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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조치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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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의-조치원 전투는 1950년 7월, 한국 전쟁 초기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미군 제24보병사단이 전의와 조치원 일대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한국군이 후퇴하고, 유엔군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미군은 일본 주둔 제24보병사단을 투입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했다. 미군은 전의 전투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수적 열세와 측면 공격으로 인해 후퇴했고, 조치원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금강 방어선으로 물러났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군의 진격을 3일 동안 지연시켜 대전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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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조치원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한국 전쟁
전투명전의-조치원 전투
날짜1950년 7월 10일 – 1950년 7월 12일
장소충청남도 전의군(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전동면), 조치원 일대
결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 세력
유엔군미합중국
북한군조선인민군
지휘관
유엔군리처드 W. 스티븐스
북한군이권무
부대
유엔군미국 21 보병 연대
북한군조선인민군 제4사단
병력 규모
유엔군2,000명
북한군20,000명
사상자 규모
유엔군전사 409명, 총 665명 사상 (포로 처형 포함)
북한군차량 262대 손실 (추정), 탱크 9대 손실
추가 정보
정글 한가운데에서 박격포탄을 발사하는 박격포 튜브를 지탱하는 제복 입은 두 명의 남자
1950년 7월 11일, 조치원에서 북한군 진지를 향해 사격하는 미국 박격포 분대
도로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화살표
평택-안성-천안 전투 지도

2. 배경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군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후퇴해야 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다.

2. 1. 전쟁 초기 상황 (1950년 6월)

1950년 6월 25일 밤, 조선인민군 10개 사단은 대한민국을 전면 침공했다. 89,000명의 병력으로 6개 열을 이루어 진격한 북한군은 한국 육군을 기습했다. 혼란스럽고 장비가 부족했으며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한국군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3]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은 고립된 저항을 분쇄하며, 전선에 38,000명의 병력만을 배치할 수 있었던 한국군을 상대로 한반도 남쪽으로 꾸준히 진격했다.[4] 한국군 대다수는 침략에 직면하여 후퇴했으며, 6월 28일까지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붕괴된 정부와 군대를 남쪽으로 철수시켰다.[5]

2. 2. 미국의 참전 결정과 초기 대응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붕괴하는 대한민국에 지원을 보내기로 결의했고,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지상군 파병을 명령했다.[6] 그러나 극동에 주둔한 미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가까운 부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윌리엄 F. 딘 소장의 제24보병사단이었다. 이 사단은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미국 제8군이 도착하여 방어선을 구축할 때까지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6][7]

1950년 6월 30일, 더글라스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은 월턴 워커 주일 미 제8군 사령관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7월 1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제24사단의 선견대로 부산에 도착했고, 7월 4일에는 사단의 주력 일부가 대전으로 진출했다.

3. 전의-조치원 전투 (1950년 7월)

오산, 평택, 천안에서 연이어 미군을 격퇴한 북한군 제4보병사단은 제105기갑사단의 지원을 받았다. 이권무 사단장 휘하 12,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수십 대의 탱크로 지원되는 2개 보병 연대를 이끌고 오산-천안 도로를 따라 진격을 계속했다.[21][22] 북한 제3보병사단은 미군과 교전하지 않은 채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39]

3. 1. 미군의 전략과 초기 전투 (오산, 평택, 천안)

1950년 7월 5일, 미국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오산에 투입하여 조선인민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9] 이 부대는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과 교전하여 7시간 동안 진격을 지연시켰지만, 결국 격퇴되어 후퇴했다.[9]

그동안 미 제34연대는 오산 남쪽 약 16.09km 떨어진 평택과 안성 사이의 지점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다음 지연 작전을 수행했다.[10] 그러나 34연대는 전투 준비가 미흡했고, 평택 전투에서 북한군 기갑 부대를 막지 못하고 30분 만에 무질서하게 후퇴했다.[12][13] 많은 병사들이 장비를 버리고 저항하지 못한 채 후퇴하여, 평택-안성 방어선은 북한군의 진격을 크게 지연시키거나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데 실패했다.[13][14][15]

이후 34연대는 천안으로 후퇴했고, 다음 날 밤 천안 전투에서 3대대가 또 다른 지연 작전에 참여했지만, 지휘관과 3대대 병력의 3분의 2를 잃는 큰 피해를 입고 금강으로 후퇴했다.[16][17][18][19]

3. 2. 전의 전투 (1950년 7월 9일 ~ 10일)

미 제21연대 제1대대는 전의에서 북한군 제4사단과 격전을 벌였다. 미 공군의 공습으로 북한군에 큰 타격을 입혔으나,[24][25] 지상전에서는 수적 열세로 고전했다. 7월 10일 오전, 안개 속에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미군은 박격포 사격과 공중 지원으로 대응했으나, 측면 공격과 전차 돌파로 박격포 진지가 파괴되고 통신이 두절되었다.[28][29][30]

레이 빅슬러 중위가 지휘하던 A중대 소대는 북한군에 포위되어 대부분 전사했고,[30] 미군은 혼란 속에 논을 건너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항공기의 오인 사격도 발생했다.[31] 제1대대는 20%의 사상자를 기록하고 철수했다.[31] 제3대대의 역습으로 일부 진지를 회복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3. 3. 조치원 전투 (1950년 7월 11일 ~ 12일)

전의에서 물러난 미군은 조치원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리영호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3사단이 새롭게 전선에 투입되어 미 제21연대 제3대대를 공격했다. 7월 11일 06시 30분, T-34 전차 4대가 지뢰밭을 통과하며 3대대 진지로 접근했고, 그 뒤를 이어 북한군 보병 약 1,000명이 대대를 이중 포위하는 형태로 공격해왔다. 이들은 후방 도로를 차단하여 보급과 부상병 후송을 막았다.[36] 동시에 대대 지휘소에 강력한 박격포 공격이 가해져 통신 센터와 탄약 비축량이 파괴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의 전방 관측 장교는 통신 장비 부족으로 포병과 통신할 수 없었다.[37]

