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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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월 종파 사건은 1956년 8월, 김일성이 부재한 틈을 타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의 개인 숭배와 권력 집중을 비판하며 일어난 사건이다. 김일성은 숙청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했으며, 이는 북한의 1인 독재 체제 확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불러왔으나, 김일성은 결국 숙청을 강행하며 독자 노선을 굳혔고, 한국 전쟁 이후 남북 간의 이념 대립을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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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종파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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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8월 종파 사건 |
발생 시기 | 1956년 |
관련 국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원인 | 김일성 개인숭배 강화에 대한 반발 |
결과 | 김일성 권력 강화, 반대파 숙청 및 연안파, 소련파의 몰락 |
관련 인물 | 김일성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김두봉 |
배경 | |
시대적 배경 | 한국 전쟁 이후 북한 내부 권력 투쟁 심화 |
김일성 정책 | 김일성 주체사상 확립 및 권력 집중 시도 |
반대 세력 | 연안파, 소련파 등 김일성 노선에 비판적인 세력 존재 |
경과 | |
사건 발발 | 1956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정책 비판 제기 |
비판 내용 | 김일성 개인숭배 심화, 경제 정책 실패 등 |
김일성 대응 | 비판 세력을 종파 분자로 규정하고 숙청 개시 |
숙청 과정 | 공개 비판, 체포, 처형, 강제 이주 등 가혹한 처벌 |
주요 숙청 대상 |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김두봉 등 |
영향 | |
김일성 권력 강화 | 반대 세력 제거를 통해 김일성 독재 체제 강화 |
주체사상 확립 | 김일성 주체사상을 유일 이념으로 확립 |
대외 관계 | 소련, 중국과의 관계 악화 |
북한 사회 변화 | 사회 통제 강화, 개인숭배 심화 |
평가 | |
긍정적 평가 | 북한 내부 권력 안정화에 기여 (주관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민주주의 후퇴, 개인숭배 심화, 인권 탄압 |
기타 | |
관련 사건 | 갑산파 사건 |
2. 배경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작하면서,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로동당 내에서는 김일성의 개인 숭배와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를 앞두고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흐루쇼프는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소환하여 질책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새로운 정통성에 맞추고자 했다. 김일성이 부재한 동안, 박창옥, 최창익 등 연안파 지도자들은 김일성을 공격하고 그의 지도 방식을 비판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 조장", "집단 지도 원칙 왜곡", "사회주의 합법성 왜곡" 등을 문제 삼았다.[4]
같은 해 6월, 김일성은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을 순방하며 경제 원조를 요청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의 독재 체제를 수정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설이 있다.
김일성은 정변을 감지하고 즉시 귀국했다. 쿠데타 주모자들이 국무총리 대리였던 최용건(만주파)에게 협력을 요청했으나 최용건이 김일성에게 이를 알렸다는 설, 소련 대사관을 통해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7월 31일, 노동당 중앙 간부 회의에서 박금철과 박정애는 김일성의 개인 숭배가 존재함을 인정했지만, 스탈린 숭배처럼 위험한 수준은 아니며 이미 시정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는 8월 초 조선로동당 내부 정세 안정을 위한 지시를 내렸다. 이는 포즈난 폭동 등 동유럽에서 발생한 사건들로 인해 위기와 동란이 재발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은 공동으로 내정 간섭을 하게 되었다. 9월 14일,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평양에 도착하여[5] 8월 전체회의에서 당적을 박탈당한 소련파·연안파의 제명 처분을 철회시켰다.
2. 1. 국내적 배경
해방 이후 북한 권력은 만주파,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 등 여러 세력이 분점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했지만,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와 연안파, 소련파 등은 김일성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6] 특히 한국 전쟁의 실패 책임론이 대두되면서 김일성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다.1948년 9월 9일 수립된 북한은 집단지도체제의 정권이었다. 당시 북한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러 분파들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 만주파의 4개 계파였다.
