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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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만림은 1633년에 태어나 1712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는 서얼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지방의 현감과 군수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상원군수 재직 시 백성을 위한 시를 지어 칭송받았으며, 보성군수 재임 시에는 토호 세력을 억제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여러 차례 지방관으로 근무하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사후 상원군, 보성군, 선천군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이만림은 1633년(인조 11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경서와 사서를 두루 익혔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충의위에서 복무하다 1670년(현종 11) 충훈부서사관을 거쳐 음서로 부사과를 지냈다.[1]
이만림은 서얼 출신으로, 당시 사회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관직에 올랐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
문서
그의 무과 합격자 기록에는 전력이 부사과만 등재되었다.
2. 생애
1673년(현종 14년) 무과 식년시(武科 式年試)에 갑과 2등으로 급제,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 장례 때 산릉도감(山陵都監) 영여위장(靈輿衛將)으로 참여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1]
1677년(숙종 3) 사천현감(泗川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자격 문제로 해임되었다.[1] 이후 장연 현감(長連縣監)을 지내다 호적 문제로 파직, 장단군에 도형 1년 반을 선고받았으나 1681년(숙종 7년) 왕명으로 풀려났다.[1]
이후 상원군수, 보성군수, 운산 군수(雲山郡守), 횡성 현감(橫城縣監), 홍원 현감(洪原縣監), 은산 현감(殷山縣監) 등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681년(숙종 7년) 상원군수로 있을 때 폐정을 개혁하고 백성을 안정시켰으며, 동락대에서 "태수가 백성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지 않으면, 동락이라는 대의 이름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시를 읊었다.[1] 1684년(숙종 10년) 보성군수 시절에는 공정하고 엄격한 행정으로 토호 세력을 억제하였다.[1]
1710년(숙종 36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712년(숙종 38년) 호위별장(扈衛別將)을 역임했다. 같은 해 경연에서 조태구가 그의 선정을 기려 다시 지방관으로 기용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상원군, 보성군, 선천군에 그의 선정비7가 세워졌다. 1712년(숙종 38) 9월 27일 사망했다.
2. 1. 생애 초반
1633년(인조 11년)에 태어났다. 고조부는 풍덕군수 이광윤이고, 증조부는 포천, 김화, 정읍, 회덕현감, 경산현령, 풍덕, 온양군수 등을 지내고 사후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와 의정부좌찬성에 거듭 추증된 이간이며, 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 증 병조판서 완원군 이경유이고, 아버지는 분충찬모정사공신 3등 가선대부 완계군 증 한성부판윤 이기축이고, 어머니는 그의 정실부인 단양우씨로, 절충장군 증 판결사 우종남의 딸이다. 효령대군의 8대손으로 의성군 이채의 7대손이다.
친형으로 가선대부 완림군 이만실과 이만식, 이만수 등이 있었고, 아버지 이기축의 서자들 중 이만영과 이만정은 그보다 나이가 연상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민하고 총명하여, 경서와 사서를 널리 익히고 문사로 명성이 높았다. 충의위에 입대하여 근무하다가 만료 후 다시 대충의위로 근무하던 중, 1670년(현종 11) 11월 29일 충훈부의 추천으로 파면된 김수장 대신 충훈부서사관이 되었다. 그 뒤 충훈부가낭청을 지냈고, 음서로 관직에 올라 부사과를 역임했다.[1]
