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제1대 앨런브룩 자작 앨런 브룩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앨런 브룩(1883-1963)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영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국 참모총장(CIGS)을 역임하며 연합군의 전략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성장하여 여러 언어에 능통했으며, 1902년 왕립 포병대에 임관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뛰어난 작전 계획 능력을 발휘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본토 사령관, 영국 원정군 제2군단장 등을 거쳐 CIGS가 되어 윈스턴 처칠 총리와 협력하며 전쟁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명예 포병 연대 연대 사령관을 지내고, 여러 기업의 이사로 활동하며 자연과 조류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전쟁 일기는 당시 상황과 인물들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담고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제국총참모장 - 제1대 아이언사이드 남작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는 2차례의 세계 대전을 포함한 여러 전쟁에 참전하여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보였고,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본토 방어 계획을 수립했으며, 1941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 런던탑 무관장 - 제1대 알렉산더오브튀니스 백작 해럴드 알렉산더
    제1대 알렉산더오브튀니스 백작 해럴드 알렉산더는 영국 육군 원수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하며 북아프리카 및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캐나다 총독과 영국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며 뛰어난 군사적 업적과 리더십으로 백작 작위와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 런던탑 무관장 - 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1769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은 군인과 정치가로서, 마이소르 전쟁과 마라타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나폴레옹 전쟁과 워털루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영국 총리까지 역임했다.
제1대 앨런브룩 자작 앨런 브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2년 영국 제국 참모총장이 된 앨런 브루크 경
1942년 당시 영국 육군 장군이었던 앨런 브루크 경. 당시 영국 제국 참모총장이었으며 1944년 1월에 육군 원수로 진급했다.
출생명앨런 프랜시스 브루크
별칭브루키
경칭필드 마셜 더 라이트 아너러블
출생일1883년 7월 23일
출생지프랑스 바녜르드비고르
사망일1963년 6월 17일
사망지잉글랜드 햄프셔주 하틀리 윈트니
소속영국
군 복무1902년 – 1946년
소속 군영국 육군
최종 계급육군 원수
병과왕립 포병
주요 지휘 경력
지휘제국 참모총장 (1941–1946)
본토군 (1940–1941)
제2군단 (1939–1940)
남부사령부 (1939)
기동 사단 (1937)
제8보병여단 (1934–1935)
포병학교 (1929–1932)
주요 참전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훈장가터 훈장
바스 훈장
메리트 훈장
로열 빅토리아 훈장
수훈 훈장 &
감사 표창 (7회)
학력 및 경력
직위퀸스 대학교 벨파스트 제3대 총장
임기 시작1949년
임기 종료1963년
이전찰스 베인-템페스트-스튜어트
이후티론 거스리

2. 초기 생애 및 배경

앨런 브룩은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오트피레네주 바니에르드비고르에서 서(西)얼스터 출신의 저명한 앵글로-아일랜드 가문에서 태어났다.[5] 브룩 가문은 "콜브룩의 싸우는 브룩"으로 오랫동안 군사적 전통을 이어왔으며, 삼국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복무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5] 그는 콜브룩 공원의 빅터 브룩 경(Sir Victor Brooke, 3rd Baronet), 페르마나주, 브룩보로 출신이었고, 라우스주, 캐슬 벨링햄의 앨런 벨링햄 경(Sir Alan Bellingham, 3rd Baronet)의 둘째 딸이었던 앨리스 벨링햄의 일곱 번째이자 막내였다.[6] 브룩의 아버지는 그가 8살 때 세상을 떠났다.[5]

브룩은 16세까지 살았던 프랑스 피레네자틀랑티크주 포의 데이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어(그는 가스코뉴 억양이 심했고, 프랑스 피레네 산맥에서 자란 결과로 모국어처럼 사용했다)[5]와 영어를 이중 언어로 구사했다.[7] 그는 또한 독일어에 능통했으며, 우르두어페르시아어도 배웠다.[8]

군 경력을 원했던 브룩은 1900년에 울리치 왕립 군사 학교에 "겨우" 합격하여 입학 시험에서 72명 중 65등을 했지만, 17등으로 졸업했다.

브룩은 1902년 12월 24일 왕립 포병 연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9] 울리치에서의 높은 성적 덕분에 브룩은 왕립 포병대의 어떤 부대에 합류할지 선택할 수 있었다. 그의 선택은 왕립 야전 포병대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몇 년 동안 아일랜드와 인도에서 복무했다. 그는 또한 왕립 기마 포병대에 합류하도록 선택되면서 "재킷"을 받았다. 1905년 12월 24일에는 중위로 진급했고,[123] 1906년 12월에는 영국령 인도 제국 펀자브의 제30 포병 중대에 배속되었지만, 총기 오발 사고로 귀국했다.[123]

2. 1. 가문 배경

앨런 브룩은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오트피레네주 바니에르드비고르에서 앵글로-아일랜드계 가문에서 태어났다.[5] 브룩 가문은 "콜브룩의 싸우는 브룩"으로 불릴 정도로 오랜 군사적 전통을 가진 가문이었으며, 삼국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등에서 복무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5] 아버지는 콜브룩 공원의 빅터 브룩 경(Sir Victor Brooke, 3rd Baronet)이었고, 어머니는 라우스주 캐슬 벨링햄의 앨런 벨링햄 경(Sir Alan Bellingham, 3rd Baronet)의 딸 앨리스 벨링햄이었다.[6] 앨런 브룩은 7남매 중 막내였으며, 아버지는 그가 8살 때 세상을 떠났다.[5]