그 중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만주파의 수장이었다. 만주파는 다른 계파에 비하여 교육수준이 낮고 국가적 당사업 및 정치적 경험이 없었다. 이에 비해 남로당파의 수장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었고,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한반도에서 최고의 사상가였다. 게다가 한반도 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정치적 명분도 쥐고 있어, 사회주의조선의 지도자로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은 소련의 말을 잘 듣는 인물을 위성국가의 수장으로 삼았는데, 그 결과 김일성이 북한의 수상으로 선택되었다.
소련을 등에 업고 수상이 된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은 필연적이었고, 이 갈등은 한국 전쟁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크게 역전되며 극대화되었다. 김일성은 승전 실패의 책임을 박헌영에게 몰았다. 1953년 3월,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미제 스파이'라는 명분을 만들어 체포했다.[6] 또한 연안파의 거두였던 무정을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숙청했다. 전후 김일성은 박헌영이 속했던 국내파를 대거 축출했고, 김일성을 필두로 한 만주파의 권력은 날로 커져갔다.
이 무렵 전후복구와 관련해 김일성은 강경하게 중공업 우선의 경제정책을 주장했고, 연안파, 소련파 등은 경공업 우선의 경제정책을 주장하며 갈등을 빚고 있었다. 연안파, 소련파 등은 이전부터 김일성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1955년 12월,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박헌영에게 끝내 사형이 선고되며 북한의 지도부 사이에서는 김일성에게 당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대두되었다.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전에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예비 신호를 보냈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로 요제프 스탈린을 비난하고 탈스탈린화를 시작하면서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다. 소련 블록 전역에서 각국 공산당은 개인 숭배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고, 스탈린을 본뜬 서기장들은 동유럽 전역에서 축출되었다.
김일성은 흐루쇼프에게 질책을 받기 위해 1956년 여름 6주 동안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는데, 흐루쇼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새로운 정통성에 맞추고자 했다. 김일성이 부재한 동안, 박창옥, 최창익과 다른 연안파 지도자들은 김일성을 다음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공격하고 그의 지도 방법 "수정" 실패, 개인 숭배 조장 등에 대해 비판하는 계획을 세웠다.
1956년 2월 소비에트 연방(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라고 불리는 비밀 보고를 통해 요시프 스탈린 시대의 여러 정책을 개인 숭배 비판 형태로 비판했다. 이 일은 소련의 위성국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같은 해 4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소련에서 참석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흐루쇼프의 노선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같은 해 6월, 김일성은 소련·동독·루마니아·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알바니아·몽골을 순방하며 경제 원조를 얻으려 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사이에 국내에서는 앞서 언급한 스탈린 격하 운동을 받아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의 독재 체제를 수정하기 위해 쿠데타를 계획했다고 전해진다.
2. 2. 국제적 배경
1956년 3월,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스탈린 사후 그의 독재와 개인숭배, 숙청과 학살을 비판하는 움직임이었다. 흐루시초프는 소련공산당 제20차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의 잘못을 비판하는 비밀연설을 했고, 이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4]스탈린 격하의 주요 내용 중 하나인 개인숭배 비판은 김일성의 독주를 견제할 명분으로 북한 지도자들에게 고무적이었다. 특히 박헌영 숙청에 대한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우려가 커지면서,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의 권력을 무너뜨릴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전에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로 요제프 스탈린을 비판하고 탈스탈린화를 시작하면서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다. 소련 블록 전역에서 각국 공산당은 개인 숭배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고, 동유럽 전역에서 스탈린을 본뜬 서기장들은 축출되었다.
김일성은 1956년 여름 6주 동안 모스크바에 소환되어 흐루쇼프에게 질책을 받았다. 흐루쇼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새로운 정통성에 맞추고자 했다. 김일성이 부재한 동안, 박창옥, 최창익과 다른 연안파 지도자들은 김일성을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공격하고 그의 지도 방법 "수정" 실패, 개인 숭배 조장, "집단 지도 원칙"의 왜곡, "사회주의 합법성의 왜곡" (즉, 임의 체포와 처형 사용)에 대해 비판하는 계획을 세웠다.
