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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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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그레브 대성당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다. 1094년에 자그레브 교구가 설립되면서 대성당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1242년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파괴된 후 재건되었다. 1880년 지진으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헤르만 볼레의 지휘 아래 네오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2020년 자그레브 지진으로 인해 첨탑 일부가 손상되어 현재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대성당은 다양한 건축 양식과 예술 작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가 방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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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20년 지진 이전의 자그레브 대성당
2020년 자그레브 지진 이전의 자그레브 대성당
정식 명칭성모 승천 대성당
다른 이름해당사항 없음
현지 이름(크로아티아어)
위치자그레브, 크로아티아
교단로마 가톨릭교회
이전 교단해당사항 없음
교회 정치 성향해당사항 없음
신자 수해당사항 없음
참석자 수해당사항 없음
웹사이트해당사항 없음
이전 이름해당사항 없음
교황령 발표일해당사항 없음
설립일13세기 중반
설립자해당사항 없음
봉헌해당사항 없음
봉헌일해당사항 없음
축성일해당사항 없음
숭배해당사항 없음
유물복자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의 석관
1919년에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옮겨온 크로아티아 순교자 페타르 즈린스키와 프란 크르스토 프랑코판의 유골
이반 안툰 즈린스키
에우겐 크바테르니크 등
행사해당사항 없음
과거 주교해당사항 없음
관련 인물해당사항 없음
상태대성당
기능적 상태재건 중
문화재 지정크로아티아 문화재 등록
지정일2013년
건축가헤르만 볼레 (마지막 재건)
건축 양식고딕 건축 (원래)
고딕 리바이벌 건축 (19세기 재건)
건축 기간13세기 중반
1880–1906 (재건/추가)
기공일해당사항 없음
완공일해당사항 없음
건설 비용해당사항 없음
폐쇄일해당사항 없음
철거일해당사항 없음
수용 인원5,000명
길이77.55m
너비46.20m
본당 너비해당사항 없음
높이해당사항 없음
지름해당사항 없음
기타 치수해당사항 없음
층 수해당사항 없음
바닥 면적1,617m²
돔 수량해당사항 없음
외부 돔 높이해당사항 없음
내부 돔 높이해당사항 없음
외부 돔 지름해당사항 없음
내부 돔 지름해당사항 없음
첨탑 수량2
첨탑 높이108m
재료해당사항 없음
북쪽 탑: 5개
남쪽 탑: 3개
종 걸린 시기해당사항 없음
종 무게해당사항 없음
주요 인물
대주교드라젠 쿠틀레샤
주교해당사항 없음
수도원장해당사항 없음
우선 수도원장해당사항 없음
부 수도원장해당사항 없음
교구 사제해당사항 없음
교구 목사해당사항 없음
부 교구 목사해당사항 없음
사제관해당사항 없음
부제해당사항 없음
여 부제해당사항 없음
낭독자해당사항 없음
학생 인턴해당사항 없음
오르간 연주자해당사항 없음
지휘자해당사항 없음
장로해당사항 없음
오르간 연주자해당사항 없음
오르간 장학생해당사항 없음
참사회 서기해당사항 없음
평신도 참사회해당사항 없음
관리인해당사항 없음
교구 사무원해당사항 없음
사업 관리자해당사항 없음
전례 코디네이터해당사항 없음
종교 교육해당사항 없음
그리스도교 입문 예식해당사항 없음
청소년 사역해당사항 없음
꽃꽂이 길드해당사항 없음
음악 그룹해당사항 없음
교구 관리자해당사항 없음
복사단해당사항 없음
기타 정보
로고해당사항 없음
로고 크기해당사항 없음
로고 링크해당사항 없음
로고 설명해당사항 없음
역사적 장소 정보
건축가헤르만 볼레 (마지막 재건)
건축 양식해당사항 없음
관리 기관자그레브 대성당(http://www.zg-nadbiskupija.hr/home)
지정 유형크로아티아 문화재
공식 명칭해당사항 없음
유형이동 가능한 문화재
기준해당사항 없음
지정 날짜2013년 3월 9일
지정 번호P-3621
보호 자산대성당 보물창고의 성무일도서
십자가상
추가 정보 1 이름해당사항 없음
추가 정보 1 값해당사항 없음
추가 정보 2 이름해당사항 없음
추가 정보 2 값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1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1 오프명칭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1 날짜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1 번호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2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2 오프명칭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2 날짜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2 번호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3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3 오프명칭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3 날짜해당사항 없음
추가 지정 3 번호해당사항 없음

2. 역사

1094년 훨씬 이전에 오늘날 캅톨 지역에 정착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자그레브와 그 대성당의 기록된 역사는 그해부터 시작된다. 크로아티아 왕 즈보니미르가 사망한 후, 헝가리 왕 라슬로 1세슬라보니아에서 권력을 확립했고, 자그레브 교구를 설립했다.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해당 섹션을 참조.

1093년 라슬로 1세 (1040-1095)가 주교좌를 시사크에서 자그레브로 옮기면서 기존 교회를 대성당으로 선포했다. 캅톨 교회 정착지는 타타르족의 침략(1242년) 이후에야 견고한 나무 울타리(목책)로 요새화되었다. 건물은 타타르족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몇 년 후 주교 티모시 (1263–1287)에 의해 재건되었다.

타타르족 침입과 재건에 대해서는 해당 섹션을 참조.

1624년 대성당 내부와 투즈 주교의 모든 귀중한 유산이 불에 타 버린 후, 그 장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1645년 대화재와 그 이후 바로크 시대에 대해서는 해당 섹션을 참조.

1880년 자그레브 지진은 1880년 11월 9일 오전 7시 33분 53초에 자그레브 지역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6.3의 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자그레브 대성당도 심하게 파손되었다.

