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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적 차별 철폐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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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종적 차별 철폐 제안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금지 조항을 삽입할 것을 제안한 사건이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려는 목적으로 이 제안을 했다. 그러나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식민지 보유국과 백호주의 국가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거부로 인해 부결되었다. 이 제안의 부결은 일본 내에서 국제 연맹 가입 보류와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1924년 미국의 배일 이민법 제정, 세계 대공황 등과 맞물려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태평양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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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적 차별 철폐 제안
제안 개요
명칭인종적 차별 철폐 제안
발의 국가일본
제안 시기1919년
제안 배경제1차 세계 대전파리 강화 회의
주요 내용국제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철폐 조항 추가
결과찬성 다수, 만장일치 실패로 부결
파리 강화 회의
회의 기간1919년 1월 18일 ~ 1920년 1월 21일
주요 참가국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의제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처리, 전후 세계 질서 재편
주요 결정 사항베르사유 조약 체결, 국제연맹 창설
제안 내용 상세
제안 조항국제연맹의 회원국은 국적이나 인종을 이유로 외국인을 법률적 또는 사실적으로 차별하지 않고, 모든 외국인에게 자국민과 동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보장한다.
일본의 주장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인종적 편견은 문명 사회의 이상에 어긋남
일본 대표마키노 노부아키
사이온지 긴모치
투표 결과
찬성11개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
반대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기권(정보 없음)
부결 이유만장일치제 원칙에 따라 미국의 반대로 부결
영향 및 평가
일본 내 반응실망과 분노, 서구 열강에 대한 불신 심화
아시아 각국 반응일본에 대한 지지, 인종 평등에 대한 열망 고조
역사적 의의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국제적 논의를 촉발
일본의 국제적 위상 강화 시도
태평양 전쟁의 간접적 원인 중 하나로 작용
관련 인물
주요 인물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이탈리아 총리)
마키노 노부아키 (일본 전권대사)
사이온지 긴모치 (일본 원로)
기타 관련 인물에피타시오 페소아 (브라질 대통령)
로만 드모프스키 (폴란드 대표)

2. 역사적 배경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인종적 차별 철폐 제안을 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 국제 사회에서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승전국의 지위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 했다.[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파리 강화 회의에 5대 강대국 중 하나이자 유일한 비서구 국가로서 참여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일본 대표단이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것은 일본이 국제 무대에서 주요 국가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마키노 노부아키


우드로 윌슨


1919년 2월 13일, 일본 전권 마키노 노부아키국제연맹 규약위원회에서 연맹 규약에 "인종 혹은 국적 여하에 의해 법률상 혹은 사실상 조금도 차별을 마련하지 않는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의 인종적 차별 철폐 조항을 넣을 것을 제안했다.

당시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일본계 이민자에 대한 차별 문제가 심각했으며, 일본은 인종 차별 철폐 제안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외교 조사회의 이토 미요지 등은 국제 연맹에서 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백인 국가들이 인종적 편견으로 일본의 발전을 저해할 것을 우려했다.

1918년 11월 13일, 우치다 야스야 외상은 외교 조사회에서 강화 회의에 대한 외무성 의견안을 발표하면서, 국제 연맹 참가 조건으로 '인종적 편견의 제거'를 언급했다. 이 의견은 외교 조사회에서 승인되어 일본 전권의 공식 방침이 되었다.

일본의 제안은 초기에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과 백호주의 정책을 시행하던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력에 시달리던 라이베리아인, 아일랜드인 등의 지지를 받으며 설득 교섭을 계속했다.

4월 11일, 일본은 연맹 규약 전문에 "국가 평등의 원칙과 국민의 공정한 처우를 약속한다"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영국은 반대했지만, 일본은 "수정안은 이념이며, 내정의 법률적 규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영국이 다른 나라를 평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다"라며 채택을 요구했다.

수정안은 출석자 16표 중 11표의 찬성을 얻어 가결되는 듯했으나, 의장이었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중요한 의제는 전원 일치가 필요하다"며 거부했다. 마키노 노부아키는 "일본 대표단은 회의록에 이 회의에서 과반수의 찬성표가 있었음을 명확히 기술하도록 희망한다"고 발언했고, 이 내용은 회의록에 남게 되었다.

