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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용도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감리교 목사로, 신비주의적 신앙과 실천을 강조하며 부흥 운동에 힘썼다. 3·1 운동 참여, 잦은 투옥, 폐결핵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목회 활동을 이어갔으며, 기도 신비주의와 그리스도 신비주의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신학 사상을 펼쳤다. 그는 사랑을 강조하고,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을 역설했지만, 신비주의적 경향과 성애적 비유 사용으로 인해 이단 논란에 휩싸여 휴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의 신학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성경적 근거 부족과 주관적인 해석에 대한 비판을 받으며, 33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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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2. 생애

이용도는 1915년 와슨 선교사의 권유로 개성 한영서원에 입학하여, 1919년 3·1 운동을 시작으로 여러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24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했지만 폐결핵으로 휴학을 반복하다 1928년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강원도 통천군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 전국주일학교연대회의 간사, 1931년 감리교 경성 지방 순회부흥사로 활동하며 부흥 운동에 힘썼다.

그는 진리와 종교는 삶에 있다고 강조하며, 기독교의 핵심은 믿음보다 사랑에 있다고 하였다. 그의 신비주의적 신앙은 1931년 장로교 황해노회와 1932년 평양노회의 금족령으로 이어졌고,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휴직 처분을 받았다. 1933년 원산신학산에서 백남주 등이 활동하던 신령주의 집단에 참여하여 예수교회 창설을 선언했지만, 같은 해 폐결핵으로 33세에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 (1901년 ~ 1924년)

1915년, 와슨(A.W. Wasson) 선교사의 권유로 개성의 한영서원에 입학했다. 1919년 3·1 운동으로 2개월, 1920년 2월 11일 기도절 사건으로 6개월, 1921년 크리스마스 불온 문서 사건으로 6개월, 1922년 태평양 회의 사건으로 2년 동안 잇따라 투옥되었다. 1924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했지만, 폐결핵으로 휴학을 반복했다.[1]

2. 2. 신학 공부와 목회 활동 (1924년 ~ 1933년)

1924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했지만, 폐결핵으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1928년 1월 28일에 졸업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강원도 통천군에 파견되어 목회 활동을 했다. 1930년 전국주일학교연대회의 간사, 1931년 6월에는 감리교 경성 지방 순회부흥사로 일하며 부흥 운동 설교에 힘썼다.

진리는 말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있다고 말하며,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선언했다. 기독교의 신수는 믿음보다 사랑에 있다고 강조했다. 교회사 연구자 민경배는 이용도의, 나라의 슬픔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며 느끼는 슬픔은 "그리스도에 대한 몸부림치는 사랑으로 표현되었지만, 상징적으로는 신랑에 대한 신부의 성애로밖에 표현하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랑의 융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결을 맺는다고 믿고, 자신을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고 한다.[1]

2. 3. 이단 논란과 사망 (1931년 ~ 1933년)

이용도의 신비주의 신앙은 기존 교단의 의심과 견제를 받았다. 1931년 10월 장로교 황해노회에서 그에게 금족령을 내렸고, 1932년 4월 평양노회에서도 금족령을 내려 그를 규제하였다. 1932년 제22차 장로교 총회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목회 활동을 금지시켰다.[4] 1933년 3월에는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휴직 처분을 받았다.

병 치료를 위해 원산신학산에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백남주, 이호빈, 한준명, 유명화 등 신령주의적 신앙생활자들이 있었다. 이용도는 그 집단에 참여하여 1933년 6월 3일 "예수교회" 창설 선언문과 교리를 작성하였다. 같은 해 10월 2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33세에 사망했다.[1]

3. 신학 사상

이용도의 신학 사상은 신비주의가 주된 내용이며, 특히 기도 신비주의와 그리스도 신비주의가 대표적이다.[3] 그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이라고 보았으며,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고난을 극복한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하나가 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용도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했다.[3]

그는 진리가 말하는 곳이 아닌 사는 곳에 있으며, 종교는 설교가 아닌 삶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기독교의 핵심은 믿음보다 사랑에 있다고 보았으며, 요한복음을 중시했다.