1956년 2월 소비에트 연방(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라고 불리는 비밀 보고를 통해 요시프 스탈린 시대의 다양한 음모를 폭로함으로써 스탈린 시대의 여러 정책을 개인 숭배 비판 형태로 비판했다. 이 일은 소련의 위성국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6월, 김일성은 소련·동독·루마니아·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알바니아·몽골을 순방하며 경제 원조를 얻으려 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사이에 국내에서는 앞서 언급한 스탈린 격하 운동을 받아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의 독재 체제를 수정하기 위해 쿠데타를 계획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은 정변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즉시 귀국했다. 김일성이 감지한 경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쿠데타 주모자들이 김일성이 부재중인 동안의 국무총리 대리인 최용건(만주파)에게 협력을 요청하자 최용건이 계획의 존재를 김일성에게 통보했다는 설, 쿠데타 주모자들이 소련 대사관에 협력을 요청하자 소련 대사관에서 최용건을 거쳐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7월 31일, 노동당 중앙 간부 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박금철과 박정애는 김일성의 개인 숭배가 존재하고, 간부 임명과 해임에 대해 일부 과오를 범했다고 인정했지만, 김일성에 대한 숭배는 스탈린 숭배처럼 위험 수위까지 발전한 것은 아니며, 당은 이미 과오를 시정하는 조치를 검토하고 있으므로, 개인 숭배 문제는 더 이상 토론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모스크바는 4월부터 5월에 걸쳐 소련의 신노선에 대한 김일성의 표리부동에 극도의 불만을 나타냈지만, 8월 초에는 노동당의 내부 정세를 안정시키는 다양한 조치에 대해 명확한 지시를 표명했다. 이는 포즈난 폭동이나 라코시 마차시의 은퇴 등 불온한 사건이 이어지고, 다시 위기와 동란이 발생할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공동으로 이례적인 내정 간섭을 하게 되었다. 9월 14일,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평양에 도착했고[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다시 전체회의를 개최시켜, 8월 전체회의에서 당적을 박탈당한 소련파·연안파의 제명 처분을 철회시켰다.
3. 전개
1956년 4월, 스탈린 격하 운동 직후 소련파 및 연안파는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에게 개인숭배에 대한 자기비판을 요구하려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개인숭배가 박헌영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며 이를 차단했다. 소련 공산당은 당대회를 정식 대회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압박하며 소련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1956년 8월,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을 간 사이, 연안파 부주석 최창익 등은 김일성을 비판하여 주석직에서 물러나게 하려 했다. 이들은 평양예술극장에서 열릴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하고 당의 민주적 집단지도체계를 확립하려 했으나, 이 소식은 최용건 등 만주파에 들어갔다.
서휘는 연안파가 최용건 등 당내 명망 높은 인물도 비판할 계획을 가진 것에 대해, 당 핵심 간부들의 불만이 컸던 점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이 계획을 알고 전원회의를 연기했다. 8월 30일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은 김일성의 권력 집중과 북한 주민의 기아를 무시한 산업화를 비판했다. 김일성 지지자들은 연설을 방해하고 비난하여 발언을 거의 들을 수 없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변화를 약속하며 공격을 무력화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위원회는 김일성을 지지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는 투표를 했다.
8월 전원회의 이후 숙청을 피해 연안파 지도자 일부는 중국으로 도주했고, 소련파와 연안파 지지자들은 체포되었다. 김두봉은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1958년 "음모 배후" 혐의로 숙청되어 "강제 실종"되었고, 처형 또는 옥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1956년 9월, 소련-중국 공동 대표단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에게 숙청 중단과 연안파, 소련파 지도자 복귀를 지시했다. 9월 23일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8월 반대파 지도자들을 사면, 복권했지만, 1957년 숙청이 재개되어 1958년까지 연안파는 사라졌다. 탄압에 직면한 소련파는 소련으로 돌아갔다.
