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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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언 커티스는 1956년 랭커셔주에서 태어나 체셔주에서 성장한 영국의 음악가로, 1970년대 후반 영국 사회의 불안과 절망을 표현하며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은 조이 디비전의 보컬이자 작사가였다. 그는 1976년 버나드 섬너, 피터 훅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으며, 특유의 어색한 춤과 우울한 가사로 유명해졌다. 1978년부터 뇌전증 증세를 겪었고, 이는 공연과 투어의 압박으로 악화되었다. 1980년, 그는 23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죽음 이후 뉴 오더가 결성되었으며, 커티스는 사후에도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의 삶과 음악은 영화와 책으로 재조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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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커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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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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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언 케빈 커티스 |
출생일 | 1956년 7월 15일 |
출생지 | 랭커셔주스트랫퍼드, 잉글랜드 |
사망일 | 1980년 5월 18일 |
사망지 | 체셔주 매클즈필드, 잉글랜드 |
직업 | 가수, 작곡가, 음악가 |
악기 | 보컬, 기타, 멜로디카, 신시사이저 |
활동 기간 | 1976년 – 1980년 |
레이블 | 팩토리 |
관련 그룹 | 조이 디비전 |
웹사이트 | 조이 디비전 공식 웹사이트 |
음악 스타일 | |
장르 | 고딕 록, 포스트 펑크 |
2. 유년 시절 및 초기 생애
이언 케빈 커티스는 1956년 7월 15일 랭커셔주 스트렛퍼드의 메모리얼 병원에서 태어나 체셔주 메이클즈필드의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자랐다.[124][5] 그는 도린과 케빈 커티스의 두 자녀 중 첫째였다.[6]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지적인 아이였으며, 특히 시에 재능을 보였다.[7]
11살 때 킹스 스쿨에 입학했으며,[7] 이 학교는 당시 메이클즈필드의 남자 문법 학교였다. 이곳에서 그는 철학, 문학, 그리고 톰 건과 같은 시인들에게 관심을 키웠다.[7] 킹스 스쿨 재학 중 여러 학업 상을 받기도 했으나,[8] 학업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킹스 스쿨에서 9개의 O-레벨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17][18] 잠시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역사와 신학 A-레벨을 공부했지만, 곧 학문에 환멸을 느끼고 학업을 중단했다.[19] 학교를 그만둔 뒤 커티스는 예술, 문학, 음악에 더욱 몰두했으며, 점차 어두운 주제에서 영감을 얻기 시작했다.[20]
커티스는 십 대 초반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 짐 모리슨과 데이비드 보위 같은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았다.[12] 어린 시절 교회 합창단 활동이 그의 초기 음악 경험 중 하나였다.[13][14] 음반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아 메이클즈필드 시내 음반 가게에서 긴 회색 코트 아래 음반을 숨겨 훔치곤 했다.[126][15] 또한, 학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노인들을 방문하는 사회 봉사 활동 중 친구들과 함께 처방약을 훔쳐 복용하기도 했다.[126] 16세 때는[9] 친구들과 훔친 다량의 클로르프로마진을 복용한 후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져 위 세척을 받았다.[10][11]
고등학교를 그만둔 후, 커티스는 맨체스터 시티 센터의 음반 가게에서 잠시 일하다가[21] 공무원으로 더 안정적인 직업을 구했다. 처음에는 체들 헐름의 국방부에서 몇 달간 근무했고,[22] 이후 맨체스터 피카딜리 가든에 있는 인력 서비스 위원회에서 일했다. 나중에는 우드퍼드에서 근무하다가, 자신의 요청으로 메이클즈필드의 취업 교환소로 옮겨 장애인 재취업 보조원으로 일했다.[23]
2. 1. 결혼
1975년 8월, 커티스는 19세의 나이로 학교 친구였던 18세의 Deborah Woodruff|데보라 우드루프eng와 메이클즈필드의 세인트 토마스 교회에서 결혼했다.[127][117] 두 사람 사이에는 1979년 4월 16일에 태어난 딸 나탈리 커티스가 있으며, 그녀는 현재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127]3. 조이 디비전
1976년 7월 맨체스터 레서 프리 트레이드 홀에서 열린 섹스 피스톨즈 공연을 본 이언 커티스는 그곳에서 만난 버나드 섬너, 피터 훅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18] 커티스는 보컬리스트 겸 작사가로 합류했으며,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스티븐 모리스가 드러머로 영입되어 밴드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32] 초기 밴드 이름은 '바르샤바(Warsaw)'였으나, 동명의 다른 밴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조이 디비전'으로 변경했다.[34] 이 이름은 카롤 체틴스키의 소설 《인형의 집》(The House of Dolls)에 묘사된 나치 강제 수용소 내 성노예 부서를 지칭하는 용어에서 따온 것이다.
