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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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택 전투는 1950년 7월 6일 한국 전쟁 발발 후 미군이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평택에서 벌인 전투이다. 미군은 병력과 장비 부족, 훈련 부족 등 열악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철수했다. 이 전투로 인해 미군의 사기가 저하되었으며, 제24보병사단은 이후 대전 전투에서 궤멸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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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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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7월 6일 |
장소 | 경기도 평택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국제 연합군 |
교전국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조지 B. 바스 |
지휘관 2 | 이권무 |
병력 규모 | |
병력 1 | 2,000명 |
병력 2 | 12,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33명 사망 또는 실종, 18명 부상 |
사상자 2 | 불명 |
참전 부대 | |
부대 1 | 제34보병연대 |
부대 2 | 제4사단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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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미군을 한반도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6]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극동 지역의 미군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고, 가장 가까운 부대는 일본에 주둔하며 윌리엄 F. 딘 소장이 지휘하던 미국 제24보병사단이었다. 제24보병사단은 전력이 부족했고, 장비 또한 구식이었다.[6]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24보병사단은 한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고(1950년 6월 30일), 이에 따라 7월 1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선견대로 부산에 도착했다. 7월 4일에는 사단의 주력 일부가 대전으로 진출했다.[6]
윌리엄 F. 딘 소장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오산으로 투입하면서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고, 오산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는 동안 안성-평택선에 제34보병연대를 전개하여 적의 남진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7월 4일 오후, 제34연대 1대대가 대전에 도착하자, 딘 소장은 이 대대로 하여금 평택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여 스미스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했다. 7월 5일 새벽에는 제3대대와 연대본부가 도착했고, 딘 소장은 제34연대장 제이 B. 러브리스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긴급명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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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소장이 평택-안성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려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 평택은 서쪽에 아산만과 안성천이 있어 자연적인 방어 지형을 갖추고 있었고, 동쪽의 안성과의 사이에는 도로가 빈약하여 적의 주 공격로가 오산-평택 국도로 예상되었다.
- 둘째, 안성은 경기와 충청 내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북한군이 안성을 점령하면 성환이나 천안으로 진출하여 국도의 동측방을 위협할 수 있었다.
- 셋째, 2개 대대로는 넓은 지역을 방어하기 어렵지만, 축차 저항을 통해 사단 주력이 도착할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제34연대는 성환읍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제3대대를 안성으로 보내 장호원과 용인 방면 도로를 방어하게 했다. 제1대대는 평택 북쪽 외곽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경부국도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당시 통신 장비 부족과 잦은 통신 두절로 인해 연대장의 지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각 대대는 대대장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해야 했다.
2. 1. 미군의 준비 부족
Harold B. Ayres영어 중령이 지휘하는 제34보병연대 제1대대는 훈련 부족, 장비 부족, 정보 부족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12] 중화기 부족으로 사단 전체에 대한 포병 지원이 제한적이었다.[13] 통신 장비, 무기, 탄약이 거의 없었고, 많은 양의 장비가 이동 중이었지만, 사단은 일본에서 장비가 부족했다. 사단이 사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무전기는 작동하지 않았고, 부대 간 통신을 위한 배터리, 통신선, 전화가 부족했다.[14] 사단은 전차가 없었다. 새로운 M26 퍼싱과 구형 M4A3 셔먼 전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북한 T-34를 관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기 중 하나인 고폭 대전차 (HEAT) 탄약도 부족했다.[15] 무전기와 유선의 부족은 미국 부대 간의 통신을 방해했다.[16]대대 병사들은 M1 개런드 소총이나 다른 무기, C-레이션, 그리고 각자 100발 미만의 탄약만 가지고 있었고, 각 소대에는 M2 브라우닝 기관총 1정만 사용할 수 있었다.[17] 수류탄이 없었고, 북한 전차에 사용할 수 있는 중화기용 탄약도 거의 없었다.[21] 또한, 연대 병사 중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들은 전날 다른 사단에서 급히 전출되었다.[18]
