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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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화는 명나라 영락제 때 활약한 환관으로, 본래 이름은 마삼보였다. 그는 무슬림 출신으로,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 과정에서 포로로 잡혀 거세된 후 환관이 되어 연왕 주체(훗날 영락제)를 섬겼다. 정난의 변에서 공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씨 성을 하사받고 내궁감의 태감이 되었다. 영락제의 명으로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남중국해와 인도양 일대를 항해하며 조공 관계를 수립하고,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이르렀다. 그의 대항해는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앞섰으며, 이후 중국의 해금 정책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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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명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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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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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정화 |
본명 | 마허 |
다른 이름 | 마허 마삼보 청호 마흐무드 샴스 |
출생일 | 1371년 |
출생지 | 윈난성쿤밍시 (당시 원나라) |
사망일 | 1433년 또는 1435년 |
직업 | 제독 외교관 탐험가 관료 |
시대 | 명나라 |
중국어 표기 | |
간체 | 郑和 |
번체 | 鄭和 |
병음 | Zhèng Hé |
민난어 발음 | Tēⁿ Hô |
광둥어 발음 | Zeng6 Wo4 |
우어 발음 | Zen Wu |
객가어 발음 | Jehng Wòh |
관직 및 경력 | |
재임 기간 (영락제) | 1402년 ~ 1424년 |
재임 기간 (선덕제) | 1425년 ~ 1435년 |
직책 | 환관 무장 항해가 |
칭호 | 태감 |
군사 정보 | |
복무 | 명나라 해군 |
충성 | 명나라 |
주군 | 영락제 |
복무 기간 | 1398년 ~ 1434년 |
개인 정보 | |
종교 | 이슬람교 |
아호 | 복선 |
2. 생애
정화의 성인 시절 외모는 키가 7치(1치는 약 26.5cm~30cm로 추정)[19]였고, 허리는 5치였으며, 볼과 이마는 높았고, 코는 작았다고 전해진다. 눈은 날카로웠고, 이빨은 조개처럼 하얗고 잘 생겼으며, 목소리는 종소리처럼 컸다. 그는 또한 전쟁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전투에 익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2][18][19]
정화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며 천비(마조) 여신을 깊이 신봉했다. 창락 비문에는 폭풍우 속에서 돛대 끝에 나타난 신성한 등불(세인트 엘모의 불)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5]
천비(天妃) 여신의 능력은 과거에도 나타났지만, 현재 세대에도 풍부하게 드러났습니다. 급류 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중에, 갑자기 돛대 꼭대기에 신성한 등불이 빛나는 것이 보였고, 그 기적적인 빛이 나타나자 위험이 가라앉아 배가 뒤집힐 위험 속에서도 안심하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정화와 그의 동료들 (창락비문)[5]
영락제를 도와 공을 세워 태감이 된 정화는 이후 대규모 해상 원정을 이끌었다.
1424년, 정화는 수마트라의 팔렘방으로 가서 새로운 안정 위원 시지순(施紀孫|시지순중국어)에게 관인과 임명장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태종실록』 1424년 2월 27일 기록에 따르면, 옛 관인이 화재로 소실되어 정화가 새 관인을 전달하러 갔다고 한다. 시지순은 아버지 시진경(施進卿|시진경중국어)의 직책 계승을 위해 사신 구염성(邱衍成|구염성중국어)을 보내 영락제의 허락을 받았다.[95] 그러나 정화가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영락제는 이미 1424년 8월 12일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의 아들 주고치(홍희제)가 1424년 9월 7일 홍희제로 즉위했다. 홍희제는 즉위 직후인 9월 7일, 막대한 비용이 드는 보물선 원정을 중단시켰다. 이듬해인 1425년 2월 24일, 정화는 난징의 수비 책임자로 임명되어 보물선 함대를 지휘하며 도시 방어 임무를 맡았다.
1426년 5월 15일, 선덕제는 예부에 편지를 보내 정화를 훈계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공부상서 아래의 한 관리가 난징 사원 건축 노동자들에 대한 포상을 황제에게 청원했는데, 선덕제는 정화와 그의 동료들이 이 관리를 부추겼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덕제의 질책 어조는 이것이 마지막 경고임을 시사하지만, 구체적인 이전 사건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덕제는 이후 정화를 다시 신임하게 된다. 1428년 3월 25일에는 난징의 대보은사 재건 및 수리 감독을 맡아 1431년에 완공했다.
