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큰 피해를 보았다. 당시 양측 함대의 군의관들은 모두 "호수 열병"(말라리아)으로 인해 임무 수행이 불가능했고,[25] 부상자들은 보조 의사인 Usher Parsons가 홀로 돌보았다. ''Lawrence''의 마지막 함포마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페리는 기함을 옮기기로 결단했다. 그는 격렬한 포화 속을 뚫고 작은 보트를 타고 약 약 0.80km를 저어 ''Niagara''로 이동했으며, 그 사이 ''Lawrence''는 영국군에게 항복했다. 이 위험한 이동 과정에서 페리의 개인 하인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원 사이러스 티파니가 그를 동행하며 보호했다고 전해진다.[26] 나중에 페리가 항복 후에 ''Lawrence''를 떠났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배를 포기하지 말라(Don't Give Up the Ship)"는 문구가 적힌 자신의 파란색 개인 깃발만 내렸을 뿐이었다.
''Lawrence''가 항복하자 포격은 잠시 멈추었다.[24] 영국 함대는 혼란에 빠졌다. ''Detroit''은 ''Queen Charlotte''와 충돌했고, 두 함선 모두 돛대와 밧줄이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거의 모든 장교가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어 제대로 함선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바클레이 함장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부함장은 전사하여 잉글리스 중위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다른 작은 영국 함선들도 대부분 손상을 입고 바람에 밀려 표류했다.[27] 그럼에도 영국군은 ''Niagara''가 미국의 다른 스쿠너선들을 이끌고 후퇴할 것으로 예상했다.[28]
그러나 페리는 후퇴하는 대신 반격을 선택했다. ''Niagara''에 탑승한 페리는 먼저 엘리엇에게 명령하여 뒤처진 스쿠너 포격선들을 더 가까이 접근시키도록 했다. 동시에 바람이 강해지는 것을 이용하여 ''Niagara''를 몰아 바클레이의 손상된 함선들을 향해 돌진했다. ''Niagara''는 ''Detroit''과 ''Queen Charlotte'' 사이를 돌파하며 영국 전열을 갈랐고, 두 함선 앞에서 뱃머리를 바람 쪽으로 돌려 멈춘 뒤 강력한 측면 포격을 퍼부었다. 뒤따라온 ''Caledonia''와 미국의 포격선들도 후방에서 포격을 가했다. ''Detroit''과 ''Queen Charlotte''의 남은 승무원들은 엉킨 두 함선을 간신히 떼어놓았지만,[29] 더 이상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오후 3시경, 두 함선은 항복했다. 도주를 시도하던 작은 영국 함선들도 곧 추격당해 모두 항복했다.[30]
페리는 ''Niagara''호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영국군의 항복은 전투 중 잠시 빼앗겼던 자신의 원래 기함, ''Lawrence''의 갑판 위에서 받았다. 이는 영국군에게 미군이 치른 희생의 대가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4. 전투의 결과
페리는 전투 직후 웨스트 시스터 아일랜드 부근에서 함대의 응급 수리를 진행했다. 이후 그는 북서부 육군 사령관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해군 장관 윌리엄 존스에게 승전보를 보냈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페리 함대는 미군 병력 수송을 지원했고, 이는 해리슨이 이끄는 미군이 프로크터가 지휘하는 영국군을 추격하여 템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이리호 전투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미국이 미영 전쟁 기간 동안 이리호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1814년 나이아가라 반도에서의 미군 작전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미시간주, 오하이오주, 펜실베이니아주, 뉴욕주 서부 지역에 대한 영국의 위협을 제거하는 중요한 전략적 성과를 거두었다.
