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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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월면은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하는 면이다. 삼국 시대에는 백제에 속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자월리와 승봉리가 남양부에, 이작리는 인천부에 속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부천군 영흥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자월면으로 승격되었다. 자월면은 자월리, 이작리, 승봉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지역의 지명 유래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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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월면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자월면 |
한자 표기 | 紫月面 |
영문 표기 | Jawol-myeon |
광역시도 | 인천광역시 |
시군구 | 옹진군 |
면적 | 17.72 |
통계 정보 | |
세대 | 775 |
세대 조사 기준일 | 2020년 12월 31일 |
인구 | 955 |
인구 조사 기준일 | 2022년 2월 |
법정리 | 3 |
행정리 | 7 |
반 | 26 |
면사무소 정보 | |
면사무소 주소 | 자월서로 164(자월리 1024) |
홈페이지 | 자월면사무소 |
2. 역사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다. 조선시대에는 자월리·승봉리는 남양부에, 이작리는 인천부에 속했다.[1]
1914년 3월 1일 부군면 통폐합으로 자월리와 이작리는 경기도 부천군 영흥면에, 승봉리는 덕적면에 속하게 되었다.[1] 1966년 7월 1일 영흥면 자월출장소가 자월리와 이작리에 설치되었고,[1] 1973년 7월 1일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옹진군에 편입되었다.[1] 1983년 2월 15일 영흥면 자월출장소가 '''자월면'''으로 승격되었고, 승봉리가 자월면으로 편입되었다.[1] 1995년 3월 1일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으며,[1] 2019년 2월 8일 이작리에 이작출장소가 설치되었다.[1]
2. 1. 삼국 시대 ~ 조선 시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다.[1] 조선시대에는 자월리·승봉리는 남양부에, 이작리는 인천부에 속했다.[1]2. 2. 일제 강점기 ~ 현재
1914년 3월 1일 부군면 통폐합으로 자월리와 이작리는 경기도 부천군 영흥면에, 승봉리는 덕적면에 속하게 되었다.[1] 1966년 7월 1일 영흥면 자월출장소가 자월리와 이작리에 설치되었고,[1] 1973년 7월 1일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옹진군에 편입되었다.[1] 1983년 2월 15일 영흥면 자월출장소가 '''자월면'''으로 승격되었고, 승봉리가 자월면으로 편입되었다.[1] 1995년 3월 1일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으며,[1] 2019년 2월 8일 이작리에 이작출장소가 설치되었다.[1]3. 행정 구역
wikitable
법정리 | 행정리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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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월리 | 자월1리 | 면사무소 소재지 |
자월2리 | ||
자월3리 | ||
이작리 | 이작1리 | 이작출장소 소재지 |
이작2리 | ||
이작3리 | ||
승봉리 | 승봉리 |
3. 1. 법정리 및 행정리 구성
wikitable법정리 | 행정리 | 비고 |
---|---|---|
자월리 | 자월1리 | 면사무소 소재지 |
자월2리 | ||
자월3리 | ||
이작리 | 이작1리 | 이작출장소 소재지 |
이작2리 | ||
이작3리 | ||
승봉리 | 승봉리 |
4. 지명 유래
조선시대 관가에 근무하던 사람이 귀향살이를 와서 첫날 밤 억울함과 신세를 한탄하며 하늘을 쳐다보니, 유난히 밝은 보름달이 갑자기 붉어지더니 바람이 일어나고 폭풍우가 몰아쳤다고 한다. 그는 하늘도 자기의 억울함을 알아 주는가 싶어 이곳의 이름을 자월도라 지었다고 한다. 그는 귀향살이를 끝내고 돌아갈 때 큰 바위에 자월도라고 새기고 떠났는데, 그 후부터 이 마을은 자월리라 불리고 있다고 전해진다.[2]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즉도"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이즉도는 독갑도 동쪽에 있으며, 주위가 35리이고, 목장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2] 여기서 이즉도는 지금의 대이작도와 소이작도를 합쳐 부른 이름으로 추정된다.