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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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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평 대전은 기원전 260년,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국 시대의 주요 전투이다. 진나라는 한나라의 상당군을 차지하기 위해 조나라와 대립했고, 조나라는 상당군을 지키기 위해 염파를 파견했으나, 진나라의 계략으로 조괄이 지휘를 맡게 되면서 공세로 전환했다. 백기는 조괄의 공세를 역이용하여 조나라 군대를 포위, 40만 명을 생매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투에서 조나라는 막대한 인적 손실을 입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진나라는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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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진나라와 조나라 간의 장평 전투
진나라와 조나라 간의 장평 전투
분쟁전국시대
장소장평 (현재의 산시성 가오핑 부근)
기간기원전 262년 4월 – 기원전 260년 7월
교전 세력
교전국 1진나라
교전국 2조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진나라백기, 왕흘, 텅
조나라염파, 조괄 (전사), 펑팅 (전사)
병력 규모
진나라550,000명
조나라450,000명
결과 및 영향
결과진나라의 결정적인 승리
영향진나라의 전략적 우위 공고화
조나라의 군사력 심각한 약화
한단 포위전
사상자 규모
진나라약 250,000명 사망
조나라400,000명 사망 (대부분 포로로 잡힌 후 처형됨)

2. 배경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 이후 강성해져 다른 나라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원전 262년, 진나라 장수 백기가 한나라의 야왕(현재의 허난성 친양 시)을 함락시키면서 한나라의 상당군은 본국과의 연결이 끊긴 월경지가 되었다.

고립된 상당군의 관리와 백성들은 진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나라에 귀속하여 함께 진나라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당시 상당 태수였던 풍정은 기원전 262년 조나라 효성왕에게 사신을 보내 17개 성읍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했다. 조나라 내부에서는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효성왕은 평원군의 주장을 받아들여 상당군을 접수했다.

조나라의 이러한 결정은 상당을 자국 영토로 여기던 진나라 소양왕을 격분시켰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는 왕흘을 장수로 삼아 군대를 보내 상당을 점령했다. 상당 주민들이 조나라의 장평으로 피난하자 진나라 군대는 이를 추격하여 조나라 영토로 진격했다. 이에 조나라 효성왕은 노장 염파를 총대장으로 임명하여 장평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되면서 양국 간의 대규모 충돌인 장평 대전이 시작되었다.

2. 1. 전국시대의 정세

당시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 개혁 이후 강성해져 전국 칠웅 중에서도 압도적인 국력을 자랑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여섯 나라, 특히 국경을 맞댄 한, 위, 조, 초를 여러 차례 침공하며 영토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기원전 262년, 진나라는 백기 장군을 보내 한나라의 야왕(현재의 허난성 친양 시)을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한나라의 북방 영토인 상당군은 본국과의 연결이 끊어진 월경지 신세가 되었다. 고립된 상당군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한나라 환혜왕은 상당 땅을 진나라에 넘겨주고 화의를 맺으려 했다. 환혜왕은 상당 태수 근두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지만, 근두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한나라는 근두를 파면하고 풍정을 새로운 태수로 임명했다. 하지만 진나라의 지배를 두려워한 상당의 관리와 백성들은 풍정에게 진나라에 항복하지 말 것을 호소하며, 조나라에 땅을 바쳐 한나라와 조나라가 힘을 합쳐 진나라에 맞서야 한다는 방안을 모색했다. 풍정이 부임한 지 30일째 되던 날, 상당군의 17개 성읍은 조나라에 땅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조나라 효성왕은 당시 조나라의 실력자였던 평원군과 그의 동생 평양군에게 의견을 물었다. 평양군은 "진나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질 것이므로 헌납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평원군은 "싸우지 않고 영토를 얻을 좋은 기회이니 즉시 승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효성왕은 고심 끝에 평원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상당을 접수했다.