4. 1. 피해 규모
영국군은 41명이 사망하고 9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생존자는 306명이었다. 바클레이 선장은 이미 1809년에 왼쪽 팔을 잃은 상태였는데, 이 전투에서 다리와 허벅지 일부를 추가로 잃었고 남은 팔마저 "영구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중상을 입었다. 미국군은 27명이 사망하고 9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부상자 중 2명은 나중에 사망했다.[31] 미국 함선 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로렌스''로, 장교 2명과 사병 20명이 사망하고 장교 6명과 사병 55명이 부상을 당했다.[29]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세 척의 함선, 즉 미국 측의 ''로렌스''와 영국 측의 ''디트로이트'', ''퀸 샬롯''은 전투 후 병원선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9월 13일 이리 호에 불어닥친 폭풍으로 ''디트로이트''와 ''퀸 샬롯''은 돛대가 부러지는 등 이미 손상된 상태에서 더욱 파괴되었다. 부상자들이 이리로 옮겨진 후, ''로렌스''는 1814년에 다시 사용될 수 있었지만, 영국 함선 두 척은 사실상 선체만 남은 상태로 전락했다.[32]
4. 2. 전략적 영향
이리호 전투에서의 승리는 미영 전쟁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34] 페리는 전투 직후 해리슨 장군에게 낡은 봉투 뒷면에 연필로 휘갈겨 쓴 유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장군께: 우리는 적과 조우했고, 그들은 우리의 것입니다. 두 척의 함선, 두 척의 브릭, 한 척의 스쿠너, 그리고 한 척의 슬루프입니다. 경의와 존경을 담아, O.H. 페리"[33] 이후 해군 장관 윌리엄 존스에게도 "전능하신 분께서 이 호수에서 미합중국의 무력에 적에 대한 획기적인 승리를 주셨습니다. 두 척의 함선, 두 척의 브리그, 한 척의 스쿠너, 그리고 한 척의 슬루프로 구성된 영국 함대는 격렬한 전투 끝에 이 순간 제 지휘 하에 항복했습니다."라는 내용의 승전보를 전했다.전투 후 페리 함대는 서둘러 함선을 수리하고, 포획한 영국 함선과 함께 미국 육군 병력 2,500명을 수송하여 9월 27일 애머스트버그를 저항 없이 점령했다. 같은 시기, 리처드 멘토 존슨이 이끄는 1,000명의 미군 기병대는 육로를 통해 디트로이트로 진격하여 역시 큰 전투 없이 탈환했다.
영국군 사령관 프로크터는 전투 결과를 알기 전부터 이미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아메리카 원주민 연합의 지도자 테쿰세는 항전을 주장했지만, 프로크터는 애머스트버그와 디트로이트를 포기하고 9월 27일 템스 강을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보급품이 부족했던 테쿰세와 그의 부족민들도 어쩔 수 없이 프로크터를 따라야 했다. 해리슨이 이끄는 미군은 후퇴하는 영국군과 원주민 연합을 추격하여 10월 5일 템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테쿰세와 그의 부사령관 라운드헤드가 전사했다.
이리호에서의 승리로 미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리호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는 1814년 나이아가라 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의 작전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서부 뉴욕주 등 미국 북서부 영토에 대한 영국의 직접적인 공격 위협을 제거하는 중요한 성과였다.
그러나 이후 1814년 휴런호의 매키노 섬을 탈환하려는 미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척의 함선을 잃기도 했다. (4척은 1813년 말 버팔로 전투 이후 영국이 정박해 있던 블랙 록을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고, 4척은 이리호와 휴런호에서 별도의 사건으로 나포되었다.) 전쟁 후, 전투에서의 역할 분담을 놓고 페리와 그의 부사령관이었던 엘리엇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영국 측에서는 패배한 함대 사령관 바클레이가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5. 전투 이후
전투 후, 페리와 제시 엘리엇 사이에서는 전투 중 각자의 역할에 대해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고, 이는 인쇄물을 통해서도 이어졌다. 영국군 사령관 버클리는 군법 회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전투 중 입은 부상이 심각하여 수년간 군무에 복귀하지 못했다.
전투에서 크게 손상된 기함 USS 로렌스와 USS 나이아가라는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1820년 이리호의 미저리 만(Misery Bay) 근처에 의도적으로 침몰되었다.[35] 이후 1875년, ''로렌스''는 인양되어 필라델피아로 옮겨져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말, 배를 보관하던 전시관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로렌스''는 소실되었다. ''나이아가라''는 1913년에 인양되어 복원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낡아졌다. 결국 해체되었고, 그 부품의 일부는 재건된 ''나이아가라''에 사용되어 현재 이리 시에 전시되어 있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여러 기념물이 세워졌다. 오하이오주 푸틴베이에는 약 107.29m 높이의 페리의 승리와 국제 평화 기념관 내 페리 기념비가 서 있으며, 전투에 참여했던 병사들을 기리고 있다. 또한, 펜실베이니아주 이리의 프레스크 아일(Presque Isle) 동쪽 끝에는 약 30.78m 높이의 또 다른 페리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로렌스''와 ''나이아가라''가 건조되고 미 함대가 주둔했으며, 전쟁 후 자침했던 프레스크 아일 만의 반도에 위치한다.
