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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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전의는 당나라 말기, 오대 십국 시대의 인물로, 황소의 난에 참여했다가 당나라에 항복하여 낙양령이 되었다. 민생 안정과 낙양 부흥에 힘썼으며, 이한지를 몰아내고 하양 절도사가 된 후 주전충을 도왔다. 후량 건국 후 위왕에 봉해졌으나, 주전충의 난행을 겪었다. 후량 멸망 후 후당에 항복하여 하남윤, 제왕이 되었으나, 이사원 등에게 미움을 받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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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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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성 | 장(張) |
이름 | 전의(全義) |
자 | 거언(居言), 언(言) |
시호 | 충숙(忠肅) |
작위 | 기국공(岐國公), 제왕(齊王) |
묘호 | 없음 |
출생 | 847년 |
사망 | 926년 |
시대 | 당나라, 후량 |
국적 | 당나라, 후량 |
관직 | |
주요 관직 | 검교사공(檢校司空),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하중윤(河中尹),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중서령(中書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장종식(張宗奭) |
아들 | 장국유(張國維) |
2. 당나라 시기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룸)
2. 1. 출신 배경 및 황소 휘하에서의 활동
장전의는 852년 당 선종 치세에 태어났다. 그의 본래 이름에 대해서는 기록이 나뉘는데, 《구오대사》에는 장거연(張居言)으로,[1] 《신오대사》에는 장언(張言)으로 기록되어 있다.[4] 그의 가문은 임보(臨濮, 현재의 산둥성 허저시) 출신으로, 할아버지 장련(張璉)과 아버지 장성(張誠) 모두 대대로 농사를 짓는 농민 집안이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소작농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1]장전의는 젊은 시절 임보현(臨濮縣)의 관청에서 농지를 관리하는 하급 관리로 일했으나, 당시 현령에게 자주 모욕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 희종의 건부(乾符) 연간(874년–879년) 말, 대규모 농민 봉기인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장전의는 황소가 이끄는 반란군에 가담하였다.[1]
이후 황소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고 당 희종을 청두로 몰아낸 뒤, 881년경 새로운 나라인 제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했다.[5] 장전의는 이 제나라 정권에서 문관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상서(吏部尚書, 문관부 장관)와 물자 운송을 책임지는 운송 담당관을 맡아 활동했다.[1] 농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혼란기에 반란군에 합류해 점차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2. 2. 제갈상과 제갈중방 휘하에서의 활동
황소가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장안에서 쫓겨난 후, 장전의는 하양(河陽, 현대 자오쭤, 허난성) 절도사 제갈상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는 제갈상 휘하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제주(澤州, 현대 진청, 산시성) 자사로 임명되었다.[1]886년 제갈상이 사망하자, 장전의와 제갈상의 또 다른 부관 유경(劉經)은 제갈상의 아들 제갈중방을 임시 절도사로 지지했다. 그러나 유경이 실권을 장악하려 하자 다른 장교들의 반감을 샀다. 같은 해 말, 유경은 장교 이한지를 의심하여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유경은 뤄양을 기지로 삼아 민치(澠池, 현대 뤄양)에 주둔하던 이한지를 기습 공격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한지에게 패배했다. 유경은 뤄양을 버리고 황하 북쪽 하양으로 도망쳤다. 이한지가 추격해오자 유경은 장전의에게 황하를 건너는 이한지를 막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유경의 권력 장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장전의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한지와 합류하여 함께 하양을 공격했다. 그러나 하양 함락에는 실패하고 회주(懷州, 현대 뤄양)로 물러났다.[6]
하양 절도사 내부가 혼란한 틈을 타, 펑궈(奉國, 현대 주마뎬, 허난성)에서 황제를 자칭한 전직 당나라 장군 진종권이 부하 장군 손유를 하양으로 보냈다. 손유가 곧 하양을 점령하자 제갈중방은 쉬안우(宣武, 현대 카이펑, 허난성) 절도사 주전충에게 달아났다. 손유는 하양 절도사를 자칭했다. 그러나 장전의는 회주를, 이한지는 제주를 각각 점령하여 손유에게 저항했다.[6] 이후 진종권이 주전충에게 크게 패배하자 손유도 하양에서 철수했다. 장전의와 이한지는 다시 힘을 합쳐 이한지는 하양을, 장전의는 뤄양을 장악했다. 그들은 당시 주요 군벌 중 하나인 헤둥(河東, 현대 타이위안, 산시성) 절도사 이극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극용은 부하 장교 안금준(安金俊)을 보내 제주 자사를 맡기고 이한지와 장전의를 지원하게 했다. 또한 이극용은 조정에 보고하여 이한지를 하양 절도사로, 장전의를 하남부(河南, 즉 뤄양)의 시장으로 임명했다.[7]
