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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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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 의공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군주로, 제 환공의 아들이다. 그는 제 환공 사후 왕위 계승 다툼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이복 동생인 제 소공이 죽자 그의 아들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노나라와의 갈등을 겪었으며, 신하들의 원한을 사 기원전 609년에 살해당했다. 이후 제나라 사람들은 그의 아들을 폐하고 위나라에 있던 공자 원을 옹립하여 제 혜공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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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의공
기본 정보
이름제 의공 (齊懿公)
강상인 (姜商人)
여 (呂)
시호의공 (懿公)
신상 정보
출생미상
사망기원전 609년
아버지환공
어머니밀희 (密姬)
배우자미상
지위
작위공 (公)
봉국제나라
재위 기간기원전 612년 – 기원전 609년
계승 순서21대
선대 공여사
후대 공혜공
기타 정보
가문강 (姜)
왕조강제

2. 즉위 전 군위 다툼

제 환공 사후, 상인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에 뛰어들었다. 제후 무궤가 죽은 후, 배다른 형인 세자 소송나라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려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여, 결국 세자 소가 제 효공으로 즉위하였다.

상인은 은밀히 현명한 선비들과 교류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며 세력을 키웠다. 기원전 612년, 제 소공이 죽고 그의 아들 제군 사가 즉위했으나, 세력이 약한 틈을 타 상인은 제군 사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사기》에는 상인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고, 《춘추좌씨전》에는 공자 원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여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1. 환공의 여러 아들들과 권력 투쟁

제 환공 말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섯 공자 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제후 무궤 사후, 상인은 배다른 형인 세자 소송나라의 지원을 받아 즉위하려는 것을 막고, 일단 소를 송나라로 쫓아냈다. 그러나 송 양공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결국 세자 소가 제 효공으로 즉위했다.[1][2]

제 의공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은밀히 현명한 선비들과 교류하며 백성들을 위로했다. 기원전 612년, 제 효공의 뒤를 이은 제 소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제군 사가 즉위했으나, 세력이 약했다. 이에 제 의공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묘상에서 제군 사를 살해했다.[1][2]

사기》 〈제태공 세가〉에는 '상인이 스스로 왕위에 올라 의공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춘추좌씨전》 〈문공 14년〉에는 공자 원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공자 원이 "나는 너를 섬길 수 있어도, 너는 나를 섬길 수 없다"라며 거절하여 제 의공이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제 의공의 아버지 제 환공은 춘추 오패의 첫 번째 인물로, 강력한 군주였다. 제 환공은 아들을 낳지 못한 세 명의 정실 부인과 여섯 명의 총애하는 후궁, 그리고 열 명이 넘는 아들을 두었다. 제 의공은 당시 상인(尙仁)으로 불렸으며, 어머니는 소국 밀(密)나라 공주 미희(彌姬)였다. 제 환공의 다른 다섯 아들인 공자 무궤, 태자 소(昭)(훗날 제 효공), 공자 반(潘)(훗날 제 소공), 공자 원(元)(훗날 제 혜공), 공자 옹(雍) 역시 왕위를 다투었다.[1][2]

기원전 643년 10월, 제 환공이 사망하자 여섯 공자는 왕위 다툼을 벌였다. 공자 무궤가 처음에는 승리했지만, 3개월 후 살해당하고 제 효공이 왕위를 이었다. 제 효공은 10년간 재위 후 사망했고, 제 소공이 뒤를 이었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효공의 아들을 죽였다.[1][2]

기원전 613년 5월, 제 소공이 사망하고 아들 사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두 달 뒤, 공자 상렌은 효공의 무덤에서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았다. 그는 제 환공의 다섯 아들 중 네 번째로 제나라 군주가 되었으며, 사후 제 의공으로 불리게 되었다.[1][2]

2. 2. 제나라 계승 전쟁

제 환공 말년, 군위를 다툰 다섯 공자 중 한 명으로, 제후 무궤 사후 배다른 형인 세자 소의 도움을 받아 제후 위에 오르려 하는 것을 다른 공자들과 함께 저지하고 일단은 소를 송나라로 쫓아 보냈다. 그러나 송 양공과 싸워 져 결국 세자 소가 즉위하여 제 효공이 되었다.[1][2]

군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음으로 현명한 선비와 사귀고 백성들을 달랬다. 제 효공의 뒤를 이은 다른 배다른 형인 제 소공이 기원전 612년에 죽고 그 아들 제군 사가 군위에 올랐으나, 세력이 외롭고 약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묘상에서 제군 사를 죽였다.[1][2]

사기》〈제태공 세가〉에서는 '상인이 자립하여 의공이 되었다'고 한다. 《춘추좌씨전》〈문공 14년〉에서는 일단 또 다른 배다른 형 공자 원에게 군위를 양보하나, 공자 원이 “나는 너를 섬길 수 있어도, 너는 나를 섬길 수 없다”라며 거부하고 공자 상인이 군위에 오르는 것으로 나온다.[3]