1430년, 선덕제는 정책을 바꿔 정화에게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원정을 명령했다.[6][7] 이 마지막 항해에서 돌아오던 중인 1433년에 사망했다는 설과, 난징으로 돌아와 계속 수비 임무를 맡다가 1435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6]
정화의 무덤은 난징 소황산(牛首山) 남쪽 기슭에 있으며, 그의 시신 대신 의복과 관모만 묻힌 가묘(켄타프)로 여겨진다. 원래 말굽 모양이었던 무덤은 1985년에 이슬람 양식으로 재건되었다.[33]
2. 1. 출생과 가문
정화의 본명은 마삼보(馬三保|마삼보중국어) 또는 마화(馬和|마화중국어)이다. 1371년 운남성(雲南省) 쿤밍시 진녕구 곤양주(昆陽州) 보산향(寶山鄉)의 무슬림 가정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58] 그의 성씨인 '마'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사이이드 가문임을 의미한다.[58] 아버지의 이름은 마합지(馬哈只|마합지중국어) 또는 마하지(馬哈只|마하지중국어)로 알려져 있으며,[58] 이 이름과 할아버지의 '하지(Hajji)' 칭호는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를 순례했음을 시사한다. 정화에게는 형 한 명과 여동생 네 명이 있었다.정화의 선조는 칭기스칸의 중앙아시아 원정 때 몽골에 귀순한 색목인 정치인 사이드 아잘 샴스 알딘 오마르(賽典赤)로, 그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때 운남평장정사로서 운남성 개발에 기여했다.[59][2][3] 정화는 사이드 아잘의 5대손이며,[59] 증조부인 바얀(Bayan)은 운남의 몽골 주둔지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화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항해자들의 수호신인 천비(天妃|천비중국어, 마조(媽祖))에 대한 신앙심도 깊었다. 이는 류지강(劉家崗|류지강중국어)과 창러(長樂|창러중국어)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정화는 항해를 시작할 때 무슬림 성인의 무덤과 천비 모두에게 보호를 구했다고 전해진다.[1]
1381년 가을, 주원장(홍무제)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당시 원나라 세력 하에 있던 운남성을 공격하여 정복했다. 이 과정에서 정화의 아버지 마하지는 명나라 군대와의 전투 중 37세 또는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몽골군을 도왔는지, 아니면 전투에 휘말렸는지는 불분명하다. 장남인 원밍(文銘|원밍중국어)은 아버지를 곤명 외곽에 묻었다.
이때 소년 정화는 명나라 군대에 붙잡혀 거세된 뒤 환관이 되었고,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주체(朱棣, 훗날 영락제)에게 보내졌다.[107][108] 홍무제 사후, 연왕 주체가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오른 정난의 변(靖難의 變) 때 정화는 주체를 도와 공적을 세웠다. 이에 영락제는 정화에게 정(鄭|정중국어)이라는 성씨를 하사하고, 환관 최고위직인 태감(太監)으로 임명했다.[109] 정화가 무슬림 출신이었던 점은 훗날 영락제가 대규모 해상 원정의 지휘관으로 그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2. 2. 환관이 되기까지
마삼보(馬三保)는 운남성(雲南省) 곤양(昆陽)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씨인 마(馬) 씨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아버지 마합지(馬哈只)의 이름은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를 순례한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인 하지에서 유래했다. 그의 선조는 칭기스칸의 중앙아시아 원정 때 몽골에 귀순하여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시절 운남성 개발에 기여했던 색목인 정치인 사이드 아잘 샴스앗딘이었다. 정화가 이슬람교도 출신이었다는 점은 훗날 영락제가 대규모 해상 원정을 계획할 때 그를 지휘관으로 고려하게 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한 후, 여전히 원나라 세력 하에 있던 운남성을 공격했다(1381년). 이 과정에서 당시 10세였던 소년 정화는 명나라 군대에 붙잡혔고, 이듬해인 1382년경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다. 이후 당시 연왕(燕王)이던 주체(朱棣, 훗날 영락제)에게 보내졌다.[107][108][60]
정화는 자신보다 11살 많은 주체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당시 주체는 북평(北平, 현재의 베이징)을 거점으로 북방의 몽골 부족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정화는 이곳에서 군인으로서 경험을 쌓으며 주체의 신임을 얻었다.[4] 그는 주체가 지휘하는 여러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특히 1390년 우량카이 원정에서 공을 세웠다. 연왕 밑에서 그는 '삼보(三寶)'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불교의 삼보를 뜻한다. 정화는 북평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환관을 불신하여 글을 배우지 못하게 했던 홍무제의 정책과는 대조적인 환경이었다.
홍무제가 사망한 후,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영락제가 황제 자리에 오른 정난의 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정화는 영락제를 도와 큰 공을 세웠고, 그 결과 환관의 최고 직책인 태감에 임명되었다.[109] 또한 1404년(영락 2년)에는 영락제로부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아, 이후 '정화(鄭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61]
3. 원정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대규모 해상 원정을 이끌었다.[6] 이 원정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양을 항해하여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달했으며,[11] 이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함대였다.[110][109] 원정의 목적은 방문하는 국가들에 명나라의 위세를 보이고 조공 관계를 확장하며,[6] 다양한 문물을 교류하는 것 등을 포함했다.[111][12] 정화의 원정은 당시 인도양 무역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영락제 사후 정책 변화로 중단되었다.[22] 원정의 구체적인 배경과 목적, 함대의 규모, 각 항해의 상세한 과정 및 중단 이유는 아래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3. 1. 원정의 배경과 목적
영락제가 막대한 비용이 드는 대규모 원정을 기획한 배경과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우선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는 해금령을 내려 민간 선박의 해상 교역을 금지했으나[62], 영락제는 이러한 소극적인 대외 정책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절 파견과 조공 관계 수립을 추진했다. 이는 황제의 자리를 정난의 변을 통해 찬탈한 영락제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명나라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깊다.