1880년 자그레브 대지진과 그 이후의 복원 과정에 대해서는 해당 섹션과 해당 섹션을 참조.

199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그레브 대교구 설립 900주년을 기념하여 크로아티아를 처음 방문하는 동안 자그레브 대성당을 방문했다. 그는 1990년대에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의 국제적 인정을 위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대성당을 방문하는 동안 알로이시예 스테피나츠 추기경의 묘에서 기도했으며, 그를 "''교회의 가장 밝은 인물이자 진정한 사람''"이라고 칭했으며 1998년에는 그를 시복했다.[22]

교황 베네딕토 16세 또한 2011년 6월 5일 대성당을 방문하여 주일 저녁 기도를 드리고 복자 알로이시예 스테피나츠의 무덤 앞에서 기도했다.

2020년 '''3월 22일''' 오전(CET) 6시 24분경, 규모 5.3 MW, 5.5 ML의 지진이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를 강타했으며, 진앙은 시내 중심에서 북쪽으로 7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했다. 자그레브 대성당이 손상되었으며, 남쪽 첨탑 끝부분이 부러져 인접한 대주교 궁전 지붕으로 떨어졌다.[23] 2020년 4월 17일, 자그레브 대성당의 북쪽 첨탑은 지진으로 기울어져 철거되었다.[24][25][26]

안전을 위해 북쪽 종탑의 제어된 폭파


2024년 5월, 대성당은 북쪽과 남쪽 모두 30미터의 첨탑이 없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크로아티아 건설 회사 "Spegra"는 현재 각 석재 블록(각 블록의 무게는 100kg, 일부는 최대 1200kg)을 교체하는 과정에 있으며, 3D 프린팅된 후 새로운 트래버틴 블록으로 교체한다고 설명했다. 손상되어 제거된 종탑 블록은 대성당 앞에 줄지어 있으며, 각 블록에는 고유한 바코드가 표시되어 있다. 2024년 현재 대성당은 여전히 대대적인 개축 공사 중이며, 정확한 재개장 날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27]

2. 1. 초기 역사 (1094년 ~ 1242년)

1094년 훨씬 이전에 오늘날 캅톨 지역에 정착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자그레브와 그 대성당의 기록된 역사는 그해부터 시작된다. 크로아티아 왕 즈보니미르가 사망한 후, 헝가리 왕 라슬로 1세슬라보니아에서 권력을 확립했고, 자그레브 교구를 설립했다.[8]

1094년, 라슬로 1세는 오늘날 캅톨에 있는 오래된 크로아티아 정착지에 있던 기존 교회 중 하나를 새로 설립된 자그레브 교구의 주교 두하의 자리(대성당)로 선택했고, 헝가리 수도인 오스트로곤(오늘날 부다페스트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곳)의 대교구에 종속되었다. 새로운 대성당은 1102년경 캅톨에 건설되기 시작했고, 1175년 자그레브 주교 프로단이 그곳에 묻혔다. 즐라트나 불라(황금 칙서)와 안드리아 2세 왕의 기증서(1217년)에도 이 새로운 자그레브 대성당이 언급되어 있다.[8] 1242년 타타르족이 자그레브를 지나면서 일으킨 화재로 대성당은 거의 파괴되었다.

1093년 라슬로 1세 (1040-1095)가 주교좌를 시사크에서 자그레브로 옮기면서 기존 교회를 대성당으로 선포했다. 캅톨 교회 정착지는 타타르족의 침략(1242년) 이후에야 견고한 나무 울타리(목책)로 요새화되었다. 건물은 타타르족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몇 년 후 주교 티모시 (1263–1287)에 의해 재건되었다.[8]

주교 티모테이 (+ 1287)는 손상된 "타타르 이전 대성당"을 처음부터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의 새로운 동쪽 부분을 지었는데, 이는 초기 고딕 건축 양식의 세 개의 다각형 앱스로, 그 중 가운데(또는 주요) 앱스는 더 크고 육각형이며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그 볼트는 남쪽과 북쪽 통로의 앱스 볼트보다 높다. 그는 또한 북쪽 본당의 바깥 벽을 따라 성물실("티모테이의 성물실")을 건설했다. 대성당에는 여러 시대에 수집된 다양한 금속 용기, 전례 의복, 전례 서적을 포함하는 보물창고("리즈니차")가 있다.

대성당 보물창고 주요 소장품[9]



성소의 앱시스 공간은 티모테이에 의해 앱스의 돌출부에 배치된 33개의 일련의 전례 좌석으로 장식되었다. 티모테이는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으로 성물실을 건설했는데, 볼트의 갈비뼈가 둥근 오목한 모양의 볼트의 핵심(쐐기돌)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물실의 볼트와 벽에 있는 그림은 13세기 후반에 그려졌으며, 북부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북쪽 앱스는 1275년에 완공되었고, 티모테이는 그곳에서 성 라슬로 제단을 봉헌했으며, 1284년에는 성모 마리아 제단이 있는 남쪽 앱스를 완성했다. 티모테이 주교는 1287년에 이곳에 묻혔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대성당을 위해 그의 그림 몇 점을 그렸다.[11]

2. 2. 타타르족 침입과 재건 (1242년 ~ 1645년)

1093년 라슬로 1세(1040-1095)가 주교좌를 시사크에서 자그레브로 옮기면서 기존 교회를 대성당으로 선포하였다.[8] 캅톨 교회 정착지는 타타르족의 침략(1242년) 이후에야 견고한 나무 울타리(목책)로 요새화되었다. 이 건물은 타타르족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몇 년 후 주교 티모시 (1263–1287)에 의해 재건되었다.[8] 그러나 시지스문드 왕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의 내전 동안인 1387년, 왕의 명령에 따라 그라데츠 주민들이 나무 울타리를 뜯어냈다.