1959년까지 숙청으로 최고인민회의 의석 1/4 이상이 공석이 되어, 1959년 북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조직되어야 했다.[2]
1961년까지 남은 파벌은 김일성 빨치산파와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당원뿐이었다. 1961년 중앙위원회 68명 중 소련파 2명, 연안파 3명, 국내파 3명만 남았고, 이들도 1960년대 후반 거의 숙청되었다.
소련파와 연안파가 김일성 제거에 실패한 이유는, 1950년 이후 당원이 된 젊은 당원들이 이들을 외세 영향 받은 "외국인"으로 보고 김일성을 진정한 한국인으로 본 민족주의적 관점 때문일 수 있다.
서대숙에 따르면, "[김일성]의 권력 장악 투쟁은 완료되었다... 더 이상 지위에 도전할 파벌은 없었고, 처음으로 북한 점령 외국 무력도 없었다."[3] 김일성은 남로당 세력 소멸, 연안파, 소련파 간부 타격, 주체사상 확립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제3차 당대회와 중앙총회에서 새 중앙지도자가 선출, 위원장은 김일성, 상무위원 11명 중 5명이 만주파였다.
1956년 2월 소비에트 연방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요시프 스탈린 시대 정책을 개인 숭배 비판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소련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 노선 협력을 요구했다.
같은 해 6월 김일성은 동유럽 순방으로 경제 원조를 얻으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사이 국내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을 받아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 독재 체제 수정 쿠데타를 계획했다 전해진다.
김일성 부재중, 6월 8일 최창익은 이바노프 대사와 회담, 7월 14일 연안파 리필규는 피트로프 임시대리대사와 회담하여 김일성 개인 숭배 비판을 전했다.
김일성은 정변 감지 후 즉시 귀국했다. 김일성 감지 경위는 여러 설이 있다. 쿠데타 주모자들이 국무총리 대리 최용건(만주파)에게 협력 요청, 최용건이 김일성에게 통보했다는 설, 소련 대사관 통해 최용건 거쳐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는 설 등이다.
7월 24일, 박창옥은 남일에게 중앙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지도 방법과 개인 숭배 규탄을 알리고 합류를 설득했다. 박창옥, 최창익, 김승화는 소련 대사관 필라토프 참사관에게 김일성 비판 준비를 보고했다.
반대파 활동은 비밀이 없어, 소련 대사관 보고, 지지 구하며 유세, 반김일성 세력 결집했다. 김일성과 지지자들은 더 빈번하게 소련 대사관과 접촉했다.
7월 31일, 노동당 중앙 간부 회의에서 박금철, 박정애는 김일성 개인 숭배 존재, 간부 임명, 해임 과오 인정했지만, 스탈린 숭배처럼 위험 수준 아니며, 당은 과오 시정 조치 검토 중이므로, 개인 숭배 문제 토론 필요 없다 말했다.
모스크바는 8월 초, 노동당 내부 정세 안정 조치 지시했다. 포즈난 폭동, 라코시 마차시 은퇴 등 불온 사건으로 위기, 동란 발생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8월 13일, 피트로프는 김일성에게 소련 공산당 중앙 서한 내용 전달했다. "당내 민주는 당 훼손, 규칙 약화, 파괴 목적 도구로 사용 불가, 당 지도층 및 기관, 멤버 불신감 전파 이용 불가" 내용에 김일성은 만족, 당내 서한 내용 전달, 정치 투쟁 주도권 잡았다.
8월 18일, 김일성 중앙상무위원회 소집, 소련 공산당 중앙 서한 설명했다. 최창익 반발, 김두봉은 특별회의 소집, 당내 문제 토론 요청했다.