구체적인 원정 목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들이 제기되었다.
- 건문제 탐색설: 정난의 변 당시 남경에서 탈출하여 행방불명된 건문제가 남쪽 바다로 도망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를 찾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다는 설이다.[109] 그러나 이것이 원정의 주된 목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 티무르 제국 견제설: 서쪽에서 성장하는 티무르 제국을 경계하여, 그 주변 세력과 동맹을 맺고 협공하려 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티무르는 제1차 원정이 시작된 해에 사망했고, 그의 사후 제국이 급격히 분열되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67]
- 수군 세력 통제설: 과거 주원장에게 패배한 진우량 휘하 수군 세력의 반항을 우려하여 이들을 원정에 동원했다는 설이다. 이 역시 진우량이 격파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타당성이 낮다고 평가된다.[68]
이러한 설들 외에도, 영락제가 찬탈을 통해 즉위한 것에 대한 국내의 부정적인 시선을 불식시키기 위해,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아 유교적인 성왕의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계승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해석이 있다.
또한, 정치적인 이유 외에 경제적인 목적도 거론된다. 명나라 함대가 남중국해와 인도양의 해상 패권을 장악하여 여러 나라의 조공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궁정에서 필요한 해외 사치품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비신 등의 기록에서도 여러 나라의 물산과 교역 상황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경제적 동기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의 해금령 하에서는 조공 무역만이 허용되었고, 조공 무역은 받은 공물보다 몇 배의 하사품을 주어야 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화의 원정은 영락제 시대의 전반적인 적극적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영락제는 직접 몽골 고원을 침공했으며(영락제의 몽골 원정), 1407년에는 베트남의 호 왕조를 멸망시키고 안남을 직접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환관들을 주변 여러 나라에 파견하여 조공을 유도했는데, 후현은 티베트, 네팔, 벵골 술탄국 등 남서쪽 국가들에 파견되었고, 이시하는 군대를 이끌고 아무르강 유역으로 파견되어 여진족을 복속시켰다.[69] 정화의 대원정 역시 이러한 대외 팽창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러한 주요 외교 및 군사 임무에 환관들이 중용된 것은 영락제의 환관 중용 정책을 보여주는 사례이다.[70]
초기(1차~3차) 항해는 주로 기존에 중국 상선들이 왕래하던 동남아시아와 인도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해금령으로 약화된 명나라의 영향력을 이 지역에 다시 확립하고, 조공 무역 체제를 강화하며 사적인 무역을 억제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제1차 항해 당시 팔렘방에서 해적 두목 진조의를 토벌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4차 항해부터) 항해에서는 인도 서해안을 넘어 페르시아의 호르무즈,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함대를 파견했다. 이는 기존 이슬람 상인들의 교역망이 확립되어 있던 인도양 서부 해역까지 명나라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조공 관계를 넓히려 시도했음을 보여준다.[96]
3. 2. 정화 함대의 규모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1405년 6월 제1차 원정을 시작으로 총 7차례의 대규모 해상 원정을 이끌었다.[6] 명사(明史)에 따르면 첫 원정 함대는 전체 길이가 44장(약 137m), 폭 18장(약 56m)에 이르는 대형 선박을 포함한 함선 62척에 총 승무원 27,800명으로 구성되었다.[110] 이 중 가장 큰 배는 약 8000ton 규모로 추정된다.[109] 이는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120ton급 3척, 승무원 170명)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함대(250ton급 3척, 승무원 88명)와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규모였다. 다른 기록에서는 첫 항해 함대가 317척의 함선에 약 2만 8천 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다고도 한다.[9][8][12]
1597년에 출판된 羅懋登(Luo Maodeng)의 소설 『삼보태감하서양기통속연의』(三寶太監下西洋記通俗演義)에는 정화 함대의 선박 종류와 크기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등장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26] 소설에 따르면 함대는 다음과 같은 배들로 구성되었다.
