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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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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장산 전투는 1955년 1월 18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이장산섬을 점령한 전투이다. 국공 내전 이후 중화민국은 다천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해안을 공격했으나, 인민해방군은 해상 게릴라 전술에 대응하여 동중국해 연안 도서 점령을 시도했다. 이장산 전투에서 인민해방군은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섬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중화민국은 다천섬 방어에 위협을 느껴 철수했다. 이 전투는 미국이 중화민국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포모사 결의안 채택과 다천도 철수 작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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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명칭이장산 전투
부분 전쟁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중국 인민해방군이 중화민국 국군 진지를 공격하는 모습
중국 인민해방군이 중화민국 국군 진지를 공격하는 모습
장소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타이저우 시 위환현 이장산섬
날짜1955년 1월 18일~1월 20일
결과중국 인민해방군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중화민국
교전국 2중국 공산당
지휘관
지휘관 1왕선밍
지휘관 2장아이핑
병력 규모
규모 1병력 최소 1,000명
규모 2병력 최소 5,000명, 함대 137척, 항공기 184대
피해 규모
피해 1567명 사망, 519명 생포
피해 2393명 사망, 1024명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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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국공 내전 결과, 1949년 중화민국의 중앙 정부는 중국 대륙 영토를 상실하고 대만으로 이전했지만, 중국 서남부 산악 지대 및 동남 연안부 도서 일대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군사 작전을 지속했다. 그러나 1950년 저우산 군도, 하이난섬인민해방군에게 함락되었고, 서남부에서도 인민해방군이 미얀마 국경 지대로 진공했기 때문에, 국민당은 대만푸젠성저장성 연안 일부 도서(진먼섬, 다천섬, 이장산섬)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으며, 동중국해 연안에서 해상 게릴라 전술로 공산당에 대항했다.[1]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로 공산당 정권이 대만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지자 인민해방군은 대만 해협에서 군사 행동을 중지했다. 이를 계기로 국민당은 몇 차례 반격을 시도했지만(난르다오 전투, 둥산다오 전투), 전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 대륙 반격 발판을 마련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는 트루먼 행정부 시기에는 국공 내전 조정 실패 이후 중국 내전에 간섭하지 않는 자세였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만 중립화 선언을 발표하고,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배치해 대만 국민당 정권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게 되었다. 1951년부터 군사 원조가 재개되고 군사 고문단이 다시 파견되었지만, 트루먼 정부는 대만 국민당 정권에게 대륙 공산당 정권에 대한 군사 행동을 자제시키고, 일본이나 NATO처럼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하여 대만 방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피했다.

1953년 1월, 트루먼 행정부의 방어적 봉쇄 정책을 대신하여 능동적인 "반격" 정책을 주장하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자, 2월 연두교서에서 대만 중립화를 해제하고 중화민국군의 대륙 군사 행동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받아 국민당 정권은 1953년 7월 15일부터 7월 18일에 걸쳐 푸젠성 장저우시 둥산섬에 침공했지만 참패했다.(둥산다오 전투)[2]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 정전 이후, 공산당 정권에서 대만 해방이 구체적인 안건으로 다시 부상했다. 이 기간 동안 인민해방군은 소련으로부터 어뢰정 및 제트 전투기를 입수하고,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일본제 해방함 및 포함을 정비하여 현대적인 군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미국에게 둥산다오 전투와 같은 무모한 "대륙 반격"을 추진하는 대만 장제스 정권과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국공 내전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는 의견이 정부 안팎 관계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러나 1954년 7월 23일, 캐세이퍼시픽 항공기가 남중국해 상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전투기에 격추되고, 생존자 수색에 나선 미국 해군 항공모함 기동 부대와도 교전한 사건(캐세이퍼시픽 항공기 격추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내 여론은 일시에 반공으로 기울었고, 미국과 중화민국 간 군사 동맹 기운이 일어났다.