3. 1. 기도 신비주의

이용도는 깊은 차원의 기도를 통해 영성에 가까워지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큰 복이라고 보았다. 이용도의 신비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그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3]

3. 2. 그리스도 신비주의

이용도의 신학에서 주된 부분은 신비주의인데, 특히 기도 신비주의와 그리스도 신비주의가 대표적이다. 기도 신비주의는 깊은 기도를 통해 영성에 다가가고자 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용도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이라고 강조했으며, 이러한 신비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3]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고난을 이겨낸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와 하나가 되는 삶을 추구한다. 이용도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하는 것을 넘어, 신비주의적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였다.[3]

3. 3. 사랑의 강조

이용도는 진리는 말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있다고 말하며,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선언했다.[1] 그는 기독교의 신수는 믿음보다 사랑에 있다고 강조하며, 요한복음을 중시했다. 그러나 교회사 연구자 민경배는 이용도가 나라의 슬픔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며 느끼는 슬픔은 "그리스도에 대한 몸부림치는 사랑으로 표현되었지만, 상징적으로는 신랑에 대한 신부의 성애로밖에 표현하기 어려웠다"라고 평가했다.[1] 또한 이용도는 사랑의 융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결을 맺는다고 믿고, 자신을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고 한다.[1]

4. 어록

이용도는 자신의 신앙관과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다양한 어록을 남겼다. 그의 어록은 신앙, 기도, 사랑, 고난, 겸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의 사상과 신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이용도는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능력이며,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랑을 신앙의 핵심으로 보았고, 겸손과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어록들은 간결하면서도 깊은 영적 통찰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이용도는 자신의 어록들을 통하여, 당시 일제강점기하의 고난을 겪고 있던 조선의 현실에서, 조선 교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올바른 신앙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4. 1. 신앙과 실천

이용도는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조선 교회에 기도, 개인 전도, 열심, 사랑, 용기, 감사, 찬송, 협동, 성경 공부, 구도심, 봉사, 가정 기도는 부족하고, 잔말, 말질, 평론, 돈만 모으려는 생각, 게으름, 시비, 투쟁, 비겁, 공포, 불평, 근심, 걱정, 분열, 연애 문학, 구금심, 탐욕, 이기, 가정 불안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결(신령)과 세속이 교회를 지배하는 두 세력이며, 교회가 성서적 신령함으로만 존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웅변은 사람을 움직이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는 밀실 부흥 후에 나오는 신앙과 열정으로 하는 기도가 연설보다 목적 달성에 더 유력하다고 생각했다.[1]

이용도는 교역에 신앙이 첫째 조건이고 사랑이 그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슬픔을 주님이 들어오시는 문으로 여겼고, 이익을 위해 벗을 구하는 것을 무지개에서 황금을 구하는 것에 비유했다. 그는 미소로 적막한 사람을 위로하려 했고, 과거를 통회하고 새 마음을 눈물로 반죽하여 예수의 피로 인을 치자고 했다.[1]

그는 신령한 능력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생활을 개척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그는 주님의 뜻대로 인도받기를 원했고, 회개 운동의 선구자가 조선에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는 말하지 않고, 기도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성경을 보지 않고는 편지를 쓰거나 책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1]

이용도는 유(柔)한 물이 강(强)한 돌을 깨뜨리는 것처럼,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고 믿었다. 그는 분배 균등의 최고 이상은 절대 사랑의 작용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사랑은 죽이고 그리스도의 사랑만 나타내기를 원했고,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라고 했다.[1]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생각했고, 선인보다 악인에게서 배움이 더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고통, 가난, 비천함을 선생, 애처, 궁전으로 삼고 주님과 함께 살고자 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소유가 모두 주를 위해 없어지기를 바랐고, 생활 표준을 낮춰 생활 전체에서 예수를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1]

이용도는 예배당을 판결 골짜기, 해결처, 주님과의 면회소, 상담소로 여겼다. 그는 주님의 발자국마다 눈물이 고여 있지만, 그 눈물은 쓴 눈물이 아니라 단 사랑이라고 했다. 그는 주님을 신랑, 자신을 신부로 비유하며, 주님의 말씀과 얼굴을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했다.[1]