8월 21~23일, 당내 상황 토론 중앙상무위원회 회의 열렸다. 김일성 개막 인사 후, 최창익은 당내 개인 숭배 현상, 집단 지도, 당내 민주 부족 지적했다. 김일성 지지자들은 최창익 반론, 비판했다. 회의 마지막 날, 남일은 최창익 비판, 김두봉은 최창익 직무 해임 제안했다. 회의는 8월 30일 중앙 전원회의 소집 결정했다.
국가 안전 부문 "경찰 수단" 사용, 관련자 심문, 박의완은 소련 대사관에 보고했다. 소련 대사관은 김일성 반대파 과격 행동보다, 김일성 심한 수단 사용 우려했다.
김일성 귀국 후 8월 30일~8월 3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열렸다. 무역상 윤공흠은 당내 개인 숭배 등 문제 폭로, 김일성 등 지목 비판, 김일성 개인 숭배 문제 전 당 토론 제안했다. 윤 발언 중단, 김일성은 반당 분자, 반혁명 분자 발언 기회 줄 필요 없다 제기, 투표에서 대다수 찬성했다.
대회 휴식 시간, 서휘, 윤공흠, 리필규는 귀가, 전화선 끊김 확인, 위기 느껴 문화성 부상 김강 만나 상의, 30일 밤, 군용차로 중조 국경 압록강 대교 향했다. 국경 넘을 때 중국 국경 검문소에 막혀 신분 밝혔다. 병사는 상급 기관 보고, 일행 베이징으로 보냈다. 저우언라이, 뤄루이칭 만나 보고 청취했다.
휴식 후 회의, 윤 당적 박탈 결의, 반대파 규탄, 발언 기회 없었다. 김일성 총괄 발언, 최창익, 박창옥 처분 제안, 찬동 얻었다. 31일 회의,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 분파, 음모 활동" 결의 채택되었다.
회의 후, 국가 전체 대규모 수색, 체포, 탄압했다. 검찰 기관은 최창익 등 죄상 증거 찾기 시작, 반대파 간부 특권 박탈, 가족 경찰 감시했다. 대학 대규모 사상 검거, 김일성종합대학 당 위원장 홍락웅 중국 망명, 교수, 학자 비밀경찰 연행, 행방불명되었다.
중국은 망명한 서휘, 소련은 주소련 대사 리상조 서한으로 8월 종파 사건 진상 알았다. 소련 공산당 중앙 간부회는 사건 심각, 소련, 중국 공산당 중앙 함께 북한 지도자 의견 교환, 비판, 제안해야 한다 했다. 9월 14일, 소련 아나스타스 미코얀 대표단,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 참석 위해 베이징 도착했다. 소련 대표단, 중국 지도자 회담, 김일성 과오 시정, 조선 정세 안정 위해 중소 양국 공동 평양 대표단 파견 결정했다. 소련·중화인민공화국 이례적 내정 간섭했다. 9월 14일, 미코얀,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 평양 도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 전체회의 개최, 8월 전체회의 당적 박탈 소련파·연안파 제명 처분 철회시켰다.[5]
3. 1. 김일성 비판 시도
1956년 8월, 평양예술극장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의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와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7] 윤공흠은 김일성이 "경찰 정권"을 만들었다고 비난하며, 당내 개인 숭배 등 심각한 문제들을 지적하고 김일성, 김창만, 한상두, 박금철, 박정애, 리일경 등을 비판했다.[7]그러나 전 북한 내무성 부장 강상호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 지지자들은 사전에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준비했다. 이들은 윤공흠의 발언이 시작되자 "반당종파분자"라고 외치며 발언을 방해했고, 결국 윤공흠은 발언을 중단해야 했다.[7] 김일성은 "반당 분자와 반혁명 분자에게 계속 발언할 기회를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고, 대다수가 이에 찬성하여 윤공흠의 발언 기회는 박탈되었다.[7]
3. 2. 김일성의 반격과 숙청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자 즉시 귀국하여 자신에게 반기를 든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7] 1956년 8월 30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일성은 반대파를 '반당종파분자'로 비판하며, 최창익, 박창옥 등에 대한 처분을 제안했고, 회의는 만장일치로 이를 승인하였다. 회의 다음 날인 8월 31일,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 동지의 분파와 음모 활동"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었고, 이들은 당으로부터 제명되고 모든 당내 직무에서 해임되었으며, 추가 조사가 결정되었다.전체회의 이후, 북한 전역에서 대규모 수색, 체포 및 가혹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박창옥과 최창익은 해임된 후 각각 동해안의 목재 가공 공장과 양돈장으로 추방되었고, 주소련 대사 리상조는 영국 첩보 기관과 관련이 있다는 죄목으로 소환 명령을 받았다. 