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딘 패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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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럴딘 패러는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로, 1901년 베를린 궁정 오페라단에서 데뷔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06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하여 1922년 은퇴할 때까지 672회 공연에서 29개의 역할을 맡았으며, 특히 "나비 부인"으로 유명했다. 오페라 활동 외에도 무성 영화에 출연하여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으며, 1915년 영화 《카르멘》에 출연했다. 1967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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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딘 패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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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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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앨리스 제럴딘 패러 |
출생일 | 1882년 2월 28일 |
출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멜로즈 |
사망일 | 1967년 3월 11일 |
사망지 | 미국 코네티컷주 리지필드 |
국적 | 미국 |
직업 | 오페라 가수, 배우 |
활동 기간 | 1901년 – 1922년 |
배우자 | 루 텔레겐 (1916년 결혼, 1923년 이혼) |
경력 | |
오페라 데뷔 | 1901년, 베를린 국립 가극장,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 |
음반 발매 | 1904년, 영국 그래모폰 회사에서 흑색 라벨 레코드 발매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 | 1906년 |
레코드 발매 | 1907년 - 1923년, 빅터 토킹 머신사 |
영화 데뷔 | 1915년, 카르멘 |
은퇴 | 1923년 (사실상) |
2. 생애 초기
제럴딘 패러는 야구 선수 시드 패러와 그의 아내 헨리에타 반스 사이에서 매사추세츠주 멜로즈에서 태어났다.[2] 5세 때 보스턴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했고, 14세에 독주회를 열었다.[2] 이후 뉴욕 시, 파리에서 미국의 소프라노 엠마 서스비에게, 마지막으로 베를린에서 이탈리아 바리톤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에게 성악을 배웠다.[2]
제럴딘 패러는 3년 동안 몬테카를로 오페라에서 활동한 후, 1906년 11월 26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데뷔했다.[4] 1907년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 부인'' 메트 초연에 출연했으며,[5] 1922년 은퇴할 때까지 이 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672회 공연에서 29개의 역할을 불렀다.[5] 그녀는 특히 "제리-플래퍼"로 알려진 뉴욕의 젊은 여성 오페라 관람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6]
패러는 1901년 베를린 궁정 오페라단에서 샤를 구노의 ''파우스트'' 중 마르그리트 역으로 데뷔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2]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유명한 독일 소프라노 릴리 레만에게 계속해서 공부를 했다.[2] 그녀는 앙브루아즈 토마의 ''미뇽''과 쥘 마스네의 ''마농''의 타이틀 롤과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에트 역을 맡았다. 베를린에서 그녀의 팬들 중에는 독일 황태자 빌헬름도 있었는데, 그는 1903년부터 그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1년베를린 국립 가극장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으로 오페라 데뷔를 하였고, 그래머폰사에서 레코드 녹음을 시작하여 흑색 라벨 레코드로 발매되었다. 1906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줄리엣 역으로 첫 출연을 하였다.
3. 오페라 경력
패러는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아미카'' (몬테카를로, 1905), 푸치니의 ''수녀 안젤리카'' (뉴욕, 1918),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마담 상젠'' (뉴욕, 1915), 그리고 엥겔베르트 훔페르딩크의 ''왕의 아이들'' (뉴욕, 1910)에서 거위 소녀 역을 창조했는데, 이를 위해 패러는 자신의 거위 무리를 훈련시켰다.[7]
초연에 대한 ''뉴욕 트리뷴''의 한 리뷰에 따르면, "오페라가 끝날 무렵 미스 패러는 팔에 살아있는 거위를 들고 커튼 앞에 나타나 '큰 웃음'을 자아냈다."[7]
그녀의 전기 작가 엘리자베스 내시는 과거의 유명한 벨칸토 가수들이 음색의 완벽성을 위해 극적인 행동을 희생한 것과는 달리, 그녀는 역할의 순수한 서정적인 측면보다 감정적인 측면에 더 관심이 있었으며, ''프리마 돈나''가 사라 베르나르와 넬리 멜바의 예술을 결합할 수 있기 전까지는 오페라에서 완벽한 노래보다 극적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평가했다.[8]