밴드는 첫 EP 《An Ideal For Living》을 발매했는데, 커버에는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이 드럼 치는 그림이 사용되었고, 나치 지도자 루돌프 헤스의 삶을 다룬 곡 〈Warsaw〉가 수록되었다.[35] 이후 팩토리 레코드의 공동 설립자인 토니 윌슨의 눈에 띄어 계약을 맺고, TV 프로그램 출연 등을 통해 점차 인지도를 높여갔다.[128][11] 1979년에는 첫 정규 앨범 ''Unknown Pleasures''를, 1980년에는 두 번째 앨범 ''Closer''를 발매하며 음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밴드의 성공 이면에는 커티스의 개인적인 고통이 깊어지고 있었다. 1978년 말부터 간질 발작이 시작되었고,[38] 라이브 공연과 녹음 일정이 늘어나면서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다. 1979년 4월에는 외동딸 나탈리가 태어났지만, 같은 해 10월 벨기에 출신의 음악 프로모터 안니크 오노레와 관계를 시작하면서[40][41][42] 아내 데보라와의 결혼 생활은 위기를 맞았다.[43][44] 커티스는 늘어나는 명성에 대한 부담감, 악화되는 건강, 복잡한 개인사 속에서 우울증에 시달렸고, 1980년 4월 7일에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투어를 앞두고 있었지만, 그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밴드를 떠나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3. 1. 음악 스타일 및 활동
1976년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을 본 것을 계기로 버나드 섬너, 피터 훅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작사가 겸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모리스가 드러머로 최종 합류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드러머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초기 밴드 이름은 '바르샤바(Warsaw)'였으나, 동명의 다른 밴드 'Warsaw Pakt'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조이 디비전'으로 변경했다. 이 이름은 카롤 체틴스키의 소설 《인형의 집》(The House of Dolls)에 등장하는 나치 강제 수용소의 성노예 부서를 가리키는 명칭에서 따왔다.[34]조이 디비전의 첫 번째 EP 《An Ideal For Living》의 커버에는 버나드 섬너가 그린,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이 드럼을 치는 그림이 사용되었으며, 나치 지도자 루돌프 헤스의 삶을 다룬 곡인 〈Warsaw〉가 수록되어 있다.[35] 팩토리 레코드의 공동 설립자인 토니 윌슨은 밴드가 TV 프로그램 《So It Goes》에 출연한 후 커티스가 보낸 비판적인 편지를 받고 밴드와 계약을 맺었다.[128][11] 1979년에는 첫 정규 앨범 ''Unknown Pleasures''를, 1980년에는 두 번째 앨범 ''Closer''를 발매했다.
커티스는 조이 디비전 활동 중 특유의 어딘가 어색한 듯한 태도와 독특한 춤 동작으로 알려졌다. 그의 춤은 1978년 말부터 시작된 간질 발작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았으며[38], 실제로 무대 위에서 발작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격렬하게 경련하는 듯한 움직임과 몰입한 듯한 표정은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며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주로 보컬을 담당했지만, 일부 곡에서는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는 주로 버나드 섬너가 신시사이저를 연주할 때였으나, 〈Incubation〉이나 〈Transmission〉의 필 세션 버전처럼 드물게 두 사람이 함께 기타를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섬너의 셰르골드 매스쿼레이더(Shergold Masquerader) 기타를 사용했으나, 1979년 9월 자신만의 기타인 복스 팬텀 VI 스페셜(Vox Phantom VI Special)을 구매하여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 공연 모두에 사용했다.[39] 이 기타는 커티스 사후 섬너가 뉴 오더의 초기 곡 〈Everything's Gone Green〉 등을 연주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커티스의 창법은 펑크 록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 밴드 보컬로서는 드물게 배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힘 있는 바리톤 보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가사는 매우 내성적이며, 고독, 불안, 절망과 같은 감정을 주로 다루었다. 이러한 가사는 오랜 경제 불황에 시달리던 1970년대 후반 영국 젊은이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커티스는 여러 문학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가사를 썼다. "Dead Souls"는 니콜라이 고골의 동명 소설 『죽은 혼』에서, "Atrocity Exhibition"은 J. G. 발라드의 동명 단편집 『잔혹 행위 전람회』에서 제목을 따왔다. "Interzone"은 윌리엄 버로스의 소설 『벌거벗은 점심』에 등장하는 도시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T. S. 엘리엇과 조지프 콘래드를 좋아하는 작가로 꼽기도 했다.