2. 2. 프랑스에서의 성장과 교육

앨런 브룩은 1883년 7월 23일 오트피레네주 바니에르드비고르에서 서(西)얼스터 출신의 저명한 앵글로-아일랜드 가문에서 태어났다.[5] 브룩 가문은 "콜브룩의 싸우는 브룩"으로 오랫동안 군사적 전통을 이어왔다.[5] 그는 콜브룩 공원의 빅터 브룩 경(Sir Victor Brooke, 3rd Baronet)과 앨런 벨링햄 경(Sir Alan Bellingham, 3rd Baronet)의 딸인 앨리스 벨링햄 사이에서 태어났다.[6]

브룩은 16세까지 프랑스 피레네자틀랑티크주 포의 데이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어가스코뉴 억양이 섞인 모국어처럼 사용했으며, 영어와 함께 이중 언어를 구사했다.[5][7] 독일어에도 능통했으며, 우르두어페르시아어도 배웠다.[8]

2. 3. 왕립 군사 학교 입학과 임관

앨런 브룩은 군 경력을 희망하여 1900년 울리치 왕립 군사 학교에 입학했다.[9] 입학 시험에서는 72명 중 65등으로 겨우 합격했지만, 졸업할 때는 17등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9] 만약 그가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면, 왕립 공병대에 임관했을 것이고, 아마도 대전 이후 참모 본부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9]

1902년 12월 24일 왕립 포병 연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9] 울리치에서의 높은 성적 덕분에 왕립 포병대의 어떤 부대에 합류할지 선택할 수 있었고, 왕립 야전 포병대를 선택하여 아일랜드와 인도에서 복무했다.[9] 1905년 12월 24일에는 중위로 진급했고,[123] 1906년 12월에는 영국령 인도 제국 펀자브의 제30 포병 중대에 배속되었지만, 총기 오발 사고로 귀국했다.[123]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중 앨런 브룩은 서부 전선의 영국 왕립 기병 포병대 탄약 부대에 배속되어 뛰어난 작전 계획가로 명성을 얻었다.[10] 제18사단으로 전출된 후,[10] 1916년 솜 전투에서 프랑스의 "이동 포격" 시스템을 도입하여 진격하는 보병을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11]

오른쪽부터: 로렌스 코스그레이브, 브룩, 에드워드 모리슨, 앤드루 맥노튼,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7년 초부터 캐나다 군단과 함께 비미 능선 전투의 포격을 계획했다.[12] 1918년에는 제1군의 수석 포병 참모 장교(GSO1)로 임명되었다.[12] 브룩은 수훈 훈장과 바를 받은 중령으로 전쟁을 마쳤으며, 여섯 번 작전 보고서에 언급되었다.[89][90]

3. 1. 서부 전선에서의 활약

제1차 세계 대전 중 앨런 브룩은 서부 전선의 영국 왕립 기병 포병대 탄약 부대에 배속되어 뛰어난 작전 계획가로 명성을 얻었다.[10] 제18사단으로 전출된 후,[10] 1916년 솜 전투에서 프랑스의 "이동 포격" 시스템을 도입하여 진격하는 보병을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11]

1917년 초부터 캐나다 군단과 함께 비미 능선 전투의 포격을 계획했다.[12] 1918년에는 제1군의 수석 포병 참모 장교(GSO1)로 임명되었다.[12] 브룩은 수훈 훈장과 바를 받은 중령으로 전쟁을 마쳤으며, 여섯 번 작전 보고서에 언급되었다.[89][90]

3. 2. 전쟁의 상흔과 종전

브룩은 수훈 훈장과 바를 받은 중령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을 끝냈으며, 여섯 번 작전 보고서에 언급되었다.[89][90] 전쟁은 브룩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 직전, 그는 렌스의 폐허를 보며 전쟁의 비극을 되새겼다.[13]

휴전 협정 후 런던에서 군중들의 축하를 보면서도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꼈고, 훗날 회고록에 그날의 우울함을 기록했다.[14]

4. 전간기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브룩은 1919년 캠벌리 참모대학에서 열린 첫 번째 종전 후 과정에 참여하여 짧은 기간 동안 동료 학생들과 대학 강사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제50사단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한 후,[1] 캠벌리로 돌아와 강사로 활동했으며, 제국 국방대학에 입학했다.[1] 이후 제국 국방대학의 강사로 임명되어[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을 이끌 주요 지휘관이 된 대부분의 장교들과 친분을 쌓았다.

1929년부터 브룩은 포병 감찰관, 군사 훈련 국장 등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15] 1935년에는 기동 사단(이후 제1기갑사단)의 사령관 (GOC)을 맡았다.[15] 1938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대공군단(1939년 4월 대공 사령부로 개칭)을 지휘했으며, 전투기 사령부 사령관인 휴 다우딩과 굳건한 관계를 맺어 영국 본토 항공전 동안 두 사령부 간 협력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16] 1939년 7월, 브룩은 사우스 사령부를 지휘하게 되었다.[16]

4. 1. 참모대학 강사 및 제국 국방대학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브룩은 1919년 캠벌리 참모대학에서 열린 첫 번째 종전 후 과정에 참여하여 짧은 기간 동안 동료 학생들과 대학 강사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제50사단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한 후,[1] 캠벌리로 돌아와 강사로 활동했으며, 제국 국방대학에 입학했다.[1] 이후 제국 국방대학의 강사로 임명되어[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을 이끌 주요 지휘관이 된 대부분의 장교들과 친분을 쌓았다.