2. 1. 일본 국내 정치

하라 다카시 총리는 1918년 9월에 집권했으며, 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친서방 외교 정책을 채택하도록 결심했다.[2]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오쿠마 시게노부와 테라우치 마사타케 총리 하의 정부들이 팽창주의 정책을 펼친 결과 일본이 미국과 영국 모두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다.[2] 하라 다카시는 일본이 서방으로 복귀하도록 하기 위해 강화 회의에서 국제 연맹 창설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2] 그러나 국제 연맹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국내 여론은 국제 연맹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었고, 반대 여론이 더 우세했다.[2] 따라서 이 제안은 일본이 국제 연맹 가입 조건으로 연맹 규약에 인종 평등 조항 삽입을 요구함으로써 국내 반대 여론을 무마하는 역할을 했다.[2]

2. 2. 불평등 조약

1850년대 쇄국 정책이 끝난 후, 일본은 안세이 조약(불평등 조약)을 체결했지만, 곧 서구 열강과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게 되었다.[5] 메이지 정부는 이러한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을 가장 시급한 국제적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 대표단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평등 조항을 제안하게 되었다.

3. 인종 차별 철폐 제안

1919년 2월 13일, 일본 전권 대표 마키노 노부아키국제연맹 규약위원회에서 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철폐 조항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인종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법률상 또는 사실상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2]

1850년대 쇄국 정책이 끝난 후, 일본은 불평등 조약(안세이 조약)을 체결했지만, 곧 서구 열강과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 메이지 정부의 시급한 국제적 과제였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일본 대표단은 국제 연맹 규약에 해당 조항을 제안했다.

일본 외교관 마키노 노부아키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연합국 측에서 함께 싸웠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공감과 감사의 유대가 형성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대표단은 이 제안이 당시 서구 주도의 국제 시스템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점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다. 일본의 의도는 자국 국민의 평등과 국제 연맹 회원국의 평등을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대표단 내에서는 제안에 보편주의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이는 회의에서 논란을 야기했다.

로버트 세실은 일본의 제안이 매우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그리스 총리 또한 종교 차별 금지 조항도 매우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므로 삭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일본에서는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일본 이민 배제 정책이 일본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수치의 징표"를 종식하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칭다오와 산둥성의 나머지 독일 조차지 문제로 일본과 격렬한 적대 관계에 있던 중화민국 대표단도 이 조항을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 중국 외교관은 당시 산둥 문제에 대해 그의 정부는 이 조항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는 "호주인 100명 중 95명이 평등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했다"고 발표하며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5] 휴즈는 백호주의 이민 정책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믿고 "백호주의를 훼손하는 정부는 호주에서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뉴질랜드 총리 윌리엄 매시 또한 휴즈만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이 조항에 반대했다.

일본 대표단을 이끈 마키노 노부아키는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싸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하나 이상의 연합국과 거래하는 데 있어서 인정된 열등한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우리는 단순한 정의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6] 프랑스는 프랑스어와 문화가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문명화"의 힘이었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제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대영 제국 대표단을 함께 유지하고 싶어 하는 어색한 상황에 처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총리 얀 스머츠 장군과 캐나다 총리 로버트 보든 경은 휴즈를 중재자로 삼아 타협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일본 외교관들은 휴즈를 불쾌하게 여겼고, 휴즈는 일본인들이 자신에게 아첨했다고 불평했다.

1919년 1월 14일, 파리에 도착한 일본 전권단은 인종 차별 철폐 제안 성립을 위해 각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영국 주재 일본 대사 진다 스테미는 미국의 로버트 랜싱 국무장관과 면회하여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 2월 4일에는 에드워드 하우스 명예 대령에게 두 가지 안을 제시했고, 하우스는 윌슨도 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가 강력히 반대했으며, 영국 전권 로버트 세실, 아서 밸푸어 외상은 개인적으로는 일본 입장에 찬성했지만, 인종 차별 철폐 문제를 연맹 규약에서 다루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강화 회의에서 일본 대표는 자국의 이해 관계가 걸린 산둥 문제, 남양 제도 문제 외에는 거의 적극적인 발언을 하지 않아 "사일런트 파트너"라고 조롱받았다. 우치다 야스야 외상은 국제 연맹 설립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각국의 실망을 샀다.