그는 현대 교회가 '괴이(怪異)한 예수'를 요구하며, 참 예수는 죽임을 당하고 마귀가 예수로 가장하여 선전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주를 사랑하거든 주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해야 하고, 드러나는 사업보다 숨어서 하는 작은 일을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했다.[1]

이용도는 조선 교회의 사업이 확대되지만 전도와 부흥에는 열의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주를 모르고 사는 것보다 주를 알고 죽기를 원했고, 남을 이롭게 하려면 자신이 손해를 보고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월급쟁이, 강도업자, 연설객의 지위를 떠나 성령의 뜨거운 사랑의 은혜를 구했다.[1]

그는 주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세상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을 주님의 피조물, 작품, 연에 비유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외적, 내적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만이 주관자가 되기를 원했다.[1]

이용도는 오늘의 교회 전도 사업이 주님의 뜻과 반대로 사람을 모으는 데만 치중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사랑과 생명, 심령, 죄인, 자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앙생활에서 전체를 희생해야 은혜를 받고, 기도는 모험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1]

그는 신앙은 불이고 참된 지식은 연료라고 비유했다. 그는 서양의 기독교는 동적이고 동양의 기독교는 정적이며, 서양인은 외적인 것을 찾고 동양인은 신비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서양인은 공관복음적이고 동양인은 요한복음적이라고 말했다.[1]

이용도는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가득 차 있다고 고백하며, 눈물, 든 손, 엎드린 기도, 땀을 자신의 설교라고 표현했다. 그는 주의 나라에는 남자, 여자, 먹는 것, 입는 것이 없고, 은혜, 사랑, 진리만 있다고 말했다.[1]

그는 기도의 생활을 용기, 위로, 거룩한 생활로 정의하며, 참회와 감사가 함께하는 생활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 사는 것보다 하루라도 온전히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을 복으로 여겼고,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했다.[1]

이용도는 대중보다 개인을 위해 살고자 했고, 예수는 한 사람을 위해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겸손해야 주님이 들어와 계실 수 있다고 믿었고, 모든 것을 끊고 주님과 십자가만 바라보는 불구자가 되기를 기도했다.[1]

그는 형제에게 자신을 사랑하지 말고 진리를 사랑하라고 부탁하며, 자신이 진리에서 벗어나면 자신을 버리라고 말했다. 그는 작은 일에서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믿었고, 하루에서 천 년을 살고 한 사람에게서 만인을 위하고자 했다.[1]

이용도는 자신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없는 미련한 자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남을 비평하는 자, 은혜를 갈구하지 않는 자, 사치한 자를 교만한 자라고 지적했다.[1]

그는 육의 사람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영의 사람은 하나님과 겸손을 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주님만이 자신의 구주이며, 사랑의 날개로 자신을 덮어 저주를 대신 받아주시기를 기도했다.[1]

이용도는 세상 사람처럼 겉모양을 단장하는 목사를 찾지 말고, 하늘에 속한 자를 찾으라고 말했다. 그는 믿음의 식구를 만나는 것을 기뻐했고, 그들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고 고백했다.[1]

그는 주님을 따라 살려면 육신의 생각, 정욕, 사욕, 물욕, 예전 것들을 다 죽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육이 평안하고 수치와 욕을 당하지 않으면 영이 받을 바가 두렵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로 살다 기도로 죽는 것이 복된 일이며, 기도가 본업이고 그 외의 것은 부업이라고 말했다.[1]

이용도는 창기, 난봉, 아이, 무식한 자, 불교인, 무교회주의자 등 누구에게서든지 배울 점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는 진리는 말할 바가 아니라 살 바이며,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무언, 겸비, 기도, 근로, 순종을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