4. 2. 주요 직책 역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브룩은 1919년 캠벌리 참모대학에서 열린 첫 번째 종전 후 과정에 참여하여 동료 학생들과 대학 강사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 이후 제50사단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1] 브룩은 캠벌리로 돌아와 강사로 활동했으며, 제국 국방대학에 입학, 이후 강사로 임명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을 이끌 주요 지휘관이 된 대부분의 장교들과 친분을 쌓았다.[1]

1929년부터 브룩은 포병 감찰관, 군사 훈련 국장 등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15] 1935년에는 기동 사단(이후 제1기갑사단)의 사령관 (GOC)을 맡았다.[15] 1938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대공군단(1939년 4월 대공 사령부로 개칭)을 지휘했으며, 전투기 사령부 사령관인 휴 다우딩과 굳건한 관계를 맺어 영국 본토 항공전 동안 두 사령부 간의 협력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16] 1939년 7월, 브룩은 사우스 사령부를 지휘하게 되었다.[16]

5.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39년 9월 브룩은 영국 원정군 (BEF)의 제2군단을 지휘했다.[17] 여기에는 버나드 몽고메리 소장이 지휘하는 제3보병사단, 더들리 존슨 소장의 제4보병사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7]

군단장으로서 브룩은 연합국의 방어 능력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의 질과 결의에 의구심을 품었다.[17] 그는 프랑스 전선 부대를 방문했을 때 면도하지 않은 남성, 빗질하지 않은 말, 더러운 차량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러한 회의론이 정당화된 것으로 보였다.[17]

BEF 사령관인 고트 경은 브룩이 세세한 부분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생각하여 그를 교체할 생각을 했다.[18]

독일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브룩은 닐 리치 참모총장(BGS)의 도움을 받아 덩케르크로의 후퇴에서 영국군을 능숙하게 지휘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제2군단은 세단 전투에서 연합군의 패배 이후 독일군의 빠른 기갑 부대 진격에 직면했다.[19] 1940년 5월 말에는 이프르-코민 운하에 대한 독일군의 주요 공격을 막아냈지만, 벨기에군의 항복으로 인해 왼쪽 측면이 노출되었다. 브룩은 즉시 몽고메리의 제3사단에게 군단의 오른쪽 측면에서 격차를 메우도록 명령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독일군 부대에서 병력들을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북쪽으로 투입하면서 제2군단은 덩케르크의 축소된 경계의 동쪽 또는 남동쪽으로 지정된 장소로 후퇴했다.[20]

그 후 5월 29일 브룩은 고트의 명령으로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몽고메리에게 군단을 맡겼다.[20] 몽고메리에 따르면, 브룩은 그러한 위기 속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 감동하여 "그는 퐁테인블로 해변에서 몽고메리에게 넘겨주면서 무너져 울었다"고 한다.[21]

5. 1. 영국 원정군 제2군단장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39년 9월 브룩은 영국 원정군 (BEF)의 제2군단을 지휘했다.[17] 여기에는 버나드 몽고메리 소장이 지휘하는 제3보병사단, 더들리 존슨 소장의 제4보병사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7]

군단장으로서 브룩은 연합국의 방어 능력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의 질과 결의에 의구심을 품었다.[17] 그는 프랑스 전선 부대를 방문했을 때 면도하지 않은 남성, 빗질하지 않은 말, 더러운 차량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러한 회의론이 정당화된 것으로 보였다.[17]

BEF 사령관인 고트 경은 브룩이 세세한 부분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생각하여 그를 교체할 생각을 했다.[18]

독일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브룩은 닐 리치 참모총장(BGS)의 도움을 받아 덩케르크로의 후퇴에서 영국군을 능숙하게 지휘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제2군단은 세단 전투에서 연합군의 패배 이후 독일군의 빠른 기갑 부대 진격에 직면했다.[19] 1940년 5월 말에는 이프르-코민 운하에 대한 독일군의 주요 공격을 막아냈지만, 벨기에군의 항복으로 인해 왼쪽 측면이 노출되었다. 브룩은 즉시 몽고메리의 제3사단에게 군단의 오른쪽 측면에서 격차를 메우도록 명령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독일군 부대에서 병력들을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북쪽으로 투입하면서 제2군단은 덩케르크의 축소된 경계의 동쪽 또는 남동쪽으로 지정된 장소로 후퇴했다.[20]

그 후 5월 29일 브룩은 고트의 명령으로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몽고메리에게 군단을 맡겼다.[20] 몽고메리에 따르면, 브룩은 그러한 위기 속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 감동하여 "그는 퐁테인블로 해변에서 몽고메리에게 넘겨주면서 무너져 울었다"고 한다.[21]

5. 2. 덩케르크 철수 지휘

독일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브룩은 닐 리치 참모총장(BGS)의 도움을 받아 덩케르크로의 후퇴에서 영국군을 능숙하게 지휘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제2군단은 세단 전투에서 연합군의 패배 이후 독일군의 빠른 기갑 부대 진격에 직면했다.[19] 1940년 5월 말, 이프르-코민 운하에 대한 독일군의 주요 공격을 막아냈지만, 벨기에군의 항복으로 인해 왼쪽 측면이 노출되었다. 브룩은 즉시 버나드 몽고메리의 제3사단에게 군단의 오른쪽 측면에서 격차를 메우도록 명령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독일군 부대로부터 병력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2군단은 덩케르크의 축소된 경계의 동쪽 또는 남동쪽으로 후퇴했다.[20]

브룩의 행동은 그의 부대를 항복으로부터 구했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의 항복으로 남겨진 20마일의 격차를 독일군이 점령하여 안전하게 탈출하기 전에 BEF 전체를 포획하는 것을 막았다.[19] 1940년 5월 29일, 브룩은 고트의 명령으로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몽고메리에게 군단을 맡겼다.[20]

5. 3. 프랑스에서의 추가 작전

1940년 8월 6일, 북부 사령부를 방문하여 로널드 아담 장군(오른쪽)과 함께 6인치 해안 방어포를 살펴보는 앨런 브룩 육군 원수 (왼쪽).