선박 종류 | 중국어 명칭 | 돛대 수 | 길이 (장(약 m)) | 너비 (장(약 m)) | 주요 용도 |
---|---|---|---|---|---|
보선 | 宝船|Bǎo Chuánzho | 9층 | 44.4장 (약 127m) | 18장 (약 52m) | 기함, 보물 운반 |
마선 | 馬船|Mǎ Chuánzho | 8층 | 37장 (약 103m) | 15장 (약 42m) | 말, 공물, 수리 물품 운반 |
량선 | 粮船|Liáng Chuánzho | 7층 | 28장 (약 78m) | 12장 (약 35m) | 식량 운반 |
좌선 | 坐船|Zuò Chuánzho | 6층 | 24장 (약 67m) | 9.4장 (약 25m) | 병력 수송선 |
전선 | 战船|Zhàn Chuánzho | 5층 | 18장 (약 50m) | - | 전투함 |
이 배들에는 항해사, 탐험가, 선원, 의사, 노동자, 군인 등 다양한 직종의 인원이 탑승했으며, 통역관 공진(龔珍)도 동행했다. 이후 여섯 차례의 원정 역시 비슷한 규모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명사』나 소설에 기록된 보선의 거대한 크기(길이 127m~137m)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이 크기는 19세기 철제 증기선이 등장하기 전까지 건조된 어떤 목선보다도 훨씬 크기 때문이다. (HMS 빅토리는 길이 69.34m, 바사호는 68.88m). 많은 학자들은 실제 보선의 길이를 61m에서 76m 사이로 추정하며, Zhao Zhigang은 약 70m였다고 주장한다.[27] 에드워드 L. 드레이어(Edward L. Dreyer) 등은 소설 『삼보태감하서양기통속연의』의 기록이 신의 도움으로 배를 건조했다는 등 환상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역사적 증거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거대한 보선은 양자강과 같이 잔잔한 수역에서 황제나 고위 관료들이 함대를 사열하는 의전용으로만 사용되었고, 실제 원양 항해의 주력선은 6개의 돛을 단 2000료(재화 용적 약 500ton, 배수량 약 800ton)급 선박이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28][29] 가장 과장된 크기 주장은 원정 3세기 후에 쓰여진 기록에 근거하며, 다수의 해군 전문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30]
선박 크기 논란은 명나라 시대의 측량 단위인 '장(丈)'의 실제 길이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기도 하다. 명나라 기록에 등장하는 유럽 선박이나 대포 크기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 당시 1장이 현대의 3.2m가 아닌 1.5~1.6m 정도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만약 1장을 1.6m로 계산하면 44장짜리 보선의 길이는 70.4m, 너비는 28.8m가 된다. 하지만 명나라 시대에는 지역마다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문제도 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난징의 옛 보물선 조선소(Treasure Shipyard) 유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정화 함대가 건조된 장소로 추정된다. 발굴된 가장 큰 선박 건조용 수조(dock)는 길이가 421m에 달해 기록상의 보선을 수용할 수는 있었지만, 수조의 폭(최대 41m, 내부 구조물 폭 10m)과 수심(4m)은 거대한 배를 건조하고 띄우기에는 부족했다. 수조 내 구조물의 간격 등을 고려할 때, 이곳에서 건조된 가장 큰 배의 길이는 최대 75m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32]
또한 조선소 유적에서는 길이 10m에서 11m에 달하는 티크 나무로 만든 키(rudderpost)가 여러 개 발굴되었다. 일부에서는 이 키의 크기가 거대한 선박의 증거라고 주장했지만, 후속 연구에서는 전통적인 중국 선박의 구조상 키가 수면 위 갑판까지 닿아야 하므로 반드시 길어야 하며, 키의 길이만으로 선박 전체의 크기를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 길이 11m의 키를 가진 31m 길이의 현대 목제 정크선 사례도 제시되었다.[32]
3. 3. 7차례의 원정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1405년 6월(음력 6월 15일[71] / 양력 7월 11일[13]) 첫 원정을 시작했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함대는 길이 44장(丈, 약 137m), 폭 18장(약 56m)에 달하는 거대한 보물선[110]을 포함하여, 기록에 따라 함선 62척[110] 또는 317척[9][8][12], 승무원 27,800명[110] 또는 약 28,000명[9]으로 구성된 대규모였다. 가장 큰 배는 약 8천 톤 규모[109]로 추정되며, 이는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120톤급 3척, 170명)나 콜럼버스의 함대(250톤급 3척, 88명)와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규모였다.원정의 주요 목적은 방문하는 나라들에 명나라의 조공을 요구하고, 남방의 문물을 가져오는 것[111], 인도양 무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립, 제국 통제 강화, 외국에 대한 위세 과시, 조공 체제 확장 등[6]이었다. 일각에서는 정난의 변 때 실종된 건문제를 찾기 위한 목적[109]도 제기되나 주된 목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정화 함대는 정복이나 식민지화를 목표로 하지는 않았으나[18],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힘을 과시하고[18] 필요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19]

정화는 총 7차례에 걸쳐 대규모 원정을 이끌었다.