그의 시는 자신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고독, 불안, 절망의 감정을 드러낸다. 체제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던 펑크 록과 달리, 커티스의 시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붕괴를 은유를 사용한 문학적인 표현으로 냉철하게 묘사하는 한편, 슬픔과 고통을 솔직하게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디지털적이고 무기적인 표현과 감정적인 표현의 균형은 조이 디비전의 음악과 결합하여 이성과 격정이 충돌하는 독특한 내면세계를 그려냈다. 커티스 자신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시에 특별한 메시지는 없으며 듣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면 된다고 말했지만[122], 주변 사람들은 그의 시가 담고 있는 고뇌의 깊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토니 윌슨은 ''Closer'' 앨범의 어둡고 우울한 가사에 불안감을 느낀 커티스의 연인 안니크 오노레에게 그것은 예술일 뿐이라며 안심시키기도 했다.[123]
커티스는 공무원으로 일했던 직업 안정소에서 만난 장애인들에게 헌신적으로 대했으며, 그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곡 "She's Lost Control"은 그곳에서 만났던 간질을 앓던 소녀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쓴 시이다.
4. 사생활
1975년 8월 23일, 커티스는 1972년 12월부터 교제해 온 데보라 우드러프(Deborah Woodruff)와 결혼했다. 당시 커티스는 19세, 우드러프는 18세였다.[24][25] 결혼식은 헨버리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열렸다. 부부는 1977년 5월 맥클스필드 바턴 스트리트에 집을 마련했으며,[9] 1979년 4월 16일 딸 나탈리(Natalie)를 낳았다.[26]
커티스의 아내 데보라는 그가 1979년 8월경 벨기에의 언론인이자 음악 프로모터인 안니크 오노레(Annik Honoré)와 불륜 관계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134][40] 두 사람은 그해 10월 브뤼셀 공연에서 처음 만났다.[41][42] 커티스는 이미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상태였기에 이 관계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오노레와 함께하고 싶어 했다.[44] 그러나 오노레는 2010년 인터뷰에서 자신과 커티스의 관계는 정신적인 사랑일 뿐이었다고 주장했다.[135][46] 밴드 동료들은 커티스가 오노레와 가까워지면서 다소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다고 회상했다.[42]
1978년경부터 시작된 뇌전증 증상은 1979년과 1980년 공연 및 투어의 압박 속에서 악화되었으며,[129] 이는 그의 사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처방된 약의 부작용으로 감정 기복이 심해졌고,[129] 건강 악화는 그를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음악적 야망 사이에서 갈등했으며, 특히 딸이 태어난 후에는 발작 시 아기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워 딸을 거의 안아주지 못했다.[54]
1980년 초, 오노레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자 데보라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커티스와의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렀다.[40][70] 커티스는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으며,[71] 악화되는 건강과 복잡한 개인사 속에서 심리적으로 큰 압박을 받았다.[40] 그는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성격이었으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컸던 것으로 보인다.
