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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풍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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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풍은 후한 말 원소 휘하의 인물로, 뛰어난 계략과 학식을 갖춘 참모였다. 그는 환관 세력을 혐오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원소에게 등용되어 조조와의 대립에서 지구전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도대전 패배 후, 전풍은 원소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강직한 성격과 주군의 불신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뛰어난 책략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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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풍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전풍(田豊)
본명전풍(田豐)
로마자 표기Jeonpung
원호(元皓)
출생불명
출생지거록군(鉅鹿郡) 또는 발해군(勃海郡)
사망건안(建安) 5년 (200년)
사망 장소불명
소속한복 → 원소
직책별가(別駕)

2. 생애

전풍은 성장하면서 재주가 뛰어났고, 웅대한 계략은 다수의 눈을 집중시켰다. 젊었을 때 아버지를 잃어 상중에 매우 슬퍼했으며, 세월이 지나도 이빨이 드러날 정도로 웃지 않았다.[2] 박학다식하여 주의 사람들로부터 명성이 자자했다.[2] 처음엔 태위(太尉)의 처소에 초빙되어 무재(茂才)로 추천되었고, 이후 시어사(侍御史)로 승진하였다.[2] 하지만 환관이 조정에서 득세하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2]

이후 전풍은 심배(審配)와 더불어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을 섬겼는데, 두 사람은 정직했기 때문에 한복에게 소외되었다. 초평 2년(191년), 원소(袁紹)는 한복의 세력을 흡수한 후 좋은 말로 전풍을 초빙하였다.[3] 전풍은 왕실이 곤란에 처했고, 난세를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소에게 갔다.[3] 원소는 전풍을 별가(別駕)에,[3] 심배를 치중(治中)에 임명하여 중용하였다. 훗날 원소의 명령으로 한복을 섬겼던 경무(耿武)와 민순(閔純)을 죽였다.

초평 3년 정월, 계교 전투에서 원소가 공손찬의 공격을 받자, 전풍은 그에게 벽 뒤에 숨으라고 촉구했지만, 원소는 투구를 땅에 던지며 벽 뒤에 숨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말했다.[5]

건안 원년, 조조(曹操)가 헌제(獻帝)를 허도(許都)로 맞이하였는데, 그해 전에 전풍이 먼저 헌제를 맞이할 것을 원소에게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이후 원소는 헌제를 견성으로 모셔올 것을 조조에게 권유했다. 조조가 이를 거절하자 전풍은 원소에게 허도를 습격해 헌제를 데려올 것을 건의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

건안 4년, 공손찬(公孫瓚)을 멸망시켰는데, 이때 전풍의 책략이 쓰였다. 원소는 허도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는데, 심배 · 봉기에게 군사를 통괄하게 하고 전풍 · 순심 · 허유를 참모장으로, 안량 · 문추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전풍은 저수(沮授)와 함께 지구전 전략을 주장했으나, 원소는 심배·곽도가 주장한 단기결전 전략을 채용하였다.[7] 원소의 군대 동원 소식을 접한 공융은 조조에게 전풍과 허유가 참모가 되었으니 승리하기 어렵겠다고 걱정했지만, 순욱은 전풍이 억센 인물로 필히 윗사람을 거스를 것이라고 평했다.

건안 5년,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하고 패성을 점령하여 조조를 배신하자, 조조는 유비를 직접 치기 위해 출정했다. 전풍은 이 기회에 원소에게 조조의 뒤를 칠 것을 설득했지만, 원소는 막내아들 원상이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전풍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아아! 이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평생 찾아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겨우 어린 아이 병 때문에 놓치다니 애석하구나"라고 말했고, 이에 원소가 분노하여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8]

원소가 조조를 치려 하자, 전풍은 다시 지구전을 주장하며 간곡하게 진언했지만, 원소는 크게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9] 전풍이 종군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원소는 이미 진 것이나 다름 없구나"라며 기뻐했다.

관도 대전에서 원소군이 크게 패하고 돌아오자, 장군들은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아 패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전풍에게 원소가 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풍은 원소의 성격을 언급하며 자신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0]

패하고 돌아온 원소는 "내가 패했으니 전풍에게 조소당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를 죽였다.[10] 『삼국지』 원소전의 주에 인용된 『선현행장』에 따르면, 전풍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봉기(逢紀)가 "전풍은 공이 패한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 적중한 것에 기뻐한다고 합니다."라고 참언을 하여, 원소가 전풍을 죽이게 되었다고 한다.[11]

2. 1. 초기 생애와 출사

전풍은 성장하면서 재주가 뛰어났고, 웅대한 계략은 다수의 눈을 집중시켰다. 젊었을 때 아버지를 잃어 상중에 매우 슬퍼했으며, 세월이 지나도 이빨이 드러날 정도로 웃지 않았다.[2] 박학다식하여 주의 사람들로부터 명성이 자자했다.[2] 처음엔 태위(太尉)의 처소에 초빙되어 무재(茂才)로 추천되었고, 이후 시어사(侍御史)로 승진하였다.[2] 하지만 환관이 조정에서 득세하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2]