많은 관련자들이 체포, 투옥, 처형되었으며, 이들의 가족들 또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4. 결과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이 정적과 견제 세력을 숙청하고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사건이다. 김일성은 1956년 9월 소련과 중국의 압력으로 잠시 숙청을 중단하고 일부 인사를 복권시키는 듯했으나, 이들이 떠나자 다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2] 이 과정에서 최창익, 박창옥, 김두봉 등 주요 반대파 인사들이 제거되거나 추방되었다.[3]
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숙청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김일성은 자신의 경제 발전 전략을 관철할 수 있게 되었다. 1959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석의 4분의 1 이상이 공석이 될 정도로 광범위한 숙청이 이루어져 1959년 북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실시되기도 했다.[5]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내정 간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소련과 중국의 영향을 배제하면서도 양국과의 군사 동맹을 통해 안보를 유지하는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8월 종파사건의 결과, 연안파와 소련파 (조선)는 몰락했으며, 김일성의 1인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4. 1. 김일성 1인 지배 체제 확립
8월 종파사건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김일성은 1956년 9월, 소련의 미코얀 부수상과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9월 전원회의에서 8월 전원회의의 결정이 성급했다며 윤공흠 등을 복당시키는 듯 했다.[2] 그러나 이들이 떠나자, 김일성은 본격적으로 반대파 숙청을 추진, '8월 종파사건' 관련자들을 색출하고 당증 교환사업을 통한 사상 점검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최창익, 박창옥, 김두봉, 오기성 등 반대파 인사들이 모두 제거되거나 추방되었다.[3]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숙청이 마무리되면서, 김일성은 자신의 '중공업 우선, 경공업·농업 동시 발전' 전략을 관철하게 되었다. 이후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유일 지배 체제가 강화되었고, 개인 숭배와 독재 정치가 심화되었다.[4] 1959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석의 4분의 1 이상이 공석이 될 정도로 숙청이 이루어져, 1959년 북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실시되기도 했다.[5] 1961년까지 김일성에게 남은 유일한 파벌은 자신의 빨치산파와 그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뿐이었다.
4. 2. 연안파와 소련파의 몰락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이들은 '반당종파분자'로 낙인찍혀 숙청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2]김일성은 8월 30일부터 8월 31일까지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에 대한 처분을 제안했고, 이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다음 날 회의에서는 이들의 죄상을 열거하고 당에서 제명, 모든 당내 직무 해임, 추가 조사를 결정하는 결의가 채택되었다.[4] 회의 후, 북한은 대대적인 수색과 체포, 탄압에 들어갔다.[5]
최창익과 박창옥은 해임 후 각각 동해안의 목재 가공 공장과 양돈장으로 추방되었고, 주소련 대사 리상조는 소환 명령을 받았다.[5] 김두봉은 1958년에 숙청되었는데, 권력에서 제거된 후 "강제 실종"되었으며, 처형되거나 옥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1959년까지 숙청이 계속되어 최고인민회의 의석의 4분의 1 이상이 공석이 되었기 때문에, 1959년 북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그해 7월에 조직되어야 했다.
