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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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홍술(1647년 ~ 1722년)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자는 사선이며 시호는 충정이다. 인조의 손자인 하원군 이정의 4대손으로, 1675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시작으로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다. 경신환국 이후 보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삼도수군통제사, 총융사, 북병사 등을 거쳐 훈련대장,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숙종 사후 경종 즉위 시에는 궁성을 호위하여 역모를 막는 데 기여했으나, 1722년 목호룡의 고변으로 투옥되어 옥사했다. 사후 신원되어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영조 때 복관되었으며, 1865년에는 부조지전에 신주가 모셔졌다.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술(弘述), 자는 사선(士善),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덕흥대원군의 4대손이다. 자세한 가계와 초기 생애, 관직 생활은 아래 문단에서 다룬다.
2. 생애
2. 1. 생애 초반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술(弘述), 자는 사선(士善),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원군 이정(李鋥)의 4대손이며, 종실 응천군 이돈(凝川君 李潡)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이석한(李錫漢)이며, 어머니는 호군 경주인(慶州人) 김광익(金光翼)의 딸인 증 정부인 김씨(貞夫人 金氏)이다. 부인은 증 승지 광산인(光山人) 김정탁(金廷鐸)의 딸인 증 정경부인 김씨(貞敬夫人 金氏)이다.
증 이판 이석한의 3남으로 1647년(인조 25년) 11월 30일에 태어났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675년(숙종 원년) 무과에 급제하여 1676년(숙종 2년) 5월 16일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 직후 부호군이 되었으며, 같은 해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2. 2. 무인 생활
이홍술은 무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지방관직과 중앙의 군사 관련 요직을 두루 거치며 무인으로서 활동했다.
지방에서는 선천부사, 경상우병사, 황해병사, 길주목사, 의주목사, 삼도수군통제사, 북병사, 평안병사 등을 역임하며 주로 국경 지역의 방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북방 지역 백성들의 조총 사용 및 훈련 허용, 봉화 시스템 개선, 연해 지역 수군 설치 등 국방 강화를 위한 현실적인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다.[3] 또한 안주와 평양의 성곽이 병자호란 이후 제대로 수리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수축을 건의하여 숙종의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5]
중앙 관직으로는 총융사, 어영대장, 훈련대장, 포도대장, 병조참판 등 군사 관련 핵심 직책들을 맡아 군정(軍政)에 참여했다. 특히 훈련대장 재임 시에는 전염병으로 인한 군병 손실 문제 해결과 사기 진작을 위해 금위영, 어영청의 재정을 활용하는 방안을 세자에게 건의하여 시행하기도 했다.[6]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선천부사 시절 백성을 혹독하게 다루다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2]이나 북병사 시절 월경(越境) 사건 처리 미흡[4] 등으로 인해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홍술은 무관으로서 국방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때로는 과오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등 복합적인 면모를 보인 인물이다.
2. 2. 1. 지방관 활동
1680년(숙종 6) 8월 6일 자산부사(慈山府使)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 11일에는 평산부사(平山府使)를 역임하였다. 이후 1681년(숙종 7) 12월 22일 창성부사(昌城府使)를 지냈으며, 1682년(숙종 8) 7월 25일에는 선천부사(宣川府使) 겸 감목관(監牧官)을 맡았다.
1685년(숙종 11) 4월 15일, 선천부사 재임 중 청강진(淸江鎭) 군졸의 은 도둑 사건을 조사하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부자(父子)가 모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처음에는 고신(告身)을 빼앗기는 처벌에 그쳤으나, 우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차자를 올려 문제를 제기하자 대흥산성(大興山城) 별장(別將) 직에서 파직되고 관련자들이 추고(推考)를 받게 되었다.[2]
파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686년(숙종 12) 12월 21일 소강첨사(所江僉使)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1687년(숙종 13)에는 절도사(節度使)와 방어사(防禦使)를 거쳐 4월 17일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 28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랐으며, 12월 20일에는 황해병사(黃海兵使)를 역임하였다. 이후 1691년(숙종 17) 6월 24일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냈고, 1692년에는 의주목사가 되었다.