조나라의 이러한 결정에 진나라 소양왕은 크게 분노했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는 왕흘을 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여 상당을 공격해 점령했다. 상당의 주민들은 조나라의 장평(長平)으로 피난했고, 왕흘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이들을 추격하여 그대로 조나라 영토로 진격했다. 이에 조나라 효성왕은 노련한 장수 염파를 총대장으로 임명하고, 장평성의 방비를 강화하며 진나라 군대에 맞설 준비를 갖추었다. 이로써 양국 군대는 장평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2. 2. 상당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기원전 265년, 진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하여 친양 지역을 점령했다. 이 공격으로 한나라의 상당군(현재의 산시성 창즈시 일대)은 수도를 포함한 남부 지역(현재의 허난성 서부)과의 연결이 끊어져 고립된 월경지 신세가 되었다. 진나라는 이후 몇 년간 태항산을 넘는 주요 길목과 요새들을 장악하며 상당군을 더욱 압박했고, 상당군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상당군은 조나라의 수도 한단 바로 서쪽에 위치하며, 생산력이 높고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만약 진나라가 이곳을 차지한다면 조나라의 북쪽과 서쪽 방면으로 쉽게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는 셈이었다.

기원전 262년, 진나라의 명장 백기가 한나라의 야왕(현재의 허난성 친양시)을 함락시키면서 상당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한나라의 환혜왕은 상당군을 진나라에 넘겨주고 화의를 맺으려 했다. 환혜왕은 당시 상당 태수였던 근두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으나 근두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근두는 파면되었고 풍정이 새로운 태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풍정 역시 진나라의 지배를 원치 않는 상당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따라 진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했다.

풍정은 관리 및 백성들과 논의를 거쳐, 고립된 상황을 타개하고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상당군 전체를 조나라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는 조나라와 한나라가 힘을 합쳐 진나라에 맞서도록 하려는 전략이었다. 풍정이 부임한 지 30일째 되던 날, 상당군의 17개 성읍 대표는 조나라에 공식적으로 귀속 의사를 전달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조나라의 효성왕은 이 제안을 두고 중신들과 논의했다. 동생인 평양군은 진나라와의 충돌을 우려하여 반대했지만, 당시 조나라의 실권자였던 평원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넓은 영토를 얻을 기회"라며 강력히 찬성했다. 효성왕은 고심 끝에 평원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상당군의 귀속을 승인하고, 즉시 노련한 장수 염파를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상당 지역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조나라의 이러한 결정은 상당 지역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던 진나라를 크게 자극하여 장평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3. 조나라의 개입

기원전 262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야왕(현재의 허난성 친양 시)을 함락시키면서 한나라의 북방 영토인 상당군은 본국과의 연결이 끊어져 고립되었다. 한나라 환혜왕은 상당을 진나라에 넘겨주고 화의를 맺으려 했으나, 새로 부임한 상당 태수 풍정은 진나라의 지배를 원치 않는 관리와 백성들의 뜻을 모아 조나라에 상당군을 넘겨 진나라에 함께 맞서자고 제안했다. 풍정이 부임한 지 30일째 되던 날, 상당의 17개 성읍을 조나라에 바치겠다는 사자가 파견되었다.

조나라 효성왕은 이 제안을 두고 동생인 평양군과 당시 실력자였던 평원군에게 의견을 물었다. 평양군은 "상당을 받으면 진나라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으니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평원군은 "싸우지도 않고 금 한 푼 쓰지 않고 큰 영토를 얻을 기회인데 왜 망설이는가? 빨리 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효성왕은 고심 끝에 평원군의 의견을 따라 상당군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보내 접수했다.

조나라의 이러한 결정은 진나라 소양왕의 큰 분노를 샀다. 기원전 260년, 소양왕은 왕흘을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하여 상당군을 점령했다. 상당의 백성들은 조나라의 장평으로 피난했고, 왕흘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이들을 추격하여 그대로 조나라 영토로 침입했다. 이에 효성왕은 노련한 장수 염파를 총대장으로 임명하고, 장평성의 방비를 강화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로써 장평 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3. 전투의 진행

장평에 도착한 진나라 군대와 조나라 군대는 초기에 몇 차례 충돌했으나 조나라가 연이어 패배했다. 이에 조나라 장수 염파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수비를 강화하는 지구전을 선택하여 2년 동안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지구전으로 진나라 군대가 지치기 시작하자, 진나라 재상 범저는 이간계를 사용하여 조나라 효성왕이 염파를 해임하고 실전 경험이 없는 조괄을 총대장으로 임명하게 만들었다. 여러 신하와 심지어 조괄의 어머니까지 반대했지만 효성왕은 듣지 않았다. 한편 진나라는 조나라의 지휘관 교체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백전노장 백기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왕흘을 부장으로 삼아 결전을 준비했다.