제 환공이 기원전 643년 10월에 사망하자, 여섯 명의 공자들은 왕위를 놓고 서로 싸웠다. 공자 무궤가 처음에는 승리했지만, 3개월 후에 살해당하고 제 효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제 효공은 10년 동안 재위하다가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제 소공이 즉위했는데, 그의 지지자들은 효공의 아들을 죽였다.[1][2]

제 소공은 20년 동안 재위하다가 기원전 613년 5월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사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 공자 상인은 효공의 무덤에서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제 환공의 다섯 아들 중 네 번째로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제 의공으로 불리게 되었다.[1][2]

기원전 613년 5월, 이복 형제인 소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가 즉위했다(제군사). 그러나, 사의 어머니는 소공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사는 국인들에게 얕보였다. 그 해 안에, 상인은 사를 살해하고, 공위에 즉위했다. 『사기』에 따르면, 상인은 10월에 무리와 함께 소공의 묘 위에서 사를 살해하고, 스스로 국군으로 섰다(의공).[3]

3. 제위 계승과 통치

환공과 애첩 밀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환공 사후, 제공의 자리를 다툰 공자 중 한 명이었지만, 공위를 계승하지는 못했다. 상인은 몰래 현사와 교류하고, 사람들에게 베풀어 지지를 얻었다.

기원전 613년 5월, 이복 형제인 소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제군사)가 즉위했다. 그러나 사의 어머니는 소공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사는 국인들에게 얕보였다. 그 해 안에, 상인은 사를 살해하고 공위에 즉위했다. 『사기』에 따르면, 상인은 10월에 무리와 함께 소공의 묘 위에서 사를 살해하고, 스스로 국군으로 섰다(의공).[3]

의공은 공자였던 시절, 병축이라는 인물의 아버지와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항상 병축의 아버지에게 져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제공이 되자 의공은 병축의 아버지의 다리를 자르고[4], 병축을 하인으로 삼았다. 또한 용직(『춘추좌씨전』에서는 염직)이라는 인물의 아내가 미인이었으므로, 이를 빼앗아 후궁으로 들이고, 용직을 참승(마차의 동승자)으로 임명했다.

의공 4년 (기원전 609년), 의공이 신지에 놀러 나가자, 배승했던 병축과 용직도 놀았다. 용직이 병축에게 "다리 잘린 자식"이라고 놀리자, 병축도 "아내를 빼앗긴 주제에"라고 되받아쳤다. 두 사람은 의공에 대한 원한으로 의기투합했다. 의공이 대나무 숲에 놀러 나갔을 때, 병축과 용직은 마차 위에서 의공을 살해하고, 시체를 대나무 숲에 버리고 그대로 도망갔다.

의공은 즉위 후 교만해져서 인심을 잃었기 때문에, 제나라는 의공의 태자를 폐하고, 위나라로 망명해 있던 공자 원을 맞이하여 즉위시켰다. 이가 혜공이다.

3. 1. 조카 살해와 즉위

제 환공 말년, 군위를 다툰 다섯 공자 중 한 명이었다. 제후 무궤 사후 배다른 형인 세자 소송나라의 도움을 받아 제후 위에 오르려 하는 것을 다른 공자들과 함께 저지하고 일단은 소를 송나라로 쫓아 보냈다. 그러나 송 양공과 싸워 져 결국 세자 소가 즉위하여 제 효공이 되었다.[1][2]

군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몰래 현명한 선비와 사귀고 백성들을 달랬다. 제 효공의 뒤를 이은 다른 배다른 형인 제 소공이 기원전 612년에 죽고 그 아들 제군 사가 군위에 올랐으나, 세력이 외롭고 약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묘상에서 제군 사를 죽였다.[1][2]

사기》〈제태공 세가〉에서는 '상인이 자립하여 의공이 되었다'고 한다. 《춘추좌씨전》〈문공 14년〉에서는 일단 또 다른 배다른 형 공자 원에게 군위를 양보하나, 공자 원이 “나는 너를 섬길 수 있어도, 너는 나를 섬길 수 없다”라며 거부하고 공자 상인이 군위에 오르는 것으로 나온다.[3] 이리하여 공자 상인은 제후로 즉위했다.