4. 1. 뇌전증 투병
커티스는 1978년 말부터 간질 발작을 겪기 시작했으며, 이는 1978년 12월 런던에서의 첫 라이브 공연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처음 심하게 나타났다. 그는 1979년 1월 23일에 공식적으로 간질 진단을 받았다.[47] 의사들은 그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처방된 여러 강력한 약물 없이는 그의 삶이 간질로 인해 의미를 잃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49] 영국 간질 협회(Epilepsy Action)에 가입한 커티스는 처음에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나, 점차 위축되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논의하기를 꺼렸다.[50] 처방된 약물이 발작을 억제하지 못할 때마다 의사는 다른 항경련제를 처방했고, 그의 아내 데보라는 커티스가 새로운 약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고 회상했다.[51]1979년과 1980년에 걸쳐 공연과 투어의 압박 속에서 커티스의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고,[9] 발작은 더 잦고 격렬해졌다.[52] 진단 후에도 커티스는 간질 환자에게 권고되는 사항과 달리 음주와 흡연을 계속했으며, 불규칙한 수면 습관을 유지했다.[49] 처방된 약물들은 극심한 기분 변화를 포함한 여러 부작용을 일으켰다.[9][53] 이러한 변화는 그의 아내와 가족들도 인지했으며, 특히 아내와 함께 있을 때 그가 얼마나 과묵해졌는지 언급했다.[54] 1979년 4월 딸 나탈리가 태어난 후, 커티스는 심각한 건강 상태 때문에 발작 시 아기에게 해를 끼칠까 봐 딸을 거의 안아주지 못했다.[54]
밴드의 두 번째 앨범 『클로저』 녹음 당시 커티스의 상태는 특히 심각하여, 주당 평균 두 번의 전신 강직-간대성 발작을 겪었다.[55] 녹음 중 한 번은 커티스가 스튜디오 화장실 바닥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기도 했다. 그는 발작 후 싱크대에 머리를 부딪혔다.[56][57] 밴드 동료인 피터 훅은 당시 커티스의 상태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랐다고 회고했다. 훅은 커티스가 동료들을 걱정시키지 않으려 했으며, 우려를 표하면 괜찮다고 안심시키려 했다고 덧붙였다.[57]
1980년 4월, 핀스버리 파크의 레인보우 극장에서 열린 공연 도중, 사전에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명 기술자가 스트로보스코프를 사용하는 바람에 커티스는 광과민성 간질 발작을 일으키며 스티븐 모리스의 드럼 키트 위로 쓰러졌다. 그는 무대 뒤로 옮겨져 안정을 취해야 했다.[58] 회복 후 커티스는 같은 날 저녁 웨스트 햄스테드에서 예정된 두 번째 공연을 강행했지만, 공연 시작 약 25분 만에 다시 심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58]
커티스의 독특한 무대 위 춤 동작은 종종 그가 겪는 발작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59] 일부에서는 이를 "간질 댄스"라고 부르기도 했다.[60] 1979년과 1980년 사이의 라이브 공연 중 커티스는 여러 차례 무대에서 쓰러져 실려 나가야 했다.[61] 발작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조이 디비전 공연에서는 섬광등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버나드 섬너는 특정 타악기 소리가 커티스의 발작을 유발할 수 있었다고 나중에 언급했다.[62] 1980년 4월에는 테리 메이슨이 커티스의 약 복용, 금주, 충분한 수면을 돕는 보조 담당자로 고용되었다.[63]
간질은 그의 정신 상태에도 영향을 미쳤다. 간질 치료 약물 복용 후 조울증 증세가 심해졌으며, 버나드 섬너는 이 약물이 그의 정신 상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커티스는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는 성격이었으며, 이것이 큰 압박감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밴드 멤버들은 회고했다. 그의 곡 "She's Lost Control"은 직업 안정소에서 만난 간질을 앓던 소녀가 사망한 사건에 충격을 받아 쓴 곡이다.
1980년 4월 7일, 커티스는 간질 치료제를 과다 복용하여 처음으로 명백한 자살 시도를 했다.[69] 그는 약 복용 후 아내에게 연락했고, 구급차에 실려 갔다. 그는 나중에 이 시도가 실패하여 뇌 손상을 입을까 두려워 전화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 이후, 토니 윌슨과 그의 파트너 린지는 투어 일정이 커티스의 건강에 해롭다고 우려하며 그를 더비셔 주 찰스워스의 별장에서 요양하도록 했다.[68][42] 요양 중에도 그의 정신적 고통은 계속되었고, 병세 악화, 밴드에 대한 부담감, 록 스타로서의 삶에 대한 압박감, 아내와의 관계 문제 등으로 인해 그는 점차 궁지에 몰렸다. 그는 밴드를 떠나 네덜란드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싶다는 소망을 멤버들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5. 죽음
커티스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은 1980년 5월 2일 버밍엄 대학교 하이 홀에서 열렸다. 이 공연에서 조이 디비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Ceremony〉를 연주했는데, 이 곡은 이후 뉴 오더의 첫 싱글이 되었다. 커티스가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곡은 〈Digital〉이었고, 이 공연의 부트랙 음원은 컴필레이션 앨범 《Still》에 실렸다.[136]
1980년 5월 17일 저녁, 커티스는 아내 데보라에게 이혼 소송을 포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데보라는 그의 불안정한 상태를 염려했지만, 커티스는 혼자 밤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며 그녀를 부모님 댁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미국 투어를 위해 맨체스터행 기차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74][75]
