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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해군 군축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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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네바 해군 군축 회담은 1927년 미국, 영국, 일본 3개국이 보조함(순양함, 잠수함 등)의 군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개최된 회담이다. 1921-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주력함의 건조가 제한되었지만, 보조함에 대한 규제가 미흡하여 열강 간의 군비 경쟁이 심화되자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가 회담을 제안했다. 미국은 보조함의 총톤수와 개별 함선의 크기를 제한하는 '비율주의'를, 영국은 개별 함선의 규모를 규제하는 '개함 규제주의'를 주장하며 대립했고,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이후 이 문제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담에서 다시 논의되어 런던 해군 조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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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해군 군축 회담
개요
회의 종류해군 군축 회담
기간1927년 6월 20일 ~ 1927년 8월 4일
장소스위스 제네바
참가국미국
영국
일본
주요 의제함선 건조 제한, 해군 군비 경쟁 억제
결과합의 실패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해군력 증강 경쟁 심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1922년)일부 함선 제한, 추가 논의 필요
회의 목표
미국모든 종류의 함선 제한
구축함, 잠수함 제한
영국순양함 제한에 소극적
자국 해군력 유지
일본미국, 영국과 동등한 해군력 요구
군축 자체에 소극적
주요 쟁점
순양함 제한배수량, 함포 크기 제한 이견
구축함, 잠수함 제한각국 이해관계 충돌
총 톤수 제한국가별 할당량 불균형
회의 과정
각국 입장 차이 확인타협 실패
일본의 소극적 태도군축 회의 무산에 영향
언론의 부정적 보도회의 분위기 악화
결과 및 영향
합의 실패해군 군비 경쟁 심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일부 함선 제한 합의
제네바 회담의 실패 극복 노력
제2차 세계 대전 발발해군 군비 경쟁의 결과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군 군축 문제는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회담에서 체결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통해 주력함(전함과 항공모함)의 건조 규제와 보유 수량이 확정되었지만, 보조함(순양함과 잠수함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였다.[9] 조약 체결 후 보조함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면서, 그 제한은 열강 사이에서 시급한 과제로 여겨졌다.

1927년 미국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제창으로 미국, 영국, 일본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6월 20일부터 군축 회담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와 전 외무장관이었던 이시이 기쿠지로전권대사로 참석했다.

당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구미에 대해 협조 노선을 취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회담에서 미국의 ‘비율주의’와 영국의 ‘개함 규제주의’가 대립하였고, 양국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며 8월 4일에 결렬되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해군 군비 경쟁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군 군비 경쟁은 국제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회담에서 체결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은 전함과 항공모함 같은 주력함의 건조와 보유량을 규제했지만, 순양함과 잠수함 등의 보조함에 대한 규제는 미흡했다.[9] 조약 체결 후 보조함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면서, 열강들은 보조함 제한 문제를 시급하게 다루어야 했다.

1927년 2월, 미국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해군 군비 제한 논의를 위해 제네바에서 5대 열강 회의를 제안했다.[1] 영국과 일본은 초청을 수락했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거절했다.[2] 미국은 제네바 회담을 통해 워싱턴 조약의 주력함 전력 비율(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간 5:5:3:1.75:1.75)을 소형 함정으로 확대하고자 했다.[3]

2. 2.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한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전함항공모함 같은 주력함의 보유 비율을 미국과 영국은 5, 일본은 3,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1.75로 제한했다. 그러나 순양함이나 잠수함 등 보조함에 대한 규제는 미흡했다.[3] 이는 각국이 보조함을 경쟁적으로 건조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2. 3. 쿨리지 대통령의 제안

1927년 미국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해군 군비 경쟁을 억제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5대 열강(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회담을 제안했다.[1] 영국과 일본은 이 초청을 수락했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거절했다.[2]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은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간의 주력함(전함 및 순양전함)의 전력 비율을 각각 5:5:3:1.75:1.75로 정의했다. 미국은 제네바 회담을 통해 이 비율을 소형 함정으로 확대하여 영국과 자국 모두 총 배수량 300,000톤의 순양함을, 일본에는 180,000톤을 허용하고자 했다. 동시에 미국은 개별 함선의 크기에 대한 추가적인 제한을 피하고자 했다.[3]

3. 회담 과정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군 군축 문제는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통해 주력함(전함과 항공모함) 건조는 규제되었지만, 보조함(순양함과 잠수함 등)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였다. 조약 체결 후 보조함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면서 열강들은 보조함 제한을 시급한 과제로 인식했다.