그녀는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를 위해 광범위한 녹음을 했으며, 종종 그 회사의 광고에 prominently 등장했다. 그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21] 『파우스트의 겁벌』[22]와 『파우스트』[23]의 마르게리트,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24], 『나비 부인』의 나비 부인[25], 『팔리아치』의 네다[26], 『라 보엠』의 미미[27], 『메피스토펠레』의 마르게리타[28],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29], 『춘희』의 비올레타[30], 『미뇽』의 미뇽[31], 『카르멘』의 미카엘라[32]와 카르멘[33],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34], 『마농』의 마농[35], 『베르테르』의 샤를로트[36], 『토스카』의 토스카[37], 『왕자 왕녀』의 거위 치는 아이(공주)[38], 『아리안과 푸른 수염』의 아리안[39], 『호기심 많은 여자들』의 로자우라[40], 『수잔나의 비밀』의 수잔나[41], 『줄리앙』의 루이즈[42], 『마담 생 제느(무례 부인)』의 카테리나[43], 『타이스』의 타이스[44], 『로드레타』의 로드레타[45], 『수녀 안젤리카』의 안젤리카[46], 『왕비 피아메트』의 올란다[47], 『자자』의 자자[48], 『루이즈』[49], 『나바라의 딸』의 아니타[50]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3. 1. 유럽에서의 활동
제럴딘 패러는 3년 동안 몬테카를로 오페라에서 활동한 후, 1906년 11월 26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데뷔했다.[4] 1907년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 부인'' 메트 초연에 출연했으며,[5] 1922년 은퇴할 때까지 이 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672회 공연에서 29개의 역할을 불렀다.[5] 그녀는 특히 "제리-플래퍼"로 알려진 뉴욕의 젊은 여성 오페라 관람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6]
패러는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아미카'' (몬테카를로, 1905), 푸치니의 ''수녀 안젤리카'' (뉴욕, 1918),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마담 상젠'' (뉴욕, 1915), 그리고 엥겔베르트 훔페르딩크의 ''왕의 아이들'' (뉴욕, 1910)에서 거위 소녀 역을 창조했는데, 이를 위해 패러는 자신의 거위 무리를 훈련시켰다.[7] 초연에 대한 ''뉴욕 트리뷴''의 한 리뷰에 따르면, "오페라가 끝날 무렵 미스 패러는 팔에 살아있는 거위를 들고 커튼 앞에 나타나 '큰 웃음'을 자아냈다."[7]
그녀의 전기 작가 엘리자베스 내시는 과거의 유명한 벨칸토 가수들이 음색의 완벽성을 위해 극적인 행동을 희생한 것과는 달리, 그녀는 역할의 순수한 서정적인 측면보다 감정적인 측면에 더 관심이 있었으며, ''프리마 돈나''가 사라 베르나르와 넬리 멜바의 예술을 결합할 수 있기 전까지는 오페라에서 완벽한 노래보다 극적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평가했다.[8]
그녀는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를 위해 광범위한 녹음을 했으며, 종종 그 회사의 광고에 prominently 등장했다. 그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21] 『파우스트의 겁벌』[22]와 『파우스트』[23]의 마르게리트,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24], 『나비 부인』의 나비 부인[25], 『팔리아치』의 네다[26], 『라 보엠』의 미미[27], 『메피스토펠레』의 마르게리타[28],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29], 『춘희』의 비올레타[30], 『미뇽』의 미뇽[31], 『카르멘』의 미카엘라[32]와 카르멘[33],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34], 『마농』의 마농[35], 『베르테르』의 샤를로트[36], 『토스카』의 토스카[37], 『왕자 왕녀』의 거위 치는 아이(공주)[38], 『아리안과 푸른 수염』의 아리안[39], 『호기심 많은 여자들』의 로자우라[40], 『수잔나의 비밀』의 수잔나[41], 『줄리앙』의 루이즈[42], 『마담 생 제느(무례 부인)』의 카테리나[43], 『타이스』의 타이스[44], 『로드레타』의 로드레타[45], 『수녀 안젤리카』의 안젤리카[46], 『왕비 피아메트』의 올란다[47], 『자자』의 자자[48], 『루이즈』[49], 『나바라의 딸』의 아니타[50]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3. 2.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 및 전성기
제럴딘 패러는 3년간 몬테카를로 오페라에서 활동한 후, 1906년 11월 26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데뷔했다.[4] 1907년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 부인'' 메트 초연에 출연했으며,[5] 1922년 은퇴할 때까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단원으로 활동하며 672회 공연에서 29개의 역할을 맡았다.[5] 특히 "제리-플래퍼"로 알려진 뉴욕의 젊은 여성 오페라 관람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6]