일본 정부도 제안 성립이 어렵다고 보게 되었고, 최악의 경우에는 의사록에 기록함으로써 일본의 입장을 밝히도록 훈령을 내렸다. 외교 조사회의 이토이누카이 쓰요시는 제안이 실현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국제 연맹 불참을 결정해야 한다며 강경했다.

3. 1. 제안의 내용

1919년 2월 13일, 국제 연맹 위원회에서 일본 대표 마키노 노부아키는 연맹 규약 제21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다.[12]

마키노는 인종 및 종교적 원한이 전쟁의 원인이 되므로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이 제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제안이 즉시 각국의 인종 차별 정책 철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운용은 각국 위정자들에게 맡겨진다고 말했다. 마키노의 제안은 "황인종에 대한 인종적 편견 때문에 일본이 불리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본국의 훈령을 해석한 것이었다.

벨기에 대표는 일본 안에 반대했고, 브라질,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는 일본 주장에 이해를 표하는 발언을 했다. 중화민국 대표는 본국의 훈령을 기다리겠다며 의견을 보류했다. 그 후 "종교에 관한 규정"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가 되면서 제21조 자체가 삭제되었다. 마키노는 인종 차별 철폐 제안 자체는 훗날 회의에서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4월 11일 국제 연맹 위원회 최종 회의에서 마키노는 연맹 규약 전문에 "각 국민의 평등 및 그 소속 각인에 대한 공정한 대우의 주의를 긍인한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수정안을 제안했다.[15] 영국의 로버트 세실 전 봉쇄상은 이러한 문구 삽입은 무의미하며, 의미가 있다면 중대한 반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수정안이 이념을 노래하는 것이며 법적 규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를 거부하는 것은 영국이 다른 나라를 평등하게 보지 않는 증거라고 주장하며 수정안 표결을 요구했다.

의장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제안 철회를 권고했지만, 마키노는 표결을 요구했다. 윌슨을 제외한 16명이 투표를 실시, 11명이 찬성, 5명이 반대했다.

'''그러나 윌슨은 "만장일치가 아니므로 제안은 불성립이다"라고 선언했다'''.[16][17] 마키노는 다수결로 결정된 적이 있었다고 반발했지만, 윌슨은 중대한 문제는 만장일치로 표결되어 왔다고 답변했고, 마키노도 이에 동의했다. 마키노는 일본 주장의 정당성을 믿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며, 자신의 진술 및 찬반 수는 의사록에 기재해 달라고 요청했고, 윌슨도 이를 승낙했다.[18] 4월 28일 연맹국 총회에서 마키노는 인종 문제의 "유보"에 대해 연설하고, 일본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다.

3. 2. 국제 사회의 반응

1919년 2월 13일, 일본 전권 마키노 노부아키국제연맹 규약위원회에서 연맹 규약에 '''인종적 차별 철폐''' 조항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인종 혹은 국적 여하에 의해 법률상 혹은 사실상 조금도 차별을 마련하지 않는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었다.[12]

당초 이 제안은 많은 식민지를 소유한 영국이나 백호주의 정책을 시행하던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5] 그러나 서구 열강의 압력에 시달리던 라이베리아인이나 아일랜드인 등은 일본의 제안에 감사를 표했다.[13] 일본은 설득 교섭을 계속하며, 4월 11일 최종위원회에서 연맹규약 전문에 "국가평등의 원칙과 국민의 공정한 처우를 약속한다"는 문구를 담는 수정안을 다시 제안했다.

일본은 수정안이 부결되자 "수정안은 어디까지나 이념이며, 그 나라의 내정의 법률적 규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영국이 다른 나라를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라며 수정안 채택을 요구했다.