1695년(숙종 21) 6월 5일, 의주목사 재임 중 북방 지역 군병들의 조총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은 조총을 주요 무기로 삼았으나, 북방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국경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간의 조총을 관아에 보관하고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젊은 군인 중에는 조총이 어떻게 생긴 무기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홍술은 민간의 조총 사용을 허가하고 3일마다 점검 시 총을 가져오게 하면 무기 정비와 유사시 대비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숙종은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후 권시경(權是經), 민진후(閔鎭厚) 등 다른 관리들도 비슷한 건의를 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이홍술은 북방 지역의 봉화 시스템 문제점도 지적했다. 경흥(慶興)에서 시작되어 강변 여섯 고을로 이어지는 봉화가 산이 높고 구름이 많아 자주 끊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변 여섯 고을이 각자 봉화를 올려 북병영(北兵營)에 직접 보고하도록 하고, 지형이 험한 곳은 봉수군을 나누어 배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3] 그러나 같은 해 11월 30일, 회령(會寧) 백성이 국경을 넘어 도적질한 사건에 연루되어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12월 10일에는 영의정 남구만이 서쪽 지방의 흉년을 이유로 평안병사 직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상소를 올렸다.
1697년(숙종 23) 6월 15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고, 1699년(숙종 25) 윤 7월 26일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1702년(숙종 28) 윤 6월 12일 북병사(北兵使)에 제수되었다. 임금을 만난 자리에서 다시 한번 북방 백성들의 조총 사용 금지 문제를 지적하며, "군인이면서 조총이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는 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라고 아뢰었다. 이에 승지 정호(鄭澔)도 국경을 넘는 문제는 조총 외에도 인삼 채취 등 다른 이유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며, 조총 훈련까지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동조했다. 숙종은 이 문제가 중대하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했다. 또한 정호와 이홍술은 북방 연해 지역의 방어 취약성을 지적하며 수군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이홍술은 길주(吉州)의 성진(城津)이 요충지임에도 방비가 없음을 지적하며 수군을 배치하여 변고에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숙종은 이홍술에게 부임 후 상황을 살펴 보고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1704년(숙종 30) 3월 25일, 영의정 신완(申琓)이 북방 지역의 월경 사건 보고가 부정확하다는 이유로 관련자 처벌을 청하자, 함경 감사 이진휴(李震休)와 함께 파직되었다.[4]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지방관과 중앙 관직을 오갔다. 1708년(숙종 34) 수원부사(水原府使)와 경기수사(京畿水使)를 역임했고, 1710년(숙종 36) 다시 경기수사를 거쳐 12월 14일 평안병사(平安兵使)가 되었다. 1711년(숙종 37) 1월 24일, 평안병사로서 임금을 만나 안주(安州)와 평양(平壤)의 성곽이 병자호란 이후 제대로 수리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수축을 건의했고, 숙종은 이를 허락하여 특별히 수축하도록 명했다.[5] 1713년(숙종 39) 11월 3일에는 다시 수원부사가 되었다.
이처럼 이홍술은 여러 지방관직을 역임하며 국방 및 지역 현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개선을 시도했으나, 때로는 과오로 인해 처벌받기도 하는 등 순탄치만은 않은 관직 생활을 보냈다.