제 의공의 아버지인 제 환공은 춘추 오패의 첫 번째 인물이었다. 제 환공은 아들을 낳지 못한 세 명의 주요 부인과 여섯 명의 총애하는 첩, 그리고 열 명이 넘는 아들을 두었다. 제 의공은 당시 상인(尙仁)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어머니는 소국인 밀(密)의 공주인 미희(彌姬)였다. 제 환공의 다른 다섯 아들, 공자 무궤, 태자 소(昭)(후일 제 효공), 공자 반(潘)(후일 제 소공), 공자 원(元)(후일 제 혜공), 공자 옹(雍) 또한 왕위를 다투었다.[1][2]

제 환공이 기원전 643년 10월에 사망하자, 여섯 명의 공자들은 왕위를 놓고 서로 싸웠다. 공자 무궤가 처음에는 승리했지만, 3개월 후에 살해당하고 제 효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제 효공은 10년 동안 재위하다가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제 소공이 즉위했는데, 그의 지지자들은 효공의 아들을 죽였다.[1][2]

제 소공은 20년 동안 재위하다가 기원전 613년 5월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사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 공자 상인은 효공의 무덤에서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제 환공의 다섯 아들 중 네 번째로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제 의공으로 불리게 되었다.[1][2]

기원전 613년 5월, 이복 형제인 소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가 즉위했다(제군사). 그러나, 사의 어머니는 소공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사는 국인들에게 얕보였다. 그 해 안에, 상인은 사를 살해하고, 공위에 즉위했다. 『사기』에 따르면, 상인은 10월에 무리와 함께 소공의 묘 위에서 사를 살해하고, 스스로 국군으로 섰다(의공).[3]

3. 2. 노나라와의 갈등

제 의공 즉위 후, 제군 사의 외가인 노나라에서는 양중을 주나라 왕에게 사자로 보내 제나라에 있는 제군 사의 어머니 소희(昭姬, 다른 이름으로 자숙희, 숙희라고도 한다)를 불러들이기를 청했다.[5]

주나라 왕은 선백을 사자로 제나라에 보내 숙희를 청했는데, 제나라는 선백과 자숙희를 잡아들였다.[5] 이듬해 가을에는 노나라 서비를 쳤다. 겨울 11월, 진, 송, 위, 채, 정, 허, 여섯 나라가 호(扈)에서 회맹하고 제나라 토벌을 모의했다.[5]

제나라는 진나라에 뇌물을 주고 제나라 토벌을 없던 일로 만들어 위기를 넘겼다.[6] 이듬해 봄, 노나라가 곡양에서 제나라와 만나고자 했으나, 제후는 가지 않았다.

여름, 노나라가 양중을 제나라에 보내 뇌물을 바친 후에야 두 나라는 처(郪)에서 회맹했다.[7] 이듬해(노 문공 17년) 여름, 또 노나라 서비를 쳐 노나라 양중이 제나라에 회맹을 청했다.[8]

4. 비참한 최후

의공은 즉위 후 교만해져서 백성들의 신임을 잃었다.[9] 기원전 609년, 의공은 병융(《춘추좌씨전》에는 병촉(邴歜))과 용직(《춘추좌씨전》에는 염직(閻職))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들은 의공을 수레 위에서 살해하고 시체를 대나무 숲에 버리고 도망갔다.[9]

제나라 사람들은 의공의 아들을 폐하고, 위나라로 망명해 있던 공자 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니, 이가 곧 제 혜공이다.[9]

4. 1. 사냥과 관련된 원한

의공은 공자 시절, 병융(丙戎)의 아버지와 사냥을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의공은 즉위한 후 병융 아버지의 발을 끊었고, 병융을 자기 종으로 삼았다. 또 용직(庸職)의 아내를 좋아하여 자기 궁에 두고, 용직을 참승으로 부렸다.[9]

노 문공 18년(기원전 609년) 5월, 의공이 신지라는 못으로 놀러갔는데, 병융과 용직이 서로 농을 주고받았다. 용직은 병융에게 “발 끊긴 아들!”이라 말했고, 병융은 용직에게 “아내 빼앗긴 놈!”이라 말했다. 둘은 함께 의공을 원망하였고, 의공은 수레 위에서 살해당해 시체는 나무 숲 가운데에 버려졌다.[9]

춘추좌씨전》〈문공 18년〉의 이야기도 위와 비슷하나, 병융과 용직이 각각 병촉(邴歜)과 염직(閻職)으로 나오며, 의공이 병촉의 아버지와 밭을 가지고 다투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9]

의공은 공자였던 시대, 병축이라는 인물의 아버지와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항상 병축의 아버지에게 져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제공이 되자 의공은 병축 아버지의 다리를 자르고[4], 병축을 하인으로 삼았다. 또한 용직(《춘추좌씨전》에서는 염직)이라는 인물의 아내가 미인이었으므로, 이를 빼앗아 후궁으로 들이고, 용직을 참승(마차의 동승자)으로 임명했다.[9]