[2]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작도 지역은 해적 떼들이 점거하고 있었다.[2] 이때 면적이 좁은 소이작도에는 큰 해적떼가 점거하고 있어 대이작이라 하였고 면적이 넓은 대이작도에는 작은 해적떼가 점거하고 있었다.[2] 소이작도는 대이작도 서쪽에서 방향을 길게 서쪽으로 두고 형성된 섬으로 대이작도의 절반가량으로 지형이나 산세가 모두 대이작을 닮아서 마치 흉내를 낸 것 같다.[2] 이 섬은 옛날부터 왜해적(倭海賊)떼가 점거하고 있었으며, 임진왜란이나 기타 국난이 있었을 때에 육지에서 피난을 와서 살던 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2] 이작1리 남쪽에 있는 계남리는 마을 형태가 게 모양으로 생겼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옛날부터 게가 많아 이 지역 주민은 게로 끼니를 이어 나갔으며, 이 게는 귀신을 쫓는다 하여 집집마다 게를 잡아 처마 밑에 매달아 놓았다 하여 ‘게남리’라 부르다가 변음되어 '계남리‘로 바뀌어 전해진다.[2] 벌안이라는 지명은 벌집 모양의 그물을 뗏목처럼 쳐놓고 고기를 잡았다 하여 ‘벌안’이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2]
아득한 옛날에 신(辛)씨와 황(黃)씨가 고기를 잡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대피하였다. 며칠 동안 굶주린 채 섬을 둘러보니 경관과 산세가 좋아 정착하기로 하고,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신황도(辛黃島)라 불렀다. 그러다 이곳의 지형이 봉황새의 머리 모양과 같다 하여 승봉도(昇鳳里)라 개칭되었다.[2] 승봉도 내 안(큰)마을은 주민들이 주당죽에서 거주하다가 질병으로 인해 이주해 오면서, 많은 사람이 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2]
4. 1. 자월리(자월도)
조선시대 관가에 근무하던 사람이 귀향살이를 와서 첫날 밤 억울함과 신세를 한탄하며 하늘을 쳐다보니, 유난히 밝은 보름달이 갑자기 붉어지더니 바람이 일어나고 폭풍우가 몰아쳤다고 한다. 그는 하늘도 자기의 억울함을 알아 주는가 싶어 이곳의 이름을 자월도라 지었다고 한다. 그는 귀향살이를 끝내고 돌아갈 때 큰 바위에 자월도라고 새기고 떠났는데, 그 후부터 이 마을은 자월리라 불리고 있다고 전해진다.[2]4. 2. 이작리(이작도)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즉도"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이즉도는 독갑도 동쪽에 있으며, 주위가 35리이고, 목장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2] 여기서 이즉도는 지금의 대이작도와 소이작도를 합쳐 부른 이름으로 추정된다.[2]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작도 지역은 해적 떼들이 점거하고 있었다.[2] 이때 면적이 좁은 소이작도에는 큰 해적떼가 점거하고 있어 대이작이라 하였고 면적이 넓은 대이작도에는 작은 해적떼가 점거하고 있었다.[2] 소이작도는 대이작도 서쪽에서 방향을 길게 서쪽으로 두고 형성된 섬으로 대이작도의 절반가량으로 지형이나 산세가 모두 대이작을 닮아서 마치 흉내를 낸 것 같다.[2] 이 섬은 옛날부터 왜해적(倭海賊)떼가 점거하고 있었으며, 임진왜란이나 기타 국난이 있었을 때에 육지에서 피난을 와서 살던 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2] 이작1리 남쪽에 있는 계남리는 마을 형태가 게 모양으로 생겼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옛날부터 게가 많아 이 지역 주민은 게로 끼니를 이어 나갔으며, 이 게는 귀신을 쫓는다 하여 집집마다 게를 잡아 처마 밑에 매달아 놓았다 하여 ‘게남리’라 부르다가 변음되어 '계남리‘로 바뀌어 전해진다.[2] 벌안이라는 지명은 벌집 모양의 그물을 뗏목처럼 쳐놓고 고기를 잡았다 하여 ‘벌안’이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2]4. 3. 승봉리(승봉도)
아득한 옛날에 신(辛)씨와 황(黃)씨가 고기를 잡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대피하였다. 며칠 동안 굶주린 채 섬을 둘러보니 경관과 산세가 좋아 정착하기로 하고,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신황도(辛黃島)라 불렀다. 그러다 이곳의 지형이 봉황새의 머리 모양과 같다 하여 승봉도(昇鳳里)라 개칭되었다. 승봉도 내 안(큰)마을은 주민들이 주당죽에서 거주하다가 질병으로 인해 이주해 오면서, 많은 사람이 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참조
[1]
웨이백
대동여지도를 인터넷 지도처럼 볼 수 있다.
http://mirror.puzzle[...]
2018-09-04
[2]
웹사이트
자월면의 유래
http://www.ongji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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