1940년 6월 2일, 브룩은 육군 참모총장(CIGS)으로부터 "새로운 BEF를 형성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19] 그는 이 명령이 "전쟁에서 그의 가장 암울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브룩은 이미 프랑스에 연합군 요새를 유지하기 위한 "브르타뉴 계획"의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9] 막심 베이강 장군이 프랑스군이 붕괴되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고 경고한 후, 그는 자신의 부대를 셰르부르와 브레스트로 철수시켜 영국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상관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결정했다.[19] 그는 전쟁 장관 앤서니 이든에게 그 임무가 "군사적 가치가 없고 성공의 희망도 없다"고 말했지만, 정치적 가치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었다.[22]

10 다우닝 가에서 딜의 전화를 받고 윈스턴 처칠 수상과 처음 대화했을 때, 브룩은 모든 영국군을 프랑스에서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브룩에게 설득당했다.[11][23] 그 결과, 약 20만 명의 영국군과 연합군이 프랑스 북서부의 항구에서 성공적으로 철수했다.[24][25]

5. 4. 영국 본토 사령관

남부 사령부에서 잠시 복귀한 후, 1940년 7월 브룩은 영국 본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침공 준비를 담당하게 되었다.[26][27] 독일의 영국 침공이 발생할 경우 육상 전투를 지휘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전임자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경 장군과는 달리, 브룩은 적군이 자리를 잡기 전에 신속하게 반격할 기동 예비대를 개발하고, 해안에 가벼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상륙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했다.[26][27] 또한, 전쟁 후 브룩은 "해변에 살포된 겨자 가스를 사용할 의도도 있었다"고 인정했다.[26][27]

선임 장교들이 1941년 10월 2일 '범퍼' 훈련 중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왼쪽은 심판장인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 본토 사령관(곧 참모총장)인 앨런 브룩 경 장군과 대화하고 있다.


브룩은 세 군의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는 것이 국가 방위에 "심각한 위험"이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용 병력이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숫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브룩은 독일이 침공할 경우 상황이 "무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는 분명 필사적인 싸움을 벌였을 것이고 미래는 균형을 잃었을 수도 있지만, 전쟁의 행운이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확실히 이 해안을 방어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썼다.[28][29] 그러나 결국, 독일 침공 계획은 예비 병력 집결 단계를 넘지 못했다.[30]

5. 5. 제국 참모총장 임명

1941년 12월, 브룩은 존 딜 경의 뒤를 이어 제국 참모총장(CIGS)이 되어 영국 육군의 전문 수장이 되었다.[31] 이 직책에서 그는 참모총장 위원회에 영국 육군을 대표했으며, 1942년 3월에는 더들리 파운드 경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 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나머지 기간 동안, 브룩은 윈스턴 처칠 총리(그는 또한 국방부 장관이기도 했다), 전시 내각, 그리고 영국의 동맹국들에게 가장 중요한 군사 고문이었다.[32]

런던의 전쟁성에서 책상에 앉아 세계 지도를 바라보는 앨런 브룩 경 (1942년경).


CIGS로서 브룩은 영국 육군의 실질적인 수장이었고, 참모총장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영국 전쟁 노력의 전반적인 전략적 방향을 결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42년, 브룩은 서방 연합국의 최종 지휘 기구인 미국-영국 연합 참모총장에 합류했다.[32] 그는 전체 영국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거시 전략에 집중했고, 연합 참모총장을 통해 미국의 상대와 관계를 맺었다. 그는 또한 고위 지휘관의 임명 및 평가, 인력 및 장비 할당, 야전 지휘관의 육상 작전을 지원하는 전술 공군 조직에 대한 책임도 있었다. 자유 프랑스,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부대의 군사 작전을 감독하는 주요 책임을 맡았다.[33]

브룩의 주된 초점은 지중해 전역에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그의 주요 목표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군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몰아내 지중해를 연합군 선박에 개방한 다음, 연합군이 준비되고 독일군이 충분히 약해지면 해협을 건너 침공하는 것이었다.[34] 이러한 지중해 작전에 대한 시각은 서유럽 조기 침공에 대한 미국의 헌신과 대조를 이루었고, 이는 연합 참모총장 회의에서 여러 차례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35]

트리폴리에 방문한 윈스턴 처칠 총리와 군 지휘관들, 1943년. 이 그룹에는 올리버 리즈 경 중장, 해롤드 알렉산더 경 대장, 앨런 브룩 경 대장, 버나드 몽고메리 경 대장이 포함되어 있다.