- 제1차 원정 (1405년-1407년): 소주 태창주[73]에서 출발하여 참파(베트남 중부), 수마트라, 팔렘방, 말라카, 실론(스리랑카)을 거쳐 1406년 인도 캘리컷(코지코드)에 도달했다.[111] 팔렘방에서는 화교 해적 지도자 진조의(陳祖義) 세력과의 충돌이 있었는데, 정화는 진조의를 격파하고 사로잡아 남경으로 압송하여 처형했다.[74][20] 이 항해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으며, 특히 신생 말라카 왕국은 정화 함대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75]
- 제2차 원정 (1407년 말-1409년): 이전과 유사한 항로를 따랐으나, 시암(태국)과 자바 등을 추가로 경유했다. 귀환 중 스리랑카 갈에 중국어, 타밀어, 페르시아어 3개 언어로 된 비석을 세웠다.[111]
- 제3차 원정 (1409년 말-1411년): 역시 캘리컷까지 도달했다. 귀환 길에 스리랑카의 현지 왕(코테 왕국의 비라 알라케스와라)[20]이 정화 함대를 공격했으나, 정화는 반격하여 왕과 그 가족을 사로잡아 1411년 7월 남경으로 압송했다.[111][20]
- 제4차 원정 (1413년 겨울-1415년): 더 서쪽으로 나아가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아덴까지 도달했다.[111] 귀환 중 수마트라 현지 왕의 요청으로 반란 세력을 진압했으며,[111] 30개국 이상의 사절을 데리고 귀국했다. 시안의 대학습항(大學習巷) 사원에는 이 4차 원정에 대한 내용이 새겨진 1523년 비석이 남아있다.[6]
- 제5차 원정 (1417년 겨울-1419년): 본대는 아덴까지 갔고, 분견대는 아프리카 동해안의 말린디까지 도달한 것으로 여겨진다.[111] 귀환 시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 등 진기한 동물들을 데려왔는데,[111] 특히 말린디에서 온 기린은 상서로운 동물 '기린'(麒麟|치린중국어)으로 여겨져 명나라 천명의 증표로 해석되었다.[13][12][14][15][16]
- 제7차 원정 (1431년 12월-1433년 7월): 영락제 사후 홍희제 때 잠시 중단되었던 원정은 선덕제 때 재개되었다.[22] 선덕제의 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정화는 고령이었으나 그를 대체할 인물이 없었다.[111][94] 함대는 호르무즈까지 도달했으며, 분견대는 메카까지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94] 정화는 이 마지막 항해 중 또는 직후에 병사한 것으로 추정된다.[111] 중국에는 그의 무덤이 있지만 비어 있으며, 실제로는 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정화 사후 명나라는 다시 쇄국정책으로 전환하여 더 이상의 대규모 원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11] 홍희제와 선덕제는 막대한 비용[21]과 유교적 원칙 위배[22] 등을 이유로 원정을 중단시켰다. 성화제 때 잠시 재개 논의가 있었으나, 비용 문제와 관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11] 대항해 관련 공식 기록은 후대 관료들에 의해 상당수 인멸되거나 감춰진 것으로 여겨진다.[111][22]
다행히 제4차와 제7차 원정에 동행했던 마환(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槎勝覽),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 등의 개인 기록이 남아 당시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세계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111] 이 기록들은 당시 방문했던 항구들의 풍습, 생활상, 교역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3. 4. 원정의 중단
1424년 영락제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홍희제(재위 1424년~1425년)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항해를 중단시켰다.[89] 정화는 홍희제의 아들인 선덕제(재위 1426년~1435년) 시대에 한 번 더 항해를 했지만, 중국 보물선 함대의 항해는 그 후 종료되었다. 선덕제는 그의 아버지가 항해를 중단시킨 결정을 공적으로 여겼으며,[22] 항해 자체가 황명조훈(皇明祖訓)에 명시된 규칙, 즉 "멀리 떨어진 나라들이 많은 비용과 어려움을 감수하며 조공을 바치는데, 이는 결코 내 뜻이 아니다. 양쪽 모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도록 그들에게 전갈을 보내 조공을 줄이도록 해야 한다."[21]는 원칙에 위배된다고 보았다.[22] 또한 이는 오랜 유교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항해는 명나라 환관 세력이 문신 관료 세력에 대해 우위를 점했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정화의 사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후대의 관리들은 공식 기록에서 그의 업적을 축소하려 하기도 했다.[22] 정화가 사망한 다음 해인 선덕 10년(1435년)에 선덕제마저 사망하자 명나라는 다시 내향적인 정책 기조로 돌아섰고, 국력의 쇠퇴와 맞물려 더 이상 대규모 항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7차 항해 때 명나라에 왔던 여러 나라의 사절들은 귀국할 배편을 구하지 못해 3년간 발이 묶였다가, 1436년(정통 원년)에야 마자파힛 사절단의 배에 간신히 편승하여 귀국길에 올랐으나, 도중 조난으로 56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후에도 항해 재개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1457년(천순 원년)에는 천순제가 다시 항해를 계획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98] 성화 연간에도 항해 재개 논의가 있었지만, 막대한 비용과 유교적 명분론을 내세운 관료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일설에 따르면, 항해가 백성을 괴롭히고 국력을 소모시킨다고 생각한 류대하가 후일의 항해 재개 시도를 막기 위해 관련 공식 기록들을 몰래 빼내어 소각했다고도 전해진다.[99]
