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조 (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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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상조(1915년)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전쟁 당시 북한의 군인이었다. 경상남도 동래 출신으로,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으며, 중국 공산당에 가담하여 국공 내전에 참전했다. 한국 전쟁에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하여 휴전 회담 대표로 참여했으며, 이후 소련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56년 김일성 축출 시도에 연루되어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1989년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김일성의 남침 주도를 증언했다. 1996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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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조 (1915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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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상조 |
원어명 | 李相朝 |
출생일 | 1916년 3월 7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 |
사망일 | 1996년 8월 6일 |
사망지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
거주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
![]() | |
직업 | 군인, 정치인, 정부 관료 |
별명 | 김택명(金澤明) |
종교 | 무종교 |
소속 정당 | 조선로동당 |
경력 | |
주요 경력 |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 조선로동당 고문 겸 당무위원 군인 |
군 복무 | 인민군 지상군 중장 전역 (1954년) |
직책 |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1950년~1954년) |
직책 2 | 주소련 특명전권대사 (1955년~1957년) |
주석 | 김두봉 |
수상 | 김일성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군사 정보 | |
소속 | 조선인민군 |
충성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소속 정당 | 조선로동당 |
2. 생애
경상남도 동래군(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출신으로,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에서 최창익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1년 옌안으로 이동하여 마오쩌둥 계열에 합류하였다.[1]
1945년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가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조선인민군 중장 계급으로 정찰국장과 부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1]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이어진 휴전 회담에 북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3]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는 북한 측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맡았다.
연안파에 속했던 이상조는 김일성 중심의 권력 구조 속에서 입지가 좁아지자 외교관으로 전향하여 1955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였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최창익 등 연안파가 소련파와 함께 김일성 축출을 시도한 8월 종파 사건에 동조하였다.[6]
8월 종파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고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자, 조선로동당 중앙당의 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1956년 소련에 망명하였다.[6][7] 이는 북한 외교관 최초의 망명 사례였다. 망명 후 소련 민스크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1989년 9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한국 전쟁이 스탈린의 승인 하에 김일성이 주도한 남침이었음을 증언하였다.[9][2] 이 방문 기간 동안 고향인 부산과 서울을 찾았으며, 서울에서는 휴전 회담 이후 처음으로 백선엽과 만나기도 하였다.[8] 1992년에는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을 결성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의 퇴진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였다.[10] 1996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항일 무장 투쟁
1913년 또는 1915년 경상남도 동래군(現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만주 봉천에서 정미소와 농장을 경영하여 13세 때 중국 동북부로 이주하였다. 1930년대부터 중국 동북부 등지에서 항일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중산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김창만의 권유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방문하기도 했으나, 김구의 환영 연설이나 연령대가 높은 간부들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고, 당의 결정에 따라 중앙 육군 군관학교 성자분교 특별훈련반에 입학하여 김홍일의 지도를 받았다. 1938년 8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10월부터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항일군정대학 제5기를 졸업했으며, 1940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41년에는 최창익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옌안으로 이동하여 마오쩌둥 계열에 합류하였다. 1942년부터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말부터 북만주 지역에서 지하 공작 활동을 전개했다. 1943년 5월에는 바옌 현에서 조선독립동맹 제12지부를, 1945년 8월 20일에는 하얼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 특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9월에는 하얼빈 보안 총대 산하에 조선 독립 대대를 창설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이 부대가 조선의용군 간부들과 합쳐져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되자 지대장을 맡았다.
2. 2. 북한 정권 수립 참여와 한국전쟁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북한으로 들어가 북로당 인민군에 합류하였다. 1946년 6월 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요청으로 귀국하여[10]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였다. 조선로동당 간부 부장을 맡았으나, 1948년 반소련 성향으로 여겨져 상업성 관리국장으로 좌천되기도 했다.[10] 1950년에는 상공 부상으로 임명되었다.[10]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에 소집되어 중장 계급으로 부총참모장 겸 정찰국장을 맡았다.[10] 그는 소집된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선에 보내는 임무를 맡아, 2개월간 3개 군단을 조직하여 약 10만 명을 전선으로 보냈다.[10] 이후 정찰국장 임무에 집중하였다.[10]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말까지 이어진 휴전 회담에 북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3][10] 남일, 장평산과 함께 북한 대표로 활동하며[3] 회담에 꾸준히 참석했다. 휴전 회담 당시 대한민국 육군 대표로 나온 백선엽에게 "미제의 개"라고 적힌 메모를 보여주었다는 일화가 있으며,[4][5] 근엄함을 보이기 위해 얼굴에 파리가 앉아도 한 시간 넘게 험악한 표정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4][5] 1953년 4월 17일에는 판문점에서 북한 대표로 부상 포로 교환 협정에 서명하였다.[1]
1953년 7월 27일 한국휴전협정 체결 이후 북한 측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임명되었으며, 개성시 당 위원장도 겸임하였다.[10]

2. 3. 소련 주재 대사 부임과 망명
연안파에 가까웠던 이상조는 김일성의 빨치산파가 장악한 군부에서 입지가 좁아져 외교관으로 전향하게 된다. 1955년 8월, 당시 북한의 주요 우방국 중 하나였던 소련 주재 특명전권대사로 모스크바에 부임했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소련으로부터 공급받은 무기 대금 상환 문제를 교섭하여 군사 원조를 무상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으며, 북한의 주요 수출품이던 모나자이트 수입을 아나스타스 미코얀 제1부수상과 직접 담판하여 성사시키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영향을 받은 최창익 등 연안파가 소련파와 함께 해외 순방 중이던 김일성 축출을 시도했을 때(8월 종파 사건), 이상조는 이에 동조했다.[6] 그는 이전부터 김일성에 대한 개인 우상 숭배에 비판적인 입장이었으며,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에 북한 내 김일성 독재 체제의 실상을 알리고 조선로동당에 압력을 행사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김일성은 해외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여 8월 당 대회에서 반격에 성공했고, 연안파의 기도는 무산되었다. 이 사건 이후 북한 내 연안파와 소련파는 대거 숙청되었고, 조선로동당 중앙당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은 이상조는 귀국하지 않고 1956년 소련에 망명을 신청했다.[6][7] 이는 북한 외교관 최초의 망명 사례였다.