이후 전풍은 심배(審配)와 더불어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을 섬겼는데, 두 사람은 정직했기 때문에 한복에게 소외되었다. 초평 2년(191년), 원소(袁紹)는 한복의 세력을 흡수한 후 좋은 말로 전풍을 초빙하였다.[3] 전풍은 왕실이 곤란에 처했고, 난세를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소에게 갔다.[3] 원소는 전풍을 별가(別駕)에,[3] 심배를 치중(治中)에 임명하여 중용하였다. 훗날 원소의 명령으로 한복을 섬겼던 경무(耿武)와 민순(閔純)을 죽였다.

초평 3년 정월, 계교 전투에서 원소가 공손찬의 공격을 받자, 전풍은 그에게 벽 뒤에 숨으라고 촉구했지만, 원소는 투구를 땅에 던지며 벽 뒤에 숨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말했다.[5]

건안 원년, 조조(曹操)가 헌제(獻帝)를 허도(許都)로 맞이하였는데, 그해 전에 전풍이 먼저 헌제를 맞이할 것을 원소에게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이후 원소는 헌제를 견성으로 모셔올 것을 조조에게 권유했다. 조조가 이를 거절하자 전풍은 원소에게 허도를 습격해 헌제를 데려올 것을 건의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

건안 4년, 공손찬(公孫瓚)을 멸망시켰는데, 이때 전풍의 책략이 쓰였다.

2. 2. 원소의 참모

전풍은 젊은 시절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웅대한 계략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박학다식하여 주의 사람들로부터 명성이 자자했으며, 태위의 처소에 초빙되어 무재로 추천되었고, 이후 시어사로 승진하였다.[2] 그러나 환관이 조정에서 득세하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2]

이후 전풍은 심배와 더불어 기주목 한복을 섬겼으나, 정직했기 때문에 한복에게 소외되었다. 191년(초평 2년), 원소가 한복의 세력을 흡수한 후 전풍을 초빙하였고, 전풍은 왕실이 곤란에 처한 난세를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원소에게 갔다. 원소는 전풍을 별가, 심배를 치중에 임명하여 중용하였으며, 훗날 원소의 명령으로 한복을 섬겼던 경무민순을 죽였다.[3]

192년 겨울, 공손찬과의 계교 전투에서 원소군이 포위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전풍은 원소에게 후퇴를 권했으나, 원소는 투구를 내팽개치며 사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5]

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헌제를 허도로 맞이하기 전, 전풍은 원소에게 헌제를 맞이할 것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원소는 헌제를 견성으로 모셔올 것을 조조에게 권유했으나 거절당하자, 전풍은 허도를 습격해 헌제를 데려올 것을 건의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 조조가 장수를 포위하고 있을 때도 전풍은 허도 습격을 진언했지만, 원소군 휘하 탈주병이 이 계획을 조조에게 전해 조조는 포위망을 풀고 급히 돌아왔다.[4]

199년(건안 4년), 공손찬을 멸망시킬 때 전풍의 책략이 쓰였다. 원소는 허도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는데, 심배 · 봉기에게 군사를 통괄하게 하고 전풍 · 순심 · 허유를 참모장으로, 안량 · 문추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전풍은 저수와 함께 지구전 전략을 주장했으나, 원소는 심배·곽도가 주장한 단기결전 전략을 채용하였다.[7] 원소의 군대 동원 소식을 접한 공융은 조조에게 전풍과 허유가 참모가 되었으니 승리하기 어렵겠다고 걱정했지만, 순욱은 전풍이 억센 인물로 필히 윗사람을 거스를 것이라고 평했다.

200년(건안 5년),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하고 패성을 점령하여 조조를 배신하자, 조조는 유비를 직접 치기 위해 출정했다. 전풍은 이 기회에 원소에게 조조의 뒤를 칠 것을 설득했지만, 원소는 막내아들 원상이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전풍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했고, 이에 원소가 분노하여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8]

원소가 조조를 치려 하자, 전풍은 지구전을 펼쳐 조조를 지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 전풍이 재차 간곡하게 진언하자 원소는 크게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전풍이 종군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원소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기뻐했다.[9]

원소군이 관도 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장군들은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아 패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전풍에게 원소가 중용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전풍은 원소가 외견은 관용이 있지만 속으로는 의심이 많아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패하고 돌아온 원소는 전풍을 죽였다. 원소는 측근들에게 자신이 패했으니 전풍에게 조소당할 것이라고 말했고,[10] 선현행장에 따르면, 원소는 기주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걱정했지만 전풍만은 자신을 꾸짖었기에 부끄러워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때 봉기는 전풍이 공이 패한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자신의 말이 적중한 것에 기뻐한다고 참언했고, 원소는 이 말을 듣고 전풍을 해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11]

2. 3. 관도대전과 죽음

전풍은 환관(宦官)이 조정에서 득세하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2] 이후 심배(審配)와 더불어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을 섬겼으나, 정직했기 때문에 한복에게 소외되었다. 초평 2년, 원소(袁紹)는 한복의 세력을 흡수한 후 전풍을 초빙하였고, 전풍은 왕실을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원소에게 갔다.[3] 원소는 전풍을 별가(別駕)로 임명하여 중용하였다.