패러는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아미카'' (몬테카를로, 1905), 푸치니의 ''수녀 안젤리카'' (뉴욕, 1918),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마담 상젠'' (뉴욕, 1915) 등 여러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다.[7] 엥겔베르트 훔페르딩크의 ''왕의 아이들''(뉴욕, 1910)에서는 거위 소녀 역을 맡아 자신의 거위 무리를 직접 훈련시키기도 했다.[7] ''뉴욕 트리뷴''의 초연 리뷰에 따르면, "오페라가 끝날 무렵 미스 패러는 팔에 살아있는 거위를 들고 커튼 앞에 나타나 '큰 웃음'을 자아냈다."[7]
그녀의 전기 작가 엘리자베스 내시는 패러가 과거 벨칸토 가수들이 음색의 완벽성을 위해 극적인 행동을 희생한 것과는 달리, 역할의 순수한 서정적인 측면보다 감정적인 측면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평가했다.[8]
패러는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를 위해 많은 녹음을 했으며, 종종 그 회사의 광고에 등장했다.[21][22][23][24][25][26][27][28][29][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46][47][48][49][50]
3. 3. 은퇴
3년 동안 몬테카를로 오페라에서 활동한 후, 패러는 1906년 11월 26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데뷔했다.[4] 1907년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 부인'' 메트 초연에 출연했다.[5] 1922년 은퇴할 때까지 이 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672회 공연에서 29개의 역할을 불렀다.[5] 그녀는 특히 "제리-플래퍼"로 알려진 뉴욕의 젊은 여성 오페라 관람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6]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아미카'' (몬테카를로, 1905), 푸치니의 ''수녀 안젤리카'' (뉴욕, 1918),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마담 상젠'' (뉴욕, 1915), 그리고 엥겔베르트 훔페르딩크의 ''왕의 아이들'' (뉴욕, 1910)에서 거위 소녀 역을 창조했다.[7] 거위 소녀 역을 위해 패러는 자신의 거위 무리를 훈련시켰다.[7] 초연에 대한 ''뉴욕 트리뷴'' 리뷰는 "오페라가 끝날 무렵 미스 패러는 팔에 살아있는 거위를 들고 커튼 앞에 나타나 '큰 웃음'을 자아냈다."라고 평했다.[7]
그녀의 전기 작가 엘리자베스 내시는 과거의 유명한 벨칸토 가수들이 음색의 완벽성을 위해 극적인 행동을 희생한 것과는 달리, 그녀는 역할의 순수한 서정적인 측면보다 감정적인 측면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평가했다.[8] 그녀는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를 위해 광범위한 녹음을 했으며, 종종 그 회사의 광고에 등장했다.
4. 영화 경력
제럴딘 패러는 오페라 시즌 사이에 무성 영화에도 출연했다. 문학 및 영화 평론가인 에드워드 와겐크네히트는 패러를 "파라마운트가 스크린으로 데려온 가장 유명한 예술가"라고 묘사한다.[9] 1915년 제작자 제시 라스키가 패러를 영입한 것은 당시 "영화 역사상 가장 센세이션한 쿠데타"로 여겨졌다.[9]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였던 패러의 할리우드 도착은 큰 기대와 갈채를 받았다. 그녀의 개인 열차가 샌타페이 역에 도착했을 때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대기했다. 그녀는 완벽한 호흡을 맞췄던 세실 B. 드밀 감독이 그녀의 라스키 영화 6편을 모두 연출했으며, 소품 담당자까지 동료 작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는데, 이는 메트로폴리탄 무대 담당자들에게 받은 사랑과 같았다.[10]
1915년부터 1920년까지 패러는 세실 B. 드밀의 1915년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각색한 영화를 포함하여 12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다. 보스턴의 심포니 홀에서 열린 이 영화의 초연은 대대적인 홍보 캠페인을 거쳤으며 비평가들로부터 열광적인 평을 받았다.[11] 샌프란시스코 콜&포스트는 "아름답고 재능 있는 스타 제럴딘 패러가 영화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겠다는 결심은 영화의 위상을 높이는 데 있어 가장 획기적인 단계 중 하나이다. 영화 속 미스 패러의 '카르멘'은 영화가 말하는 무대를 뛰어넘어 거둔 최고의 승리이다.”라고 평했다.[12]
그녀는 이 연기로 1916년 ''모션 픽처 매거진''이 개최한 "스크린 걸작" 콘테스트에서 여성 부문 1위를 차지했다.[13] 그녀의 다른 주목할 만한 스크린 역할 중 하나이자 패러가 개인적으로 최고로 꼽은 작품은 1917년 영화 잔 다르크였다.[14]
1931년 6월, 패러는 전국 방송 회사의 "레드" 네트워크를 통해 라디오 방송 데뷔를 했다.[15] 1960년, 패러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음악 및 영화 부문 별 2개를 받았으며, 위치는 바인 스트리트 1620번지와 1709번지에 있다. 패러가 출연한 영화로는 카르멘(1915), 유혹(1915), 마리아 로사(1916), 잔 다르크(1916), 신에게 버림받은 여자(1917), 악마의 돌(1917), 새로운 길(1918), 지옥의 고양이(1918), 그림자(1919), 가장 강한 맹세(1919), 세계와 그 여자(1919), 사막의 정염(1919), 새로운 카르멘(1920), 수수께끼: 여자(1920) 등이 있다.