1469년 9월 어느 날 밤, 보스니아에서 온 투르크인들이 자그레브 근처 사바 강까지 공격하려 했지만, 폭우로 인해 부풀어 오른 사바 강이 자그레브 주변을 홍수로 뒤덮어 공격을 포기하였다. 이후 주교 오스발드 투즈는 캅톨 전체 정착지 주변에 이 있는 방어벽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1478년경에 완공되었다. 탑과 함께 자그레브의 모든 주교 도시인 캅톨을 둘러싼 중세 요새는 20세기 초에 부분적으로 철거되었으며, 그 잔해는 오늘날 자그레브의 캅톨, 리브냐크와 오파토비나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추기경 토마스 바카츠 에르되디 (+1521)는 자그레브 교구 행정관이자 오스트로고니아 대주교였으며, 대성당 자체 주변에 성벽과 6개의 둥근 과 1개의 사각형 으로 요새를 건설했다. 대성당 정면 앞 성벽 중앙에 있는 탑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친척과 상속자는 가장 유명한 크로아티아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사망 직후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어 1217년에 완공되었고 헝가리안드레 2세 왕이 봉헌했다.

예술사학자들이 "라슬로의 대성당"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자그레브 대성당, 즉 단일 복도의 초기 로마네스크 교회는 오늘날 대성당의 남쪽 본당 부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곳에서 기초의 일부가 발견되었고, 그 시대의 프레스코 유적이 앱스의 남쪽과 북쪽 벽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8]

주교 티모테이 (+ 1287)는 손상된 "타타르 이전 대성당"을 처음부터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를 "티모테이의 대성당"이라고 부른다. 1510년에야 완공되었고, 주교 요십 유라이 스트로스마이어 (+ 1905)는 이에 대해 "''자그레브의 탁자 교회는 고딕-이탈리아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원래의 모습으로 자그레브 시의 진정한 랜드마크였습니다''"라고 말했다.

티모테이는 그의 생애 동안 교회의 새로운 동쪽 부분을 지었는데, 이는 초기 고딕 건축 양식의 세 개의 다각형 앱스로, 그 중 가운데(또는 주요) 앱스는 더 크고 육각형이며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그 볼트는 남쪽과 북쪽 통로의 앱스 볼트보다 높다. 오늘날, 그것은 대성당 동쪽 부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는 또한 북쪽 본당의 바깥 벽을 따라 성물실("티모테이의 성물실")을 건설했다.

대성당 보물창고("리즈니차")에는 여러 시대에 수집된 다양한 금속 용기, 전례 의복, 전례 서적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다.

성소의 앱시스 공간은 티모테이에 의해 앱스의 돌출부에 배치된 33개의 전례 좌석으로 장식되었다. 티모테이는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으로 성물실을 건설했는데, 볼트의 갈비뼈가 둥근 오목한 모양의 볼트의 핵심(쐐기돌)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물실의 볼트와 벽에 있는 그림은 13세기 후반에 그려졌으며, 북부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개조 공사를 거치면서 틈새가 막혔지만, 헤르만 볼레에 의해 발견되어 복원되었으며, 오늘날 그 틈새에는 모든 자그레브 주교대주교의 목록이 적힌 돌판이 있다(67명의 주교와 7명의 대주교, 그 중 5명은 추기경이었다).

북쪽 앱스는 1275년에 완공되었고, 티모테이는 그곳에서 성 라슬로 제단을 봉헌했으며, 1284년에는 성모 마리아 제단이 있는 남쪽 앱스를 완성했다. 11세기와 12세기의 비슷한 모양을 닮은 세 개의 양식화된 기독교 십자가가 있는 흰색 석판은 1284년 성모 마리아 제단의 원래 조각이다. 티모테이 주교는 1287년에 이곳에 묻혔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대성당을 위해 그의 그림 몇 점을 그렸다.

티모테이의 사망(+1287) 후, 건설은 1344년에야 재개되었는데, 당시 크로아티아의 반 및 주교 스테판 3세 카니자이 (+1374)가 새로운 중앙 및 북쪽 본당을 건설했다.[11] 대성당 공사는 천천히 진행되었다. 1400년경 '''주교 에버하르트''' (+1419) 시대에 중앙 및 북쪽과 어느 정도 남쪽 본당이 완공되었고, 1433년까지 주교 알벤 (+1433)은 남쪽 본당과 고딕 양식의 두 종탑의 하부를 완성했다.

투즈 주교 (+1499)의 노력 덕분에 대성당은 제단과 그림으로 풍성하게 채워졌고,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리스도의 수난 3폭 제단화가 남쪽 앱스의 성모 마리아 제단에 배치되었다. 성경과 함께 중세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독서는 동물 우화집 또는 중세 자연사로, 식물, 동물, 악마, 및 기타 신화 속 생물 목록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중의 믿음에 따르면 신이 마법의 속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존재의 신비주의와 상징은 대성당의 예술적 설비의 일부가 되었고, 특히 프랑스의 고딕 대성당(예: 샤르트르 대성당)이 이러한 것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었다. 자그레브 대성당에도 그러한 특이한 인물들이 있다. 이 모든 특이한 생물과 괴물들은 실제로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구상의 하나님의 집을 함께 지키고 방어한다.

투즈 주교 (+1499)의 노력으로 대성당은 고딕 건축르네상스 제단과 그림으로 풍성하게 채워졌으며, 1510년까지 세 개의 본당에 똑같이 높은 고딕 메쉬 볼트와 지붕이 완공되었다.