2. 2. 무과 급제와 관직 생활
1673년(현종 14년) 부사과 재직 중 무과 식년시(武科 式年試)에 갑과(甲科) 2등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충훈부에서 충훈부 가낭청 임명 문제를 논의하며, 그가 충춘부가낭청(忠勳府假郞廳)이었으나 이제 과거에 급제하여 출신(出身)이 되었으므로, 그를 대신하여 충의위 김수장을 가낭청으로 임명할 것을 묻는 기사가 실려있다.[1]
1673년 4월 16일 무과에 갑과 중 제2등으로 급제하여 이조의 인사 때 특별히 절충장군(折衝)에 임명되고, 4월 18일 부호군에 임명되었다.[1] 1674년(현종 15) 3월 19일 인선왕후 사망 시 산릉도감(山陵都監)에 참여하여 영여위장(靈輿衛將)으로서 이돈오(李敦五)와 함께 영여를 지켰다. 그 공로로 그해 6월 29일 비망기에 상으로 상현궁(上弦弓) 1장(一張)을 하사받았다.[1] 그 뒤 그해 9월 숙종이 1672년 가을, 겨울에 직첩환수자, 1673년에 근무 성적이 낮아 포폄되어 해임된 자, 그 해 봄과 여름에 근무 성적 최하점 면직자들에게 직첩을 환급할 때 사용(司勇)직을 돌려받았다.[1] 그해 9월 24일 호군에 임명되었다.[1]
1674년(숙종 즉위) 10월 14일 봉상시봉사가 되고, 1677년(숙종 3) 9월 6일 사천현감(泗川縣監)에 임명되어 9월 8일 사은숙배 후 부임하였다.[1] 그러나 9월 10일 승정원에서 '이미 전에 자궁(資窮)이 되었는데 현감에 임명되었으며, 본시 천얼로서 이렇다 할 이력도 없는 인물이며, 제목(除目)에 오른 관료들은 1등급 아래 계급 이하이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이런 사람은 갈아야 되며 자목지임(字牧之任)에는 불가하다'며 그를 현감에서 체차할 것을 청하여, 숙종이 의계를 따라 해임하였다.[1] 9월 28일 다시 도성으로 올라와 호군에 임명되었다.[1]
2. 3. 지방관 생활
1679년(숙종 5년) 10월 13일 장연 현감(長連縣監)에 임명되어 10월 23일 사은숙배 후 부임하였다. 1680년(숙종 6년) 호적 점련(粘連)에 대한 일처리 잘못으로 황해도 관찰사가 형조에 보고하여 의금부에 체포되었고, 9월 6일 파직되었다. 의금부로부터 장단군에 도형 1년 반(徒刑一年半) 정배(定配)형을 받았다.
1681년(숙종 7년) 4월 10일 왕명으로 특별 방송(放送)되어 풀려났다. 이후 상원군수와 보성군수를 역임하였다.
1686년(숙종 12년) 1월 10일 부호군이 되었다가 1689년(숙종 15년) 7월 29일 운산 군수(雲山郡守)에 발령되고, 1691년(숙종 17) 윤 7월 26일 횡성 현감(橫城縣監)으로 발령되어 부임하였다.
1698년(숙종 24년) 8월 3일 홍원 현감(洪原縣監)이 되고, 1702년(숙종 28년) 1월 16일 부호군을 거쳐, 1703년(숙종 29년) 11월 1일 은산 현감(殷山縣監)에 임명되어 11월 26일 하직인사하고 부임하였다. 1706년(숙종 32년) 1월 11일 부호군에 임명되어 돌아왔다가 그해 4월 18일 비변사에서 작년도 각 도의 환상봉(還上捧) 징수 실적이 낮은 황해도 지방관의 하나로 지목되어 추고받았다.
2. 3. 1. 상원군수 시절
1681년(숙종 7년) 윤 6월 8일 상원군 군수에 임명되어 6월 28일 하직인사를 올리고 부임하였다. 상원군수로 재직할 때는 그릇된 폐정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케 했다. 백성들과 더불어 이 고을에 있는 동락대에 올라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태수가 백성과 더불어 굶주리고 배부름을 함께 하지 않으면, 대의 이름 동락은 누구를 위함인가(太守與民飢飽異, 臺名同樂爲誰人)."라는 시를 읊었다. 지방관 임기만료로 전직하게 되자, 상원군 백성들이 그의 유임을 청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그 소 중에도 이 글귀가 실렸다.[1] 1684년(숙종 10년) 보성군 군수로 전보되었다.
2. 3. 2. 보성군수 시절
1684년(숙종 10년) 보성 군수로 부임했을 때, 지역 토호들의 세력이 강고했으나, 이만림은 공평하고 엄정한 행정(治政)을 펼쳐 1년여 만에 토호들을 억제하였다.[1] 1708년(숙종 34년) 9월 12일 보성군수에 임명되어 10월 19일 하직인사 후 도임하였다.[1]
2. 3. 3. 그 외 지방관 시절
1681년(숙종 7년) 상원군수로 재직할 때 그릇된 폐정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케 했다. 백성들과 더불어 이 고을에 있는 동락대에 올라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태수가 백성과 더불어 굶주리고 배부름을 함께 하지 않으면, 대의 이름 동락은 누구를 위함인가(太守與民飢飽異, 臺名同樂爲誰人)."라는 시 한 구를 읊었다. 지방관 임기만료로 전직하게 되자, 상원군의 백성들이 그의 유임을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소 중에도 이 글귀가 실렸다.
