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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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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천보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1739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후 신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임했지만, 1761년 장헌세자 평양 원유사건에 책임을 지고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과 함께 음독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담론을 즐기고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유척기와 함께 영조 시대의 2대 문장가로 꼽혔다. 사도세자와의 의리를 지킨 공로로 불천위로 봉해졌으며, 저서로 《진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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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보

2. 생애

이천보는 생원시에 합격하고 내시교관으로 있다가,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2. 1. 관직 생활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40년 홍문관 정자가 되고 교리·헌납·장령 등 언관직을 역임한 뒤 1749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같은 해 좌의정에 오른 뒤 영의정으로 임명됐다.

이후 신병을 이유로 벼슬을 마다했으나 영조의 배려로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761년 1월 5일 《영조실록》에는 이천보가 영의정에서 물러나 병으로 죽었다고 명기되어 있으나,[1] 그 후 고종 36년(1899년) 장헌세자의 복권과 장조 추존 문제를 다룬 부분에서는 이천보, 이후, 민백상이 연쇄 자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2] 즉, 실록의 기록이 병사, 자살 모두를 인정하는 형식이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현재는 1761년 정월에 장헌세자 평양 원유사건에 책임을 지고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과 함께 음독 자결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3] 영조는 세 사람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세자의 원유 사건을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3]

2. 2. 장헌세자 사건과 죽음

1761년 1월 5일 《영조실록》에는 이천보가 영의정에서 물러나 병으로 죽었다고 명기되어 있으나,[1] 고종 36년(1899년) 장헌세자의 복권과 장조 추존 문제를 다룬 부분에서는 이천보, 이후, 민백상이 연쇄 자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2] 실록의 기록이 병사, 자살 모두를 인정하는 형식이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현재는 1761년 정월에 장헌세자가 저지른 장헌세자 평양 원유사건에 책임을 지고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과 함께 음독 자결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3] 영조는 세 사람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세자의 원유 사건을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3]

3. 인물 및 평가

이천보는 담론을 좋아하고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품으로 유명했다. 영조유척기와 함께 2대 문장가로 꼽혔으며, 문집으로 《진암집(晉庵集)》이 있다. 사도세자와의 의리를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불천위에 봉해졌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11촌 조카 이문원을 양자로 들였다.[2]

3. 1. 학문적 교류

이천보는 담론을 즐기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품으로 이름났다. 영조유척기와 더불어 2대 문장가로 꼽혔으며, 남유용, 오원, 황경원 등과 당파를 초월하여 학문적으로 교류하였다.[2]

3. 2. 사후 평가

이천보는 담론을 즐기고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영조유척기와 함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혔으며, 남유용, 오원, 황경원 등과 당파를 초월하여 학문적으로 교류하였다.

문집으로 《진암집(晉庵集)》이 전해지며, 사도세자와의 의리를 지킨 점이 높이 평가되어 불천위로 지정되어 사후에도 영예를 누렸다.[2]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11촌 조카 이문원을 양자로 들였다. 조정에서는 장헌세자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공로를 기려 불천위(不遷位)로 삼아,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영구히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2] 이천보가 길러낸 인재들은 훗날 정조의 개혁 정치에 기여하였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대제학 이일상(李一相)
할아버지이성조(李成朝)
아버지이주신(李舟臣)
어머니김만기(金萬基)의 딸
부인은진 송씨 (송상유의 딸)
아들판서 이문원(李文源)
며느리청송 심씨 (심수의 딸, 송상유의 사위)
손자좌의정 이존수(李存秀)
사위조경(趙絅)
사위오재순(吳載純)
사위서유방(徐有防)[4]


참조

[1] 서적 조선왕조실록 영조 97권, 37년(1761년) 1월 5일 3번째기사
[2] 서적 조선왕조실록 고종 39권, 36년(1899년) 11월 19일 3번째기사
[3] 서적 대장부의 삶 역사의 아침 2007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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