그는 신앙생활을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이라고 정의하며, 불의를 예수의 의와 바꾸는 기도를 강조했다. 그는 주님만이 자신의 주, 진리, 말, 운동이 되기를 원했고,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자신이 반역자, 변절자, 마귀라고 말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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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는 예수를 유일 최대의 애인으로 삼고, 그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는 진리를 아는 것보다 더 상쾌한 정신적 쾌락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누더기를 입고 세수를 안 해도 주님께 곱게 보일 수 있다고 믿었다.[1]

그는 좋다고 생각되는 길로 가서 구원을 얻으려 해도 얻지 못하면 예수께로 오라고 권면했다. 그는 술, 계집에서 안전을 얻으려 해도 헛된 노력이기에 예수를 전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령의 은혜를 받으려면 죽었다가 깨어나야 하고, 작은 죄라도 철저히 쏟아버려야 새 은혜가 담긴다고 말했다.[1]

이용도는 기도를 시(詩)라고 표현했고, 교만한 이마가 먼지에 엎드러지기 전에는 신도 진리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를 잠꼬대로 하지 말고 영이 깨어서 전심전령을 바쳐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가 마귀이며, '내'가 죽어야 마귀가 죽는다고 말했다.[1]

그는 주님을 자신의 밥, 잠, 보재약, 눈물, 땀, 세계, 우주라고 표현했다. 그는 지옥의 말석에 갈 자로 오래 믿은 자, 학자, 부자를 꼽았고, 불쌍한 자로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자, 남을 인도하는 자를 꼽았다.[1]

이용도는 죄의 값으로 마음이 상하고, 얼굴이 변하고, 경제가 파멸되고, 조직이 파멸되고, 병들고, 죽고, 지옥에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혼자 기도할 때 무서우면 신이 멀리 있는 증거이고, 기쁘고 환하면 신이 가까이 계신 증거라고 말했다.[1]

그는 병들었을 때가 주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복된 때라고 말했다. 그는 체험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지, 설명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는 값이 높은 보물일수록 나타나지 않고, 주님의 은혜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1]

이용도는 목사를 내수외호(內瘦外豪)한 가련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봐도 별것 없으니, 주님의 생명을 붙잡고 살라고 권면했다. 그는 사람은 다 광인이니, 이왕 미칠 바에는 진리와 그리스도에게 미치라고 말했다.[1]

그는 사랑이 사람의 생명이며, 사람이 사람됨은 사랑, 즉 의지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속이 상하고 쓰림을 무릅쓰고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던져버리고 성경을 보았고, 성경이 크고 큰 생명책이라고 고백했다.[1]

이용도는 자신의 일에 아무 계획이 없고, 생명 강수 흐르는 대로 떠나가다가 걸리면 머무르고 깨어지면 깨어지는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 그는 주님을 신랑, 자신을 신부로 비유하며, 침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때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다.[1]

그는 이론 없이 빛 없이 죽고, 뒤에 조리 있고 빛 있게 싸울 사자가 나오기를 바랐다. 그는 무리하게 죽을 테니 형은 유리하게 살아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은 먼저 떨어져 죽는 작은 밀알 한 알갱이가 되겠다고 말했다.[1]

이용도는 예수의 생활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모든 것을 예수에게 묻고, 신앙의 초점을 예수에게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핍박과 멸시를 받아도 마음의 화평과 안위를 잃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있는 증거라고 믿었다.[1]

그는 주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머리카락 하나도 검고 희게 못한다고 믿고 돌진하라고 격려했다. 그는 영을 위한 노동으로 성경 보며 땀 흘리도록 기도하는 것, 육을 위한 노동으로 땅 파며 육체를 움직이는 것을 상책으로 꼽았다.[1]

이용도는 하나님을 믿는 야곱은 돌베개를 하고서도 돌단을 쌓고 감사했지만, 공부 많이 하고 돈 모아 명예를 얻어서는 돌단을 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즐겨 사람의 악을 말하고 듣는 자는 악인, 즐겨 사람의 선을 말하고 듣는 자는 선인이라고 말했다.[1]

그는 선은 여성적이고 악은 남성적이며, 선은 약하지만 강하고 악은 강하지만 약하며, 선은 져서 이기고 악은 이겨서 진다고 말했다. 그는 한 개의 선을 가진 사람을 위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한 사람의 선인을 위해 세상을 귀히 여기겠다고 말했다.[1]