이 수정안은 출석자 16표 중 11표(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찬성을 얻어 가결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의장이었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수정안에 반대했다. 당시 모든 의제는 다수결 방식으로 채택되었으나, 윌슨은 갑자기 "중요한 의제에 대해서는 전원 일치가 필요하다"며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다.[16][17] 마키노 노부아키는 "일본 대표단은 회의록에 남기기 위해 이 회의에서 과반수의 찬성표가 있었던 것을 명확히 기술하도록 희망한다"고 발언했고, 결국 이 내용은 회의록에 남겨졌다.[18]

미국 내에서도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는 일본의 제안에 감사를 표했다.[14] 그러나 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일본계 이민 배척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이 제안은 부정적인 여론에 부딪혔다.

4. 인종 차별 철폐안 투표

1919년 4월 11일, 국제 연맹 규약 위원회 최종 회의에서 일본은 연맹 규약 전문에 "국가 평등의 원칙과 국민의 공정한 처우"를 명시하는 수정안을 다시 제안했다. 이 수정안은 출석 위원 16명 중 11명(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찬성을 얻어 가결되는 듯 보였다.[7] 그러나 의장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중요 의제는 만장일치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제안을 거부했다.[1] 마키노 노부아키는 이에 대해 "회의록에 과반수 찬성이 있었음을 명확히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1]

4. 1. 투표 결과

국가투표 결과
일본 제국찬성
프랑스찬성
이탈리아찬성
브라질찬성
중국찬성
그리스찬성
세르비아찬성
체코슬로바키아찬성
대영 제국기권
미국기권
포르투갈기권
루마니아기권
벨기에불참



1919년 4월 11일, 국제 연맹 위원회는 최종 회의를 열었다.[7] 이 제안은 출석한 17명의 대표 중 11명이 찬성하여 과반수의 찬성을 얻었으나, 반대는 없었다.[1] 그러나 의장인 우드로 윌슨은 실제 반대 투표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5] 강한 반대가 있었다는 이유로 만장일치 가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결과를 뒤집었다.[8]

4. 2. 윌슨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1919년 국제연맹 규약위원회에서 일본이 제안한 인종적 차별 철폐 조항은 출석자 16표 중 11표의 찬성을 얻었으나, 의장이었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반대하였다. 당시 모든 의제는 다수결로 채택되었으나, 윌슨은 "중요한 의제에 대해서는 전원 일치가 필요하다"며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다.[1] 이는 미국 내 인종 차별 문제와 일본계 이민 배척 여론, 그리고 백호주의를 옹호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 연방 국가들의 반대를 의식한 결정이었다.[5] 마키노 노부아키는 이에 대해 "일본 대표단은 회의록에 남기기 위해 이 회의에서 과반수의 찬성표가 있었던 것을 명확히 기술하도록 희망한다."라고 발언하였고, 이 내용은 회의록에 남겨졌다.[1]

윌슨은 일본을 달래기 위해 중국의 전 독일령에 대한 일본의 주장을 지지하고, 제안 거부에 대한 보상으로 마리아나 제도, 마셜 제도, 캐롤라인 제도를 일본이 국제연맹을 대신하여 관리하는 위임통치령으로 하는 것에 동의했다.[9]

5. 제안 부결의 영향

인종적 차별 철폐 제안의 부결은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과 일본 간의 관계 악화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 언론은 회의 진행 상황을 자세히 보도했고, 이는 미국에 대한 여론의 반감을 초래했다. 미국에서는 의도적인 불행동으로 인해 인종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25]

1945년 국제 연합 헌장에는 인종 평등에 대한 문제가 국제 정의의 기본 원칙으로 포함되었지만, 당시의 제안 부결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초래한 갈등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제안의 거부가 일본이 서방과의 협력에서 벗어나 군국주의로 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22]

일본 전권단은 인종 차별 철폐 조항과 산둥반도 문제 간의 연관성을 부인하며, "인종 차별 철폐 조항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4월 11일 회의의 일이며, 산둥 문제가 미·영·불·이 4강 회의에서 고려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다"고 반론했다.[24]

붉은 여름린칭당해 불태워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윌 브라운을 에워싸고 기념 촬영하는 백인들