영미 동맹 초창기에는 종종 영국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1942년 4월 런던 회담에서 브룩과 처칠은 조지 C. 마셜 장군에게 프랑스 조기 상륙에 대한 영국의 의도를 오해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연합군은 시칠리아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서유럽에 대한 계획된 침공을 1944년까지 연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카사블랑카 협정은 브룩의 오랜 친구인 존 딜 야전 원수가 중재한 타협안이었으며, 딜은 워싱턴 D.C.에 있는 영국 합동 참모단의 단장이었다.[36]

CIGS의 직책은 중요한 전쟁 지역에서 지휘하는 것만큼 보람 있지는 않았지만 CIGS는 해당 지역을 지휘할 장군을 선택하고 그들이 가져야 할 인력과 탄약을 결정했다. 적절한 지휘관을 찾는 문제에 있어서 그는 종종 좋은 지휘관이 될 많은 장교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했고, 이것이 영국이 전쟁 초기에 겪었던 어려움 뒤에 숨겨진 이유 중 하나라고 불평했다.[37] 1942년 클로드 오친렉 경 장군이 영국 제8군의 사령관으로 교체될 예정이었을 때, 브룩은 처칠이 선호하는 윌리엄 고트 중장 대신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을 선호했다.[38] 그 직후 고트는 그의 항공기가 격추되면서 사망했고 몽고메리가 지휘권을 받았다.[39]

브룩(왼쪽)과 처칠노르망디 상륙 직후인 1944년 6월 12일 노르망디 프랑스에 있는 버나드 몽고메리의 이동식 본부를 방문하고 있다.


1년 후,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고 브룩은 더 이상 처칠 곁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그는 서유럽 연합군 침공을 지휘하기를 고대했는데, 브룩은 처칠이 세 번이나 그에게 약속했다고 믿었던 직책이었다. 1943년 8월 제1차 퀘벡 회담에서 그 지휘권은 조지 마셜 장군에게 돌아가기로 결정되었다.[41]

버나드 몽고메리 경 장군이 1943년 12월 15일 이탈리아에서 해롤드 알렉산더 경 대장과 8 인도 사단 본부를 시찰하는 동안 그의 참모 차량에 타고 있다.


야전 원수 앨런브룩 자작 동상, 국방부 건물, 화이트홀, 런던.


브룩은 모든 영국 육군 수장 중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사고와 말에 재빨랐고, 영국 및 연합국 군 동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지만, 그의 타협하지 않는 스타일은 미국인들을 경계하게 만들 수 있었다.[42] CIGS로서 브룩은 서방 연합국의 거시 전략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서부에서의 전쟁은 그의 계획에 따라 거의 그대로 전개되었으며, 적어도 1943년까지 미국의 군대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 중 하나는 프랑스 조기 상륙에 반대했던 것으로, 오버로드 작전을 1944년 6월까지 연기하는 데 중요했다.[35]

5. 6. 연합군 전략 수립과 지중해 전역

브룩의 주된 초점은 지중해 전역에 맞춰져 있었다.[34] 여기서 그의 주요 목표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군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몰아내 지중해를 연합군 선박에 개방하는 것이었다.[34] 그 후, 연합군이 준비되고 독일군이 충분히 약해지면 해협을 건너 침공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설정했다.[34]

이러한 브룩의 지중해 작전에 대한 시각은 서유럽 조기 침공에 대한 미국의 헌신과 대조를 이루었고, 이는 연합 참모총장 회의에서 여러 차례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35] 영미 동맹 초창기에는 종종 영국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1942년 4월 런던 회담에서 브룩과 처칠은 장군 조지 C. 마셜, 미국 육군 참모총장에게 프랑스 조기 상륙에 대한 영국의 의도를 오해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연합군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 아래 시칠리아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서유럽에 대한 계획된 침공을 1944년까지 연기하는 결과를 낳았다.[36] 카사블랑카 협정은 실제로 브룩의 오랜 친구인 존 딜 야전 원수가 중재한 타협안이었으며, 딜은 워싱턴 D.C.에 있는 영국 합동 참모단의 단장이었다. 브룩은 전쟁 후 "나는 그날과 그 밖의 많은 유사한 경우에 그의 도움에 무한한 감사를 빚지고 있다"고 썼다.[36]

5. 7. 주요 지휘관 임명

1942년 클로드 오친렉 경 장군이 영국 제8군의 사령관으로 교체될 예정이었을 때, 브룩은 처칠이 선호하는 윌리엄 고트 중장 대신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 (몽고메리는 브룩의 전 제자이자 그의 피보호자였다.[38])을 선호했다. 그 직후 고트는 그의 항공기가 격추되면서 사망했고 몽고메리가 지휘권을 받았다. 브룩은 몽고메리의 임명을 이끈 비극적인 사건을 신의 개입으로 나중에 회상하곤 했다.[39] 며칠 전 브룩은 오친렉의 주요 직책인 중동 사령관을 제안받았다. 브룩은 처칠을 다루는 방법을 다른 어떤 장군보다 잘 알고 있다고 믿고 거절했다. 그는 새로운 CIGS가 처칠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데 6개월이 걸릴 것이고 "그 6개월 동안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기록했다.[40]

적절한 지휘관을 찾는 문제에 있어서 그는 종종 좋은 지휘관이 될 많은 장교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했고, 이것이 영국이 전쟁 초기에 겪었던 어려움 뒤에 숨겨진 이유 중 하나라고 불평했다.[37]

5. 8.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유럽 전선

1943년 8월 제1차 퀘벡 회담에서 서유럽 연합군 침공 지휘권은 조지 마셜 장군에게 돌아가기로 결정되었다.[41] 브룩은 자신이 배제된 것과 처칠이 그에게 그 결정을 전달한 방식에 모두 몹시 실망했다.[41]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오버로드 작전)은 브룩이 주장했던 대로 1944년 6월까지 연기되어 실행되었다.[35]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브룩의 전략과 역할이 중요했다. CIGS로서 브룩은 서방 연합국의 거시 전략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서부에서의 전쟁은 그의 계획에 따라 거의 그대로 전개되었으며, 적어도 1943년까지 미국의 군대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 중 하나는 프랑스 조기 상륙에 반대했던 것으로, 오버로드 작전을 1944년 6월까지 연기하는 데 중요했다.[35] 그는 독일 군대를 매우 존경하는 신중한 장군이었다.