이후의 상세한 전투 과정, 즉 조괄의 공세, 백기의 포위 섬멸 작전, 조나라 군대의 패배와 항복, 그리고 백기에 의한 대규모 학살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3. 1. 초기 전투와 염파의 지구전

기원전 262년, 진나라는 왕흘(王齕)을 파견하여 상당군(上黨)을 공격했다. 상당의 관리였던 풍정(馮亭)은 진나라에 항복하는 대신 조나라에 투항하기로 결정했고, 조나라는 군대를 보내 상당을 접수하려 했다. 기원전 260년 4월, 진나라 장수 왕흘은 상당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으나 이미 상당의 군민들은 조나라로 피신한 후였다. 왕흘은 이들을 추격했고, 조나라는 명장 염파(廉頗)를 파견하여 군민들을 보호하고 진군을 막도록 했다. 양국 군대는 장평(長平, 현재 산시성 고평시 부근)에서 마주쳤다.

초기 전투는 조나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기원전 260년 4월, 염파의 첫 방어선이었던 고평관(현재 고평시와 장자현 경계) 서쪽(현재 산시성 친수이현과 고평시 경계)에서 벌어진 첫 교전에서 조나라 군대는 몇 차례 패배했다. 진나라 군대는 조나라 지휘관을 사살하고 고평관과 인근 요새 세 곳을 점령하며 첫 번째 방어선을 돌파했다. 장평 도착 이후 벌어진 세 차례의 소규모 교전에서도 조나라 군은 연이어 패배했다.

염파는 진나라 군대의 강함을 파악하고 정면 대결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정예병인 진나라 군대와의 야전을 피하고, 단강(丹水, 현재 친강의 가장 큰 지류) 동쪽 강둑을 따라 두 번째 방어선을 구축하고 강력한 보루를 쌓아 수비를 강화하는 지구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이는 장평이 진나라 수도보다 훨씬 멀어 보급이 어렵고, 서쪽의 험준한 산길 때문에 진나라 군대의 피로도가 더 클 것이라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염파는 시간을 끌어 진나라 군대를 지치게 만들고자 했다.

진나라 군대는 6월과 7월 맹공을 펼쳐 승리하기도 했으나, 결정적인 돌파에는 실패했다. 진나라 군대는 단강 도하를 시도하고 한때 염파의 방어선을 돌파하기도 했지만, 전선을 유지할 힘이 부족하여 격퇴당했다. 결국 기원전 260년 7월부터 양측은 단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대치 상태에 들어갔으며, 이 교착 상태는 이후 2년간 지속되었다. 양측 모두 진지를 대대적으로 보강하여, 총 병력은 약 10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전선이 형성되었다.

2년의 시간이 흐르자 염파의 의도대로 진나라 군대는 보급 문제와 계속되는 대치 상황으로 인해 피로와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3. 2. 진나라의 계략과 지휘관 교체

장평 대전이 장기화되면서 진나라조나라 양국 모두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 효성왕염파가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방어만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하던 진나라는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당시 진나라 재상이었던 범수는 이전의 실책으로 입지가 불안했기에 이번 전투의 승리가 절실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범수는 두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첫째는 이간계를 사용하여 조나라의 지휘관을 교체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진나라의 지휘관을 비밀리에 교체하는 것이었다. 범수는 조나라 내부에 첩자들을 보내 염파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 첩자들은 "염파가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는 것은 뒤에서 진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조괄이 장군이 되는 것이다"와 같은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을 들은 조 효성왕은 염파의 지구전 전략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염파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조괄을 임명했다. 조괄은 명장 조사의 아들이었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하고 병법 이론에만 밝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 조사는 생전에 아들이 오만하고 실전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아내에게 "왕이 괄에게 중책을 맡기려 하면 사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때문에 조괄이 총대장으로 임명되자 재상 인상여뿐만 아니라 조괄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임명을 반대하며 조사의 유언을 전했지만, 효성왕은 듣지 않았다. 다만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패배하더라도 가문이 처벌받지 않도록 해달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한편, 조나라의 지휘관이 조괄로 교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나라는 비밀리에 총사령관을 왕흘에서 백전노장 백기로 교체하고, 왕흘을 부장으로 삼았다. 백기의 임명은 조나라 군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극비에 부쳐졌으며, 이 사실을 누설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이로써 경험 많은 백전노장 백기와 실전 경험이 없는 조괄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다.