1624년 대성당 내부와 투즈 주교의 모든 귀중한 유산이 불에 타 버린 후, 그 장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돔이 있는 남쪽, 새로운, 거대한 전망대-종탑은 1644년에 완공되었고, 빈코비치 주교 (+1642)는 대성당 입구의 이미지를 변경했는데, 오래된 고딕 포털을 철거하고 오래된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새로운 포털을 건설했다.

1645년 자그레브를 황폐하게 만든 대규모 화재로 대성당 전체 폭에 걸쳐 아치가 무너졌다.

2. 3. 1645년 대화재와 바로크 시대

1624년 대성당 내부와 투즈 주교의 모든 귀중한 유산이 불에 타 버린 후, 그 장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돔이 있는 남쪽의, 새롭고 거대한 전망대 겸 종탑은 1644년에 완공되었고, 빈코비치 주교 (+1642)는 대성당 입구의 이미지를 변경했는데, 오래된 고딕 포털을 철거하고 오래된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새로운 포털을 건설했다.

1880년 이전의 자그레브 대성당


1880년의 광장


1645년 자그레브를 황폐하게 만든 대규모 화재로 대성당 전체 폭에 걸쳐 아치가 무너졌다. 보그단 주교 (+1647)는 건축가 알버탈과 수리 계약을 체결했는데, 그 계약서에서 그는 바로크 시대에 원래의 고딕 양식을 개조에 반복할 것을 요구했다. "''우선, 파괴된 볼트, 기둥 및 코러스, 즉 갱을 원래의 제브제스마 형태로 복원하고, 훌륭하고 튼튼한 돌로 튼튼하고 굳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후 2세기 동안, 1880년 지진까지는 주로 교회의 내부를 끊임없이 재건하고 수리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 때문에 남쪽에 단일 요새화된 르네상스 망루가 세워졌고, 군사 관측소로 사용되었다.[12]

2. 4. 1880년 자그레브 대지진

1880년 자그레브 지진은 1880년 11월 9일 오전 7시 33분 53초에 자그레브 지역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6.3의 지진이다. 진앙지는 자그레바츠카 고라(메드베드니차) 지역이었으며, 물질적 피해는 당시 연간 국가 예산의 절반에 달했다.[13]

이 지진으로 자그레브 대성당도 심하게 파손되었다. 당시 측면 제단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던 사제 프란요 라츠키는 "끔찍한 휘파람 소리가 시작되자, 아치형 천장이 무너지고 먼지로 인해 어둠이 짙어져 교회 벽과 기둥의 움직임이 완전히 으스스하게 보였다."라고 묘사했다.[13]본당이 붕괴되었고, 타워는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다.[14]

헤르만 볼레가 이끈 네오 고딕 양식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서쪽에 104m 높이의 첨탑 2개가 세워졌다. 현재 대성당 복원의 일환으로 두 첨탑 모두 복원 과정에 있다.[14]

2. 5. 헤르만 볼레의 재건 (1880년 ~ 1902년)

1880년 자그레브 지진으로 대성당은 심하게 파손되었다. 주 본당은 무너졌고, 탑은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다. 1880년 '''11월 9일''' 오전 7시 33분 53초에 자그레브 지역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6.3의 지진으로, 당시 연간 국가 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 지진 당시 측면 제단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던 사제 프란요 라츠키는 "끔찍한 휘파람 소리가 시작되자, 아치형 천장이 무너지고 먼지로 인해 어둠이 짙어져 교회 벽과 기둥의 움직임이 완전히 으스스하게 보였다."라고 묘사했다.[13]

이후 헤르만 볼레가 네오 고딕 양식으로 대성당 복원을 이끌었으며, 대성당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복원 과정의 일환으로 서쪽에는 104m 높이의 첨탑 2개가 세워졌으며, 현재 대성당의 광범위한 일반 복원의 일환으로 두 첨탑 모두 복원 과정에 있다.[14] 지진 이후, 대성당은 건축가 헤르만 볼레의 지휘와 이자도르 크르슈냐비의 후원 아래 네오고딕 양식으로 개축(1880-1902)되었으며, 개축 비용은 2494430KRW였다. 유약을 바른 타일로 만든 지붕 (자그레브 고르니 그라드의 성 마르코 교회와 유사)은 낡아 1961년에 구리판으로 대체되었다.

헤르만 볼레는 1878년 요십 유라이 스트로스마이어 주교에게 대성당 재건축에 대한 개념적인 설계도를 제공받았고, 이듬해 자그레브 주교 요십 미할로비치는 "'''볼레 대성당'''"으로 불리게 될 대성당의 새로운 개축을 시작했다. 높고 뾰족하며 속이 빈 종루는 독일 고딕 양식의 예이며, 1889년부터 1899년까지 지어졌다. 북쪽 종탑은 '''108.2m''' 높이이며, 남쪽 종탑은 '''108.16m''' 높이이다. 높이 60m 지점에 있는 대성당의 각 종탑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지고 금박 손으로 된 4개의 시계가 있으며, 시계의 무게는 500kg이다.[15]

3. 20세기와 21세기

199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그레브 대교구 설립 900주년을 기념하여 크로아티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자그레브 대성당을 방문했다. 그는 1990년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의 국제적 인정을 위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대성당을 방문하는 동안 알로이시예 스테피나츠 추기경의 묘에서 기도했으며, 그를 시복했다.[22] 교황 베네딕토 16세 또한 2011년 6월 5일 대성당을 방문하여 주일 저녁 기도를 드리고 알로이시예 스테피나츠의 무덤 앞에서 기도했다.