대항해 자체의 막대한 경비와 더불어, 조공 무역 체제 유지에도 많은 재정이 소요되었다. 영락제 사후 명나라는 재정 긴축을 위해 조공 무역에 제한을 두기 시작했고, 그 결과 조공국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도양 무역에서는 명나라 선단의 빈자리를 이슬람 상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101]
4. 역사적 평가 및 유산
정화의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년 앞선 대규모 항해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는 후세에 삼보태감(三寶太監)으로 불리며 사마천, 채륜과 더불어 환관 출신 위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항해는 말라카 왕국의 성장 등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미쳤으며, 방문지 곳곳에는 그를 기리는 유적이 남아있다.[37]
정화의 사망 시기는 1433년 또는 1435년으로 추정되며,[95] 난징 우수산 남쪽 기슭에 그의 가묘(cenotaph)가 조성되었다.[33]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화의 항해는 명나라 공식 역사 기록에서 오랫동안 축소되거나 누락되었다.[35] 이는 정치적 부담감, 기록 관리 문제 등 복합적인 이유 때문으로 보이며,[35] 20세기 초 량치차오의 저술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34][35]
정화의 대규모 항해는 선덕제 사후 중단되었는데, 이는 북방 몽골의 위협 증대 및 관련 군사 비용 증가,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관료들의 반대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98] 항해는 기본적으로 평화적 외교와 조공 무역을 목적으로 했으나, 스리랑카 원정(명-코테 전쟁)[77]처럼 군사력을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항해 경로는 초기 동남아시아 중심에서 점차 인도양 너머 아라비아, 아프리카 동안까지 확장되었다.[96]
항해에 대한 공식 기록은 소실되었으나,[99] 동행했던 마환의 『영애승람』, 비신의 『성차승람(星槎勝覽)』,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 등 민간 기록과 『무비지』에 수록된 일부 해도를 통해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100] 이 기록들은 당시 동남아시아 및 인도양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4. 1. 현대의 재조명
정화의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년이나 앞선 대규모 항해로 매우 높게 평가받는다. 그는 후세에 삼보태감으로 불리며, 사마천 및 채륜 등과 함께 환관 출신의 영웅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또한 정화가 머물렀던 자바, 수마트라, 태국 등 각지의 항구에서는 정화에 대한 평판이 높아 삼보묘(三寶廟)가 건립되어 그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기도 한다.정화 함대는 처음부터 말라카 해협에 세워진 말라카 왕국을 인도양 항해의 중요한 근거지로 여겨 국왕을 우대하였다. 그 덕분에 말라카 왕국은 정화 함대의 보호 아래 성장하여, 중국 함대의 항해가 중단된 뒤에도 동서 교역의 중계항으로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정화의 위대한 항해는 중국 공식 역사 기록에서 오랫동안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1904년 량치차오가 '우리 조국의 위대한 항해사 정화 전기'를 출판한 이후에야 비로소 중국과 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4][35]

마지막 항해 이후 수십 년 동안, 명나라 황실 관리들은 여러 왕조 시대의 역사를 편찬하면서 정화와 그의 원정에 대한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 영락제와 선덕제 시기의 공식 기록에는 정보가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다른 공식 출판물에서는 정화의 원정 자체가 완전히 생략되기도 했다.[35]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항해에 대한 기억을 없애려는 조정의 음모로 해석하기도 하지만,[46] 기록이 여러 부서에 흩어져 있었고, 왕조를 세운 홍무제의 명령을 어기고 이루어진 대규모 원정이 명나라 조정에 일종의 부담을 주었을 가능성도 크다.[35]
정화의 항해 이후 명나라의 국가 주도 해양 원정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15세기 초부터 중국은 북쪽의 잔존 몽골 세력으로부터 점점 더 큰 군사적 압력을 받았다. 수도를 남쪽의 난징에서 북쪽의 베이징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위협에 직접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북방의 위협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베이징에서 매년 몽골을 겨냥한 군사 원정을 벌여야 했고, 이 육상 원정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은 해양 원정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자금과 직접적으로 충돌했다. 설상가상으로 1449년에는 토목보의 전투에서 정통제가 직접 이끈 명나라 군대가 몽골 기병에게 대패하고 황제 본인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전투는 북방 유목민의 위협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명확히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몽골이 정통제의 이복동생인 경태제가 이미 즉위한 상황에서 정통제를 송환함으로써 명나라 내부에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1457년 정통제가 복위하여 정치적 안정을 되찾기 전까지 혼란은 계속되었다. 복위 후 명나라는 매년 대규모 육상 원정을 벌이는 전략을 포기하는 대신,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보수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양 원정에 투입될 자금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절단은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명나라를 방문했다. 지역 상황에 따라서는 사절단이 너무 자주 도착하여 조정에서 이를 제한해야 할 정도였다. 『명사』에는 자바, 참파, 시암 같은 나라들이 3년에 한 번 이상 사절을 보내는 것을 금지하는 황제의 칙령이 기록되어 있다.[38]