3. 3. 조괄의 공세와 백기의 반격

기원전 260년 7월, 조나라효성왕진나라 재상 범저의 이간책과 염파의 소극적인 수비 전략에 대한 불만으로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을 새로운 총대장으로 임명했다.[7] 린상여를 비롯한 여러 신하와 심지어 조괄의 어머니까지 그의 실전 경험 부족을 이유로 임명을 반대했지만, 효성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7] 조괄은 명장 조사의 아들이었으나, 병법 이론에만 밝고 실전 경험이 전무하여 '탁상공론'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아버지 조사조차 생전에 그의 능력 부족을 우려하여 중책을 맡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7]

총대장이 된 조괄은 부임 즉시 염파가 구축했던 방어 전략을 모두 폐기하고, 조나라 군대가 대군이라는 점을 믿고 공세로 전환했다.[7] 그는 주력 부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단강을 빠르게 건너 강 서쪽에 주둔한 진나라 군대의 좌익을 공격하여 일거에 격파하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군대의 보급품 대부분은 강 남쪽의 기존 주둔지에 남겨두었다.[7]

한편, 진나라는 조나라의 총대장 교체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백기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왕흘을 부장으로 삼았다.[7] 백기는 조괄의 공세적인 움직임을 예측하고, 마치 수십 년 후 한니발 바르카가 칸나이 전투에서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포위 섬멸 작전을 준비했다.[7] 그는 의도적으로 단강 서쪽의 좌익 병력을 줄이는 대신, 서쪽 언덕의 요새를 강화하여 조나라 군대를 유인할 준비를 마쳤다.[7]

조괄이 계획대로 단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하자, 진나라 좌익 부대는 교전하는 척하다가 서쪽 언덕 요새를 향해 후퇴했다.[7] 조괄은 이를 진나라 군대가 패주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깊숙이 추격했다.[7] 바로 이때, 백기가 미리 준비해 둔 함정이 발동되었다. 25,000명의 진나라 별동대가 북쪽 태악산을 우회하여 조나라 군대의 퇴로를 차단했고, 동시에 5,000명의 기병이 활과 화살, 쇠뇌 등으로 무장하고 단강을 건너 조나라 군대의 본진과 남쪽 보급 기지 사이를 차단하여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7] 백기가 이끄는 진나라 주력 부대 역시 신속하게 움직여 단강 계곡의 출구를 봉쇄하면서 조괄의 군대는 순식간에 삼면이 막힌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7]

조괄은 자신의 공격이 진나라의 견고한 언덕 요새에 막혀 진전이 없다는 것과 동시에 후방과 보급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7] 그는 급히 퇴각을 명령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추격해 온 진나라 군대의 반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7] 남쪽의 아군과 합류할 길도 막힌 조나라 군대는 결국 인근 언덕에 급히 보루를 쌓고 방어 태세로 전환하며 구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7]

그러나 당시 조나라는 합종과 연횡 사이에서 자주 입장을 바꾸는 기회주의적 외교 정책으로 인해 주변 국가들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기에 초나라제나라 등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7] 진나라 소양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직접 하내 (현재의 허난성) 지역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작위를 1등급씩 올려주고 15세 이상의 모든 남자를 징집하여 장평 전선으로 보냈다.[7] 이렇게 증강된 병력은 조나라의 구원군과 보급을 차단하는 데 투입되어 포위망을 더욱 강화했다.[7]