3. 전투의 전개

1955년 1월 18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이장산에 상륙했다. 인민해방군 항공기는 오전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이장산과 대천의 중화민국 포병 및 통신 진지를 공격했다. 지상군은 세 개의 열로 항해하여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20개의 해변에 상륙했으며, 포격정은 근접 지원을 제공하고 해안 포병과 항공기는 중화민국 포병을 제압했다.[1]

제178보병연대 소속 2개 대대가 세 번째 대대를 후속 부대로 하여 북쪽 섬에, 제180보병연대 소속 1개 대대는 남쪽 섬에 상륙했다. 인민해방군 항공기는 대천에서 중화민국 군함 5척을 격퇴했다. 인민해방군은 해안 교두보에서 빠르게 돌파하여 1월 19일 오후 5시 50분까지 섬들을 장악했다.[1]

이에 앞서 1954년 5월 15일, 인민해방군 저장(浙江) 전선 부대는 해군 지원을 받아 가오다오(高島), 투먼산(頭門山), 양위(羊嶼) 등의 도서를 점령했다. 중화민국 공군과의 공중전도 빈번하게 벌어졌으며, 전투기 연 279대가 122회 출격하여 10차례의 공중전에서 11대 격추, 5대를 격파하고 7월 6일까지 제해권을 장악했다. 8월부터 10월까지 투먼산, 양위, 가오다오에 각각 포병 진지와 어뢰정 기지가 설치되었다. 9월 3일부터는 진먼다오(金門島)와 마쭈다오(馬祖島)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

중화민국 역시 공군 외에 해군 구축함 등을 투입하여 인민해방군의 포병 진지 등을 포격했다.

11월 1일부터 다천다오(大陳島)와 이장산다오(一江山島)에 대해 인민해방군의 폭격기 공습과 투먼산, 양위 포병 진지의 130mm 포격이 시작되었다. 5일에는 토우산다오(頭山島) 해안포가 이장산다오 해역의 포함을 격파했고, 14일에는 가오다오의 어뢰정 부대가 다천다오에서 위산수이(漁山水道)를 항행 중인 중화민국 해군 호위 구축함 "타이핑(太平)"을 격침시켰다. 12월 21일부터 다음 해 1월 10일 사이에는 폭격기 연 28대와 전투기 연 46대를 투입하여 주변 함선을 폭격, 호위 구축함 "타이허(太和)" 외 3척을 격파했다.

한편 국민당 정권 측도 12월 2일 미국과 미·중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대항했다.

제해권과 제해권을 확보한 인민해방군은 1월 17일 밤 스푸(石浦)에서 상륙 부대를 출격, 18일 오전 8시에 이장산다오에 대한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는 상륙 부대 3700명, 호위함 5척(난창(南昌) (구 포함 우지(宇治)), 우창(武昌) (구 해방함 제14호), 지난(濟南) (구 해방함 제194호), 선양(沈陽) (구 해방함 제81호)[3]), 포함 2척, 어뢰정 12척, 호위정 24척, 로켓포선 6척, 양륙함 및 수송선 약 140척, MiG-15 전투기 75기, Tu2 폭격기 8기 등 항공기 351기가 참가했다.

같은 날 저녁, 인민해방군은 해당 섬의 점령을 선언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중화인민공화국은 자국 사상자를 393명으로 보고했고, 중화민국은 전사 519명, 포로 567명으로 보고했다. 중화민국 측은 720명 전원이 사망했고, 3,000명 이상의 인민해방군 병사가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나, 720명이라는 숫자는 제2차 광저우 봉기 당시 사망한 혁명가 수의 10배로 상징적으로 조작된 숫자였다. 2011년에는 포로로 잡혔던 중화민국 군인이 대만을 방문하기도 했다.[2]

이 전투는 미국이 중화민국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승리 9일 후 포모사 결의안을 채택했다.[2]

이장산 상실은 다천(Dachen)에 대한 중화민국의 방어 체계를 위협했다. 결국 중화민국은 1955년 2월, 미국 해군미국 공군의 지원을 받아 킹콩 작전을 통해 다천에서 철수했다.[1] 일강산도 함락으로 다천도는 중공군 포병의 사정권 안에 들어갔고, 제공권과 제해권도 상실하게 되었다.

2월 5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7함대와 제5공군에 중화민국군의 철수를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2월 중순까지 다천 열도의 중화민국군 1만 4천 명과 주민 1만 6천 명은 미국 해군 제7함대의 지원을 받아 철수했다([다천도 철수 작전]).

일강산도 전투는 인민해방군이 실시한 최초의 현대적인 상륙 작전이었으며, 이는 국민당 정권이 확보하고 있던 제해권에 대한 위협을 의미했다.

참조

[1] 웹사이트 PLA Yijiangshan Joint Amphibious Operation: Past is Prologue https://jamestown.or[...] 2016-09-13
[2] 뉴스 Taiwan in Time: Yijiangshan: Moving the Americans to action? http://www.taipeitim[...] 2020-01-12
[3] 웹사이트 https://www.guancha.[...] 201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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