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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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기려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한 의사이자 사회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용천군 출신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외과 의사로 활동하며 간 절제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부산 복음병원 설립,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 등 의료 및 사회 복지 분야에 기여했으며, 막사이사이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활동은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과 사회복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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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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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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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인동 장씨 |
호 | 성산(聖山) |
별칭 |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 |
출생일 | 1911년 10월 5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리 |
사망일 | 1995년 12월 25일 (84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
국적 | 대한민국 |
종교 | 개신교(장로회) |
학력 |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
가족 | |
부 | 장운섭 |
모 | 최윤경 |
배우자 | 김봉숙 |
자녀 | 장가용(차남) |
경력 | |
직업 | 외과 의사, 의학자, 대학 교수, 저술가 |
활동 기간 | 1940년 ~ 1995년 |
주요 활동 |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 서울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
저술 활동 | |
장르 | 수필, 외과의학교육 저술 |
수상 | |
수상 내역 | 라몬 막사이사이 상 (1979) |
2. 생애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조수 및 강사로 의료계에 발을 들였다. 1940년부터는 평양 연합기독(기홀)병원 외과 과장, 평양도립병원장, 평양의과대학 외과 교수, 김일성종합대학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북한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내려와 제3육군병원에서 군속으로 근무했다. 1951년부터 1976년까지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으로 재직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 봉사에 헌신했다. 이 시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1953년~1956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장 및 외과 교수(1956년~1961년)를 겸임하기도 했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서울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부산 복음간호전문대학장,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 및 대표이사, 한국 간 연구회 초대 회장, 청십자병원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 한국 의료 발전과 사회 복지에 기여했다.
1976년 부산 복음병원장 정년 퇴임 후, 거제도 고현보건원, 부산아동병원 등에서 봉사 활동을 이어갔다. 1979년 인제대학교 부산백병원 명예원장, 1983년 청십자병원 명예원장, 1985년 한국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1993년 한국청십자 사회복지회 명예 대표이사를 마지막으로 공식 활동을 마감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를 졸업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시절 백인제 교수의 지도로 외과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2년에는 의사인 김하식의 장녀 김봉숙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젊은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관비로 운영되는 경성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수석으로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백인제 교수에게 더 배우기 위해 경성 의학 전문학교 조교로 들어갔다. 1940년 나고야 대학에서 충수염에 관한 세균학 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9]
2. 2. 북한에서의 활동
1940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평양 연합기독(기홀)병원 외과 과장을 역임했다.[1]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2월까지는 평양도립병원장을,[1] 1947년 1월부터 1950년 11월까지는 평양의과대학 외과 교수를 역임했다.[1] 김일성종합대학 의과대학 교수로도 활동했다.[1] 1947년에는 북한 정부로부터 모범 노동자 상을 받았다.[2]2. 3. 한국전쟁과 월남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장기려는 둘째 아들 장가용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1] 유엔군과 한국군이 평양을 탈환했을 때, 장기려는 대학 병원과 야전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4] 한국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 그는 환자 수송 구급차를 몰고 남쪽으로 향했다.[4] 피난민 행렬 속에서 아내와 자녀들을 발견했지만, 응급 환자들이 타고 있어서 가족들을 차에 태워달라고 부탁할 수 없었다.[4] 둘째 아들만이 그와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고, 그는 이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4]이듬해 장기려는 부산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진료소(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를 설립하여, 1976년 6월까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4]
2. 4. 부산에서의 의료 및 사회 활동
1950년 12월, 한국 전쟁의 혼란 중에 가족을 뒤로 하고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한 장기려는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다. 이 병원은 현재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장기려는 복음병원에서 피난민을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제공하며 1976년 6월까지 25년간 원장으로 재직했다.[10]장기려는 간암 연구에 매진하여 1959년에는 한국 최초로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간 연구를 지속하여, 1974년에는 한국간연구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68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였다. 이는 현재 대한민국 의료보험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장미회[10] 창설, 부산 생명의 전화 설립, 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 등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주도했다. 1976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소외 계층과 지역 사회의 복지 증진에 힘썼다.
2. 5. 노년과 죽음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1]3. 의학적 업적
장기려는 간 절제술 분야의 선구자로, 1943년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 절제술에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하였다.[10] 이후 '간내 혈관 및 담관계의 형태학적 연구', '간 절제술의 절제단의 처치법', '간경변증시 간 절제의 한계 및 간의 급성 실조시 대상의 방법들에 관한 실험' 등을 진행하며 간 수술법을 발전시켰다.