포위된 지 46일이 지난 9월에 이르자 조나라 군 진영에는 식량이 완전히 떨어졌다.[7]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말을 잡아먹고, 심지어는 서로 죽여 그 인육을 먹는 참혹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7] 조괄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4~5차례에 걸쳐 부대를 나누어 필사적으로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7] 마지막으로 조괄 자신이 직접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으나, 진나라 군대가 쏜 화살과 쇠뇌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7] 총대장 조괄이 죽자 지휘 체계를 잃고 완전히 와해된 조나라 군대 40만 명(일부 기록에는 20만 명)은 결국 백기에게 항복했다.[7]

3. 4. 조나라 군의 항복과 백기의 학살

조괄진나라 군대의 유인책에 속아 깊숙이 추격하다가 백기가 미리 배치해 둔 복병에 의해 퇴로와 보급로가 차단당했다. 진나라 별동대 2만 5천 명은 조나라 군대의 후방을 끊었고, 기병 5천 명은 조나라 군대의 진영을 돌파하여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전세가 불리해진 조나라 군은 보루를 쌓고 구원병을 기다렸으나, 진나라 소양왕이 직접 하내(河內)로 가서 15세 이상 남자를 모두 징발하여 전선으로 보내 조나라의 구원과 보급을 완전히 차단했다.

포위된 지 46일이 지난 9월, 조나라 군영에서는 식량이 완전히 떨어져 병사들이 서로 죽여 잡아먹는 참혹한 상황에 이르렀다. 탈출을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마지막으로 조괄이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돌파를 시도했지만 진나라 궁수와 쇠뇌병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조괄이 죽자 지휘관을 잃은 조나라 군사 40만 명(다른 기록에는 20만 명)은 백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백기는 항복한 군사들을 먹일 군량이 부족하고, 이들이 훗날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끔찍한 결정을 내렸다. 그는 항복한 조나라 군사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소년병 24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9] 백기는 살해한 조나라 군사들의 머리를 모아 쌓아 '두로산(頭顱山)'이라 부르고, 그 위에 누각을 지어 '백기대(白起臺)'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대의 한 시인은 이 참상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高臺八尺盡頭顱''' (고대팔척진두로)

:'''何止區區萬骨枯''' (하지구구만골고)

:'''矢石無情緣鬪勝''' (시석무정연투승)

:'''可憐降卒有何辜''' (가련항졸유하고)

:

:팔 척 백기대는 모두가 해골이요

:들판에 뒹구는 뼈 겨우 수만 구뿐이겠는가?

:화살과 돌이 무정히 날아다닌 건 전투에서 이기려 한 것이었다만은

:불쌍한 항복한 군사들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 학살은 중국의 다른 나라들에게 진나라에 대항하면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라는 공포심을 심어주었고, 특히 조나라는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국가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의 조나라 전사자 및 처형자는 45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농사를 지을 남성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조나라는 이후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약 30년 뒤인 기원전 228년에 결국 멸망했다.

1995년 이후 장평 지역에서는 당시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인골 매장 구덩이가 여러 차례 발굴되었다.[7] 발굴된 인골 중에는 무기에 의한 손상이 발견되어 학살의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것이 생매장의 직접적인 증거인지, 아니면 전투 중 사망한 병사들의 집단 매장지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4. 전투의 결과

조나라 군대는 주력 부대가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고 지휘관 조괄이 전사하면서 결국 항복했다. 항복한 조나라 병사는 20만 명에 달했다.

백기가 이끈 진나라 군대는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으로 국력을 거의 소진하여 엄청난 수의 포로를 먹일 군량도, 진나라로 연행할 여력도 부족했다. 또한 백기는 조나라 포로들이 풀려나면 훗날 진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위협이 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기는 소년병 24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조나라 병사들을 모두 생매장하여 처형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의 조나라 전사자 및 처형자는 총 45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1995년 이후 장평 지역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 인골 매장지가 발굴되었다.[7] 발굴된 유골 중 상당수에서 무기에 의한 손상이 발견되어, 이들이 생매장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전투 중 사망했거나 다른 방식으로 학살된 후 매장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하지만 이것이 포로 학살의 증거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전사자들의 집단 묘지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4. 1. 조나라의 몰락