건안 원년, 조조(曹操)가 헌제(獻帝)를 허도(許都)로 맞이하기 전에, 전풍은 원소에게 헌제를 맞이할 것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이후 원소는 헌제를 견성으로 모셔올 것을 조조에게 권유했으나 거절당했고, 전풍은 허도를 습격해 헌제를 데려올 것을 건의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

건안 4년, 공손찬(公孫瓚)을 멸망시킨 원소는 허도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전풍은 저수(沮授)와 함께 지구전 전략을 주장했으나, 원소는 심배·곽도(郭圖)가 주장한 단기결전 전략을 채용하였다.[7]

건안 5년, 유비(劉備)가 서주자사(徐州刺史) 차주(車冑)를 살해하고 조조를 배신하자, 조조는 유비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 전풍은 이 기회에 조조의 뒤를 칠 것을 원소에게 건의했지만, 원소는 아들 원상(袁尙)이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했다.[8] 전풍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아아! 이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평생 찾아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겨우 어린 아이 병 때문에 놓치다니 애석하구나"라고 말했고, 이에 원소는 분노하여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8]

원소가 조조를 치려 하자, 전풍은 다시 지구전을 주장하며 간곡하게 진언했지만, 원소는 크게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9] 전풍이 종군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원소는 이미 진 것이나 다름 없구나"라며 기뻐했다.

관도 전투에서 원소군이 크게 패하고 돌아오자, 장군들은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아 패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전풍에게 원소가 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풍은 원소의 성격을 언급하며 자신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0]

패하고 돌아온 원소는 "내가 패했으니 전풍에게 조소당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를 죽였다.[10] 『삼국지』 원소전의 주에 인용된 『선현행장』에 따르면, 전풍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봉기(逢紀)가 "전풍은 공이 패한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 적중한 것에 기뻐한다고 합니다."라고 참언을 하여, 원소가 전풍을 죽이게 되었다고 한다.[11]

3. 평가

조조는 만약 원소가 전풍의 책략을 이용하였다면 자신과 원소의 입장은 완전히 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지 위서 원소전의 주석에 나왔고, 역사가 손성은 "전풍과 저수의 지모는 전한의 건국공신 장량진평에 필적한다"라고 극찬하였다.

전풍은 원소에게 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는 진언을 여러번 했으나, 지나치게 강직하여 원소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많아 서서히 소외되었다. 그 점에서는 조조의 참모였던 순욱이 "전풍은 강직한 성격으로 틀림없이 윗사람을 거슬릴 것입니다"라고 지적한 것이 적중했다. 또한 삼국지의 주석자였던 배송지도 주군을 잘못 골랐기 때문에 충절을 다했지만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 개탄스럽다고 하였다.

뛰어난 계책을 내보였으나 주군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신과 그 세력 전체가 망했다는 점이 공통점으로 범증에 비견된다.

3. 1.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도 정사와 거의 비슷하게 묘사되었으며, 암군에게 충의를 다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조조와의 싸움에서는, 사적대로 원소를 간언하다 투옥된다. 과연 전풍이 우려한 대로, 원소는 관도에서 조조에게 대패하고 만다. 원소가 전풍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자, 봉기가 "전풍은 옥중에서 주공의 패배를 비웃고 있습니다"라고 참언한다. 격노한 원소는 사자에게 보검을 쥐여 전풍의 처형을 명한다.

옥중의 전풍은, 옥리로부터 패전을 고하자, "(당신이 말한 대로) 원 장군은 대패하여 돌아올 테니, 반드시 당신은 중용될 것입니다"라고 기뻐하는 옥리에게, 전풍은 "원 장군은 겉으로는 관대해 보여도 속으로는 질투심이 많고, 부하의 충성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이기면 기뻐하며 나를 용서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패전하여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이상, 나는 살아남는 것을 바라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과연 원소로부터의 사자가 와서, 전풍을 참수하려 한다.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전풍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옥리 앞에서 "주군을 간파하지도 못하고 섬긴 것, 그것이 무지한 것이다. 오늘 죽더라도 무엇을 아까워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옥중에서 자결한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Xianxian Xingzhuang
[3] 서적 Xianxian Xingzhuang
[4] 서적 Xianxian Xingzhuang
[5] 서적 Yingxiong Ji
[6] 서적 Xianxian Xingzhuang
[7] 서적 Xiandi Zhuan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Xianxian Xingzhuang
[12] 서적 先賢行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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