2. 3. 이한지와 이극용의 가신으로서
장전의는 처음에는 자신의 하남 부가 속한 하양 절도사였던 이한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7] 하지만 농민 출신이었던 장전의는 이한지에게 경멸을 받았고, 이한지는 장전의의 농업 진흥 노력을 가볍게 여겼다. 또한 이한지는 장전의에게 끊임없이 물품을 요구했으며,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장전의의 부하들을 잡아 매질하기도 했다.[7] 장전의는 처음에는 이한지를 두려워하는 척하며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7]문덕 원년 (888년), 이한지가 호국 절도사(산시성 윈청시에 본부가 있음) 왕충영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장전의는 왕충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양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한지의 가족을 사로잡았다. 이후 스스로 하양 절도사를 칭했다.[7] 이에 이한지는 산서성 지역의 강력한 군벌이었던 이극용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장전의를 공격했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몰린 장전의는 당시 세력을 키우던 주전충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주전충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장전의는 주전충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2. 4. 주전충의 가신으로서
문덕 원년(888년), 장전의는 하양 절도사 이한지를 몰아내고 스스로 하양 절도사가 되었다. 이에 이한지는 제주(澤州)로 도주하여 이극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극용은 부하 강준립, 이존효, 설아단(薛阿檀zho), 사엄(史儼zho), 안금준, 안휴휴(安休休zho)를 보내 하양을 포위 공격하게 했다. 성안의 식량이 떨어지자 장전의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인질로 주전충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주전충은 부하 정회, 갈종주, 우존절(牛存節zho)을 보내 장전의를 구원했다. 주전충의 군대는 이극용의 군대를 격파하고 태행산을 통해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위협을 느낀 강준립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주전충은 정회를 하양의 임시 절도사로 임명하고 장전의를 하남 윤으로 재임명했다. 장전의는 목숨을 구해준 주전충에게 깊이 감사하며 이후 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고, 주전충의 군사 작전에 필요한 군량을 풍부하게 공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남 지역에 유국 절도사(佑國節度使)가 설치되자, 당시 황제인 당 소종은 장전의를 유국 절도사로 임명했다.[7] 농민 출신이었던 장전의는 농업 경영 능력을 발휘하여 주전충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890년, 주전충과 이광위 노룡 절도사(본부: 현 베이징)의 요청으로 당 조정이 이극용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선포하자, 장전의는 갈종주, 주전충의 아들 주유유(朱友裕zho)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이극용 휘하의 조의 절도사(본부: 현 장지)를 공격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이극용의 주력이 재상 장준이 지휘하는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 해 말, 장전의는 명예 재상 직함인 '동중서문하평장사'()를 받았다.[8]
892년, 주전충의 요구로 당시 하양 절도사였던 조극유()가 강등되자, 장전의는 유국 절도사와 더불어 하양 절도사를 겸하게 되었다.[9] (다만, 이후 어느 시점에 정회가 다시 하양 절도사가 되었다.)[10]
896년, 봉상 절도사(본부: 현 바오지) 이모진이 장안을 공격하자 당 소종은 진국 절도사(본부: 현 웨이난) 관할 지역으로 피신했다. 이때 주전충과 장전의는 소종에게 수도를 낙양으로 옮길 것을 거듭 청원했다. 이에 압박을 느낀 이모진은 소종에게 사죄하고 장안의 궁궐을 수리한 뒤 황제를 다시 맞이했다.[11]
898년, 소종은 장전의에게 더 높은 명예 재상 직함인 '시중'(侍中)을 수여했다.[10]
900년, 환관 유기수가 쿠데타를 일으켜 소종을 폐위시키고 태자 이유를 옹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은퇴하여 하남의 장수이(長水zho) 현에 머물던 장준은 장전의를 찾아가 다른 절도사들과 함께 소종 복위 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장전의가 실제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듬해인 901년, 소종은 황실 경호대 장교 손덕소(), 동언필(董彥弼zho), 주승회(周承誨zho) 등이 주도한 반격으로 복위되었다.) 소종 복위 직후 장전의는 명예 재상 직함인 '중서령'(中書令zho)을 받았다.[12]