연도 (숙종) | 주요 직책 |
---|---|
1680년 (6) | 자산부사, 평산부사 |
1681년 (7) | 창성부사 |
1682년 (8) | 선천부사 겸 감목관 |
1685년 (11) | 선천부사 (혹형 사건으로 파직) |
1686년 (12) | 소강첨사 |
1687년 (13) | 경상우병사, 황해병사 |
1691년 (17) | 길주목사 |
1692년 (18) | 의주목사 |
1697년 (23) | 삼도수군통제사 |
1699년 (25) | 총융사 |
1702년 (28) | 북병사 |
1704년 (30) | 북병사 (월경 사건 처리 미흡으로 파직) |
1708년 (34) | 수원부사, 경기수사 |
1710년 (36) | 경기수사, 평안병사 |
1713년 (39) | 수원부사 |
2. 2. 2. 중앙 관료 생활
1699년(숙종 25) 부호군을 거쳐 총융사가 되었고, 춘당대 친림시 참시관, 문과 회시 2소시관 등을 맡으며 중앙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숙종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중앙 요직을 거치며 군사 및 행정 분야에서 활동했다.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연도 (숙종) | 주요 관직 | 주요 활동 및 비고 |
---|---|---|
1700년 (26) | 오위도총부 부총관, 동돈녕, 총융사, 훈련도정 | 정유석 등 죄인을 비호하고 과거 부정에 연루되었다는 윤리 문제로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함. |
1701년 (27) | 어영대장 | 과거 비리 연루 문제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숙종이 윤허하지 않음. |
1702년 (28) | 북병사 | 북방 백성들의 조총 사용 및 훈련 허용, 연해 지역 수군 및 진보 설치 등을 건의함. |
1704년 (30) | (파직) | 함경도 월경 사건 보고 부실 문제로 파직 및 유배됨.[4] |
1705년 (31) | 도총관, 포도대장, 동지 | 복직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함. |
1706년 (32) | 훈련도정, 좌우포도대장 | |
1708년 (34) | 수원부사, 경기수사 | |
1710년 (36) | 경기수사, 평안병사 | |
1711년 (37) | 평안병사 | 안주와 평양의 성곽 수축을 숙종에게 건의하여 허락받음.[5] |
1713년 (39) | 좌윤, 수원부사 | |
1716년 (42) | 형조참판, 훈련대장 | |
1717년 (43) | 우윤 | |
1718년 (44) | 병조참판, 훈련대장 | 전염병으로 인한 군병 손실 문제 해결 및 사기 진작을 위해 금위영, 어영청 재정 활용 방안을 세자에게 건의하여 시행함.[6] |
2. 3. 생애 후반
1718년(숙종 44) 10월 17일 무과전시 참시관(武科殿試 參試官)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훈령도정(訓鍊都正), 훈련지사(訓鍊知事), 부총관(副摠管)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19년(숙종 45)에는 무과별시전시 시관(武科別試殿試 試官)을 맡았고, 중추부사(中樞府事), 훈련대장(訓鍊大將),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그해 10월 20일 훈련대장으로서 당시 세자(훗날 경종)에게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의 군비 강화를 건의했다. 그는 청나라가 심양성(瀋陽城)을 증축하는 것을 경계하며, 연이은 흉년으로 양서 지방의 군정이 약화된 상황을 지적하고 별도의 영장(營將) 설치를 주장했다. 이에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은 재정 문제를 들어 반대했으나, 이홍술은 불필요한 첨사(僉使)와 만호(萬戶)를 줄여 재원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세자는 이를 옳게 여겨 조정에서 논의하도록 하였다.[7]1720년(숙종 46) 6월 8일 숙종이 승하하자 호위 궁성 훈련대장(扈衞宮城訓鍊大將)으로서 흥화문(興化門)을 굳게 지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당시 병조판서 이만성(李晩成)은 개양문(開陽門)을 지켰는데, 두 사람 모두 경종이 즉위할 때까지 엄격하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8] 같은 해 7월 11일 군기제조(軍器提調)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9월 21일에는 당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태장(笞杖)으로 쳐서 죽였는데, 이 일로 소론 측으로부터 김창집의 사주를 받아 그의 비밀을 아는 육현을 죽였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경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 3일에는 돈체사 훈련대장(頓遞使 訓鍊大將)과 돈체사 판윤(頓遞使 判尹)을 맡았다.
1721년(경종 1) 2월 4일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25일 훈련대장으로서 무관 중에 믿을 만한 인물이 부족하다며 사대부 중에서 인재를 등용하여 무예를 권장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9] 같은 해 7월 21일 특진관(特進官)을 거쳐 8월 10일 판윤(判尹)에 제수되었으며, 연잉군(延礽君, 훗날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는 데 기여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목호룡(睦虎龍)이 경종 암살 음모 사건을 고변하면서 이홍술을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이로 인해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그는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옥중 졸기(獄中卒記)에 따르면, 이홍술은 침착하고 굳센 성품에 기마와 활쏘기에 능했으며, 숙종 대에 평안도 절도사를 지내며 무신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숙종 승하 시 궁성을 철통같이 지켰으며, 왕세제 책봉에도 공을 세웠다. 그러나 김일경(金一鏡) 등이 환관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하여 그의 병권(兵符)을 빼앗고, 과거 육현을 장살(杖殺)한 사건을 빌미로 김창집과 엮어 투옥시켰다. 그는 고문에도 ("죽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내가 어찌 거짓으로 승복하겠는가?")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1722년 5월 17일 옥중에서 향년 76세로 사망했다.[10]
3. 신임사화와 죽음
1722년 (경종 2년)에 일어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당시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해 경종 시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홍술은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였으나, 결국 옥중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4. 사후
죽은 뒤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그의 가옥은 목호룡에게 상급(賞給)으로 나갔다.