장평에서의 승리 이후, 백기는 40만이 넘는 조나라 포로를 처리해야 했다. 많은 포로를 먹일 군량이 부족했고, 과거 상당 백성들처럼 조나라 군사들도 진나라에 편입된 후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9] 결국 백기는 조나라 포로들에게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생매장한 것으로 보인다.[4]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은 약 150년 후 저술한 사기에서 전투 중 사망자와 학살된 포로를 합쳐 45만 명 이상의 조나라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이 학살에서 단 240명의 어린 병사만이 살아남아 조나라로 돌려보내졌는데, 이는 공포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였다.[4]

백기는 살해한 조나라 군사들의 머리를 모아 쌓아 '두로산(頭顱山)'이라 부르고, 그 위에 '백기대(白起臺)'라는 누각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후대의 한 시인은 당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高臺八尺盡頭顱'''

:'''何止區區萬骨枯'''

:'''矢石無情緣鬪勝'''

:'''可憐降卒有何辜'''

:

:팔 척 백기대는 모두가 해골이요

:들판에 뒹구는 뼈 겨우 수 만 구뿐이겠는가?

:화살과 돌이 무정히도 날아다닌 건 전투에서 이기려 한 것이었다만은

:불쌍한 항복한 군사들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 대규모 학살은 진나라에 대항하는 자는 죽음뿐이라는 강력한 경고를 다른 나라들에 보냈으며, 특히 조나라 백성들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전투와 학살로 인해 농사를 지을 성인 남성이 거의 사라지면서 조나라는 국가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렸고, 다시는 이전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백기는 승세를 몰아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려 했으나, 진 소양왕은 병사들의 휴식을 이유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백기는 이에 불만을 품고 사임했으며, 이후 왕의 재출정 요구를 거절하다 자살을 강요당해 생을 마감했다. 진나라는 다른 장수를 보내 한단을 공격했지만, 평원군이 이끄는 조나라의 격렬한 저항과 초나라, 위나라의 지원에 힘입어 한단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패배로 진나라의 동방 확장 정책은 약 30년간 중단되었다.

그러나 장평에서의 치명적인 인력 손실을 겪은 조나라는 이러한 일시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쇠퇴를 막을 수 없었다. 장평 대전 이전까지 조나라는 전국 시대 강국 중 하나이자 진나라의 확장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평가받았으나, 이 전투 이후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반면 진나라는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비교적 빠르게 회복하고 10년 안에 완전한 국력을 되찾아 다른 국가들에 대한 압도적인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 결국 조나라는 장평 대전 이후 약 30년 뒤인 기원전 22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우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4. 2. 진나라의 통일 기반 마련

장평 대전 이후 진나라 장군 백기는 승세를 몰아 조나라 수도 한단을 즉시 포위하려 했으나, 진 소양왕은 병사들의 휴식을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기는 이에 불만을 품고 사임했으며, 이후 왕의 복귀 명령도 거부하다 결국 자살 강요당했다.[4] 진나라는 다른 장군을 보내 한단을 공격했지만, 조나라의 격렬한 저항과 초나라, 위나라의 지원으로 한단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패배로 진나라의 확장은 약 30년간 중단되는 등 단기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장평 대전은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한 전투였다. 전쟁 이전 조나라는 전국 시대의 강대국 중 하나로, 진나라의 확장을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쟁자였다. 하지만 장평에서의 막대한 병력 손실은 조나라에게 치명타가 되었고, 이후 다시는 이전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반면 진나라는 3년간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10년 만에 국력을 완전히 회복하여 다른 국가들에 대한 압도적인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 이러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진나라는 통일 전쟁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고, 결국 장평 대전으로부터 40년이 지난 기원전 221년, 다른 모든 국가를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를 세우는 기반을 다졌다.

4. 3. 백기의 최후

장평 대전에서 승리한 백기는 기세를 몰아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즉시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수십만 명에 달하는 조나라 포로를 관리하는 문제에 직면했다.[4] 새로 점령한 지역의 민심이 불안정하고 포로들이 재무장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위험 때문에 이들을 풀어줄 수도 없었다. 결국 백기는 포로 대부분을 생매장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단 240명의 어린 병사만 살려 보내 조나라에 공포심을 심어주려 했다. 사마천사기에 따르면 이때 학살된 조나라 병사의 수는 45만 명 이상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진나라의 재상 범저는 백기의 공이 너무 커져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범저는 소양왕에게 조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하며 진나라 군대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결국 소양왕은 백기의 한단 공격 계획을 승인하지 않고 공세를 늦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얻은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놓치는 결정이었다. 이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한 백기는 병을 핑계로 사임했다.