3. 작전 계획
윌리엄 F. 딘 소장은 평택-안성 선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다. 평택은 아산만에 연한 안성천이 서측방을 방어하고, 안성은 교통의 요지로서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판단했다.[1] 제34연대는 병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축차 저항을 통해 시간을 벌려 했다.[1] 연대장 제이 B. 러브리스 대령은 제3대대를 안성으로, 제1대대를 평택으로 배치했다.[1] 통신 불통으로 인해 지휘가 어려워, 각 대대는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다.[1]
딘 소장이 평택-안성 선에 방어선을 설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 평택은 서쪽의 안성천이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고, 동쪽의 안성 사이에는 남북 종단 도로가 빈약하여 적의 공격이 오산-평택 국도로 집중될 것으로 예상했다. 따라서 북한군은 정면 공격 외에 우회 포위가 어려워, 일부 병력으로도 방어가 가능한 요충지라고 판단했다.[1]
- 둘째, 안성은 경기와 충청 내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여러 방향으로 연결되는 도로망의 중심지였다. 북한군이 안성을 점령하면 일대의 평야를 장악하고 국도의 동측방을 위협할 수 있으며, 진천-청주로 진출하는 길목을 확보하게 된다고 보았다.[1]
이에 따라 러브리스 대령은 연대본부를 성환에 설치하고, 제3대대를 안성으로 보내 장호원과 용인 방면 도로를 방어하게 했다. 연대에 예비 병력이 없어 제3대대의 L 중대를 성환에 예비로 배치하고, 4.2인치 중박격포를 양 대대에 분할 배속했다.[1]
제3대대는 I, K 중대로 안성의 동북쪽과 서북쪽 도로를 방어하고, 제1대대는 평택 북쪽 외곽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C 중대를 예비로 확보한 가운데 A, B 중대로 경부 국도를 방어하게 되었다.[1]
그러나 당시 통신 장비의 문제와 잦은 통신선 절단으로 인해 연대장의 지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선의 대대들은 대대장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해야 했다.[1]
4. 전투 과정
이날은 미군과 북한군 간의 첫 교전일이자, 미 제34연대가 참전한 첫날이기도 하다. 연대는 같은 날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죽미고개에서 큰 피해를 본 전투를 치른 것과는 달리, 큰 교전 없이 평택-안성선을 유지했다.[9]
헤럴드 B. 에이리스 중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는 05:00에 평택으로 진출하여 읍 북쪽 국도변 민가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C 중대를 예비대로 배치했다. 주력 부대인 A, B 중대는 그로부터 4km 북쪽인 도로 동쪽 칠괴리 부근에 배치되었다. 이때, 사단 포병사령관 대리인 조지 B. 바스 준장이 오산에서 평택으로 왔다.[10]
바스 준장은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가 교전한 상황을 에이리스 중령에게 알리며 "곧 북한군 전차가 들이닥칠 것이니, 전방을 정찰하여 경고하고, 로켓포 부대를 전진 배치하여 전차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20]
이에 대대장은 C 중대에서 1개 소대를 차출, 2.36인치 로켓포로 무장시켜 찰스 E. 페이에 중위의 지휘 하에 차량으로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또한, 좌측 전방의 A 중대에게는 도로에 대전차 방어 진지를 긴급히 만들도록 지시했다.[9]
한편, 죽미고개에서 패배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4:30부터 철수를 시작했으나, 이미 북한군 전차가 오산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한 뒤였기 때문에 국도를 따라 평택으로 철수하지 못하고 안성 방향으로 이동하여 저녁 무렵 그곳에 집결, 제3대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당시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철수 상황을 연대에 즉시 알리지 못해 평택의 제1대대와 성환의 연대, 대전의 사단 지휘부는 모두 혼란에 빠졌다.[9]
4. 1. 7월 5일: 평택-안성선 유지
Ayres영어 중령 지휘 하에 제1대대는 05:00에 평택으로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대대는 읍의 북쪽 국도변 민가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C 중대를 예비로 배치했다. 주력 A, B 중대는 4km 북쪽 도로 동쪽 칠괴리 부근에 추진 배치되었다.[9] 같은 시각, 사단 포병사령관 대리인 조지 B. 바스 준장이 오산에서 평택에 도착했다.[10]바스 준장은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의 교전 상황을 에이리스 중령에게 전하며, 곧 북한군 전차가 들이닥칠 것이므로 전방 정찰과 로켓포조 배치로 전차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20] 이에 대대장은 C 중대에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2.36인치 로켓포로 무장시키고, 찰스 E. 페이에 중위 지휘 하에 차량으로 국도를 따라 북상시켜 북한군 전차의 남하를 저지하도록 했다. 또한, 좌일선 A 중대에게는 본도 상에 대전차 차단 진지를 급히 편성하도록 명령했다.[9]
한편, 오산 전투에서 패배한 스미스 특임대는 14:30부터 죽미고개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북한군 전차가 오산을 지나 남하한 뒤였기 때문에, 국도를 따라 평택으로 철수하지 못하고 오산에서 안성으로 향하여 저녁 무렵 집결했다.[9] 스미스 부대는 안성의 제3대대와 합류했지만, 당시 통신 두절로 인해 제1대대에 철수 상황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이로 인해 평택의 제1대대와 성환의 연대, 대전의 사단 지휘부 모두 스미스 부대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9]
7월 5일 저녁, 북쪽으로 파견된 정찰대는 오산 남쪽에서 전차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이 팀은 소정 마을에서 전차를 파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1명이 사망(케네스 R. 섀드릭)하고 평택으로 후퇴해야 했다.[19] 얼마 지나지 않아 스미스 특임대 생존자들이 제1대대 지휘소에 도착하여 오산에서의 패배를 알렸지만, 에이리스는 그들의 보고를 신뢰하지 않았다.[20]