2020년 3월 22일 오전 6시 24분(CET, 중앙유럽표준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규모 5.3 MW, 5.5 ML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시내 중심에서 북쪽으로 7km 떨어진 지점이었다. 이 지진으로 자그레브 대성당이 손상되었는데, 남쪽 첨탑 끝부분이 부러져 인접한 대주교 궁전 지붕으로 떨어졌다.[23] 2020년 4월 17일에는 지진으로 기울어진 북쪽 첨탑이 철거되었다.[24][25][26]

2024년 5월, 대성당은 남북 양쪽 모두 30미터 높이의 첨탑이 없는 상태로 관찰되었다. 크로아티아 건설 회사 "Spegra"는 각 석재 블록(무게 100kg, 일부는 최대 1200kg)을 교체하는 중이며, 3D 프린팅 후 새로운 트래버틴 블록으로 교체한다고 밝혔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파리노트르담 대성당처럼 대부분 탑이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최근 지진 피해 복구의 일환으로 손상된 조각들이 모두 제거되어 약 30미터가량 짧아졌다. 손상되어 제거된 종탑 블록은 대성당 앞에 줄지어 있으며, 각 블록에는 고유한 바코드가 표시되어 있다. 2024년 현재 대성당은 여전히 대대적인 개축 공사 중이며, 정확한 재개장 날짜는 미정이다.[27]

3. 1. 교황 방문

199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그레브 대교구 설립 900주년을 기념하여 크로아티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자그레브 대성당을 방문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늘 나는 크로아티아 땅에 사랑, 화합, 평화의 메시지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맨손으로 전하는 순례자로서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1990년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의 국제적 인정을 위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대성당을 방문하는 동안 알로이시예 스테피나츠 추기경의 묘에서 기도했으며, 그를 "교회의 가장 밝은 인물이자 진정한 사람"이라고 칭했고 1998년에는 그를 시복했다.[22]

교황 베네딕토 16세 또한 2011년 6월 5일 대성당을 방문하여 주일 저녁 기도를 드리고 복자 알로이시예 스테피나츠의 무덤 앞에서 기도했다.

3. 2. 2020년 자그레브 지진

2020년 3월 22일 오전 6시 24분(CET, 중앙유럽표준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규모 5.3 MW, 5.5 ML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시내 중심에서 북쪽으로 7km 떨어진 지점이었다. 이 지진으로 자그레브 대성당이 손상되었는데, 남쪽 첨탑 끝부분이 부러져 인접한 대주교 궁전 지붕으로 떨어졌다.[23] 2020년 4월 17일에는 지진으로 기울어진 북쪽 첨탑이 철거되었다.[24][25][26]

2024년 5월, 대성당은 남북 양쪽 모두 30미터 높이의 첨탑이 없는 상태로 관찰되었다. 크로아티아 건설 회사 "Spegra"는 각 석재 블록(무게 100kg, 일부는 최대 1200kg)을 교체하는 중이며, 3D 프린팅 후 새로운 트래버틴 블록으로 교체한다고 밝혔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파리노트르담 대성당처럼 대부분 탑이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최근 지진 피해 복구의 일환으로 손상된 조각들이 모두 제거되어 약 30미터가량 짧아졌다. 손상되어 제거된 종탑 블록은 대성당 앞에 줄지어 있으며, 각 블록에는 고유한 바코드가 표시되어 있다. 2024년 현재 대성당은 여전히 대대적인 개축 공사 중이며, 정확한 재개장 날짜는 미정이다.[27]

4. 건축

자그레브 대성당 정문 포털 양쪽에는 붉은색 안산암으로 만들어진 3개의 둥근 돌기둥이 있으며, 이는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 성 게오르기우스 등 성인 조각상을 위한 받침대 역할을 한다. 그 위에는 성인의 이름을 적은 리본을 들고 있는 천사가 있다. 헤르만 볼레는 네오 고딕 양식으로 대성당을 리모델링하면서 수많은 가고일로 장식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에는 가고일(프랑스어: gargouille - 목구멍) 형태의 빗물 홈통이 있었고, 용, 개구리, 박쥐 등 괴물 같은 동물 형태의 석상들이 입에서 물을 뿜어내며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했다.[16] 켈트 및 게르만 신화에서 가고일은 밤에 움직이고 낮에는 돌로 변하는 존재로 언급된다.[16]

대성당 종탑 사이 첫 번째 갤러리에는 고막(페디먼트)이 있다. 39m 높이에 위치하며, 15미터 변을 가진 삼각형 모양이다. 성모 마리아, 예수천사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총 무게는 약 9000kg이다. "아기 예수와 천사들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조각상은 비엔나 조각가 요제프 바이어의 작품이며 1890년 자그레브에서 조각되었다. 이 조각상은 안툰 아우구스틴치치의 제자인 블라디미르 헤르레비치가 1997년에 리모델링했다.[16]

대성당에는 8개의 교회 종이 있는데, 북탑에 5개, 남탑에 3개가 있다. 가장 큰 종은 "프레스베토 트로이스트보"라고 불리며 무게는 6톤이다.

13세기부터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그림이나 부조제단의 돌판 위에 놓이기 시작했으며, 14세기에는 고딕 양식의 날개 제단이 등장했는데, 양면에 칠해진 여러 겹의 접이식 패널(트립티크, 폴립티크)이 있었고, 풍성하게 조각된 프레임으로 둘러싸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날개를 버리고 여러 요소로 구성된 건축 제단을 건설했는데, 그 중심에는 제단에 헌정된 성인의 그림이나 조각상이 놓였다. 바로크 양식은 제단의 건축적 형태를 유지하지만 천사성인의 조각상으로 풍성하게 장식한다.