6. 윈스턴 처칠과의 관계

앨런 브룩은 제국 참모총장(CIGS) 재임 기간 동안 윈스턴 처칠과 파란만장한 관계를 맺었다. 브룩은 처칠의 업무 방식, 잦은 간섭, 그리고 전략적 문제에 대한 의견 충돌로 인해 좌절감을 느꼈다.[46] 특히 처칠의 수마트라 북단 점령 구상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51] 그러나 브룩은 처칠의 리더십과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놀라운 비전 부족과 섞인 천재"라고 평가하며, 처칠과 함께 일할 기회를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언급했다.[46]

처칠의 전략적 아이디어가 건전한 군사 전략과 충돌할 때, 참모 위원회에서 처칠에게 맞설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은 브룩이었다.[48] 처칠은 브룩을 "고집스러운 얼스터 남자"라고 평가했지만,[48][49] 그의 능력과 헌신을 인정했다.[50]

1943년 5월 RMS ''Queen Mary''호에서 윈스턴 처칠(오른쪽)과 회의 중인 앨런 브룩(왼쪽에서 두 번째).


진주만 공격 직후, 처칠과 그의 고위 군사 참모들은 아카디아 회담에서 연합 참모 본부 구성을 논의했다. 브룩은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지만, 결국 연합 참모 본부는 워싱턴에 설치되었고, 필드 마샬 딜이 영국 측 대표를 맡았다. 브룩은 연합 본부의 13번의 대면 회의에 참석했다.[47]

1943년 더들리 파운드가 은퇴하고 앤드루 커닝햄이 제1 해군 경이 되면서, 브룩은 처칠과의 논쟁에서 확고한 동맹을 얻게 되었다.[53]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단계를 위한 영국의 준비와 관련하여, 브룩과 참모들은 호주에서 병력을 증강하길 원했지만, 처칠은 인도를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 문제는 참모들이 사임을 고려할 정도로 심각했지만,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다.[54]

1945년 3월 25일, 윈스턴 처칠(왼쪽)이 라인강 도하 작전에 참여한 병사들을 순방 중 앨런 브룩(오른쪽)과 함께 있다.


두 사람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바탕으로 긴밀히 협력했다. 처칠은 브룩을 "사랑하는 브룩"이라고 부르며 애정을 표현했고,[55] 브룩은 처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자신이 처칠에게 동의하지 않으면서 동의한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을 해고해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로 깊은 신뢰를 보였다.[55]

1945년 5월 7일, 10번가 다우닝가에서 윈스턴 처칠(앞줄 가운데)과 참모들. 앨런 브룩은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맥스 헤이스팅스에 따르면, 브룩과 처칠의 파트너십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어떤 교전 국가보다 전쟁의 고차적 지휘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기계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56] 브룩은 처칠에 대해 "한 남자를 그토록 동시에 존경하고 경멸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하며, 두 사람의 복잡하면서도 특별한 관계를 드러냈다.[57]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시작 전 베를린 공항에서 앨런 브룩(오른쪽)과 참모들.

7. 전후 활동 및 말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규 육군에서 퇴역한 앨런브룩 자작은 거의 모든 명예직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명예 포병 연대의 연대 사령관을 선택했다. 그는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67] 또한 산업 및 금융 분야의 여러 회사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그는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 미들랜드 은행, 내셔널 디스카운트 컴퍼니, 그리고 벨파스트 은행의 이사를 역임했다. 앨런브룩은 1948년부터 11년 동안 역임한 허드슨 베이 회사의 이사직을 특히 좋아했다.[67]

역사가 앤드류 생스터에 따르면, 그가 군대에 남지 않고 민간 부문에서 일하기로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앨런브룩 자작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재산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집을 옮겨야 했고, 당시 잘 팔리던 자서전을 출판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68]

7. 1. 군 경력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규 육군에서 퇴역한 앨런브룩 자작은 명예 포병 연대의 연대 사령관을 선택했다. 그는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67] 또한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 미들랜드 은행, 내셔널 디스카운트 컴퍼니, 벨파스트 은행의 이사를 역임했다. 앨런브룩은 1948년부터 11년 동안 역임한 허드슨 베이 회사의 이사직을 특히 좋아했다.[67]

역사가 앤드류 생스터에 따르면, 그가 군대에 남지 않고 민간 부문에서 일하기로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앨런브룩 자작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재산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집을 옮겨야 했고, 당시 잘 팔리던 자서전을 출판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68]

7. 2. 결혼과 자녀

앨런브룩 자작은 두 번 결혼했다. 1914년 얼스터 페르마나주 로스패드에 살던 존 머빈 애쉬달 칼턴 리처드슨 대령의 딸 제인 리처드슨과 6년간의 약혼 끝에 결혼했으나,[69][70]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결혼 엿새 만에 현역으로 복귀했다. 제인 브룩은 1925년 남편이 운전하던 차 사고로 척추 골절을 치료하는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 부부는 슬하에 1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두었다.[15][71]

  • 명예 로즈메리 브룩 (1918년 10월 25일 ~ 2016년)
  • 제2대 앨런브룩 자작 토마스 브룩 (1920년 1월 9일 ~ 1972년 12월 19일)