4. 2. 7월 6일: 천안으로의 철수
스미스 특임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바스 준장은 제1대대에게 현재 위치를 지키라고 명령했다.[20] 연대장은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진지를 지키다가 천안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17] 이에 제1대대장은 철수 시기를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천안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제1대대는 평택 북쪽의 통복천 다리를 폭파하고 성환으로 이동했다.[24]한편, 바스 준장은 천안에 도착한 제21연대 잔여 병력에게 천안 남쪽에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도록 지시했다.[21]
4. 3. 북한군의 공격
7월 6일 아침, 비와 짙은 안개로 시야가 매우 제한적이었다.[21] 해가 뜨자 T-34 전차 13대가 다리에서 멈춰 섰고, 그 뒤에는 보병들이 두 줄로 따르고 있었다. 미군은 처음에는 이들을 스미스 특임대의 생존자로 오인했으나, 병력 수가 너무 많은 것을 확인하고 북한군을 기습할 준비를 했다.[31]
미군 대대장은 북한군에 박격포 사격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북한군은 흩어졌다. 선두 전차는 도로 남서쪽 언덕에 있는 A 중대의 진지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박격포 사격으로 트럭이 파괴되었지만, 북한 전차의 포탄이 포병 관측병을 기절시켰고, 혼란 속에서 미군의 박격포 공격은 중단되었다.[27][25]
북한군은 즉시 A 중대의 진지로 진격했지만, A 중대는 효과적으로 반격하지 못했다. 병력의 절반도 안 되는 수만이 무기를 사용했고, 소대와 소대장들만이 반격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참호에 숨었다.[26] 15분 안에 B 중대도 효과적으로 반격할 수 있었지만, 북한군은 제1대대의 진지로 꾸준히 진격했다.[27] 이후 조사에서 많은 미군 병사들의 무기가 잘못 조립되었거나, 더럽거나, 고장난 것으로 밝혀졌다.[24] 미군은 전차에 대항할 수단이 없어 막을 수 없었다.[28]
4. 4. 미군의 철수
대부분 지휘관이 없는 혼란스러운 병사들의 집단이었던 대대는 평택에서 재편성되었다.[34] 대대 소속 공병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마을 북쪽의 다리를 파괴했다. A 중대 잔존 병력은 천안으로 향했고, 철수한 제1 및 제3 대대의 나머지 병력과 함께 재편성되었다. 몇 대의 지프와 트럭을 찾아 사용했지만, 퇴각은 대부분 도보로 이루어졌다. 몇 발의 포탄이 퇴각하는 병력 주변에 떨어졌지만, 북한군은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35] 정오 무렵, 제34 보병연대의 혼란스러운 잔존 병력은 모든 적의 공격을 벗어나 즉각적인 위험에서 벗어났다.[36]장비를 대부분 잃은 병사들은 더 이상 지연 작전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무전 장비를 분실하여 다른 부대와 통신할 수 없었다.[37] 제34 보병연대 병력이 후퇴하는 동안, 미국 항공기가 실수로 이 대열을 공격하여 함께 이동하던 한국군 병사 1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28][36] 제34 보병연대는 많은 병사들이 더 이상 전투 장비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질 무렵 천안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38]
5. 결과 및 영향
딘 소장은 평택 전투에서 제34보병연대가 제대로 싸우지 않고 너무 빨리 후퇴한 것에 대해 분노했다.[38] 그는 즉시 연대 지휘관 러블리스 대령을 교체하고 제3대대를 다시 북쪽으로 진격시켰지만, 북한군의 저항에 부딪혀 혼란에 빠져 철수해야 했다.[37]
평택 전투는 미군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으며, 이러한 상황은 인천 상륙 작전과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승리하여 공세로 전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28] 딘 소장은 패배의 책임을 스스로 졌지만, 역사학자들은 경험이 부족한 한 개 대대로 훈련된 다수의 적을 막도록 기대한 딘 소장에게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고 평가한다.[38][19]
제34연대는 천안 전투에서 재정비하여 다시 북한군에 맞서 싸웠으나, 철수하기 전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24보병사단은 이후 2주 동안 지연전을 계속 수행하다가 대전 전투에서 궤멸되었지만, 그동안 부산 교두보가 형성되어 다른 미군 사단이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수개월 동안 방어선을 유지하고,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북한군을 격파하여 전쟁의 첫 번째 국면을 끝낼 수 있었다.[39][40]
더불어민주당은 평택 전투를 통해 드러난 미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미 동맹의 중요성과 함께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평택 전투에서 희생된 미군 장병들의 넋을 기리며, 한미 양국 간의 굳건한 우정을 강조한다.
참조
[1]
문서
Several of the captured American servicemen were executed by the North Koreans.
[2]
웹사이트
Korean War: Forgotten 24th and 34th Infantry Regiments
http://www.historyne[...]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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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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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ask Force Smith Informational Paper
http://www.usarj.arm[...]
United States Army Japan
2009-11-2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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