남쪽 본당 입구 오른쪽 종탑 벽에는 각진 글라골 문자 비문이 있는데, 이는 크로아티아인이 기독교교황 요한 4세와 처음 연결되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 비문은 1942년에 새겨졌으며,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슬라바 V' 비슈니 BOGU - 나 스포멘 1300. 고디쉬니체 포크르슈테냐 HRVATSKOGA NARODA KOJI SE ZAVJERI NA VJEČNU VJERNOST 페트로보이에 페치니 프리비쉬 OD NJE OBJEĆANJE OBRANE U SVAKOJ NEVOLJI 드루주바 브라체 HRVATSKOGA ZMAJA 추바주치 성인 프라드예도바 프레포루쿠치 HRVATSKU DOMOVINU 벨리코이 보고로드치''"[17]

("지극히 높으신 신께 영광을 - 크로아티아 민족의 세례 1300주년을 기념하며, 모든 어려움에서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베드로의 동굴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는, 크로아티아 드래곤 형제회의 사회가 선조의 성소를 보호하며, 크로아티아 조국을 위대한 성모님께 추천한다")

글라골 문자 비문 아래에는 마리야 비스트리차의 십자가 12번째 정거장 - "갈보리"의 석고 복사본이 있으며, 안테 오를리치의 작품이다.

대성당 입구 왼편, 북쪽 본당 서쪽 벽에는 성모 승천의 큰 그림이 있다. 그림 아래에는 자그레브 주교 아우구스틴 카조티치(+1322)의 예배당 입구가 있다. 북쪽 종탑 꼭대기에는 높이 2.55m, 너비 1.44m, 무게 1500kg의 십자가가 수리 및 재도금되었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이미 15세기에 오르간을 가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처음 언급된 오르간은 1363년 그라데츠의 성 마르코 교회가 소유했다. 투즈 주교 시대부터 오르간과 성가대는 북쪽 본당에 위치해 있었으며, 오늘날의 성가대와 대형 오르간(수동 4개, 레지스터 78개, 파이프 6068개, 루드비히스부르크에서 온 발커)은 대성당 정문 위에 위치해 있다. 하울릭 대주교가 1855년에 구입한 자그레브 대성당 오르간은 낭만적인 음향 특성을 가진 콘서트 오르간 계열에 속하며, 6,000개 이상의 플루트 파이프, 78개의 레지스터 및 4개의 수동 장치가 있다. 문화재 제로 등급인 이 오르간은 크로아티아 공화국 문화부에서 보호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18] 성모 마리아의 바로크 대리석 제단은 요십 플. 갈주프 주교(+1786)가 성 스테판 예배당을 위해 의뢰했으며, 1778년 조각가 세바스티안 페트루치가 제작하여 1946년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차즈만 챕터의 코르시안 좌석


'''차즈만 챕터의 코르시안 좌석'''

"차즈만 챕터"는 1232년 자그레브 주교 스테판 2세가 설립했으며, 차즈마에서 16세기 중반 터키의 정복 이전까지 신뢰할 수 있는 장소의 역할을 수행했다. 차즈만 캐논은 자그레브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33명이었지만 나중에는 32명의 캐논으로 안정되었다. 좌석 틈새에 있는 기념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안나-카타리나 프랑코판-즈린스키, 반 페타르 즈린스키의 아내이자 이반-안툰 즈린스키의 어머니는 1673년 11월 16일 그라츠에서 포로로 사망했다. 이반 안툰 즈린스키(+1703)의 유골은 아버지와 삼촌 프란-크르스타 프랑코판 옆의 주 제단 뒤 무덤에 안치되어 있다. 니콜라 바카치-에르되디(+1693)는 터키로부터 슬라보니아를 해방시켰으며, 보스니아도 해방시키려 했다. "내 마음은 보스니아로 향한다." 그는 성모 마리아 제단 앞 대성당에 묻혔다. 박사 에우겐 크바테르니크, 브예코슬라프 바흐, 안테 라키야시는 외국 통치에 반란을 일으킨 후 배신당해 1871년 10월 11일 라코비차 근처 매복에서 살해되었다. 그들의 유골은 1921년부터 주 제단 뒤 무덤에 안치되어 있다. 크로아티아 국민 대표 스테판 라디치, 파블로 라디치 및 쥬리 바사리첵은 1928년 6월 20일 베오그라드 국민 의회에서 살해되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제1차제2차 세계 대전의 모든 크로아티아 희생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유골은 조국 전체와 그 너머에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지속적인 기억이었다''."»

축복받은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치(1898 - 1960)는 1937년부터 1960년 사망할 때까지 자그레브 대교구 대주교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선포했고(1952년 11월 2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축복했다(1998년 크로아티아 우리 숙녀 오브 비스트리차). 대성당에는 이반 메슈트로비치가 만든 그리스도를 묘사한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치 추기경의 부조가 있다.

대성당은 1993년에 발행된 크로아티아 1000 쿠나 지폐의 뒷면에 묘사되었다.[19]

정면을 바라볼 때 건물의 너비는 46미터이고 높이는 각각 104m와 105m이다.[21]

4. 1.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

1093년 라슬로 1세(1040-1095)가 주교좌를 시사크에서 자그레브로 옮기면서 기존 교회를 대성당으로 선포하였다.[8] 헝가리안드레 2세 왕이 봉헌한 최초의 자그레브 대성당은 단일 복도의 초기 로마네스크 교회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오늘날 대성당의 남쪽 본당 부지에서 기초의 일부와 앱스의 남쪽과 북쪽 벽에서 그 시대의 프레스코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8]

4. 2. 고딕 양식

1093년 라슬로 1세 (1040-1095)가 주교좌를 시사크에서 자그레브로 옮기면서 기존 교회를 대성당으로 선포했다. 1242년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건물이 파괴되었지만 몇 년 후 주교 티모시 (1263–1287)에 의해 재건되었다. [8]

주교 티모테이 (+ 1287)는 손상된 "타타르 이전 대성당"을 처음부터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를 "티모테이의 대성당"이라고 부른다. 1510년에야 완공되었으며, 주교 요십 유라이 스트로스마이어 (+ 1905)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자그레브의 탁자 교회는 고딕-이탈리아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원래의 모습으로 자그레브 시의 진정한 랜드마크였습니다''".


