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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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존오는 고려 말의 문신으로, 학문에 힘쓰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신돈의 횡포에 맞서 상소를 올렸으나 장사 감무로 좌천되었다. 이후 고향에서 은둔하다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는 신돈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시조를 남겼으며, 공민왕은 그의 강직함을 두려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존오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학문에 정진하여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10여 세에 12도(徒)에 들어가 지은 글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1] 1360년 문과에 급제, 수원부 서기(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이후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2]
이존오는 상소에서 신돈이 왕과 동등하게 앉고 재상들을 앉아서 대하는 등 무례한 행동을 보이고, 신돈 집권 이후 여러 자연재해가 발생한 것을 들어 신돈의 실정을 비판했다.[1] 또한 예(禮)는 상하를 분별하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기준이므로, 신돈의 행동은 유교적 예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1]
2. 생애
신돈 집권 시기, 신돈의 무례함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부분의 관리들은 신돈을 두려워하여 동참하지 않았다. 정추만이 그의 뜻에 따랐다.[3] 이 상소로 인해 공민왕의 분노를 사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고 국문을 받았으나, 이색의 도움으로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4]
장사감무로 좌천된 후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5] 1371년 31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에도 신돈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고 한다.[1] 이존오 사후 3개월 뒤에 신돈은 처형되었다. 공민왕은 이존오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추증하고, 그의 어린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다.[1]
2. 1. 어린 시절과 과거 급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하여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10여 세에 12도(徒)에 들어갔는데, '강물이 넘친다'(江漲)는 제목으로 "큰 들판은 모두 물에 잠겼지만, 높은 산은 홀로 잠기지 않았네"라는 글을 써서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1] 1360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원부 서기가 되었다가,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1366년 우정언이 되었다.[2]
2. 2. 관직 생활과 신돈과의 갈등
1360년 문과에 급제한 이존오는 수원부서기(水原府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2]
신돈 집권 시기, 이존오는 공민왕에게 신돈의 무례함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요물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동료들에게 상소 내용을 알렸으나, 대부분의 관리들은 신돈을 두려워하여 동참하지 않았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추만이 그의 뜻에 따랐다.[3]
상소문이 채 읽히기도 전에 공민왕은 크게 분노하여 상소를 태워버리라 명하고, 정추와 이존오를 불러 꾸짖었다. 왕은 이들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이춘부, 김란, 이색, 김달상에게 국문을 명했다.[1]
국문 과정에서 이춘부 등은 이존오에게 배후를 추궁했지만, 이존오는 "국가에서 어린아이도 '아는 것이 없다'고 하지 않고 언관(言官)에 두었으니 감히 간언하지 않고 국가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신돈의 무리들은 이존오를 죽이려 했으나, 이색이 이춘부를 설득하여 이존오는 사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4] 이 사건으로 재상(宰相)과 대간(臺諫)이 모두 신돈에게 아부하게 되었고, 바른 말을 하는 자가 사라졌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3]
이존오는 고향 공주 석탄(石灘)으로 돌아가 은둔 생활을 하다 1371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신돈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존오 사후 3개월 뒤, 신돈은 수원에서 처형되었다. 공민왕은 이존오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추증하고, 그의 어린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다.[1]
2. 3. 은둔 생활과 죽음
신돈의 전횡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장사감무로 좌천된 그는[4] 고향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5] 1371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5] 죽기 직전에도 측근에게 자신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게 한 뒤 "신돈이 아직도 강성한가?"라고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에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겠다"고 말해 신돈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고 한다.[1] 이존오가 죽고 3개월 뒤에 신돈은 수원에서 처형되었다.[1]