영조 1년(1725년) 8월 11일 신원(伸寃) 되었고, 증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左贊成) 겸 의금부판사 세자이사(世子二師)에 증직되었다. 그러나 영조 3년(1727년) 10월 6일 소론의 집권으로 추탈되었다가 영조 17년(1741년) 복관되어 다시 추증되었다. 이때 충정(忠定)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고종 2년(1865년) 9월 25일, 의정부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이 고종에게 아뢰기를 "임인년(1722년, 신임옥사)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로서 그 성취한 것이 단지 큰 변란을 평정하였다거나 큰 재난을 방지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세대가 변하여 단제(壇祭)를 지낼 날이 멀지 않았으니 부조지전(不祧之典)을 시행하여 공로를 기록해 두는 뜻을 부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여, 대왕대비의 명으로 그의 신주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의 은전을 받게 되었다.[11]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水落山) 청학동(靑鶴洞) 계곡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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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버지 | 이석한(李錫漢) | 1614년 ~ 1677년 | 증 이조판서(吏曹判書) |
어머니 | 김씨(金氏) | 1609년 ~ 1649년 | 증 정부인(贈 貞夫人), 호군(護軍) 김광익(金光翼, 경주 김씨)의 딸 |
동복형 | 이홍일(李弘逸) | 1640년 ~ 1718년 | 백부 이정한(李挺漢)에게 출계 |
동복형 | 이홍달(李弘達) | 1645년 ~ 1662년 | |
부인 | 김씨(金氏) | 1648년 ~ ?년 |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증 승지(承旨) 김정탁(金廷鐸, 광산 김씨)의 딸 |
아들 | 이세희(李世禧) | 1680년 ~ 1715년 | |
장녀 | 이씨(李氏) | 심수징(沈壽徵, 청송 심씨)에게 출가 | |
차녀 | 이씨(李氏) | 조명복(趙明復, 임천 조씨)에게 출가 | |
서모 | 차영(次英) | 양녀(良女) | |
이복동생 | 이홍선(李弘選) | 1652년 ~ 1725년 | |
이복동생 | 이홍매(李弘邁) | 1655년 ~ 1743년 | |
이복동생 | 이홍수(李弘遂) | 1669년 ~ 1723년 |
참조
[1]
문헌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2]
조선왕조실록
숙종 16권, 11년(1685 을축 / 청 강희(康熙) 24년) 4월 15일(갑진) 1번째기사
1685-04-15
[3]
조선왕조실록
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6월 5일(을미) 2번째기사
1695-06-05
[4]
조선왕조실록
숙종 39권, 30년(1704 갑신 / 청 강희(康熙) 43년) 3월 25일(갑자) 4번째기사
1704-03-25
[5]
조선왕조실록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1월 24일(계축) 2번째기사
1711-01-24
[6]
조선왕조실록
숙종 62권, 44년(1718 무술 / 청 강희(康熙) 57년) 9월 5일(경진) 2번째기사
1718-09-05
[7]
조선왕조실록
숙종 64권, 45년(1719 기해 / 청 강희(康熙) 58년) 10월 20일(기미) 1번째기사
1719-10-20
[8]
조선왕조실록
숙종 65권, 46년(1720 경자 / 청 강희(康熙) 59년) 6월 8일(계묘) 2번째기사
1720-06-08
[9]
조선왕조실록
경종 3권, 1년(1721 신축 / 청 강희(康熙) 60년) 4월 25일(을묘) 2번째기사
1721-04-25
[10]
조선왕조실록
경수 3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5월 7일(신묘) 1번째기사
1722-05-07
[11]
조선왕조실록
고종 2권, 2년(1865 을축 / 청 동치(同治) 4년) 9월 25일(정해) 2번째기사
186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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