5. 사생활
1908년부터 패러는 이탈리아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7년간 연애를 했다.[16] 패러가 아내와 자녀를 버리고 자신과 결혼하라는 최후 통첩을 하자, 토스카니니는 1915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사임했다.[16] 패러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스타 테너 엔리코 카루소와 절친이었으며, 두 사람 역시 연애 관계였다는 추측이 있었다.[16] 카루소가 그녀의 좌우명인 "Farrar farà"("패러가 할 것이다")를 만들었다고 한다.[16]
1916년 2월 8일 배우 루 텔레겐과의 결혼은 상당한 스캔들의 원인이 되었다.[20] 남편의 수많은 불륜으로 인해 이 결혼은 1923년 매우 공개적인 이혼으로 끝났다.[20] 텔레겐은 1934년 할리우드에서 자살했다.
패러는 1922년 40세의 나이로 오페라에서 은퇴했다. 그녀의 마지막 공연은 레온카발로의 ''자자''였다. 헨리 플레전츠는 그의 저서 ''오페라 여명기부터 현재까지의 위대한 가수들''(1967년 초판)에서 패러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만 매 시즌 25~35회 공연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16시즌 동안 나비 부인으로 95회, 카르멘으로 58회 출연한 것이 포함된다. 1909년 레퍼토리에 추가한 푸치니의 ''토스카''의 타이틀 역할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메트 역할 중 하나였다.
패러는 콘서트 리사이틀로 전환하여, 오페라 은퇴를 발표한 지 몇 주 안에 현충일인 1922년 허쉬 파크에서 공연을 계약했다.[17] 1920년대 내내 리사이틀을 계속했으며, 1934–35 시즌 동안 잠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라디오 방송의 인터미션 해설자가 되었다. 그녀의 자서전인 ''달콤한 강박''은 1938년에 출판되었으며, 자신의 말과 사망한 어머니의 말을 번갈아 가며 썼다.
1967년 패러는 코네티컷주 리지필드에서 심장병으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뉴욕주 발할라에 있는 켄시코 묘지에 묻혔다. 그녀는 자녀가 없었다.
6. 말년 및 죽음
1908년부터 패러는 이탈리아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7년간 연애를 했다.[16] 패러가 토스카니니에게 아내와 자녀를 버리고 자신과 결혼하라고 최후 통첩을 하자, 토스카니니는 1915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패러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스타 테너 엔리코 카루소와 절친이었으며, 두 사람 역시 연애 관계였다는 추측이 있었다. 카루소가 그녀의 좌우명인 "Farrar farà"("패러가 할 것이다")를 만들었다고 한다.[16]
1916년 2월 8일 배우 루 텔레겐과의 결혼은 상당한 스캔들의 원인이 되었다. 남편의 수많은 불륜으로 인해 이 결혼은 1923년 매우 공개적인 이혼으로 끝났다.[20] 이혼의 상황은 텔레겐이 1934년 할리우드에서 기이한 자살을 하면서 다시 대중의 기억 속에 떠올랐다. 패러는 텔레겐의 죽음에 대해 "그게 왜 나에게 관심이 있어야 하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패러는 1922년 40세의 나이로 오페라에서 은퇴했다. 그녀의 마지막 공연은 레온카발로의 ''자자''였다. 이 시점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과로로 인해 조기에 쇠퇴했다. 헨리 플레전츠는 그의 저서 ''오페라 여명기부터 현재까지의 위대한 가수들''(1967년 초판)에서 패러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만 매 시즌 25~35회 공연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16시즌 동안 나비 부인으로 95회, 카르멘으로 58회 출연한 것이 포함된다. 1909년 레퍼토리에 추가한 푸치니의 ''토스카''의 타이틀 역할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메트 역할 중 하나였다.
패러는 빠르게 콘서트 리사이틀로 전환하여 오페라 은퇴를 발표한 지 몇 주 안에 현충일인 1922년 허쉬 파크에서 공연을 계약했다.[17] 그녀는 1920년대 내내 녹음을 하고 리사이틀을 계속했으며, 1934–35 시즌 동안 잠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라디오 방송의 인터미션 해설자가 되었다. 그녀의 특이한 자서전인 ''달콤한 강박''은 1938년에 출판되었으며, 자신의 말과 사망한 어머니의 말을 번갈아 가며 쓴 것으로, 패러 부인은 딸의 많은 업적을 다소 화려하게 이야기했다.
1967년 패러는 코네티컷주 리지필드에서 심장병으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뉴욕주 발할라에 있는 켄시코 묘지에 묻혔다. 그녀는 자녀가 없었다.
7. 유산 및 평가
미국 작가 바바라 폴은 제럴딘 패러, 엔리코 카루소, 그리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소재로 한 여러 추리 소설을 썼다.
8. 출연 작품
소실된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