1974년 대한간연구학회 초대 회장을 맡아 간 및 담도 수술 연구를 이끌었으며, 이 학회는 1982년 부산간연구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0년 대한의학회 학술대회에서 "한국인의 간내 혈관 및 담도의 형태학적 연구"를 발표하여 담도 수술의 기초를 제공했다. 장기려의 수술팀은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로부터 다량의 간을 절제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여러 차례 간 절제 수술을 더 시행하여 간 절제술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1979년에는 20년간 한국에서 실시된 189건의 간 대량 절제 수술 사례를 수집 및 분석하여 간암의 부위에 따라 수술법을 달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장기려는 봉와직염, 패혈증, 충수염 등 다양한 질병을 연구했으며, "후복막 봉와직염", "근염의 조직 임상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3] 1961년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1969년에는 김희규, 홍필훈 교수와 함께 ''외과학'' 교과서를 저술하여 외과학 발전에 기여했다.[3]
3. 1. 간 절제술의 선구자
1943년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 절제술에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하였다.[10] 이후 ‘간내 혈관 및 담관계의 형태학적 연구’, ‘간 절제술의 절제단의 처치법’, ‘간경변증시 간 절제의 한계 및 간의 급성 실조시 대상의 방법들에 관한 실험’ 등을 진행했다. 1959년 원발성간암에 대한 간우협절제수술(간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하였고,[10] 1979년에는 20년간 한국에서 실시된 189건의 간 대량 절제 수술 사례를 수집 및 분석하여 간암의 부위에 따라 수술법을 달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1974년 대한간연구학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학회는 간 및 담도 수술을 연구했으며, 1982년 부산간연구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60년 10월 대한의학회 학술대회에서 "한국인의 간내 혈관 및 담도의 형태학적 연구"를 발표했는데, 이는 담도 수술의 기초를 제공하여 의학적으로 중요했다. 장기려의 수술팀은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로부터 다량의 간을 절제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8번의 간 절제 수술을 더 시행하여 간 절제술이 위험한 수술 절차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담도 수술은 이러한 연구로 인해 크게 발전했으며, 1961년 6월 대한의학회 학술대회에서 이 수술에 대해 발표하고 한국 학술상을 받았다.
3. 2. 외과학 발전 기여
장기려는 봉와직염, 패혈증, 충수염 등 다양한 질병을 연구했다. "후복막 봉와직염", "근염의 조직 임상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을 ''일본 외과학회지''에 발표했다.[3] 1961년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3] 1969년에는 김희규, 홍필훈 교수와 함께 ''외과학'' 교과서를 저술했다.[3]4. 사회 공헌
그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외과의사였지만 평생 낮은 곳에서 청빈한 삶을 살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베푼 사회봉사자였다. 기독교 신앙에 기반해 65년간 봉사, 박애, 무소유를 실천했으며,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돈으로 수술을 해주고, 그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밤에 몰래 환자를 탈출시키기도 했다.[1] 그는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1]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으며, 1995년 세상을 떠나던 해에 인도주의 실천 의사 상 등을 받았다.[1]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않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았다.[1]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묘지는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내에 있다. 그는 현재까지 이영춘, 문창모, 안영모, 김찬우, 이태석, 안수현 등과 함께 "한국의 슈바이처"라 칭송되고 있다.[1]
4. 1.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해 현행 의료보험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1960년대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비 부담이 컸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북유럽의 의료보험 제도를 본따 청십자 의료보험 협동조합을 창설하여 한국 건강보험 제도의 모태가 되었다.[3]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해 부족과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두었다.[3]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설립은 대한민국 의료 보험의 주요 기반을 제공했다.[6]4. 2.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
1951년 복음진료소(현재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개설을 시작으로 청십자사회복지회, 장애인 재활 협회 등 각종 복지단체를 세우고 1976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소외계층과 지역사회의 복지 증진에 헌신했다. 영세민과 장애인들의 복지 증진에도 힘을 써서 의료복지사업, 취업 알선, 장학사업, 탁아소 운영 등을 통해 장애인들도 건전한 사회 일원으로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등 평생 동안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했다.[1] 특히, 가난한 환자를 구제하기 위해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해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자 현행 의료보험제도의 효시를 탄생시켰다.[1] 1976년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하였다.[1]5. 종교 활동