903년, 소종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둔 주전충은 당나라 황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장준이 다시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규합할 것을 우려하여 장전의에게 장준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장전의는 부하 양린()에게 군대를 주어 변장시킨 뒤 장준의 저택을 습격하게 하여 그와 가족들을 몰살시켰다. 이 학살에서 장준의 아들 장거만이 살아남았다. 이후 주전충은 장안을 파괴하고 소종을 강제로 낙양으로 옮겼으며, 장전의를 천평 절도사(본부: 현 타이안)로 임명하고 동평왕(東平王)으로 봉했다.[13][1]
904년, 주전충이 소종을 암살하고 그의 아들 이축(애제)을 황제로 세우자, 장전의는 다시 하남 윤으로 임명되었으며, 충무 절도사(본부: 현 웨이난)와 황실 경비대 총사령관 직책도 원격으로 겸임하게 되었다.[14]
주전충이 후량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자 장전의는 위왕(魏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주전충은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는데, 건화 2년(912년)에는 장전의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아내와 딸, 며느리 등 집안의 모든 여성을 농락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장전의의 아들 장계조(張繼祚)가 주전충을 살해하려 했으나, 장전의는 과거 자신을 구해준 은혜를 잊을 수 없다며 아들을 만류했다.
3. 후량 시기
907년 후량 건국 후, 태조 주전충은 장전의를 하남의 시장 겸 하양 절도사로 임명하고 위왕(魏王)에 봉했으며, 이후 이름을 장종석(張宗奭)으로 바꾸게 했다.[15][1] 장종석은 태보(太保) 직위를 추가로 받고 진국군(鎮國) 및 선의군(宣義) 절도사를 겸임하는 등 후량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1]
주우규가 즉위한 912년 이후에는 개봉의 재정 관련 본부가 해체되면서 국가 재정 관리 책임이 장종석에게 이관되었고, 현무절도사로도 임명되었다.[16][1] 주진 치세에도 그는 계속해서 국가 재정을 담당했으며, 917년에는 명예직인 천하병마부원수(天下兵馬副元帥) 칭호를 받았다.[16][17]
923년, 이존욱의 진나라 군대가 후량을 압박하자 주진은 대규모 반격을 준비했다. 이때 장종석은 경험이 부족한 단녕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는 주진의 결정에 반대하며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거나 신망이 높은 왕언장에게 맡길 것을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 결국 후량은 후당의 기습 공격으로 멸망하였다.[19]
3. 1. 태조 치세
907년, 주전충은 당 애제로부터 선위를 받아 후량을 건국하고 태조가 되었다.[15] 태조는 장전의를 다시 하남의 시장 겸 하양 절도사로 임명하고 위왕(魏王)에 봉했다.[1] 이후 태조는 장전의의 이름에 '전(全)' 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명휘(이름을 피하는 관습)를 위해 그의 이름을 장종석(張宗奭)으로 바꾸게 했다.[15] 908년, 장종석은 기존 관직 외에 태보(太保) 직위를 추가로 받았고, 진국군(鎮國, 현재의 산먼샤, 허난 성) 절도사를 맡게 되었다. 910년에는 선의군(宣義, 현재의 안양, 허난 성) 절도사까지 겸임하게 되었다.[1]911년[16] 또는 912년(건화 2년)[4], 태조는 장종석의 별장에서 여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태조는 장종석 집안의 거의 모든 여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난행을 저질렀다. 《신오대사》 장종석 열전에는 태조와 관계를 맺은 여성에 장종석의 부인과 딸들까지 포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 이에 굴욕감을 느낀 장종석의 아들 장계조(張繼祚)는 태조를 암살하려 했으나, 장종석은 과거 이한지의 공격으로부터 태조가 자신을 구해주었던 은혜를 언급하며 아들을 만류했다.[16][4]
3. 2. 주우규와 주진의 치세
912년, 태조 주황이 아들 주우규 영왕에게 시해된 후 주우규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주우규 즉위 후 단행된 정부 개편의 일환으로, 동쪽 수도 개봉에 있던 재정 관련 본부가 해체되면서 재정 관리 책임은 장종(장전의)에게 이관되었다.[16] 장종은 또한 현무절도사(당시 본부는 현 상구, 허난성)의 절도사로 임명되었다.[1]913년, 주우규의 동생인 주우정 균왕이 그를 타도하고 황위에 올랐다. 주우정은 이후 이름을 주진으로 바꾸고 수도를 낙양에서 개봉으로 옮겼으나, 장종은 계속해서 국가 재정 문제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16] 917년, 주진은 장종에게 천하병마부원수(天下兵馬副元帥)라는 칭호를 추가로 수여하였다. 당시 원수(元帥) 칭호는 후량의 명목상 속국이었던 오월국의 왕 전유가 가지고 있었다.[17]
921년, 주진은 은퇴를 청한 노장 유순의 진의를 의심하였다. 그는 유순의 은퇴를 받아들이고 낙양에 머물게 한 뒤, 장종에게 그를 독살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18]
923년, 후량의 경쟁자였던 진왕 이존욱(이극용의 아들이자 후계자)에게 황하 이북 영토를 점차 잠식당하자, 주진은 대규모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측근인 조언과 장한걸(張漢傑)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대의 신망을 얻지 못하던 단녕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장종은 단녕이 사령관으로 부적합하며, 장수들이 왕언장을 더 신임한다는 점을 들어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19]