이듬해 소양왕은 왕릉을 장수로 삼아 다시 한단을 공격했지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조나라 군민들과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이 이끄는 구원군에 의해 한단 전투에서 참패했다. 왕릉을 대신해 투입된 왕흘과 정안평마저 패배하자 다급해진 소양왕은 여러 차례 백기에게 다시 군대를 지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백기는 이미 기회가 사라졌고 병이 깊다는 이유로 끝까지 거절하며 저택에 칩거했다.

백기의 계속된 거절에 소양왕의 불만은 증오로 바뀌었고, 결국 사자를 보내 백기에게 자결을 명하는 칼을 내렸다. 백기는 칼을 받으며 진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자신에게 내려진 처사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수십만 명의 조나라 병사를 생매장한 것에 대한 업보를 언급하며 하늘이 소양왕을 통해 자신에게 내린 벌이라 여기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장평 대전은 전국 시대 말기,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회전으로, 중국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에서의 진나라의 압도적인 승리는 천하 통일의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으며, 반대로 조나라에게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혀 몰락을 초래했다.

전쟁의 규모와 결과뿐만 아니라, 전투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진나라 장수 백기가 자행한 것으로 알려진 수십만 명에 달하는 조나라 포로 학살은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로 기록되며, 후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이론에만 밝고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조나라 지휘관 조괄의 실패는 '지상담병'(纸上谈兵zho)이라는 고사성어를 남기며 리더십과 전략 운용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남겼다.

이처럼 장평 대전은 전국 시대의 세력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진나라 중심의 통일 시대를 여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전쟁의 잔혹성과 리더십의 중요성 등 다양한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는 사건이다.

5. 1. 잔혹한 전쟁의 표본

장평 대전은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특히 진나라의 장수 백기가 저지른 대규모 포로 학살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기록된다.

조괄이 이끌던 조나라 군대가 진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어 46일간 굶주린 끝에 항복하자, 백기는 40만이 넘는 엄청난 수의 포로를 떠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많은 포로를 먹일 군량이 부족했고, 과거 상당의 백성들이 진나라 통치에 저항했던 것처럼 조나라 병사들도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9]

백기는 조나라 병사들에게 스스로 무덤을 파게 한 뒤 그들을 생매장하는 잔혹한 결정을 내렸다.[9] 또한 전투 후 얻은 조나라 군사들의 머리를 모아 영루(營壘)에 쌓아 산처럼 만들고, 이를 '두로산(頭顱山)'이라 불렀으며, 그 꼭대기에 세운 누각을 '백기대(白起臺)'라고 이름 붙였다. 훗날 한 시인이 이 참담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고 전해진다.

> '''高臺八尺盡頭顱'''

> '''何止區區萬骨枯'''

> '''矢石無情緣鬪勝'''

> '''可憐降卒有何辜'''

>

> 팔 척 백기대는 모두가 해골이요

> 들판에 뒹구는 뼈 겨우 수 만 구뿐이겠는가?

> 화살과 돌이 무정히도 날아다닌 건 전투에서 이기려 한 것이었다만은

> 불쌍한 항복한 군사들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 학살은 당시 전국 시대의 다른 5국에게 진나라에 대항하면 죽음뿐이라는 강력한 경고가 되었으며, 조나라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농사를 지을 남자 대부분을 잃은 조나라는 급격히 쇠락하여 다시는 이전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결국 약 30년 후인 기원전 22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죽거나 처형된 조나라 병사는 45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백기는 어린 소년병 240명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죽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1995년 5월 이후 발굴 조사에서 대량의 인골이 묻힌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다. 영록 제1 시골갱(永祿第一屍骨坑) 보고서에 따르면 제1 갱에서는 약 130구의 시신이 발굴되었고, 이후 18개의 추가 갱이 발견되어 조사가 계속되었다.[7] 2002년과 2020년에도 추가로 인골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이 인골들에서는 무기에 의한 손상 흔적도 많이 발견되어, 단순히 생매장된 것이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것이 포로 학살의 증거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전사자들의 집단 묘지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5. 2. 이론과 실제의 괴리