장기려는 개신교 장로교 소속 공대위원장(공동대표위원장)이었지만,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함석헌, 김교신 등과 교제했으며, 32년간 무교회주의 성격의 "부산모임" 집회를 자신의 병원 사택(舍宅)과 사무실에서 주관했으며, 무교회주의 교육기관인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후원회장을 맡기도 하였다.[11]
6. 수상 내역
연도 | 수상 내역 |
---|---|
보건의 날 공로상 (부산시장) | |
대한의학협회 학술상 (대통령상) | |
선한시민상 (부산시) | |
1976년 | 국민훈장 동백장 (대통령) |
인도장 금상 (대한적십자사) | |
1979년 | 라몬 막사이사이 상 사회봉사 부문 |
제23회 부산시 문화상 (지역사회개발부문상) | |
국제라이온스 인도상 | |
인간상록수 (청년지역사회개발상록회) | |
제1회 호암상 사회봉사부문 (삼성복지재단) | |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서울대학교 총장) | |
제4회 인도주의실천의사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 |
재미한국인의사회 봉사상 | |
1995년 |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통령, 추서) |
2006년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액 |
7. 저서
제목 | 출판사 | 발행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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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사랑 | 규장문화사 | 1980년 10월 15일 |
생명과 사랑 | 규장문화사 | 1980년 2월 5일 |
나의 회고록 | ||
외길한평생 | 장학사 | 1981년 7월 20일 |
할아버지 손은 약손 | 소년 한국일보 | 1992년 10월 1일 |
외과학 | 한국외과학연구소 | 1969년 8월 20일 |
간장 및 담관계 질환 | 최신의학사 | 1982년 2월 25일 |
아름다운 사람 | 문화문고 | 1998년 12월 25일 |
위인전기전집 - 한국편 장기려 | 래더교육 | 1997년 3월 22일 |
《장기려 -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 (김은식 지음, 이윤엽 그림) | 봄나무 |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4213019/http://hongsungsa.com/home/board.php?board=book&sort=user_add4&search=%EC%9E%A5%EA%B8%B0%EB%A0%A4&command=body&no=394 장기려, 그 사람》 (지강유철 지음) | 홍성사 | 2007년 2월 20일 |
8. 평가 및 유산
그는 뛰어난 외과 의사였지만, 평생 낮은 곳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베풀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1951년 복음진료소(현재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를 시작으로, 청십자사회복지회, 장애자재활협회 등 다양한 복지단체를 설립하고 1976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소외 계층과 지역 사회의 복지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1] 영세민과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의료복지사업, 취업 알선, 장학사업, 탁아소 운영 등을 통해 장애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평생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했다.[1] 특히, 1968년 가난한 환자들을 돕기 위해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이는 대한민국 의료보험제도의 시작점이 되었다.[1]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65년간 봉사, 박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돈을 사용하거나, 밤에 몰래 환자를 돕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1] 그는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1]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수상했고, 1995년 세상을 떠나던 해에 인도주의 실천 의사 상 등을 받았다.[1] 평생 자신의 집 없이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았던 그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에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
묘소는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있다.[1]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고,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그는 이영춘, 문창모, 안영모, 김찬우, 이태석, 안수현 등과 함께 "한국의 슈바이처"로 칭송받고 있다.[1]
참조
[1]
논문
Seong San Dr. Chang Kee Ryo - Searching for the Secret of Life
http://www.dbpia.co.[...]
Hanshin University, Theology Research (한신대학교 한신신학연구소)
[2]
문서
1911년 10월 5일
1911-10-05
[3]
서적
장기려 그사람
[4]
웹사이트
CITATION for Chang Kee-Ryo
http://www.rmaf.org.[...]
Ramon Magsaysay Foundation
1979-08-31
[5]
간행물
The Ramon Magsaysay Awards
Ramon Magsaysay Award Foundation
1979
[6]
문서
경성 (Gyeongseong, 京城)
[7]
뉴스
「한국의 슈바이처」張起呂(장기려)박사 별세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5-12-26
[8]
뉴스
학술/ 장기려 박사의 가난과 고난 섬김의 삶을 기리며
http://www.ecumenica[...]
교회연합신문
[9]
서적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
[10]
문서
간질환자 치료모임
[11]
문서
국제 교회개혁 모임인 종들의 모임
2010-04-10
[12]
서적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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