:신(臣)은 부원수입니다. 비록 제가 약하고 늙었지만, 여전히 국가의 북쪽 국경을 방어할 힘이 있습니다. 단녕은 공적이 미미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지 않는 하급 장군입니다. 많은 반목이 있으며, 이는 국가에 큰 걱정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진은 장종과 재상 경상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녕에게 지휘권을 맡겼다.[19] 결국 단녕이 작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이존욱은 황하를 건너 개봉을 기습 공격했다. 수도 방어에 실패한 주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미 후당의 황제를 칭하고 있던 이존욱은 개봉에 입성하여 후량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19]
4. 후당 시기
후량이 멸망하자, 장전의를 포함한 후량의 절도사 대부분은 즉시 후당에 항복했다. 923년 겨울, 장전의는 개봉으로 가서 후당 장종에게 경의를 표하고, 이름을 다시 궉의(權義)로 바꾸었다. 그는 많은 양의 돈과 말을 조공으로 바쳤으며, 이에 장종은 자신의 아들 이지지와 형제 이존기에게 장전의를 형님으로 대우하도록 명했다.[19]
장종이 후량 태조(주전충)의 무덤을 파헤치려 했을 때, 장전의는 과거 주전충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은혜를 언급하며 만류했다. 그는 두 나라가 경쟁 관계였지만, 이미 끝난 일에 복수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황제의 복수심만 드러낼 뿐이라고 간언했다. 장종은 이 말을 받아들여 무덤을 파헤치지는 않았으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은 파괴했다.[4] 이후 장전의의 제안에 따라 장종은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4] 장종은 장전의에게 상서령 칭호를 하사하고[4], 작위를 제(齊) 공(Prince of Qi)으로 높여주었다.[1] 이는 후량이 멸망한 후 장전의가 장종과 유황후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친 결과이기도 했다.
924년, 장종과 유황후가 장전의의 저택을 방문하여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유황후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슬픔을 이야기하며 장전의를 아버지로 모시고 싶다고 청했다. 장전의는 처음에는 두려워하며 거절했지만 결국 수락했다. 이후 그는 유황후의 가부(假父, 의붓아버지)가 되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선물을 보냈다.[20]
926년, 장종의 통치에 대한 불만으로 군인들이 위보(魏博, 현 허베이성 한단시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장종은 처음 이사영을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장전의는 고위 장군이자 장종의 양아들인 이사원을 추천했다. 그러나 이사원이 위보에 도착하자 그의 군대가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이사원을 추대했고, 이사원은 반란군과 합류하여 군대를 이끌고 남쪽의 개봉으로 향했다. 자신이 추천한 이사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장전의는 큰 충격과 두려움에 빠져 식음을 전폐했고, 그 직후 사망했다.[3] 그는 이사원(후의 명종)을 비롯한 후당의 여러 장수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명종(이사원)이 즉위한 후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5. 가족 관계
- 처: 저씨(儲氏)
- 아들: 장계좌(張継祚)
- 딸: 장씨(張氏) (이숙(李粛)의 처)
- 딸: 장씨(張氏) (주우장의 처)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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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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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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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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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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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구오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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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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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웹사이트
음양력 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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