1950년대, 존 킹 페어뱅크나 조셉 니덤과 같은 서구 역사학자들은 정화의 항해 이후 중국이 《해금령》(海禁令) 정책으로 인해 바다로부터 등을 돌리고 고립되어 유럽의 기술 발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는 견해를 널리 퍼뜨렸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반박하며, 정화 시대 이후에도 중국의 해상 무역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며, 19세기까지도 중국 선박들이 동남아시아 무역에 계속 참여했고 인도 및 동아프리카와의 활발한 교역 역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잭 골드스톤과 같은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정화의 항해가 중단된 것은 중국의 기술 수준 문제라기보다는, 앞서 언급된 북방의 위협과 재정 문제 등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42] 명나라의 《해금령》은 해상 활동을 금지했지만, 이는 정화의 항해나 해금령 자체보다 훨씬 이전인 홍무제 시대의 정책이었고, 영락제 시대에는 사실상 무시되었으며 결국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해상 활동 금지 정책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밀수나 왜구 활동으로 내몰았고, 정화의 항해 이후 황실 함대와 남경 조선소의 관리가 소홀해진 것은 16세기 일본 왜구의 침입에 해안 방어가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43][44]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의 중국사 교수인 리처드 폰 글란은 정화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가 그를 잘못된 방식으로 다루며, "실제와 다른 가정에 기반한 주장"을 펼치고, 그의 업적이 아닌 실패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중국의 놓친 기회"만을 부각한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폰 글란은 15세기 아시아의 해상 역사가 본질적으로 정화와 그의 항해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정화가 아시아를 재편했다"고 주장한다.[45]
공식 역사 기록에서는 무시당했지만, 정화 함대의 모험은 일부 중국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1597년에는 항해 이야기를 다룬 소설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가 나오기도 했다.[46]
정화는 항해 중에 여러 곳에 모스크를 건설했으며[47] 마조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 자신이 메카로의 하즈 순례를 할 시간을 내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항해에서 부하 선원들을 메카로 파견했다. 그는 중국과 이슬람 국가 간의 관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48][49] 푸젠에 있는 이슬람 성인의 사당을 방문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 정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크게 높아졌다. 버너 빈지의 1999년 과학소설 『하늘의 심연(A Deepness in the Sky)』에서는 정화의 이름을 딴 '칭호(Qeng Ho)'라는 성간 무역 집단이 등장한다. 2005년 헤더 테렐의 소설 『지도 도둑(The Map Thief)』에서도 정화의 원정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2005년 정화 항해 60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은 정화 역을 뤄자량이 맡은 특별 TV 시리즈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을 제작했다. 그는 또한 1인칭 슈팅 게임 『파 크라이 3』의 주요 줄거리에서도 언급된다. 스타트렉 시리즈 『스타트렉: 피카드』에서는 USS 정화(Zheng He)라는 이름의 첨단 우주선이 등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 해군이 감시 임무를 위해 획득한 배 중 하나는 이전 소유주에 의해 USS 청호(Cheng Ho)(IX-52)로 명명되기도 했다.
4. 2. 관련 유적 및 기념물
정화의 묘는 난징 우수산(牛首山) 남쪽 기슭에 있다. 원래 묘는 말굽 모양이었으며, 그의 의복과 관모만 묻힌 가묘(cenotaph)로 추정된다. 1985년에 이슬람식으로 재건되었다.[33] 그의 시신은 실제로는 서인도 캘리컷 근처 말라바르 해안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난징의 묘는 그의 검 등 유품이 대신 묻힌 이슬람 양식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정화의 조수였던 홍보의 무덤도 최근 난징에서 발굴되었다. 난징의 정화 묘 옆에는 작은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정화는 생전 및 사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었으며, 관련 유적과 기념물이 여러 지역에 남아있다.
- 사찰 건립 및 비석:
- 정화는 1407년 첫 서쪽 항해에서 돌아온 후 난징에 천비궁(天妃宮|톈페이궁중국어)을 건립하여 바다의 여신 마조를 기렸다.
- 함대가 처음 출항했던 류허(류가항)의 천비궁에는 통번사적비(通番事蹟碑|퉁판스지베이중국어)가 세워졌다. 이 비석은 물에 잠겨 없어졌다가 재건되었다.