다음 날인 5월 18일 새벽, 커티스는 메이클즈필드 바턴 거리 77번지에 위치한 자신의 집 부엌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 숨졌다. 그의 나이는 23세였다.[137][76] 죽기 전 그는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1977년 영화 《스트로셰크》를 보았으며, 이기 팝의 1977년 앨범 《The Idiot》을 들었다.[32] 데보라 커티스가 18일 아침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77]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데보라에게 쓴 편지가 남아 있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최근 관계에도 불구하고 데보라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했다.[32][77]
커티스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재는 맥클스필드 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Ian Curtis 18 – 5 – 80"와 "Love Will Tear Us Apart"라는 문구가 새겨졌다.[92] 이 묘비는 2008년 7월 도난당했으나,[139] 이후 글씨체가 바뀐 채로 다시 세워졌다.[140] 2019년 8월에는 묘지에 헌화를 놓는 데 사용되던 중앙 돌이 도난당하기도 했다.[92]
밴드 동료였던 스티븐 모리스는 1987년 《옵션》지와의 인터뷰에서 커티스가 어떤 사람이었냐는 질문에 "농담도 좀 치고, 웃기도 하는 너랑 나와 다를 바 없는 놈이었어"라고 답하며 그의 평범했던 모습을 회상했다.[141][87]
5. 1. 자살 배경 및 원인
커티스는 1978년 말부터 뇌전증 발작을 겪기 시작하여 1979년 1월 공식적으로 뇌전증 진단을 받았다.[47] 의사들은 그의 상태가 심각하여 강력한 약물 치료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49] 커티스는 처음에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점차 주변에 알리기를 꺼렸다.[50] 처방된 여러 항경련제는 그의 발작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고, 약물을 바꿀 때마다 잠시 희망을 가졌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51]1979년과 1980년에 걸쳐 공연과 투어 일정 속에서 커티스의 뇌전증은 점차 악화되었고,[9] 발작의 빈도와 강도도 심해졌다.[52] 그는 의사의 권고와 달리 음주와 흡연을 계속했으며 불규칙한 수면 습관을 유지했다.[49] 처방받은 약물은 심각한 기분 변화와 같은 부작용을 일으켰고,[9][53] 이는 그의 아내와 가족들도 느낄 정도였다.[54] 1979년 딸이 태어났지만, 발작 위험 때문에 아기를 거의 안아주지 못했다.[54]
밴드의 두 번째 앨범 Closer 녹음 시기에는 상태가 특히 심각하여 주당 평균 두 번의 전신 강직-간대성 발작을 겪었다.[55] 한번은 녹음 스튜디오 화장실에서 발작 후 쓰러져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다.[57] 밴드 동료들은 그의 상태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랐다고 회상했다. 커티스 역시 밴드 동료들을 걱정시키지 않으려 애썼다.[57] 1980년 4월 런던 레인보우 극장 공연에서는 스트로보스코프 조명 때문에 무대 위에서 심한 광과민성 간질 발작을 일으켜 실려 나가기도 했다.[58] 같은 날 저녁 다른 공연에서도 가장 심한 발작을 경험했다.[58] 그의 독특한 무대 위 춤 동작은 종종 발작을 연상시켜 "간질 댄스"라고 불리기도 했다.[59][60] 공연 중 발작으로 쓰러지는 일이 잦아지자 섬광등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특정 타악기 소리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다.[62] 결국 1980년 4월, 그의 약 복용과 생활 관리를 돕기 위해 테리 메이슨이 보조 담당자로 고용되었다.[63]

이러한 건강 문제와 더불어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벨기에 저널리스트 아닉 호노레와의 관계로 인해 아내 데보라와의 결혼 생활은 악화되었고, 데보라는 1980년 초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40][70] 커티스는 혼자 사는 것에 정신적으로 준비되지 않았으며,[71]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음악적 야망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40] 또한 악화되는 건강 상태로 인해 타인에게 의존하게 되는 자신에 대한 부담감도 느꼈다.[40] 그는 밴드에 짐이 되고 있으며, 'Closer' 앨범으로 음악적 정점에 도달했기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린지 리드는 커티스가 자살 직전 "그는 [조이 디비전]이 그 없이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꼈다. 간질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Closer'로 정점을 찍었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42]
1980년 4월 6일, 커티스는 바르비투르산염 과다 복용으로 첫 번째 명백한 자살 시도를 했다. 그는 유서를 남기고 아내에게 연락했으며,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다.[69] 이 사건 이후 팩토리 레코드 사장 토니 윌슨과 그의 파트너 린지 리드는 커티스의 건강을 염려하여 그를 더비셔 주 찰스워스에 있는 그들의 별장에서 요양하도록 도왔다.[68][42] 요양 중에도 그는 호노레에게 편지를 보내며 관계를 정리하지 못했다.[42]
커티스는 조이 디비전의 첫 북미 투어를 앞두고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비행에 대한 공포와 함께, 미국 관객들이 자신의 뇌전증 발작에 어떻게 반응할지 크게 걱정했다.[45] 그는 이전부터 데보라에게 20대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으며,[81][82] 자신의 건강 상태가 결국 자신을 죽게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과 관객들의 조롱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83][84]