1927년 미국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제창으로 미국, 영국, 일본 대표가 제네바에서 군축 회담을 시작했다. 일본 대표단에는 조선총독을 역임한 사이토 마코토와 전 외무장관이었던 이시이 기쿠지로전권대사로 참석했다. 당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구미에 대해서는 협조 노선에 임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회담에서는 미국의 '비율주의'와 영국의 '개함 규제주의'가 대립하였고, 양국의 주장은 평행선을 그으면서 그대로 어떤 타협도 하지 못한 채 8월 4일에 결렬되었다.[4] 따라서 보조함 제한 조약은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담에서 다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3. 1. 회담의 시작

1927년 미국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제창으로 미국, 영국, 일본 대표가 제네바에서 6월 20일부터 군축 회담을 시작했다.[9] 일본 대표단에는 조선총독을 역임한 사이토 마코토와 전 외무장관이었던 이시이 기쿠지로전권대사로 참석했다.

3. 2. 각국의 입장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통해 주력함 건조는 규제되었지만, 순양함과 잠수함 등의 보조함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였다. 1927년 미국, 영국, 일본 3국은 제네바에 모여 군축 회담을 시작했다. 일본은 사이토 마코토이시이 기쿠지로를 전권대사로 파견했다.

당시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서구 열강과의 협조 노선을 취하려 했으나, 회담에서 미국의 '비율주의'와 영국의 '개함 규제주의'가 대립하면서 양국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회담은 8월 4일 결렬되었고, 보조함 제한 문제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담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각국의 구체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 '''미국''': 순양함 총 배수량 제한과 함께, 영국과는 동등한 수준, 일본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톤수를 허용하는 비율주의를 주장했다.
  • '''영국''': 대영 제국의 해상 무역로 보호를 위해 더 많은 수의 순양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개함 규제주의를 내세웠다.
  • '''일본''':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5:5:3 비율 재현을 피하고자 했으며, 미국 해군력의 70%를 유지하고자 했다.


결국 회담 참가국들은 해군력 배분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3. 2. 1. 미국의 입장

미국은 순양함 총 배수량을 300,000톤으로 제한하고, 영국과는 동등한 수준, 일본에는 180,000톤을 허용하는 비율주의를 주장했다.[4] 또한, 개별 함선의 크기 제한에는 반대했다. 미국은 중순양함 25척(총 250,000톤) 건조 계획을 협상 기준으로 삼았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보할 의사가 없었다.[4]

3. 2. 2. 영국의 입장

영국은 대영 제국의 해상 무역로 보호를 위해 순양함 70척(총 560,000톤, 평균 8,000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개함 규제주의를 내세웠다.[5] 영국은 새로 건조되는 순양함의 톤수와 주포 구경 제한을 완화할 것을 제안했다.[5]

3. 2. 3. 일본의 입장

일본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합의된 5:5:3 비율이 재현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일본 해군 참모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미국 해군력의 70%에 해당하는 함대가 최소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함에 대해서는 70% 비율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순양함에 대해서라도 이 비율을 유지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여겼다.[6] 그러나 영국과 미국 대표단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반대가 회담 실패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3. 3. 회담의 결렬

1927년 미국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제창으로 미국, 영국, 일본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6월 20일부터 군축 회담이 시작되었다.[9] 당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구미에 대해서는 협조 노선을 취할 방침이었지만, 회담에서는 미국의 '비율주의'와 영국의 '개함 규제주의'가 대립하였다.[4] 미국과 영국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8월 4일 회담은 아무런 합의 없이 결렬되었다. 이 때문에 보조함 제한 조약은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담에서 다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4. 결과 및 영향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담은 미국의 '비율주의'와 영국의 '개함 규제주의'가 대립하여 8월 4일에 결렬되었다.[9] 이 때문에 보조함 제한 문제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담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4. 1. 런던 해군 군축 회담으로의 연장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담에서 보조함 제한 조약 체결이 무산됨에 따라, 이 문제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담에서 다시 논의되었다.[7] 런던 회담에서는 순양함 톤수 제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고, 그 결과 런던 해군 조약이 체결되었다. 제네바 회담과 달리 런던 회담은 성공을 거두어, 미국은 영국보다 더 많은 수의 중순양함을, 영국은 미국보다 더 많은 수의 경순양함을 보유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영국과 미국 대표단이 더 큰 공통의 이익을 인식하고, 1929년 월가 대폭락의 결과로 정부 지출을 삭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8]

4. 2. 런던 해군 조약

런던 해군 군축 회담에서 순양함 톤수 제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고, 그 결과 런던 해군 조약이 체결되었다. 런던 회담은 제네바 회담과 달리 성공을 거두어, 미국은 영국보다 더 많은 수의 중순양함을, 영국은 미국보다 더 많은 수의 경순양함을 보유하는 데 합의했다. 영국과 미국 대표단이 더 큰 공통의 이익[7]을 인식하고, 1929년 월가 대폭락의 결과로 정부 지출을 삭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건들은 합의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8]

참조

[1] 서적 Marriott
[2] 서적 Potter
[3] 서적 Marriott
[4] 서적 Marriott
[5] 서적 Marriott
[6] 서적 Evans and Peattie
[7] 서적 Potter
[8] 서적 Marriott
[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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