그의 생애 동안 티모테이는 교회의 새로운 동쪽 부분을 지었는데, 이는 초기 고딕 건축 양식의 세 개의 다각형 앱스로, 그 중 가운데(또는 주요) 앱스는 더 크고 육각형이며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그 볼트는 남쪽과 북쪽 통로의 앱스 볼트보다 높다. 오늘날, 그것은 대성당 동쪽 부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는 또한 북쪽 본당의 바깥 벽을 따라 성물실("티모테이의 성물실")을 건설했다. [9]

성소의 앱시스 공간은 티모테이에 의해 앱스의 돌출부에 배치된 33개의 일련의 전례 좌석으로 장식되었다. 티모테이는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으로 성물실을 건설했는데, 볼트의 갈비뼈가 둥근 오목한 모양의 볼트의 핵심(쐐기돌)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물실의 볼트와 벽에 있는 그림은 13세기 후반에 그려졌으며, 북부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9] 북쪽 앱스는 1275년에 완공되었고, 티모테이는 그곳에서 성 라슬로 제단을 봉헌했으며, 1284년에는 성모 마리아 제단이 있는 남쪽 앱스를 완성했다. 11세기와 12세기의 비슷한 모양을 닮은 세 개의 양식화된 기독교 십자가가 있는 흰색 석판은 1284년 성모 마리아 제단의 원래 조각이다. 티모테이 주교는 1287년에 이곳에 묻혔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대성당을 위해 그의 그림 몇 점을 그렸다. [9]

티모테이의 사망(+1287) 후, 건설은 1344년에야 재개되었는데, 당시 크로아티아의 반 및 주교 스테판 3세 카니자이 (+1374)가 새로운 중앙 및 북쪽 본당을 건설했다.[11] 대성당 공사는 천천히 진행되었다. 1400년경 '''주교 에버하르트''' (+1419) 시대에 중앙 및 북쪽과 어느 정도 남쪽 본당이 완공되었고, 1433년까지 주교 알벤 (+1433)은 남쪽 본당과 고딕 양식의 두 종탑의 하부를 완성했다. [11] 투즈 주교 (+1499)의 노력 덕분에 대성당은 제단과 그림으로 풍성하게 채워졌고,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리스도의 수난 3폭 제단화가 남쪽 앱스의 성모 마리아 제단에 배치되었다.

성경과 함께 중세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독서는 동물 우화집 또는 중세 자연사로, 식물, 동물, 악마, 및 기타 신화 속 생물 목록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중의 믿음에 따르면 신이 마법의 속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존재의 신비주의와 상징은 대성당의 예술적 설비의 일부가 되었고, 특히 프랑스의 고딕 대성당(예: 샤르트르 대성당)이 이러한 것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었다. 자그레브 대성당에도 그러한 특이한 인물들이 있다. 이 모든 특이한 생물과 괴물들은 실제로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구상의 하나님의 집을 함께 지키고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투즈 주교 (+1499)의 노력으로 대성당은 고딕 건축르네상스 제단과 그림으로 풍성하게 채워졌으며, 1510년까지 세 개의 본당에 똑같이 높은 고딕 메쉬 볼트와 지붕이 완공되었다. 볼레는 네오 고딕 양식의 리모델링 동안 대성당을 수많은 가고일로 장식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에는 가고일(프랑스어: gargouille - 목구멍)의 형태로 빗물을 배수하기 위한 홈통이 있었으며, 용, 개구리, 박쥐, 기타 괴물 같은 동물 형태의 석상들이 입에서 물을 뿜어내며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했다. 켈트 및 게르만 신화에서 가고일은 밤에 움직이고 낮에는 돌로 변하는 존재로 언급된다. 그들은 아이들을 납치하여 잡아먹는다.[16]

4. 3. 바로크 양식

1645년 자그레브를 황폐하게 만든 대규모 화재로 대성당 전체 폭에 걸쳐 아치가 무너졌다. 보그단 주교(+1647)는 건축가 알버탈과 수리 계약을 체결했는데, 그 계약서에서 그는 바로크 시대에 원래의 고딕 건축 양식을 개조에 반복할 것을 요구했다. "''우선, 파괴된 볼트, 기둥 및 코러스, 즉 갱을 원래의 제브제스마 형태로 복원하고, 훌륭하고 튼튼한 돌로 튼튼하고 굳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후 2세기 동안, 1880년 지진까지는 주로 교회의 내부를 끊임없이 재건하고 수리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17세기에 오스만족의 위협 때문에 남쪽에 단일 요새화된 르네상스 망루가 세워졌고, 군사 관측소로 사용되었다.[12]

4. 4. 네오고딕 양식

1880년 자그레브 지진으로 대성당의 주 본당이 붕괴되고 타워가 심하게 손상되자, 헤르만 볼레의 주도로 네오 고딕 양식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쪽에 104m 높이의 첨탑 두 개가 세워졌다.[14]

이자도르 크르슈냐비의 후원 아래 건축가 헤르만 볼레의 지휘로 1880년부터 1902년까지 네오고딕 양식으로 개축이 이루어져, 자그레브 대성당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61년에는 성 마르코 교회처럼 유약을 바른 타일로 만든 지붕구리판으로 대체되었다.[15]