1684년(숙종 10년) 보성군수로 부임했을 때, 지역 토호들의 세력이 강고했으나, 그의 부임 후 공평하고 엄정한 치정으로 불과 1년여 만에 극성을 부리던 토호들을 억제하였다.
2. 4. 생애 후반
1710년(숙종 36년) 3월 19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1712년(숙종 38년) 호위별장(扈衛別將)이 되었다.
1712년(숙종 38년) 9월 15일 경연 주강 시 동지경연사 조태구(趙泰耉)는 정사공신 완계군 이기축의 아들 이만림이 일찍이 무과로 발신, 여러 곳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상원군, 은산, 보성군 백성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는다며, 비록 수령의 임기는 지났으나 특별히 지방관직을 허용해줄 것을 청하였다. 조태구는 또 이만림이 공신의 자제로서 비록 나이는 많으나 근력은 쇠하지 않았다며 다시 지방관에 기용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특진관 박권(朴權)은 정사공신의 자손 중 이만림 뿐만 아니라, 전 남원부사 유명웅(柳命雄)은 정사공신 진천군 유경(晉川君柳䪷)의 아들이며, 수령으로 있을 때 뛰어난 치적을 쌓았지만 나이가 많아 수령으로 임명하지 못하고 녹봉을 받게 하는 것처럼, 공신을 추모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고 반박하였다. 상원군, 보성군, 선천군에 그의 선정비7가 세워졌다. 1712년(숙종 38) 9월 27일에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할아버지 이경유(李慶裕) 1560년 ~ 1620년 할머니 연일정씨(延日鄭氏) 정희석(延錫禧)의 딸, 자녀 없음, 이경유의 첫째 정실 할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 병절교위(秉節校尉) 박문좌(朴文佐)의 딸, 이경유의 둘째 정실 생조모 장흥고씨(長興高氏) 옥구현감 고언명(高彦命)의 서녀, ? ~ 1644년 아버지 이기축(李起築) 1589년 ~ 1645년 어머니 단양우씨(丹陽禹氏) 1605년 ~ 1698년, 절충장군 증 판결사 우종남(禹終男)의 딸, 강원도 춘천 출신 형 이만실(李萬實) ? ~ 1689년[2], 가선대부 완림군(完林君) 형 이만식(李萬植) 1624년 ~ 1679년 형 이만수(李萬樹) 1627년 ~ 1728년, 무과 급제 누이 전주이씨 매제 장상주(張相周) 참봉 역임 서모 이름 미상 아버지 이기축의 첩 이복 서형 이만영(李萬英) 이복 서형 이만정(李萬挺) 서모 동정월 정씨(洞庭月 鄭氏) 아버지 이기축의 첩, 평양 기생 또는 공주군 향리(鄕吏)의 딸, 충남 공주 출신 서모 이름 미상 노비 출신 얼여동생 전주이씨 얼매제 무생(戊生)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1633년 ~ 1691년, 판관 이응백(李應白)의 딸 아들 이동윤(李東潤) 1671년 ~ 1751년, 문무자 이옥의 조부 며느리 동래정씨(東萊鄭氏) 1669년 ~ 1743년, 정응상(鄭應祥)의 딸 며느리 창원황씨(昌原黃氏) 1699년 ~ 1771년, 황개(黃金+皆)의 딸 아들 이동한(李東漢) 아들 이동숙(李東淑) 1683년 ~ ?년 며느리 해남윤씨(海南尹氏) 윤직미(尹直美)의 딸, 윤선도(尹善道)의 손녀 아들 이동철(李東澈) 아들 이동옥(李東沃) 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위 신규(申珪) 평산인 외손자 신겸하(申謙夏) 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위 류중겸(柳重謙) 문화인, 현감, 지중추부사 류상(柳瑺)의 아들 외손자 류연(柳演)
4. 평가
참조
[2]
문서
상장등록(喪葬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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