새로운 조나라 지휘관 조괄의 아버지는 명장 조사였다. 조사는 생전에 진나라 군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경험이 있는 장수였으며, 병사들을 아끼고 욕심이 없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왕에게 받은 상을 병사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조사는 자신의 아들 조괄을 추천하는 것을 꺼렸는데, 이는 조괄의 성품 때문이었다. 조괄은 병법 이론에는 뛰어났지만, 이를 실제 전투에 응용하는 능력은 부족했고 거만하며 뽐내기를 좋아했다. 조나라 조정에서 조괄을 지휘관으로 임명하려 하자 재상 인상여가 반대했으며, 심지어 조괄의 어머니까지 아들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조정에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면, 진나라 군대의 새로운 상장군(上將軍)이 된 백기는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노련한 장수였다. 그는 당시 여러 강대국을 상대로 싸워 백 개가 넘는 성을 빼앗는 등 큰 공적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러한 백전노장에게 조괄은 경험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결국 조괄은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조나라 군대 전체를 궤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사건은 중국어 관용어인 "지상담병"(纸上谈兵zho)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았는데, 이는 이론에는 밝지만 실제적인 수행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비꼬는 말로 사용된다.

5. 3. 한국사에 미친 영향 (한국 독자를 위한 관점)

장평대전 이후, 진나라의 장수 백기는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처리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막대한 수의 포로를 먹일 군량이 부족했고, 과거 상당 지역 백성들처럼 조나라 군사들이 저항할 것을 우려한 백기는 끔찍한 결정을 내렸다.[9] 그는 조나라 군사들에게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그곳에 생매장했다.[9] 전투 후 얻은 조나라 군사들의 머리를 모아 진영 안에 쌓아 올리고, 그 산을 '두로산(頭顱山)'이라 불렀으며, 산꼭대기에 세운 누각은 '백기대(白起臺)'라 이름 붙였다. 후대 시인은 이 참상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전해진다.

: 팔 척 백기대는 모두가 해골이요


: 들판에 뒹구는 뼈 겨우 수 만 구뿐이겠는가?


: 화살과 돌이 무정히도 날아다닌 건 전투에서 이기려 한 것이었다만은


: 불쌍한 항복한 군사들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 학살은 주변 5국에게 진나라에 대항하면 죽음뿐이라는 강력한 경고가 되었으며, 조나라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농사를 지을 남성 인력을 거의 잃어버린 조나라는 급격히 몰락하여 다시는 이전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결국 약 30년 뒤인 기원전 228년에 멸망했다.

6. 대중문화 속의 장평대전

조나라의 모든 군대를 궤멸시킨 조괄의 패배는 중국어 관용어인 '지상담병'(纸上谈兵|지상담병zho)이라는 표현으로 이어졌다. 이는 이론적 사고에는 뛰어나지만 실제 수행 능력은 떨어지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2004년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 ''장평대전''은 이 전투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이 전투는 또한 만화 ''킹덤''의 주요 배경이 되며, 사건들은 여러 진영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발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조나라 출신 캐릭터 만지는 장평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희생자 유족들을 이끌고 진나라 백성들에게 복수하려 한다. 작중 왕흘 장군은 실제 역사와 달리 왕기와 왕흘이라는 두 명의 장군으로 나뉘어 등장하며, 이 중 왕기가 장평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묘사된다.

장평은 또한 드라마 ''호란전''의 주요 줄거리이기도 하다. 조나라가 겪은 참극과 혼란은 주인공들이 진나라로 피신하는 계기가 된다.

참조

[1] 서적 Shiji
[2] 서적 Shiji
[3] 웹사이트 长平古战场 http://www.sx.xinhua[...] 2009-10-26
[4] 문서 "坑”非活埋辩 http://218.193.49.10[...]
[5] 서적 史記
[6] 서적 戦国策
[7] 웹사이트 永禄第一尸骨坑のレポート http://www.shanximus[...]
[8] 문서
[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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