망명 후에는 소련 민스크의 민스크 대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일본 외교사를 전공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 9월에는 대한민국 서울을 방문하여 고향인 부산을 찾고, 휴전 회담 이후 처음으로 백선엽을 만나기도 했다.[8] 이 방문에서 그는 한국 전쟁이 스탈린의 승인 하에 김일성이 주도한 남침이었음을 증언하였다.[9][2] 1992년 1월에는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을 결성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의 퇴진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였다.[10] 이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지내다가 1998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2. 4. 망명 이후의 삶과 대한민국 귀순
1956년 8월 종파 사건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당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았으나, 이상조는 북한으로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망명을 신청했다.[6][7] 이는 북한 외교관의 첫 망명 사례였다. 망명 후에는 소련 민스크의 벨라루스 국립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일본 외교사를 전공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989년 8월 대한민국으로 이주하였고, 같은 해 9월 서울 방문 중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 전쟁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음을 증언했다.[9][2] 대한민국 방문 기간 동안 고향인 부산과 서울을 찾았으며, 서울에서는 휴전 회담 당시 북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만났던 백선엽과 재회하기도 했다.[8]
1992년 1월에는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조선 민주 통일 구국 전선을 결성하여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활동을 펼쳤다.[10] 이후 1996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2. 5. 가족 관계
아버지는 만주 봉천에서 정미소와 농장을 경영했으며, 이로 인해 이상조는 13세 때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동생은 니혼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평양에서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56년 8월 종파 사건 이후 이상조가 소련으로 망명하자, 김일성 정권은 본보기 차원에서 동생과 그의 가족들을 처형한 것으로 전해진다.
3. 평가
휴전 회담 당시 얼굴에 파리가 앉아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1989년 9월 12일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에서 그는 어릴 적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으로 공산주의를 긍정하게 된 것이 공산주의자로서의 시작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공산주의를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진리"로 믿었던 과거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반드시 나쁘게 보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사쿠라이 요시코가 인터뷰했을 때, 그는 백발을 단정히 빗어 넘긴 온화한 모습이었으며, 귀가 어두운 것을 제외하면 74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기억력과 말투가 명확했다. 수십 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일본어임에도 불구하고 3시간 넘는 인터뷰 동안 거의 막힘없이 답변했다.
그의 동생은 니혼 대학에서 공부한 후 평양에서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으나, 이상조가 소련으로 망명하자 본보기로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여전히 공산주의가 자유주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 "그런 질문은 난센스입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는 뛰어나게 과학적이며, 제대로 실천하면 이만한 이데올로기는 없습니다. 우리 혁명가들은 어떻게 하면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그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지만, 공산주의 체제에서야말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만 공산당 일당 독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대할 권리를 인정한 위에 공산주의 체제여야 합니다."
4. 참고 문헌
- 째르치즈스키, 표도르(이휘성). (2023). 〈리상조, 수령과 싸운 대사〉. 《북한과 소련: 잊혀진 인물과 에피소드》 (pp. 404-425). 파주: 한울아카데미. ISBN 9788946074668.
- Tertitskiy, Fyodoreng. (2024년 6월 14일). 〈이상조: 지도자에게 도전한 대사〉. 《Forgotten Political Elites of North Korea: The Price of Failing the Leader》 (pp. 180-198). 에빙던온템스: 루틀리지. ISBN 9781032745473.
- 이상조, 사쿠라이 료코. (1990년 4월). 지금 처음 밝히는 한국 전쟁의 진실. 《문예춘추》, 68(5), 168-178. 문예춘추.
- 서동만. (1995). 《북한에서의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 1945-1961》.
- 이해연. (2009). 《전후의 "만주"와 조선인 사회 월경·주변·정체성》. 오차노미즈 서방. ISBN 978-4-27-500842-8.
- 김학준 (저), 이영 (역). (1997). 《북조선 50년사 - "김일성 왕조"의 꿈과 현실》. 아사히 신문사. ISBN 4-02-257170-5.
- 이기봉 (편저). (1989). 《증언 - 전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 원일정보.
- [http://kr.chinajilin.com.cn/cxz/content/2011-09/27/content_66366.htm 영원한 기념비(3) - 북만주의 조선의용군 제3지대]. 《길림신문》. 2011년 9월 27일. 2015년 5월 9일에 확인함.
-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7&idx=3790 이상조]. 노동자의 책. 2015년 5월 9일에 확인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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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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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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