잘 조직된 북한군의 공격에 미군은 압도되었고, 탄약이 떨어진 병사들은 무기를 곤봉처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백병전을 벌였다.[37] 결국 3대대는 667명 중 60% 이상이 사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고 소규모 그룹으로 흩어져 후퇴해야 했다.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미군 진영으로 도보로 탈출해야 했으며, 철수하는 병사들 대부분도 포로로 잡혔다.[32][36][41] 남은 병사들은 임시 중대 150명을 편성하여 철수했다. 무기와 헬멧을 포함한 대대 장비의 90%가 손실되었고, M24 전차 4대가 추가로 파괴되었지만 북한군 T-34 전차를 격파하지는 못했다.[24][38]

한편, 스미스 지휘 하의 제1대대는 조치원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배치되어 7월 11일 밤을 보냈다.[24] 7월 12일 새벽, 북한군 정찰대와 처음으로 조우한 후, 09시 30분에 북한군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부대의 좌익을 공격했다. 곧이어 약 2,000명의 북한군이 중포 지원을 받으며 제1대대의 진지를 직접 공격하기 시작했다. 병력 보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대대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스티븐스는 철수를 명령했다. 스미스는 한 개 중대씩 부대를 전선에서 이동시켰고, 후퇴는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졌다. 밤이 되자 연대 전체는 트럭을 타고 금강 건너 대전 근처 태평리의 저지선으로 이동했다.[39]

전방 관측소와 전선 사이에서 발견된 제21보병연대 소속 미군 4명 중 한 명. 이들은 아마도 7월 9일 밤에 포로로 잡혀 뒤로 손이 묶인 채 머리에 총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1950년 7월 10일에 촬영되었다.

4. 금강 방어선 후퇴와 대전 전투

7월 11일영어 조치원에서 미군은 박격포 공격으로 북한군에 맞섰으나, 결국 금강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칼 C. 젠슨 중령이 이끄는 제3대대는 미곡리 부근에서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은 전차와 포병을 동원하여 미군 진지를 압박했고, 미군 지휘소와 통신 시설이 파괴되면서 대대본부 병력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24]

한편, 찰스 B.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제1대대는 조치원 북쪽에서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려 했으나, 7월 12일 새벽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병력 부족과 화력 열세로 인해 미군은 결국 후퇴를 결정했고, 밤이 되자 금강을 건너 대전 근처 태평리로 이동했다.[39]

서쪽 공주 방면에서도 뉴튼 W. 랜트론 소령이 이끄는 제34연대 제3대대가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받고 금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해럴드 B. 에이리스 중령이 이끄는 제1대대는 전차 지원을 받으며 지연전을 펼쳤지만, 결국 북한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후퇴했다.[39][40]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전의-조치원 전투에서 미군은 큰 인명 및 장비 피해를 입었다. 제21보병연대는 총 531명의 사상자를 냈고, 다른 미군 부대에서도 134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3일간 총 66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41] 이는 오산, 평택, 천안 전투의 사상자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로, 미군에게 매우 큰 피해를 준 전투였다.[42] 또한, 제21보병연대는 2개 소총대대를 갖출 수 있는 충분한 장비와 물자, 그리고 975명을 장비할 수 있는 의류를 잃었다.[38]

하지만, 이러한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북한군의 진격을 며칠 동안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 육군 역사가 로이 애플먼은 이를 "한국에서 미군이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성과"라고 평가했다.[39] 제21보병연대의 지연 작전 덕분에 제24보병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대전 근처에 금강 방어선 (금강 전투)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36][38] 이후 제24보병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다시 포위되어 후퇴해야 했지만, 이들의 지연 작전은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를 구축하고, 결국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3]

5. 1. 전사자 추모

대한무공수훈자회는 매년 7월 전의 전투 전사자 추모 행사를 개최한다. 2018년 7월 11일에는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자유 평화의 빛 위령탑 공원(구 개미고개)에서 전사한 미군 428명을 기리는 제13회 추모제가 열렸다.[45]

참조

[1] 문서
[2] 문서
[3] 문헌
[4] 문헌
[5] 문헌
[6] 문헌
[7] 문헌
[8] 웹사이트 Task Force Smith Informational Paper http://www.usarj.arm[...] United States Army Japan 2009-11-29
[9] 문헌
[10] 문헌
[11] 문헌
[12] 문헌
[13] 문헌
[14] 문헌
[15] 문헌
[16] 문헌
[17] 문헌
[18] 문헌
[19] 문헌
[20] 문헌
[21] 문헌
[22] 문헌
[23] 문헌
[24] 문헌
[25] 문헌
[26] 문헌
[27] 문헌
[28] 문헌
[29] 문헌
[30] 문헌
[31] 문헌
[32] 문헌
[33] 문헌
[34] 문헌
[35] 문헌
[36] 서적 Catchpole 2001, p. 16
[37] 서적 Appleman 1998, p. 98
[38] 서적 Appleman 1998, p. 99
[39] 서적 Alexander 2003, p. 73
[40] 서적 Appleman 1998, p. 100
[41] 서적 Ecker 2004, p. 6
[42] 서적 Ecker 2004, p. 5
[43] 서적 Fehrenbach 2001, p. 103
[44] 서적 한국전쟁사 용산 전쟁기념관,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45] 뉴스 6·25 전쟁 참전 미군 428명 전사 세종시 개미고개서 추모제 http://www.daejonilb[...] 201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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