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카이소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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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카이소 정권은 막부 말기 교토에서 조정과 막부 세력의 연결 역할을 한 정치 체제이다. 1860년 이이 나오스케 암살 이후 사쓰마, 조슈, 도사 번 등의 웅번이 중앙 정계 진출을 시도하고 존왕양이파가 교토에 모여들자, 막부는 1862년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교토 수호직에 임명했다. 1863년 8월 18일 정변으로 조슈 번과 존왕양이파 공경이 추방된 후, 니조 나리유키와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이 조정을 주도하고,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마쓰다이라 사다타카 등이 참여하여 이치카이소 정권의 틀이 형성되었다. 이 정권은 조정과의 유착을 통해 국정을 주도하려 했으나,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변절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사임으로 붕괴되었으며, 메이지 유신을 앞둔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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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이소 정권 | |
---|---|
개요 | |
국가 | 일본 |
시대 | 에도 시대 말기 ~ 메이지 시대 초기 |
존속 기간 | 1862년 ~ 1869년 |
별칭 | 아이즈 번 정권, 아이즈 번 정부 |
정치 | |
정치 체제 | 번정 일체 |
번주 |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
가로 | 사이고 다노모 히로사와 사네오미 야마카와 나오타다 가와무라 히사시 |
군사 | 아이즈 번 병사 신선조 쇼기타이 주군대 백호대 |
역사 | |
주요 사건 | 분큐의 무력 금문의 변 제1차 조슈 정벌 도바·후시미 전투 보신 전쟁 아이즈 전쟁 |
멸망 | |
원인 | 아이즈 전쟁 패배 |
결과 |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유배 아이즈 번 영지 삭감 및 이동 아이즈 번 폐지 및 와카마쓰 현 설치 |
2. 성립 배경
막말기, 존왕양이 운동이 고조되면서 천황과 조정의 정치적 권위가 급속히 높아졌고, 막부가 있는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교토가 정치 동향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막부 대로였던 이이 나오스케가 1860년 (만엔 원년)에 암살(사쿠라다몬 밖의 변)된 이후,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등 강력한 번들이 중앙 정계 진출을 노리게 되었다. 이와 함께 초망(草莽, 재야의 뜻있는 선비)을 포함한 존왕양이파 인사들이 속속 교토로 모여들었다.
1863년 (분큐 3년) 당시 교토에서는 존왕양이 운동이 더욱 격렬해져, 존양 급진파 낭사에 의한 암살과 협박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조정 또한 존양 급진파 공경들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고메이 천황의 의향은 무시된 채 양이 실행을 요구하는 칙지가 남발되었다. 심지어 같은 해 8월에는 천황이 직접 양이를 실행한다는 명목으로 야마토 행행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급진파가 정권을 장악한 조슈 번은 이들과 결탁하여 교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1864년 (겐지 원년) 3월, 공무합체론에 기반한 유력 제후들의 참예회의가 요코하마 항 쇄항 문제를 둘러싼 내부 대립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이 회의의 붕괴 직후,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는 장군 후견직을 사임하는 대신 새로 설치된 금리 어수위 총독 및 섭해 방어 지휘에 임명되었다.
이치카이소 정권은 에도 막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교토에서 막부 세력을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조정 상층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사쓰마번이나 조슈번 등 유력 번들의 국정 참여를 적극적으로 배제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기존의 교토 쇼시다이만으로는 과격파 낭사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지자, 막부는 1862년 (분큐 2년) 윤8월에 교토 수호직을 신설하고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임명했다.
가타모리가 교토에 부임한 후에도 존왕양이 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존왕양이 급진파 낭사들에 의한 암살과 협박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조정에서도 존왕양이 급진파 공경들이 조정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메이 천황의 의사는 무시된 채 칙지가 남발되었고, 막부에 대해 파약양이(破約攘夷, 조약을 파기하고 서양 세력을 몰아냄) 실행을 요구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심지어 1863년 (분큐 3년) 8월에는 천황이 직접 양이를 실행한다는 명목으로 야마토 행행(大和行幸)을 계획하기까지 했다. 당시 급진파가 정권을 장악했던 조슈 번은 이러한 움직임에 편승하여 교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고메이 천황의 뜻을 받은 아이즈 번과 사쓰마 번은 협력하여 무력을 동원, 조슈 번 세력과 산조 사네토미 등 존왕양이파 공경들을 교토에서 추방했다. 이를 8월 18일의 정변이라 한다.
정변 이후 조정은 관백에 취임한 니조 나리유키와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이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10월부터 12월에 걸쳐 공무합체파인 시마즈 히사미쓰(사쓰마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슌가쿠(전 후쿠이 번주), 다테 무네나리(전 우와지마 번주),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야마우치 요도(전 도사 번주) 등이 교토로 올라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 함께 조정 참여에 임명되었다. 이를 통해 조정 아래에서 유력 번들이 국정에 참여하는 참여 회의가 실현되었다. 참여 회의에서는 조슈 번 처분 문제와 요코하마 항 쇄항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회의의 주도권을 잡으려던 사쓰마 번과 막부 및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사이에 요코하마 쇄항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결국 1864년 (겐지 원년) 2월 야마우치 요도가 도사 번으로 돌아가고, 3월에는 남은 참여 인사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면서 참여 회의는 얼마 가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같은 해 3월,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는 장군 후견직을 사임하는 대신 신설된 금리 어수위 총독(禁裏御守衛総督) 겸 섭해 방어 지휘(摂海防禦指揮)에 임명되었다. 한때 교토 수호직에서 물러났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도 복귀했으며, 가타모리의 동생이자 구와나 번주인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가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会), 마쓰다이라 사다아키(桑)를 중심으로 하는 '이치카이소(一会桑)' 체제의 기본적인 틀이 성립되었다. 이후 금문의 변을 거치며 세 사람의 제휴는 더욱 깊어졌고, 고메이 천황, 니조 나리유키,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 조정과 협력하며 요시노부가 쇼군에 취임할 때까지 교토 정치를 주도해 나가게 된다.