199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성당 외부 개축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높고 뾰족한 종루는 독일 고딕 양식의 예시이며, 1889년부터 1899년까지 건설되었다. 북쪽 종탑은 108.2m, 남쪽 종탑은 108.16m 높이이다. 각 종탑에는 60m 높이에 청동으로 만들어지고 금박을 입힌 4개의 시계가 있으며, 무게는 500kg이다.[15]

정문 포털 양쪽에는 붉은색 안산암으로 만든 3개의 둥근 돌기둥이 있으며,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 성 게오르기우스 등 성인들의 조각상을 위한 받침대 역할을 한다. 꼭대기에는 성인의 이름을 적은 리본을 든 천사가 있다. 볼레는 네오 고딕 양식 리모델링을 하며 대성당을 가고일로 장식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에는 가고일 형태의 빗물 배수 홈통이 있었고, 용, 개구리 등 괴물 같은 동물 형태의 석상들이 입에서 물을 뿜어내며 악마로부터 교회를 보호했다.[16]

종탑 사이 첫 번째 갤러리에는 고막 (페디먼트)이 있다. 39m 높이에 위치하며, 15미터 변을 가진 삼각형 모양이다. 성모 마리아, 예수천사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총 무게는 약 9000kg이다. "아기 예수와 천사들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조각상은 비엔나 조각가 요제프 바이어의 작품이며 1890년 자그레브에서 조각되었다. 이 조각상은 안툰 아우구스틴치치의 제자인 블라디미르 헤르레비치가 1997년에 리모델링했다.[16]

5. 내부

자그레브 대성당 내부에는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츠 추기경의 석관과 글라골 문자 비문이 있다.

5. 1.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츠 추기경의 석관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츠 추기경의 석관이 자그레브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5. 2. 글라골 문자 비문

6. 사진

동쪽 모습


자그레브 대성당의 네오 고딕 양식 탑


1970년대

참조

[1] 웹사이트 Inside of the Cathedral https://katedrala.hr[...] 2024-12-05
[2] 웹사이트 Inside of the Cathedral https://katedrala.hr[...] 2024-12-05
[3] 웹사이트 Inside of the Cathedral https://katedrala.hr[...] 2024-12-05
[4] 웹사이트 Inside of the Cathedral https://katedrala.hr[...] 2024-12-05
[5] 웹사이트 Zvona zagrebačke katedrale http://www.glas-konc[...]
[6] 간행물 Izvod iz registra kulturnih dobara Republike Hrvatske br. 01/10 - Lista preventivno zaštićenih dobara https://narodne-novi[...] Ministry of Culture (Croatia)
[7] 간행물 Razbijene zastarjele predrasude http://www.matica.hr[...] Matica hrvatska 2018-04-07
[8] 웹사이트 Đavlova glava u zagrebačkoj katedrali https://www.hkv.hr/r[...] hkv.hr 2024-06-15
[9] 웹사이트 Sve tajne crkvenog blaga: Skrivali ga od ratova, lukavih kradljivaca, a njegova je vrijednost - neprocjenjiva https://www.tportal.[...] 2023-07-27
[10] 웹사이트 Relikvije, kosti, krv, ljubavna pisma: RTL Direkt otkriva zanimljivosti riznice zagrebačke katedrale! https://danas.hr/zan[...] 2023-07-27
[11] 웹사이트 TIMOTEJEVA KATEDRALA https://www.hkv.hr/r[...] 2024-06-15
[12] 웹사이트 Biskup Bogdan s Alberthalom ugovor o popravku https://www.hkv.hr/r[...] 2024-06-15
[13] 웹사이트 BOLLĖOVA KATEDRALA https://www.hkv.hr/r[...] 2024-06-15
[14] 웹사이트 Archdiocese of Zagreb http://www.zg-nadbis[...]
[15] 웹사이트 Bolleova Katedrala https://www.hkv.hr/r[...] 2024-06-15
[16] 웹사이트 Rigalice https://www.hkv.hr/r[...] 2024-06-15
[17] 웹사이트 Južna lađa https://www.hkv.hr/r[...] 2024-06-16
[18] 웹사이트 Visit Zagreb https://www.visitzag[...] 2024-06-15
[19] 웹사이트 Croatian National Bank http://www.hnb.hr
[20] 뉴스 Save your tears for the cathedral, its promise is a greater symbol of Zagreb than its towers https://www.timeout.[...] 2020-04-22
[21] 웹사이트 Zagreb Cathedral of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 Visit Zagreb https://www.visitzag[...] 2022-10-09
[22] 웹사이트 Pape u Katedrali https://katedrala.hr[...] 2024-04-14
[23] 웹사이트 Sa zvonika katedrale pao križ i jako oštetio Nadbiskupski dvor kardinala Bozanića https://www.vecernji[...] 2020-03-22
[24] 웹사이트 Vrh sjevernog tornja zagrebačke katedrale uspješno uklonjen i spušten na tlo https://dnevnik.hr/v[...] 2020-04-18
[25] 웹사이트 Eksplozijama odvojen toranj katedrale, prizemljen je https://www.index.hr[...] 2020-04-18
[26] 웹사이트 Rušenje tornja zagrebačke katedrale http://hr.n1info.com[...] 2020-04-18
[27] 뉴스 Skoro nitko nije primijetio da je zagrebačka katedrala skraćena za 30 metara: ‘To nije bio plan‘ https://www.jutarnji[...] 2024-05-23
[28] 웹사이트 ザグレブ大聖堂(Kotobankl) https://kotobank.jp/[...]
[29] 서적 一歩づつ ザグレブ クロアチア、ザグレブ市内散歩 ザグレブ市観光局 2012
[30] 웹사이트 令和2年度外務大臣表彰(個人)|外務省 https://www.mofa.go.[...]
[31] 웹사이트 Foreign Minister’s Commendations for FY 2020 (Individuals)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https://www.mof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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