1961년 중앙위원회에는 총 68명의 중앙위원회 구성원 중 소련파 2명, 연안파 3명, 국내파 3명만 남아 있었다. 이들은 김일성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했고 신뢰를 받았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 이들조차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4. 3. 국제 관계 악화
8월 종파사건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56년 9월, 소련과 중국은 공동 대표단을 평양에 파견하여 김일성에게 숙청 중단과 연안파 및 소련파 지도자 복귀를 요구했다.[5] 같은 해 9월 23일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8월 반대파 지도자들을 공식 사면하고 복권했지만, 1957년에 숙청이 재개되었다.[5]소련 공산당 중앙 간부회는 8월 종파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소련과 중국이 함께 북한 지도자와 의견을 교환하고 비판 및 제안을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1956년 9월 14일, 소련의 아나스타스 미코얀 제1부수상과 펑더화이 중국 국방부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에게 과오 시정을 요구했다. 이는 이례적인 내정 간섭이었다.
그러나 1956년 10월 헝가리, 폴란드에서 위기가 발생하면서 중소 양국의 관심이 유럽으로 쏠렸고, 김일성은 이를 틈타 반대파 숙청을 재개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영향력을 경계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신호를 보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자 노선을 강화했다. 그는 소련과 중국의 영향을 배제하면서도 조소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과 중조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통해 군사 동맹을 맺어 중소와의 결정적인 대립을 피하는 방식으로 독자 노선을 구축했다.
5. 평가와 비판
8월 종파사건에 대한 평가는 사건의 성격과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남로당 세력을 제거하고,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들을 요직에서 축출했다. 이와 동시에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주체사상 확립을 내세워 이념에 의한 결정권을 장악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은 소련의 위성국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 노선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김일성이 경제 원조를 요청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이, 국내에서는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의 독재 체제를 수정하기 위해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후 연안파의 서휘, 윤공흠, 최창익[4], 소련파의 박창옥, 김승화, 박의완 등이 중심 인물이었음이 밝혀졌다.
김일성은 정변을 감지하고 즉시 귀국했다. 쿠데타 주모자들이 국무총리 대리 최용건에게 협력을 요청하자 최용건이 김일성에게 알렸다는 설, 소련 대사관에 협력을 요청하자 소련 대사관에서 최용건을 거쳐 김일성에게 전달했다는 설 등이 있다.
김일성은 8월 30일부터 31일까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반대파를 숙청했다. 이 회의에서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를 비판했지만 발언이 중단되었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서휘, 윤공흠, 리필규는 중국으로 망명했고, 최창익과 박창옥 등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중국과 소련의 내정 간섭으로 8월 전체회의의 결정이 번복되기도 했다.[5]
5. 1. 부정적 평가 (대한민국 및 국제 사회)
8월 종파사건은 대한민국과 국제 사회에서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 사건은 김일성이 권력 투쟁 과정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 비민주적인 수단으로 간주된다.[4]특히, 이 사건은 남로당, 연안파, 소련파 등 김일성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주체사상을 확립하여 권력을 공고히 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동구권에서 발생한 민주화 요구와 포즈난 폭동 등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과 비교되면서, 김일성의 독재 체제 강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더욱 강화한다.[5]
참조
[1]
서적
Origins of North Korea's Juche: Colonialism, War, and Development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
웹사이트
1959: Secret elections in North Korea
http://www.dailynk.c[...]
2017-09-19
[3]
서적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4]
뉴스
「北朝鮮現代史の理解のため、粛清された人物の研究を」
https://megalodon.jp[...]
朝鮮日報
2009-03-08
[5]
서적
北朝鮮―変貌を続ける独裁国家
中公新書
[6]
뉴스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6-24
[7]
뉴스
1958년 북한 모스크바 유학생 ‘집단 망명’ 사건, 그 후…
https://news.naver.c[...]
한겨레
201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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