1929년, 앨런브룩은 제4대 해롤드 펠리 경의 딸이자 제2대 토마스 리즈 경의 미망인이었던 베니타 리즈(1892–1968)와 재혼했다. 이 결혼은 애처가였던 브룩에게 매우 행복했다. 이들 역시 딸과 아들을 한 명씩 두었다.[72]

  • 명예 캐슬린 베니타 브룩 (1931년 1월 23일 ~ 1961년 11월 20일)
  • 제3대이자 마지막 앨런브룩 자작 앨런 빅터 해롤드 브룩 (1932년 11월 24일 ~ 2018년 1월 10일)


전쟁 중 이 부부는 햄프셔 하틀리 윈트니에서 살았다. 전쟁 후, 그들의 재정 상황으로 인해 부부는 이전 집의 정원사 오두막으로 이사해야 했고,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그들의 마지막 몇 년은 1961년 딸 캐슬린이 승마 사고로 사망하면서 어두워졌다.[73][74]

7. 3. 자연과 조류에 대한 관심

앨런브룩 자작은 자연을 사랑했으며, 사냥과 낚시를 즐겼다. 특히 조류에 대한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류 사진 분야에서 뛰어난 조류학자로 인정받았다.[15] 1944년에는 노퍽 해안의 섬이 붉은가슴알락해오리 번식에 중요하다는 이유로 영국 공군에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하지 말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15]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런던 동물학회 회장을,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왕립 조류 보호 협회(RSPB) 부회장을 역임했다.[75][76] 1954년 2월부터는 왕립 사진 협회 명예 회원으로 활동했다.[77]

7. 4. 죽음과 유산

앨런브룩 자작은 1963년 6월 17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했다.[73] 그는 같은 날 윈저 성의 성 조지 예배당에서 열리는 가터 서훈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9일 후, 그는 윈저에서 장례를 치르고 하틀리 윈트니 성 마리아 교회에 안장되었다.[73] 그는 1945년 페르매나주 브루크보로의 앨런브룩 남작[79], 1946년 브루크보로의 앨런브룩 자작 작위를 받았다.[80][81] 자작위와 남작위는 장남인 토머스에게 물려주었다.[78]

앨런브룩 자작의 묘비


그는 가터 기사(KG),[82] 바스 훈장 기사단장(GCB),[83][84] 메리트 훈장 회원(OM),[87] 로열 빅토리아 훈장 기사단장(GCVO)[88] 등 다양한 훈장을 받았다. 1916년 우수 봉사 훈장 및 1918년 메달 바를 수여받았다.[89][90]

앨런브룩 경은 194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벨파스트 퀸스 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다.[104]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서는 잉글랜드 고위 헌병으로 임명되어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군대를 지휘했다.[104]

1993년 런던 화이트홀에 있는 국방부 앞에 앨런브룩 자작 동상이 세워졌다.[105] 웰벡 칼리지[114]와 요크 공작 왕립 군사 학교는 그의 이름을 딴 기숙사를 만들었으며,[115] 여러 군사 기지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16][117]

8. 평가

앨런 브룩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의 전략 수립과 실행을 주도한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58] 그의 군사적 전문성, 전략적 통찰력, 그리고 윈스턴 처칠과의 복잡하면서도 생산적인 관계는 전쟁 승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신중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군사 지도자였으며, 연합군의 전략 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브룩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기를 썼는데,[58] 이 일기는 주로 처칠에 대한 빈번한 언급과 비판 때문에 유명해졌다. 일기에는 처칠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구절도 있지만, 브룩이 총리와 함께 일하면서 느낀 좌절감을 토로하는 배출구 역할도 했다.[58] 미국의 장군 아이젠하워마셜은 형편없는 전략가로, 해롤드 알렉산더 경은 지능이 부족한 것으로 묘사되었다.[60] 반면 더글러스 맥아더,[60] 존 딜 경,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특히 스탈린의 빠른 두뇌와 군사 전략에 대한 이해를 존경했다.[61]