1980년 5월 17일 저녁, 커티스는 데보라에게 이혼 소송을 취하해 달라고 요청했다. 데보라는 그의 불안정한 상태를 염려하여 함께 밤을 보내려 했으나, 커티스는 혼자 있고 싶다며 그녀를 돌려보냈다.[74][75] 그는 다음 날 아침 미국 투어를 위해 떠날 예정이었다.[44] 그날 밤, 커티스는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1977년 영화 스트로셰크를 보고 이기 팝의 1977년 앨범 The Idiot을 들었다.[32] 그리고 5월 18일 새벽, 맥클스필드의 자택 부엌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23세였다.[76] 그는 데보라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호노레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썼지만, 호노레에게 이별을 고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32][77] 데보라는 다음 날 아침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77]
커티스의 죽음 이후, 밴드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은 그의 가사에 담긴 깊은 고뇌와 고통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버나드 섬너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가 죽은 후에야 이언의 가사를 진정으로 듣고 그 안에 담긴 내면의 갈등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73][86] 특히 주변 사람들은 그의 시에 나타난 고뇌가 커티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소속 레이블 사장이었던 토니 윌슨조차 아니크 오노레에게 시는 예술일 뿐이라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는 점은[123] 주변의 몰이해가 그의 비극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베이시스트 피터 훅은 커티스가 처방받았던 약물 조합의 안전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88]
6. 사후
커티스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은 1980년 5월 2일 버밍햄 대학의 하이 홀에서 열렸다. 이 공연에서 조이 디비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Ceremony〉를 연주했는데, 이 곡은 이후 뉴 오더의 첫 싱글이 되었다. 커티스가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곡은 〈Digital〉이었고, 이 공연의 부트랙 음원은 컴필레이션 음반 《Still》에 실렸다.[136]
1980년 5월 18일 새벽, 커티스는 메이클즈필드 바턴 거리 77번지에 위치한 자신의 집 부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다.[137] 죽기 직전 그는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영화 《스트로스체크》를 보았으며, 이기 팝의 음반 《The Idiot》를 듣고 있었다. 그의 아내 데보라 커티스가 다음 날 아침 부엌 빨랫줄에 목을 맨 그를 발견했다. 데보라는 이언이 20세 무렵부터 살 의지를 잃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증언했다.[138]
커티스는 화장되었고, 그의 재는 메이클즈필드 공동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Ian Curtis 18 – 5 – 80"와 그의 대표곡 제목인 "Love Will Tear Us Apart" 문구가 새겨졌다. 이 묘비는 2008년 7월 도난당하는 사건이 있었으나,[139] 이후 글씨체가 바뀐 새로운 비석이 세워졌다.[140] 1987년 《옵션》지와의 인터뷰에서 스티븐 모리스는 커티스가 어떤 사람이었냐는 질문에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답했다.[141]
커티스의 사망 이후, 남은 멤버들인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티븐 모리스는 매니저 롭 그레튼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밴드 뉴 오더를 결성했다. 처음에는 "The No Names"라는 이름으로 주로 연주곡을 선보였으나 곧 뉴 오더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93] 커티스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9년 9월에 구입했던 복스 팬텀 VI 스페셜 기타는 버나드 섬너가 물려받아, 싱글 "Everything's Gone Green"을 포함한 여러 초기 뉴 오더 곡에 사용했다.[94]
6. 1. 평가 및 영향
이언 커티스는 펑크 록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 밴드 보컬로서는 드물게 배 속에서 울려 퍼지는 힘 있는 바리톤 보이스를 가졌다. 그의 내성적인 가사와 독특하고 때로는 불안정한 무대 퍼포먼스는 오랜 경제 불황에 시달리던 1970년대 후반 영국 젊은이들에게 큰 공감을 얻으며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16] 음악 잡지 Q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명의 싱어' 중 커티스를 88위로 선정했다.[116]커티스 사후, 남은 조이 디비전 멤버들(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티븐 모리스)은 매니저 롭 그레튼(Rob Gretton)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밴드 뉴 오더를 결성했다.[93] 뉴 오더의 여러 곡들은 커티스를 추모하거나 그에게 헌정되었다. 데뷔 앨범 ''Movement''의 "ICB"(Ian Curtis, Buried의 약자)와 "The Him"은 그의 죽음을 다루고 있으며,[95] 1985년 발표된 기악곡 "Elegia" 역시 그를 기리기 위해 쓰였다.[95] 2002년 곡 "Here to Stay"는 커티스뿐 아니라 매니저 롭 그레튼과 프로듀서 마틴 해넷(Martin Hannett)에게 헌정되었다.