이용도는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는 신앙은 허위의 신앙이며, 사랑이 없는 신앙은 불 꺼진 등, 맹인의 안경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지금은 진리가 없어서 기근이라고 말하며, 이 강산의 모든 영들이 말랐다고 탄식했다.[1]

그는 교회 표면에 쳐 놓은 신성과 평화의 포장을 걷어치우면 분쟁, 시기, 냉정, 탐욕의 마귀가 횡행한다고 비판하며, 주님의 신령한 손길과 진리와 사랑의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했다.[1]

그는 사람에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좋게 해야 하며,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했다.

4. 2. 기도

이용도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고 믿었다. 그는 웅변은 사람과 금전을 움직이지만, 기도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은혜를 내리게 한다고 생각했다.[1] 밀실 부흥 후에 나오는 신앙과 열정으로 하는 기도는 연설보다 목적 달성에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다.[1]

그는 조선 교회에 부족한 것으로 기도, 개인 전도, 열심, 사랑, 용기, 감사, 찬송, 협동, 성경 공부, 구도심, 봉사, 가정 기도를 꼽았고,[1] 반대로 잔말, 말질, 평론, 돈만 모으려는 생각, 게으름, 시비, 투쟁, 비겁, 공포, 불평, 근심, 걱정, 분열, 연애 문학, 구금심, 탐욕, 이기심, 가정 불안이 있다고 지적했다.[1]

이용도는 기도를 모험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 신앙은 불이고 참된 지식은 연료라고 비유하며, 학설보다는 실천을 중시했다.[1] 기도는 잠꼬대가 아닌, 영이 깨어 전심전령을 바쳐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

기도 생활은 용기, 위로, 거룩의 생활이며, 참회와 감사의 생활이라고 했다.[1] 죄만 보면 괴롭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 기쁨과 감사만 남는다고 말했다.[1] 그는 기도를 통해 불의를 예수의 의와 바꾼다고 믿었다.[1] "신앙생활이란 곧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이라며, 기도 중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강조했다.[1]

이용도는 기도를 자신의 본업으로 삼고, 다른 모든 것은 부업이라고 여겼다.[1] "기도로 살다 기도로 죽어.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기도를 통해 삶을 시작하고 마쳐야 한다고 강조했다.[1] 그는 기도를 시(詩)에 비유했다.[1]

4. 3. 사랑과 겸손

이용도는 기독교의 핵심은 믿음보다 사랑에 있다고 강조하며, 요한복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진리가 말하는 곳이 아닌, 사는 곳에 있으며, 종교는 설교가 아닌 삶이라고 선언했다.[1]

그는 나라의 슬픔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며 느끼는 슬픔을 "그리스도에 대한 몸부림치는 사랑"으로 표현했다. 이는 상징적으로 신랑에 대한 신부의 성애(性愛)로밖에 표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1] 이용도는 사랑의 융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결을 맺는다고 믿었으며, 자신을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1]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말들을 남겼다.