3. 8월 18일 정변과 참예회의 붕괴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고메이 천황의 뜻을 받든 아이즈 번과 사쓰마 번이 결탁하여 1863년 8월 18일, 실력 행사를 통해 조슈 번 세력과 산조 사네토미 등 존양파 공경들을 교토에서 추방하는 8월 18일의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 이후 조정은 관백에 취임한 니조 나리유키와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이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공무합체를 주장하던 유력 번의 지도자들이 교토로 모여들었다. 1863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시마즈 히사미쓰(사쓰마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슌가쿠(전 후쿠이 번주), 다테 무네나리(전 우와지마 번주),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야마우치 요도(전 도사 번주)가 상경하여, 기존의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아이즈 번주)와 함께 조정 참예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조정 아래에서 유력 번들이 국정에 참여하는 참예회의가 구성되었다.
참예회의에서는 정변으로 축출된 조슈 번의 처분 문제와 요코하마 항의 쇄항(개항 폐지) 문제가 주요 의제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회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사쓰마 번과, 막부의 권위를 유지하려던 막부 및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사이에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 특히 요코하마 쇄항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면서 참예회의는 난항을 겪었다. 결국 1864년 (겐지 원년) 2월 야마우치 요도가 먼저 도사 번으로 돌아갔고, 3월에는 나머지 참예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면서 참예회의는 불과 몇 달 만에 해체되었다.참예회의 구성원 소속/지위 시마즈 히사미쓰 사쓰마 번주 아버지 마쓰다이라 슌가쿠 전 후쿠이 번주 다테 무네나리 전 우와지마 번주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히토쓰바시가 당주 야마우치 요도 전 도사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아이즈 번주, 교토 수호직
4. 이치카이소 정권의 성립
같은 시기, 8월 18일의 정변 이후 교토 정치의 중심 인물이었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아이즈 번주)는 잠시 물러났던 교토 수호직에 복귀하였다. 또한, 가타모리의 친동생이자 구와나 번주인 마쓰다이라 사다타카가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會), 마쓰다이라 사다타카(桑) 세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이치카이소 정권'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되었다. 이들은 이후 금문의 변을 거치면서 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였으며, 고메이 천황과 관백 니조 나리유키,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 조정의 주요 인물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막부 말기 교토의 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이 체제는 요시노부가 쇼군직에 오르는 1866년 말까지 교토 정국의 중심 세력으로 기능하였다.
5. 이치카이소 정권의 성격과 종언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는 쇼군 후견직 대신 금리 어수호 총독에 취임하며 조정과의 관계를 강화했지만, 이는 역으로 막부 중앙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막부와 조정 양측에서 신망이 있던 아이즈번은 조정과 막부 사이의 소통 창구 역할을 자임했으며, 군사적으로도 '이치카이소' 체제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아이즈번은 특히 서남 지역 유력 번들의 국정 참여를 일관되게 반대하며 이들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했는데, 이는 사쓰마번과의 극심한 대립을 초래했고, 훗날 왕정복고 쿠데타 이후 메이지 신정부로부터 아이즈번이 배척당하고 보신 전쟁이 발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865년 (게이오 원년) 4월, 조정 내에서 무가(武家)와 관련된 사안은 반드시 '이치카이소'와의 협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들 3자의 협력을 통해 오랫동안 난항을 겪던 안세이 5개국 조약에 대한 칙허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막부의 로주 직책에 자신들의 지지 세력인 오가사와라 나가미치와 이타쿠라 가쓰키요를 임명하는 등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이치카이소 정권은 두 차례에 걸친 조슈 정벌을 주도하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으나, 1866년 (게이오 2년) 8월, 아이즈번과 구와나번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요시노부가 독단적으로 제2차 조슈 정벌 중단을 선언하였다. 또한 요시노부가 도쿠가와 종가의 가독을 상속받은 것을 계기로 여러 다이묘들이 참여하는 제후 회의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소수 실력자 중심의 '이치카이소' 체제의 존재 의의는 사실상 부정되었다. 요시노부의 이러한 입장 변화에 반발한 니조 나리유키가 9월에 일시적으로 조정 회의 참석을 거부했고, 10월에는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교토 수호직 사임을 신청하는 등 내부 균열이 심화되며 이치카이소 정권은 실질적으로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이치카이소 정권의 종언은 그동안 이 체제 하에서 정치적으로 억압받아 왔던 이와쿠라 도모미를 비롯한 반(反)막부 성향의 공경들과 여러 번들의 활동을 다시 활발하게 만들었다. 이는 메이지 유신을 목전에 둔 일본 국내 정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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