다른 많은 아티스트들도 커티스에게 경의를 표했다. 같은 레이블 소속이었던 더 두루티 컬럼(The Durutti Column)은 1981년 앨범 ''LC''에 "The Missing Boy"를 수록했고, 1990년 사이킥 TV(Psychic TV)는 "I.C. Water"를 발표했다. 포스트 하드코어 밴드 Thursday는 1999년 데뷔 앨범 ''Waiting''에 "Ian Curtis"라는 곡을, Xiu Xiu는 2003년 앨범 ''A Promise''에 "Ian Curtis Wishlist"를 수록했다.[96]
커티스의 삶과 음악은 여러 서적을 통해 조명되었다. 그의 아내 데보라 커티스(Deborah Curtis)는 1995년 그들의 결혼 생활과 아니크 오노레(Annik Honoré)와의 관계 등을 다룬 전기 ''Touching from a Distance''를 출간했다.[78] 2006년에는 믹 미들스(Mick Middles)와 린지 리드(Lindsay Reade)가 개인적인 사진과 편지 발췌록 등을 포함한 전기 ''Torn Apart: The Life of Ian Curtis''를 펴냈다. 음악 저널리스트 폴 모리(Paul Morley)는 2007년 조이 디비전에 대한 자신의 글과 리뷰를 모은 ''Joy Division, Piece by Piece, writing about Joy Division 1977–2007''을 출간했다.
커티스를 기리는 움직임은 물리적인 공간에서도 나타났다. 뉴질랜드 웰링턴의 윌리스 스트리트(Wallace Street)에는 1980년 그의 사망 직후 "Ian Curtis Lives"라는 문구가 쓰였고, 지워질 때마다 다시 쓰여 "The Ian Curtis Wall"로 불리게 되었다.[97][99] 2020년 10월에는 맨체스터 음악 및 정신 건강 축제 Headstock의 일환으로 거리 예술가 Akse P19가 맨체스터 노던 쿼터의 포트 스트리트(Port Street) 건물 벽면에 커티스의 대형 흑백 초상화 벽화를 그렸다.[104][105]
2012년, 커티스는 예술가 피터 블레이크(Peter Blake)가 비틀즈의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커버를 새롭게 디자인하면서 선정한 영국 문화 아이콘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106]
6. 2.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이언 커티스는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묘사되거나 추모되었다.영화에서는 주로 그의 생애와 팩토리 레코드 시절을 다룬 작품에서 등장한다.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의 2002년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팩토리 레코드의 흥망성쇠를 그린 작품으로, 배우 숀 해리스가 커티스 역을 연기했다. 2007년에는 커티스의 생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전기 영화 《컨트롤》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커티스의 아내였던 데보라 커티스가 쓴 회고록 《먼 곳의 손길(Touching from a Distance)》을 원작으로 하며,[107] 조이 디비전의 사진작가이자 〈Atmosphere〉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던 안톤 코르베인이 연출을 맡았다. 데보라 커티스와 토니 윌슨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배우 샘 라일리가 이언 커티스 역을, 서맨사 모턴이 데보라 커티스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2007년 칸 영화제 감독 주간(Directors' Fortnight)에서 처음 상영되어 호평받으며 3개의 상을 수상했다.[142][143] 영화는 조이 디비전의 음악 활동보다는 커티스의 학창 시절 데보라와의 관계, 결혼 생활, 명성과 사생활 사이의 갈등, 아닉 오노레(Annik Honoré)와의 관계, 그리고 그가 겪었던 뇌전증과 우울증,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108][109]