  •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유(柔)한 물이 강(强)한 돌을 굴려간다. 유한 골짜기 물이 단단하고 굳은 반석을 쪼개고 깨쳐 모래를 만든다. 돌(石)의 힘보다 물(水)의 조화가 실로 묘하도다. 유는 우주의 본성이었나니 유가 강을 주관하였느니라. 우주만유의 본성은 소(小)요, 약(弱)이요, 유(柔)이었나이다.
  • 분배 균등의 최고 이상은 많이 거둔 자도 남은 것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이 없게 됨에 있나니, 이는 내 소유란 것을 생각지 않는 절대 사랑의 작용으로만 될 수 있느니라.
  • 나의 사랑은 죽이고 그리스도의 사랑만 나타낼지어다. 네가 무엇을 사랑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직접 그를 사랑하시게 하라.
  • 주를 사랑하거든 주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것이니라.
  • 주께서는 드러나는 많은 사업 활동보다 숨어서 되는 작은 일을 기뻐하시느니라.
  • 겸비(謙卑)하소서.
  • 형제여, 나를 사랑하지 말고 진리를 사랑하여다오. 내가 만일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으면 형제는, 나를 버리라. 진리를 취하기 위하여 비(非)진리인 나를 버려다오. 그리하여 세상에서 진리가 행세하게 하여다오.
  • 즐겨 사람의 악을 말하는 자는 악인이다. 즐겨 사람의 선을 말하는 자는 선인이다. 즐겨 사람의 악한 일을 듣는 자는 악인이다. 즐겨 사람의 선한 일을 듣는 자는 선인이다.
  • 선은 여성적이요, 악은 남성적이다. 선은 약하되 강하고 악은 강하되 약하며 선은 져서 이기고 악은 이겨서 지는 것이니라. 우리는 이겨서 질 자가 아니요, 져서 마침내 승리를 얻을 자니라.
  • 어떤 사람에게 1의 선과 99의 악이 있느냐. 그러면 나는 한 개의 선을 위하여 저를 사랑하고 존경하겠노라. 세상에 한 사람의 선인과 99명의 악인이 있느냐. 그러면 나는 한 사람의 선인을 위하여 세상을 귀히 알고 중히 여길지니라.
  •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는 신앙은 허위의 신앙이니 이는 사람을 죽일 신앙이니라. 네가 신앙의 소유자냐. 그러면 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될지어다. 사랑이 없는 신앙은 불 꺼진 등이요, 맹인의 안경이니라.

4. 4. 고난과 그리스도

진리는 말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있다고 말하며,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선언했다[1]。기독교의 신수는 믿음보다 사랑에 있다고 강조하며, 요한복음을 중시했지만, 교회사 연구자 민경배는, 이용도의, 나라의 슬픔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며 느끼는 슬픔은 "그리스도에 대한 몸부림치는 사랑으로 표현되었지만, 상징적으로는 신랑에 대한 신부의 성애로밖에 표현하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1]。그리고 사랑의 융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결을 맺는다고 믿고, 자신을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고 한다[1]

5. 평가

이용도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난 속에서 기도를 통해 아픔을 극복하려는 신앙을 보여주어, 기독교 신앙의 토착화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고, 주관적인 체험 중심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하여 많은 이단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는다.[5] 최근에는 이용도를 이단이 아닌 순수한 기도의 사람으로 평가하는 책들도 출판되고 있다.[5]

5. 1. 긍정적 평가

이용도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난 속에서 기도를 통해 아픔을 극복하려는 신앙을 보여주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토착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5] 그는 진리가 말하는 곳이 아닌 사는 곳에 있으며, 종교는 설교가 아닌 삶이라고 강조했다. 즉,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을 강조하여, 형식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2. 부정적 평가

이용도의 신학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고, 주관적인 체험 중심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하여 많은 이단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는다.[5] 그는 정통 교리를 벗어난 신학적 주장을 펼쳤다는 이유로 1932년 제22차 장로교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고 목회 활동이 금지되었다.[4]

1931년 10월 장로교 황해노회는 이용도에게 금족령을 내렸고, 1932년 4월 평양노회도 금족령을 내려 그를 규제하였다.[4] 같은 해 11월, 평양노회는 이용도가 속했던 감리교 경성지방회에 이단 문제를 제기했고, 1933년 3월 중부연회는 그에게 휴직 처분을 내렸다.

일부에서는 그의 극단적인 신비주의적 표현이 사회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6. 저서

변종호가 편집한 『이용도 목사 서한집』(1934), 『이용도 목사담』(1958), 『이용도 목사의 일기』(1966) 등이 간행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네이트 한국학 http://koreandb.nate[...]
[2]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
[3] 네이버 지식백과 이용도 [李龍道] (두산백과) https://terms.naver.[...]
[4] 네이버 지식백과 이용도 [李龍道] (두산백과) https://terms.naver.[...]
[5] 뉴스 한국교회 최대 왜곡의 희생양, 이용도 목사 http://www.newsn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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