3. 이존오의 상소
이존오는 유승단, 정가신, 이자겸 등의 사례를 들어 신돈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 홍범(洪範)과 사마광의 말을 인용하여 신하가 왕의 권력을 넘보는 것의 위험성과 기강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
이존오는 상소를 통해 신돈을 공경해야 한다면 승려로 되돌려 절에 보내거나, 꼭 등용해야 한다면 권력을 억제하고 상하의 예를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3. 1. 상소의 배경과 내용
이존오가 상소를 올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368년(공민왕 17) 3월 18일 궁궐 내에서 열린 문수회에서 신돈이 왕과 동등한 위치에 앉는 모습을 목격한 사건이었다.[1] 이는 당시 유교적 예법과 정치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로, 이존오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1]
상소의 원문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1]
'''원문'''
'''번역문'''
이존오는 상소에서 신돈의 행동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유교적 예법과 정치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존오는 신돈을 공경해야 한다면 승려로 되돌려 절에 보내거나, 꼭 등용해야 한다면 권력을 억제하고 상하의 예를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4. 문학
《청구영언》에 이존오의 시조 한 수가 실려 전해지고 있다. 이 시조는 신돈의 권세를 해를 가리는 구름에 빗대어 그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1]
''구룸이 無心탄 말이 아마도 虛浪하다/中天에 떠 이셔 임의(任意)로 단니면서/구타야 光明한 날빗츨 따라가며 덥나니''
4. 1. 시조 분석
청구영언에 이존오의 시조 한 수가 실려 전하고 있는데, 신돈의 권세를 해를 가리는 구름에 빗대어 그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해석되고 있다.[1]'''구룸'''이 無心탄 말이 아마도 虛浪하다/'''中天'''에 떠 이셔 임의(任意)로 단니면서/구타야 '''光明'''한 날빗츨 따라가며 덥나니
이 시조에서 '구룸'은 사심 없이(無心) 맑아야 할 하늘을 가리는 존재로 묘사되며, 권력을 남용하는 신돈을 상징한다. '中天'(중천)은 하늘의 한가운데, 즉 임금이 계신 곳을 의미하며, 신돈이 임금의 권위를 이용하여 권세를 부리는 상황을 나타낸다. '光明'(광명)은 밝은 햇빛, 즉 정의롭고 올바른 정치를 의미하며, 신돈이 이를 가로막고 있음을 비판한다.
이 시조는 신돈의 전횡에 대한 비판 의식과 권력에 대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4. 2. 문학적 업적과 평가
《청구영언》에 이존오의 시조 한 수가 실려 전해지고 있는데, 신돈의 권세를 해를 가리는 구름에 빗대어 그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해석되고 있다.[4]>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하늘에 떠 있어 임의(任意)로 다니면서/구태여 광명(光明)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는가
5. 일화
이존오는 형 이양오가 도적에게 살해당했을 때, 육손(보통 사람과 달리 손가락이 여섯 개인 것)을 통해 형의 시신을 찾고 도적들을 잡아 복수하였다.[1] 공민왕 앞에서 신돈의 무례함을 꾸짖었으며, 공민왕은 "나는 이존오의 성난 눈이 두렵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1]
5. 1. 형의 죽음과 복수
형 이양오가 외출했다가 노비 3명과 함께 도적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존오는 몇 달 뒤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려 했다. 그러나 시신이 이미 해골이 되어 형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존오는 "나의 형은 보통 사람과 달리 손가락이 여섯 개다."라고 말했고, 이 말대로 육손을 찾아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1] 이존오는 관아에 요청하여 도적들을 모두 잡아 복수하였다.[1]5. 2. 신돈과의 대면
고려 공민왕 앞에서 신돈이 왕과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늙은 중이 어찌 이리도 무례한가?"라고 꾸짖자, 신돈은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평상에서 내려왔다.[1] 공민왕은 이존오를 두고 "나는 이존오의 성난 눈이 두렵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강직함과 용기를 엿볼 수 있다.[1]5. 3. 공민왕의 평가
恭愍王중국어은 이존오를 두고 "나는 이존오의 성난 눈이 두렵다."라고 하였다고 한다.[1]고려사 이존오전에는 辛旽중국어을 비방하는 상소로 왕에게 소환되어 면대하는 와중에 신돈이 왕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늙은 중이 어찌 이리도 무례한가?"라고 꾸짖었고, 이에 신돈이 당황하고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평상에서 내려왔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2]
6. 평가 및 현대적 의의
이존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자료 부족으로 인해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현대 사회에서 그의 삶은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준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권112 열전 권제25 제신(諸臣) 이존오
[2]
서적
고려사 권제41 세가권제41 공민왕 14년 7월 24일 경진
[3]
서적
고려사 권제106 열전권제19 제신(諸臣) 정해 부(附) 정공권
[4]
서적
고려사 공민왕 15년(1366년) 4월 13일
1366-04-13
[5]
서적
고려사 권제43 세가 권제43 공민왕 20년 5월 23일 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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