의공 4년 (기원전 609년), 의공이 신지에 놀러 나가자, 배승했던 병축과 용직도 함께 놀았다. 용직이 병축에게 "다리 잘린 자식"이라고 놀리자, 병축도 "아내를 빼앗긴 주제에"라고 되받아쳤다. 두 사람은 의공에 대한 원한으로 의기투합하여, 의공이 대나무 숲에 놀러 나갔을 때, 병축과 용직은 마차 위에서 의공을 살해하고, 시체를 대나무 숲에 버리고 그대로 도망갔다.[9]

4. 2. 용직(염직)과의 갈등

사기》〈제태공 세가〉에 따르면, 의공은 공자 시절 병융(丙戎)의 아버지와 사냥을 했는데, 항상 졌기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즉위 후, 의공은 그 아버지의 발을 끊는 형벌을 내렸고, 병융을 자기 종으로 삼았다. 또 용직(庸職)의 아내가 아름다워 자기 궁에 두고, 용직을 참승(마차를 같이 타는 사람)으로 임명했다.[9]

기원전 609년 5월, 의공이 신지라는 못으로 놀러갔을 때, 용직과 병융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용직은 병융에게 “발 끊긴 아들!”이라 말했고, 병융은 용직에게 “아내 빼앗긴 놈!”이라 말했다. 둘은 이전에 의공에게 당한 일 때문에 함께 의공을 원망하였고, 결국 의공을 수레 위에서 살해하고 시체를 나무 숲 가운데에 버렸다.[9]

춘추좌씨전》〈문공 18년〉의 이야기도 위와 비슷하나, 병융과 용직이 각각 병촉(邴歜)과 염직(閻職)으로 나오며, 의공이 병촉의 아버지와 밭을 가지고 다투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9] 의공은 공자 시절, 병촉의 아버지와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항상 병촉의 아버지에게 져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제공이 되자 의공은, 병촉의 아버지의 다리를 자르고[4], 병촉을 하인으로 삼았다. 또한 용직(《춘추좌씨전》에서는 염직)의 아내가 미인이었으므로, 이를 빼앗아 후궁으로 들이고, 용직을 참승으로 임명했다.[9]

의공 4년 (기원전 609년), 의공이 신지에 놀러 나가자, 배승했던 병축과 용직도 함께 놀았다. 용직이 병축에게 "다리 잘린 자식"이라고 놀리자, 병축도 "아내를 빼앗긴 주제에"라고 되받아쳤다. 두 사람은 의공에 대한 원한으로 의기투합하여, 의공이 대나무 숲에 놀러 나갔을 때 마차 위에서 의공을 살해하고 시체를 대나무 숲에 버리고 그대로 도망갔다.[9]

4. 3. 신하들의 복수와 죽음

의공은 공자였을 때, 병융(丙戎)의 아버지와 사냥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의공은 즉위한 후 병융 아버지의 발을 끊었고, 병융을 자기 종으로 삼았다. 또 용직(庸職)의 아내를 좋아하여, 자기 궁에 두고, 용직을 참승으로 부렸다.[9]

기원전 609년 5월, 의공이 신지라는 못으로 놀러갔는데, 병융과 용직이 서로 농을 주고받았다. 용직은 병융에게 “발 끊긴 아들!”이라 말했고, 병융은 용직에게 “아내 빼앗긴 놈!”이라 말했다. 둘은 함께 의공을 원망하였고, 의공은 수레 위에서 살해당해 시체는 나무 숲 가운데에 버려졌다.[9]

춘추좌씨전》〈문공 18년〉의 이야기도 위와 비슷하나, 병융과 용직이 각각 병촉(邴歜)과 염직(閻職)으로 나오며, 의공이 병촉의 아버지와 밭을 가지고 다투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9]

의공은 교만하여 백성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의공의 아들을 폐하고 공자 원을 위나라에서 맞아들여 세우니 혜공이다.[9]

5. 가계

제 의공은 제 환공의 아들이나, 어머니는 미상이다.[1] 제 희공의 손자이자, 제 장공의 증손이며, 제 성공의 현손이다.[1]

관계이름출생-사망
아버지제 환공기원전 643년 사망
할아버지제 희공기원전 698년 사망
증조할아버지제 장공기원전 731년 사망
현조할아버지제 성공기원전 795년 사망


참조

[1] 웹사이트 http://www.guoxue.co[...] Guoxue.com 2012-05-14
[2] 서적 Shiji (史记) Zhonghua Book Company
[3] 문서 『春秋左氏伝』文公十四年
[4] 문서 「断足」。『春秋左氏伝』によれば懿公が即位したときに邴歜の父は既に死んでいたため、墓を暴いて遺体の両脚を切断した。
[5] 문서 《춘추좌씨전》〈문공 14년〉
[6] 문서 《춘추좌씨전》〈문공 15년〉
[7] 문서 《춘추좌씨전》〈문공 16년〉
[8] 문서 《춘추좌씨전》〈문공 17년〉
[9] 문서 《사기》〈제태공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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