- 정화와 그의 동료들은 마지막 항해를 떠나기 전, 천비의 은총에 감사하며 푸젠성 창러 난산(南山)에 천비궁을 재건했다. 이곳에는 천비영응지기(天妃靈應之記|톈페이링잉지지중국어)라는 비석을 세워 이전 항해에 대해 기록했다.[50]
- 갈레 삼국어 비문: 스리랑카 갈(Galle) 시에서 1911년 발견된 갈레 삼국어 비문은 현재 콜롬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문은 중국어, 타밀어, 페르시아어 세 가지 언어로 작성되었으며, 부처를 찬양하고 함대가 힌두교와 불교 신자들이 모두 찾는 테나바라이 나야나르 사원에 기증한 물품들을 기록하고 있다.[51][52][53]
- 동남아시아의 정화 신앙: 동남아시아의 화교들 사이에서 정화는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37] 일부 항구에 남았던 선원들 중에서도 신격화된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술루의 '푼타오콩(Puntao Kong)'이 있다.[38]
- 정화의 이름(정훈(Cheng Hoon) 또는 삼보(Sam Po))을 딴 사당들이 세워졌다. 말라카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중국 사원 중 하나인 쳉훈텡 사원(Cheng Hoon Teng Temple)은 17세기에 관음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 지배 시대에는 이 사원의 수장이 말라카 중국인 공동체의 지도자로 임명되기도 했다.[38]
- 인도네시아 화교 사회는 자카르타, 치레본, 수라바야, 세마랑 등지에 정화를 기리는 사찰(예: 세마랑의 삼포콩 사원(Sam Poo Kong)[102])을 세웠다.[38] 수라바야에는 정화 모스크(Cheng Ho Mosque)도 건립되었다.[103]
- 1961년 인도네시아 이슬람 지도자이자 학자인 함카는 정화가 인도네시아 이슬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40] ''Brunei Times''는 정화가 팔렘방, 자바 해안, 말레이 반도, 필리핀 등지에 중국인 무슬림 공동체를 건설했으며, 이들은 중국어로 하나피 학파를 따랐다고 보도했다.[41]
- 선물: 정화가 파사이에 선물한 차크라 도냐 종(Cakra Donya Bell)은 현재 반다아체의 아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침몰선: 둥사 군도(프라타스 군도) 근처 바다에서 발견된 7척의 큰 침몰선이 정화 함대 소속으로 확인되었다. 이 배들은 사선(沙船), 복선(福船), 전좌선(戰座船) 종류였다.[54]
현대에 들어서도 정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 기념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매년 7월 11일을 중국 항해의 날( 中国航海日|중국 항해르중국어 )로 지정하여 정화의 첫 항해를 기념한다.
- 문화 콘텐츠: 2015년, Emotion Media Factory는 닝보의 놀이공원 로몬 U-파크를 위해 "정화가 온다"라는 멀티미디어 쇼를 제작했으며, 이 쇼는 국제유원시설협회(IAAPA) 브래스 링 어워드 결선에 진출했다.[55][56]
- 함선 명명:
- 대만 중화민국 해군의 ROCS ''청허''(PFG2-1103)는 정화의 이름을 땄다.
-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의 정화함(AX-81) 훈련함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중국의 친선 대사 역할을 수행하며 세계 각국을 방문했다.[57][104]
- 우주선 명명: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료 회수 우주선 톈원 2호는 원래 '정화'로 명명될 예정이었다. 이 임무는 근지구 소행성 469219 카모오알레와를 탐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지명: 남중국해의 티자드 뱅크(중국명: 정화군초(鄭和群礁|정화군초중국어))는 중국에서 정화의 이름을 따 부르고 있다.

4. 3. 대중문화
정화 함대의 모험은 후대에 영감을 주어, 1597년 소설 『삼보태감전』 등이 쓰이기도 했다.[46] 현대에 들어 정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되살아났으며,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그의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다.게임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PC 게임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서는 정화를 모티브로 한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 1인칭 슈팅 게임 파 크라이 3의 주요 줄거리에서도 정화가 언급된다.
소설
- 버너 빈지의 1999년 과학소설 『하늘의 심연』(A Deepness in the Sky)에서는 정화의 이름을 딴(Qeng Ho) 성간 상업 무역업자 사회가 등장한다.
- 헤더 테렐의 2005년 소설 『지도 도둑』(The Map Thief)에서도 정화의 원정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 일본에서는 쇼노 에이지의 『소설 바다의 실크로드 정화의 대항해기』(1985년), 반노 아키라의 『대항해』(1984년), 타사 준의 『정화: 중국의 대항해시대를 건설한 전설의 영웅』(2007년) 등 정화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이 출간되었다.
TV 및 드라마
- 2005년 정화 항해 60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은 특별 TV 시리즈 『정화하서양』(Zheng He Xia Xiyang)을 제작했으며, 배우 로가량이 정화 역을 맡았다.
- 스타트렉: 피카드 시리즈에는 USS 정화(USS Zheng He)라는 이름의 첨단 우주선이 등장한다.
- 드라마 『대명황비 -Empress of the Ming-』(2019년)에서는 배우 리타이가 정화 역을 연기했다.
만화
- 호시노 요시노부의 만화 『해제』는 정화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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