1950년대에 출판된 첫 번째 버전은 아서 브라이언트 경이 편집했으며,[62] 처칠 자신의 전쟁 회고록에서 브룩과 참모총장들에 대한 공로가 부족했기 때문에 출판을 결심하게 되었다.[63][58] 2001년에는 알렉스 단체프와 다니엘 토드먼이 브룩의 비판적인 원본 내용을 포함한 완전한 버전의 일기를 출판했다.[65][66] 그의 전쟁 일기는 당시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한 솔직하고 비판적인 기록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British Army officer histories https://www.unithist[...] Unit Histories 2022-01-05
[2] 서적
[3] 서적
[4] 서적 Triumph in the West Collins 1959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간행물 London Gazette 1903-02-24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Vimy Ridge: A Canadian Reassessment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Military Anecdotes Guinness Publishing 1992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05-21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웹사이트 History – World Wars: The German Threat to Britain in World War Two https://www.bbc.co.u[...] BBC 2012-10-14
[31] 간행물 London Gazette 1941-12-26
[32] 웹사이트 Alanbrooke, FM Alan Francis, 1st Viscount Alanbrooke of Brookeborough (1883–1963) http://www.kingscoll[...] Liddell Hart Military Archives 2016-03-10
[33] 서적 Masters and Commanders: How Four Titans Won the War in the West, 1941-1945 2010
[34] 서적
[35] 웹사이트 What If the Allies Had Invaded France in 1943? http://www.historyne[...] History.net 2011-10-05
[36] 논문
[37] 논문
[38] 논문
[39] 논문
[40] 논문
[41] 논문
[42] 논문
[43] 논문
[44] 논문
[45] 논문
[46] 논문
[47] 서적 Masters and Commanders: How Four Titans Won the War in the West, 1941-1945
[48] 서적 The Second World War, 6 vols Cassell
[49] 서적 The Fringes of Power: Downing Street Diaries, 2 Vols Sceptre
[50] 논문
[51] 논문
[52] 논문
[53] 논문
[54] 논문
[55] 논문
[56] 논문
[57] 논문
[58] 논문
[59] 논문
[60] 논문
[61] 논문
[62] 서적 The turn of the tide 1939-1943. A study based on the diaries and autobiographical notes of Field Marshall the Viscount Alanbrooke Collins, London
[63] 웹사이트 The Churchill Centre http://www.winstonch[...]
[64] 서적 Halfway to Heaven Sutton Publishing Ltd
[65] 간행물 The Alan Brooke Diaries Archives-London-British Records Association
[66] 웹사이트 Alanbrooke And Churchill https://winstonchurc[...] 2015-06-03
[67] 논문
[68] 웹사이트 Alan Brooke: Churchill's Right-Hand Critic (podcast where Andrew Sangster is interviewed) http://ww2podcast.co[...] 2021-06-14
[69] 문서 The Alanbrooke Papers in the Liddell Hart Centre, King's College, London; Arthur Bryant, The Turn of the Tide, 1957, and Triumph in the West, 1959, both of which include edited extracts from Alanbrooke's wartime diaries; The Economist, 23 February 1957
[70] 서적 Burke's Genealogical and Heraldic History of the Peerage Burke's Peerage Ltd
[71] 간행물
[72] 간행물
[73] 간행물
[74] 문서 The Alanbrooke Papers in the Liddell Hart Centre, King's College, London; Arthur Bryant, The Turn of the Tide, 1957, and Triumph in the West, 1959, both of which include edited extracts from Alanbrooke's wartime diaries; The Economist, 23 February 1957
[75] 간행물
[76] 간행물
[77] 문서 From RPS membership records, confirmed by the RPS, 7 December 2020.
[78] 서적 Burke's Peerage and Baronetage, 106th edition, 2 volumes. Burke's Peerage (Genealogical Books) Ltd
[79] 간행물 London Gazette 1945-10-19
[80] 간행물 London Gazette 1945-12-28
[81]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02-08
[82]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12-03
[83] 간행물 London Gazette 1942-11-20
[84] 간행물
[85] 간행물 London Gazette 1940-06-14
[86] 간행물 London Gazette 1937-01-29
[87]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06-04
[88] 간행물 London Gazette 1953-05-26
[89] 간행물 London Gazette 1916-12-29
[90] 간행물 London Gazette 1918-03-05
[91] 간행물 London Gazette 1943-12-31
[92]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07-30
[93] 간행물 London Gazette 1951-09-28
[94]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09-13
[95] 간행물 London Gazette 1954-08-27
[96]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11-29
[97] 간행물 London Gazette 1956-11-27
[98] 간행물 London Gazette 1955-08-09
[99] 간행물 London Gazette 1950-08-18
[100] 간행물 London Gazette 1957-03-27
[101] 간행물 London Gazette 1950-07-21
[102] 간행물 London Gazette 1950-09-01
[103] 간행물 London Gazette 1957-04-26
[104] 간행물 London Gazette 1953-11-17
[105] 서적 Discovering London Statues and Monuments https://books.google[...] Osprey Publishing 2002
[106] 간행물 London Gazette 1943-10-05
[107] 간행물 London Gazette 1944-02-25
[108]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10-15
[109] 웹사이트 Československý řád Bílého lva 1923–1990 https://www.prazskyh[...]
[110]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10-15
[111] 간행물 London Gazette 1948-05-11
[112] 간행물 London Gazette 1918-04-12
[113] 웹사이트 Cidadãos Estrangeiros Agraciados com Ordens Portuguesas http://www.ordens.pr[...] 2017-08-03
[114] 웹사이트 Alanbrooke Team Building http://www.dsfc.ac.u[...] 2013-08-08
[115] 웹사이트 Divided into ten houses http://www.doyrms.co[...] 2013-08-08
[116] 웹사이트 Paderborn Garrison Labour Support Unit http://bfgnet.de/emp[...] 2013-08-08
[117] 웹사이트 Alanbrooke Barracks, Thirsk, North Yorkshire http://streetmap.co.[...] 2013-08-08
[118] 웹사이트 Churchill and the Generals https://www.imdb.com[...] 2013-08-08
[119] 웹사이트 Churchill (2017) https://www.imdb.com[...] 2019-03-16
[120] 서적 William Heinemann Ltd, London 1968
[121] 웹사이트 Field Marshal Alan Francis Brooke, 1st Viscount Alanbrooke http://thepeerage.co[...] 2016-06-02
[122] 웹사이트 Alanbrooke, Viscount (UK, 1946) http://www.cracrofts[...] 2016-05-31
[123] 간행물 London Gazette 1903-02-24
[124] 뉴스 米・英・中首脳、対日戦の最終目標協議 朝日新聞 1943-12-02
[125] 웹사이트 Mr Alan Brooke https://api.parliame[...] 2016-06-02
[126] 간행물 London Gazette 1916-12-29
[127] 간행물 London Gazette 1918-03-05
[128] 간행물 London Gazette 1937-01-29
[129] 간행물 London Gazette 1940-06-14
[130] 간행물 London Gazette 1942-11-20
[131]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06-04
[132]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12-03
[133] 간행물 London Gazette 1953-05-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