5. 1. 일본 국내의 반응

제안의 부결은 일본 국내 신문 여론과 정치 단체들을 격분시켰고, 국제 연맹 가입을 보류해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제기되었다. 외교 조사회에서도 이토, 이누카이, 우치다 외무대신, 다나카 등이 마키노를 연약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하라 수상은 제안 달성이 처음부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제안 달성보다 미국, 영국과의 협조를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마키노를 옹호했다.[20]

사이온지를 수행한 고노에 후미마로는 이 제안이 부결된 것에 대해 백인에 대한 강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20] 한편, 이시바시 단잔은 일본 국민 스스로가 중국인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요시노 사쿠조도 일본이 중국인 이민을 인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21]

1924년 미국에서 이른바 배일 이민법이 성립되어 일본계 이민이 전면 금지되자, 일본 국민의 대미 감정은 악화되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자, 식민지가 적은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지를 상실하고 베르사유 체제에 반감을 가진 독일에 대한 친밀감을 강화하고, 식민지 대국인 영국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이러한 흐름은 태평양 전쟁 (대동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쇼와 천황은 독백록 속에서 대동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22]

스기우라 주고는 1919년 유히토 친왕(후의 쇼와 천황)에게 행한 윤리 어진강에서, 인종 차별 철폐는 어려울 것이나, 일본은 인애와 정의를 가지고 구미인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와베 이치로는 "국제 연맹에서 일본은 유색 인종 차별의 철폐를 열렬히 주장했지만, 그것은 열강에 대한 자국의 힘의 확대라는 측면밖에 없었다. 또한 국제 노동 기구에서는 각국의 사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반복하며, 자국의 인권 상황이 비판받지 않도록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23]

1919년 미국에서는 차별받던 흑인들이 일본의 차별 철폐 제안에 기대를 걸었지만, 윌슨 대통령이 의장 재정으로 법안을 성립시키지 않아, 많은 도시에서 인종 폭동이 발발하여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25] (붉은 여름, Chicago Race Riot of 1919|시카고 인종 폭동영어, Omaha Race Riot of 1919|오마하 인종 폭동영어, Elaine Race Riot|엘레인 인종 폭동영어)

5. 2. 국제 관계 악화

1924년 미국에서 일본계 이민을 전면 금지하는 배일 이민법이 성립되면서, 일본 국민의 대미 감정은 악화되었다.[22]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자, 식민지가 적었던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지를 상실하고 프랑스의 보복적인 베르사유 체제에 반감을 가진 독일에 대한 친밀감을 강화했다. 반면, 식민지 대국인 영국프랑스에 대한 반감은 커졌다.[22] 이러한 흐름은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쇼와 천황은 독백록에서 대동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22]

5. 3. 제2차 세계 대전으로의 연관성

일부 역사가들은 인종 차별 철폐안 거부가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부추기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22] 이들은 조항 거부가 일본이 서방과의 협력에서 벗어나 군국주의로 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본다.[22] 1923년 영일 동맹이 만료되면서 일본은 히틀러와 화해하는 등 군국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1924년 미국에서 배일 이민법이 성립되어 일본계 이민이 전면 금지되자, 일본 국민의 대미 감정은 악화되었다. 1929년 세계 대공황 발생 이후, 식민지가 적었던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식민지를 잃고 프랑스의 보복적인 베르사유 체제에 반감을 가진 독일에 친밀감을 느끼고, 식민지 대국인 영국프랑스에 대한 반감은 커졌다. 이러한 흐름은 태평양 전쟁 (대동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쇼와 천황은 훗날 독백록에서 대동아 전쟁의 원인으로 인종 차별 철폐안 부결을 언급했다.[22]

1919년 미국에서는 차별받던 흑인들이 강화 회의에서 일본의 인종 차별 철폐 제안에 기대를 걸었지만, 윌슨 대통령이 의장 재정으로 법안을 성립시키지 않자, 많은 도시에서 인종 폭동이 발생하여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25] (붉은 여름, Chicago Race Riot of 1919|시카고 인종 폭동영어, Omaha Race Riot of 1919|오마하 인종 폭동영어, Elaine Race Riot|엘레인 인종 폭동영어).

