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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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안 전투는 1950년 7월 7일부터 8일까지 대한민국 천안에서 벌어진 한국 전쟁 초기 미군과 북한군의 교전이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군이 후퇴하고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미 제24보병사단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윌리엄 F. 딘 소장의 지휘 아래, 미군은 평택 전투에서 패배한 후 천안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에 직면했다. 전투 결과, 미군은 천안에서 철수하고 금강 방어선으로 이동했으며, 제34보병연대 지휘관 로버트 R. 마틴 대령은 전사 후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 천안 전투는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대전 전투를 준비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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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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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7월 7일 – 7월 8일 |
장소 | 충청남도 천안시 |
좌표 | 36°48′36″N 127°08′51″E |
결과 | 조선인민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유엔군 | |
지휘관 | |
유엔군 | 윌리엄 F. 딘 로버트 R. 마틴 로버트 L. 웨들링턴 |
조선인민군 | 리권무 |
병력 규모 | |
유엔군 | 2,000명 |
조선인민군 | 12,000명 |
피해 규모 | |
유엔군 | 약 300명 사상 또는 실종 (98–109명 사망/실종) 및 60명 포로 |
조선인민군 | 불명 |
참전 부대 | |
유엔군 | 미국 34 보병 연대 |
조선인민군 | 조선인민군 4사단 제16 보병 연대 제18 보병 연대 조선인민군 105 기갑 사단 조선인민군 107 전차 연대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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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은 10개 사단 89,000명의 병력으로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했다. 대한민국 육군은 장비와 전쟁 준비 부족으로 혼란에 빠졌고,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은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한국 정부와 군대는 남쪽으로 후퇴했다.[2][3][4]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미군에 한국 파병을 명령했다.[5] 당시 극동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미군 부대는 일본 규슈에서 점령 임무를 수행하던 미국 제8군 소속 미국 제24보병사단이었다. 윌리엄 F. 딘 소장이 지휘하는 제24보병사단은 병력과 장비가 부족했지만,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다른 미군 부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급파되었다.[5][6]
제24보병사단 예하 제21보병연대 제1대대는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을 벌였으나 패퇴했고(스미스 특임대),[8] 제34보병연대는 평택-안성 선에서 지연전을 펼쳤으나 북한군 전차를 막을 장비가 부족하여 큰 피해를 입고 천안으로 후퇴했다.[9][11]
2. 1. 한국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밤, 조선인민군 10개 사단이 남쪽 이웃 나라인 대한민국을 전면 침공했다. 89,000명의 병력은 6개 열로 이동했으며, 기습을 당한 대한민국 육군은 혼란에 빠졌고, 장비 부족과 전쟁 대비 부족으로 참패했다.[2]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은 전선에 배치된 38,000명의 한국군으로부터 고립된 저항을 분쇄하고 남쪽으로 꾸준히 진격했다.[3] 대부분의 한국군은 침공에 맞서 후퇴했으며,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여 정부와 붕괴된 병력이 남쪽으로 철수하도록 했다.[4]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붕괴하는 국가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지상군을 한국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다.[5] 그러나 극동 지역의 미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5년간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가까운 병력은 일본 규슈에서 일본 점령 임무를 수행하던 미국 제8군 소속 미국 제24보병사단이었으며, 윌리엄 F. 딘 (미국 육군 소장)이 지휘했다. 그러나 사단은 병력 부족 상태였으며, 정규 전시 규모의 2/3 수준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군사비 지출 감소로 인해 제24보병사단의 장비 대부분은 노후화되었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제24보병사단은 한국에 투입되었으며,[5] 나머지 제8군이 한국에 도착하여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도록 북한군의 초기 "충격"을 흡수하는 임무를 받았다.[6]
2. 2. 미국의 참전 결정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붕괴하는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미군에 한국 파병을 명령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극동 지역의 미군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가까운 병력은 일본 규슈에서 일본 점령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미국 제8군 소속의 미국 제24보병사단이었으며, 윌리엄 F. 딘(미국 육군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4보병사단은 병력 부족 상태였으며, 정규 전시 규모의 2/3 수준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군사비 지출 감소로 인해 제24보병사단의 장비 대부분이 노후화되었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제24보병사단은 한국에 투입되었으며,[5] 나머지 제8군이 한국에 도착하여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도록 북한군의 초기 "충격"을 흡수하는 임무를 받았다.[6]2. 3. 초기 전투
미국 제24보병사단은 조선인민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21보병연대 제1대대는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을 벌였으나 패퇴했다.(스미스 특임대)[8] 제34보병연대는 평택-안성 선에서 지연전을 펼쳤으나,[9] 북한군 전차를 막을 장비가 부족하여 큰 피해를 입고 천안으로 후퇴했다.[11] 특히 평택 전투에서 제1대대는 큰 피해를 보았다.[12][13][14]3. 작전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