음악계에서도 많은 아티스트들이 커티스를 기렸다. 조이 디비전의 남은 멤버들이 결성한 밴드 뉴 오더(New Order)는 여러 곡을 통해 커티스를 추모했다. 데뷔 앨범 《Movement》에 수록된 "ICB"('Ian Curtis, Buried'의 약자)와 "The Him"은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1985년 발표된 연주곡 "Elegia" 역시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으며,[95] 2002년 곡 "Here to Stay"는 커티스뿐만 아니라 팩토리 레코드의 매니저였던 롭 그레튼(Rob Gretton)과 프로듀서 마틴 해넷(Martin Hannett)에게 헌정되었다. 조이 디비전과 같은 레이블 소속이었던 더 두루티 컬럼(The Durutti Column)은 1981년 앨범 《LC》의 수록곡 "The Missing Boy"로 커티스를 추모했다. 이 외에도 사이킥 TV(Psychic TV)의 "I.C. Water"(1990), 포스트 하드코어 밴드 Thursday의 데뷔 앨범 《Waiting》(1999) 수록곡 "Ian Curtis", Xiu Xiu의 두 번째 앨범 《A Promise》(2003) 수록곡 "Ian Curtis Wishlist" 등이 커티스에게 헌정되거나 그를 언급하고 있다.[96]
커티스는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기억되고 있다. 2012년, 영국의 팝 아티스트 피터 블레이크(Peter Blake)는 비틀즈의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커버 아트를 업데이트하면서 커티스를 영국 문화의 아이콘 중 한 명으로 포함시켰다.[106]
공공장소의 기념물도 존재한다. 뉴질랜드 웰링턴의 월리스 스트리트(Wallace Street)에는 "Ian Curtis Lives"라는 문구가 적힌 벽이 있다. 이 메시지는 1980년 커티스 사망 직후 처음 등장했으며, 지워질 때마다 누군가에 의해 다시 쓰여왔다. 인근에는 "Ian Curtis RIP Walk in Silence"라는 문구와 잘못된 생몰년도("1960–1980")가 적힌 벽도 있었으나,[97][98] 이후 수정되었다. 이 두 벽은 통칭 "이언 커티스 벽(The Ian Curtis Wall)"으로 불린다.[99] 여러 차례 지워지고 다시 칠해지는 과정을 반복했으며,[100][101][102][103] 2020년 10월에는 맨체스터 음악 및 정신 건강 축제인 헤드스톡(Headstock)을 기념하여 거리 예술가 Akse P19가 맨체스터 노던 쿼터의 포트 스트리트(Port Street) 건물 벽면에 커티스의 대형 흑백 초상화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104][105]
7. 이언 커티스 박물관
2014년, 이언 커티스가 마지막 생을 보낸 맥클스필드의 집(77 Barton Street)이 매물로 나왔다.[110] 이 소식을 들은 팬 잭 데이비스(Zak Davies)는 커티스와 조이 디비전을 기리는 박물관으로 집을 보존하기 위해 인디고고(Indiegogo)에서 모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이 공간을 통해 "미래 세대에게 이언 커티스의 음악과 삶을 알리고 교육하며, 팬들이 그가 걸었던 마룻바닥을 직접 밟아보는 경험"을 제공하고, 맥클스필드의 관광 명소로 만들고자 했다.[144]
그러나 캠페인은 목표 금액 15만파운드에 크게 못 미치는 2천파운드만을 모금하는 데 그쳤다. 모금된 금액은 이후 간질 협회와 마인드 자선 단체에 기부되었다.[145][111]
캠페인 실패 1년 후인 2015년, 기업가이자 음악가인 해더 골드먼(Hadar Goldman)이 이 집을 구매했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개인 구매자와의 거래를 무효화하기 위해 주택 가격 12.5만파운드에 더해 7.5만파운드의 보상금을 지불했다.[112][146][147] 골드먼은 이 집을 조이 디비전 박물관으로 만들고, 전 세계 음악가와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디지털 허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112][113][114]
하지만 2024년 현재까지 박물관 건립 계획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115]
8. 참고 서적
- 데보라 커티스 저, 오노 료조 역, 『터칭 프롬 어 디스턴스』(蒼氷社, 2006년) (아내 데보라에 의한 전기로, 미발표 시를 포함한 모든 시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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