6. 역사적 의의와 유산

1919년 국제연맹 규약위원회에서 일본 전권 마키노 노부아키가 제안한 인종적 차별 철폐 조항은 비록 우드로 윌슨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인종 평등이라는 중요한 의제를 국제 사회에 제기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5]

일본은 "인종 혹은 국적 여하에 의해 법률상 혹은 사실상 조금도 차별을 마련하지 않는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의 조항을 연맹 규약에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백호주의 정책을 고수하던 오스트레일리아와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 등의 반대에 직면했지만, 일본은 꾸준히 설득하여 4월 11일 최종위원회에서 "국가평등의 원칙과 국민의 공정한 처우"를 약속하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이 수정안은 출석자 16표 중 11표의 찬성을 얻었으나, 의장 우드로 윌슨이 "중요한 의제는 전원 일치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다. 마키노 노부아키는 "일본 대표단은 회의록에 이 회의에서 과반수의 찬성표가 있었던 것을 명확히 기술하도록 희망한다"고 발언하였고, 이는 회의록에 기록되었다.

이 제안은 비록 채택되지 못했지만, 훗날 1945년 국제 연합 헌장에 인종 평등 조항이 명시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5]

6. 1. 현대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제안한 인종적 차별 철폐 제안과 그 부결은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현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에서 인종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함을 보여준다.

특히, 이 제안은 당시 미국, 캐나다 등에서 자행되던 일본계 이민자 차별 문제와도 관련이 있어,[5] 미주 지역 한인 사회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외동포, 이주 노동자, 다문화 가정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인종과 출신 배경에 따른 차별 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참조

[1] 서적 Paris 1919: Six Months That Changed the World Random House
[2] 웹사이트 Introduction: Race and Empire in Meiji Japan https://apjjf.org/20[...] The Asia-Pacific Journal 2020-10-15
[3] 웹사이트 Racial Purity and Domination in World War II https://www.linkedin[...] 2020-07-28
[4] 웹사이트 Language Conflict and Language Rights: The Ainu, Ryūkyūans, and Koreans in Japan. https://www.research[...] 2013-01
[5] 문서 Diplomacy of Japan p. 405 as cited in {{harvtxt|Lauren|1988|p=90}} Kajima
[6] 문서 Japan May Bolt World League San Francisco Chronicle
[7] 문서 Conférence de paix de Paris, 1919–1920, Recueil des actes de la Conférence, "Secret," Partie 4, pp. 175–176. as cited in {{harvtxt|Lauren|1988|p=92}}
[8] 문서 Conférence de paix de Paris, 1919–1920, Recueil des actes de la Conférence, "Secret," Partie 4, p. 177. as cited in {{harvtxt|Lauren|1988|p=93}}
[9] 문서 Diary, 4 February 1919, Add.51131, f.33, Cecil Papers, as cited in {{harvtxt|Shimazu|1998|p=119}}
[10] 웹사이트 Question 戦前の日本における対ユダヤ人政策の基本をなしたと言われる「ユダヤ人対策要綱」に関する史料はありますか。また、同要綱に関する説明文はありますか。 http://www.mofa.go.j[...]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2010-10-04
[11] 웹사이트 猶太人対策要綱 http://www.jacar.go.[...] National Archives of Japan 1938-12-06
[12] 서적 近代日本の転機 明治大正編 吉川弘文館
[13] 문서 牧野伸顕「回顧録」
[14] 서적 20世紀の日本人―アメリカ黒人の日本人観 1900‐1945 五月書房
[15] 서적 近代日本の転機 明治大正編 吉川弘文館
[16] 문서 憲政の政治学
[17] 문서 外務省記録「人種差別撤廃」、『日本外交文書』大正7年第三冊および大正8年第三冊上巻
[18] 문서 国家と人種偏見
[19] 문서 日本外交史12 鹿島研究所出版会
[20] 서적 Paris 1919: Six Months That Changed the World Random House
[21] 간행물 真説!日本史傑物伝 2023-03-16
[22] 문서 寺崎英成, マリコ・テラサキ・ミラー
[23] 서적 国連と日本 岩波書店 1994-01-20
[24] 문서 国家と人種偏見
[25] 문서 国家と人種偏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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