이리호 전투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교수 크레이그 L. 사이먼스(Craig L. Symonds)가 저술한 "해상에서의 결단(Decision at Sea)"(2005년)에서 중요한 미국 해군 해전 다섯 개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다른 네 전투는 햄프턴로즈 해전(1862년), 마닐라 만 해전(1898년), 미드웨이 해전(1942년), 프레잉 맨티스 작전(1988년)이다.
6. 미국의 승리 요인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언급한 "우수한 중금속", 즉 미국의 더 많은 함선과 강력한 중포를 승리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36][38] 페리의 지휘력, 특히 전투 막바지에 보여준 과감한 판단과 기함 이동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역사가 C. S. 포레스터는 ''로렌스''호에 아직 사용할 수 있는 보트가 있었고 페리가 포탄에 맞지 않은 것은 미국에게 행운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24]
미국의 승리는 함선 건조 능력의 차이에서도 기인했다. 미국은 1812년 전쟁 중 이리호에서 6척의 함선을 건조했지만, 영국은 윌리엄 벨이 설계한 ''디트로이트''호 단 한 척을 건조하는 데 그쳤다. 벨의 완벽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건조가 지연된 측면도 있었다. 더욱이 ''디트로이트''호에 장착될 예정이었던 주력 대포는 요크 전투에서 미군에게 빼앗겨, 결국 아마스트버그 요새의 방어용 무기 중에서 급히 조달한 잡다한 대포로 무장해야 했다. 이 대포들은 플린트락 점화 장치나 성냥조차 없어, 통풍구에 채운 화약에 권총을 쏘아 점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37] 이러한 함선 수와 무장의 불균형은 전투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설령 영국이 더 많은 함선을 확보했더라도, 그에 맞는 무장과 승무원을 제대로 갖출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보급 능력의 차이도 미국의 우위를 뒷받침했다. 페리 함대의 대포는 체서피크 만의 주조소에서 제작되어 어려운 과정을 거쳐 프레스크 아일로 운반되었지만, 다른 필요 물자는 당시 제조업 중심지로 부상하던 피츠버그 등지에서 비교적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다. 반면, 영국 바클레이 함대의 대포와 물자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올라와 온타리오 호와 이리 호를 통해 수송되어야 했다. 그러나 1813년 초 미군이 온타리오 호를 장악하고 나이아가라 반도를 점령하면서 영국의 주요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물자는 요크(현 토론토)에서 육로로 어렵게 운송되어야 했다.[37]
영국 해군은 숙련된 선원 부족 문제도 겪고 있었다. 양측 모두 직업적인 해군 외에 호수 선원이나 민간 뱃사공 등을 승무원으로 활용했지만, 영국 측은 특히 숙련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전투 중 지휘관들이 일찍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것도 영국 함대의 지휘 체계에 혼란을 야기하며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37]
전투 후 열린 영국 군사 재판에서는 바클레이 함장과 생존 장교, 병사들이 "가장 용감하게 행동했다"고 평가하면서도, 패배의 원인으로 미국의 수적 우위, 숙련된 선원의 부족, 그리고 전투 중 지휘관들의 조기 손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37]
7. 전투 순서
2 × 24 파운드 장포
6 × 12 파운드 장포
8 × 9 파운드 장포
1 × 24 파운드 캐러네이드
1 × 18 파운드 캐러네이드
2 × 4 파운드 장포
2 × 2 파운드 장포
2 × 12 파운드 캐러네이드
2 × 9 파운드 장포
12 × 24 파운드 캐러네이드
2 × 6 파운드 장포
10 × 12 파운드 캐러네이드
지휘는 중위 프레데릭 롤레트에게 넘어감
2 × 6 파운드 장포
약 215.00kg 캐러네이드
1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18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1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18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1 × 32 파운드 캐러네이드
약 566.08kg 캐러네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