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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쿠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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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로쿠의 변은 1457년 금궐의 변으로 남조 세력에게 탈취된 삼종신기 중 하나인 신새를 아카마쓰 가문의 옛 가신들이 탈환하려 한 사건이다. 가키쓰의 난으로 몰락한 아카마쓰 가문 재흥을 위해 고하나조노 천황과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윤지를 얻어 신새 탈환을 시도했다. 1457년 12월, 1차 시도로 후남조의 두 왕자를 살해했지만 신새 탈환에는 실패했고, 1458년 3월, 오데라 도베 뉴도를 중심으로 야마토 국의 국인 오치 이에히데의 협력을 얻어 신새를 탈환했다. 이후 신새는 1458년 8월 교토로 돌아왔고, 무로마치 막부는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을 허락하며 아카마쓰 마사노리에게 가독을 상속하고, 가가 북부 절반의 슈고, 비젠 닛타 장, 이세 다카미야호를 하사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는 아카마쓰 가문 재흥에 관여하여 야마나 소젠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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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쿠의 변
사건 개요
사건명조로쿠의 변 (長禄の変)
로마자 표기Choroku no hen
발생 시기무로마치 시대 중기
발생 연도1460년 (조로쿠 4년)
주요 인물가리야마 미쓰나가, 고쇼의 아카마쓰 가문 잔당
주요 가문아카마쓰 가문
관련 인물아카마쓰 노리마사, 아카마쓰 마사노리, 하타케야마 요시히로
영향간쇼의 난 발발의 원인 중 하나
배경
배경 시기무로마치 시대
배경 설명가키쓰의 난 이후 아카마쓰 가문 몰락
아카마쓰 가문 재흥을 위한 잔당의 움직임
전개
주요 사건가리야마 미쓰나가 등이 고쇼를 습격, 아카마쓰 가문 재흥 시도
결과거병은 실패로 끝나고, 아카마쓰 가문 재흥 또한 실패
결과 및 영향
영향아카마쓰 가문 재흥 실패
간쇼의 난 발발의 간접적인 원인 제공
추가 설명아카마쓰 가문 재흥을 위해 거병했지만 실패하고, 이 사건이 간쇼의 난으로 이어진다.

2. 경과

삼종신기 중 하나인 신새(神璽)는 금궐의 변 이후 후남조 세력이 보유하고 있었다. 가키쓰의 난으로 몰락한 아카마쓰 가문의 옛 가신들은 가문 재흥을 조건으로 고하나조노 천황과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내락을 얻어 신새 탈환을 계획했다.[9][1][10][2]

조로쿠 원년(1457년) 12월, 아카마쓰 옛 가신들은 후남조의 거점을 습격하여 자천왕(自天王)과 충의왕(忠義王) 두 왕자를 살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신새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하고 오히려 추격 과정에서 일부 가신들이 목숨을 잃었다.[13][5]

이듬해인 조로쿠 2년(1458년) 3월, 아카마쓰 측은 오데라 도베 뉴도(小寺藤兵衛入道)를 중심으로 야마토 국의 국인 오치 이에히데(越智家栄), 오가와 히로미쓰(小川弘光) 등의 협력을 얻어 마침내 신새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6][7] 신새는 같은 해 8월 30일 교토로 돌아와 조정에 반환되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이 공적을 인정하여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가독 상속과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을 공식적으로 허락했으며, 가가 국 북부 절반의 슈고직 등 새로운 영지를 부여했다. 이 과정에는 당시 막부의 실력자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야마나 소젠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목적 아래 깊이 관여한 것으로 파악된다.[8]

2. 1. 배경

삼종신기 중 하나인 신새(神璽)는 이전에 일어난 금궐의 변 때 요시노 조정(남조)의 부활을 외치는 후남조 세력에 의해 교토에서 옮겨진 상태였다.[9][1] 조로쿠의 변은 기본적으로 이 신새를 가키쓰의 난으로 몰락한 아카마쓰(赤松) 가문의 옛 가신들이 되찾아온 사건이다.

아카마쓰 가문의 옛 가신들은 신새를 탈환하는 조건으로, 지로 호시마루(次郎法師丸, 훗날의 아카마쓰 마사노리)를 가독(家督)으로 하는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을 인정받기로 약속받았다. 이 약속은 고하나조노 천황윤지(綸旨)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어내서(御内書, 또는 어교서) 형태로 주어졌다고 전해진다.[9][1]

이러한 배경은 사건에 참여했던 아카마쓰 가신 가미쓰키 미쓰요시(上月満吉) 등이 사건 후 약 20년이 지난 분메이 10년(1478년)에 작성한 「호리 히데요 가미쓰키 미쓰요시 연서주진장」(堀秀世上月満吉連署注進状)[9][1]이라는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 서두에는 천황의 윤지와 쇼군의 어내서를 받고 작전을 실행했음이 명기되어 있다. 또한 아카마쓰 씨의 일족인 이나바노카미 뉴도 데이가(因幡守入道定阿)가 덴쇼 16년(1588년)에 저술한 「아카마쓰기」(赤松記)[10][2]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아카마쓰기」에는 윤지나 어내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아카마쓰 가신들이 가문 재흥을 위해 신새 탈환을 계획했으며, 쇼군의 "상의(上意)", 즉 내락을 얻은 후 내대신 산조 사네카즈(三条実量)를 통해 조정에도 이야기가 전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카마쓰기」에 따르면, 아카마쓰 옛 가신들은 산조 사네카즈의 가신인 이와미 타로우에몬(石見太郎右衛門)을 통해 산조 사네카즈와 연결되었다. 도후쿠지(東福寺)의 승려 태극정역(太極正易)의 일기 『벽산일록』(碧山日録)[11][3] 조로쿠 3년(1459년) 11월 24일 자 기록에는 이와미 타로우에몬이 원래 아카마쓰 가문의 가객(家客)이었다고 언급되어 있어[12][4], 아카마쓰 가문과의 이전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신새 탈환의 대가로 가문 재흥을 약속받은 아카마쓰 옛 가신들은 구체적인 작전 실행에 나서게 된다.

2. 2. 신새 탈환 작전 (1차)

삼종신기 중 하나인 신새(神璽, 신지)는 이전에 금궐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을 통해 요시노 조정(남조)의 부흥을 꾀하는 후남조 세력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조로쿠의 변은 본래 가키쓰의 난으로 몰락했던 아카마쓰 가문의 옛 가신들이 이 신새를 되찾으려 한 사건이다.

아카마쓰 가문의 옛 가신들은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신새를 되찾아오면 아카마쓰 마사노리(당시 지로 호시마루)를 가독으로 삼아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을 인정해주겠다는 고하나조노 천황윤지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어교서(御教書, 또는 어내서 御内書)를 확보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내용은 사건 관련자 중 한 명인 가미쓰키 미쓰요시(上月満吉)가 사건 약 20년 후인 분메이 10년(1478년)에 기록한 「호리 히데요 가미쓰키 미쓰요시 연서주진장」(堀秀世上月満吉連署注進状)에 명시되어 있다.[9][1] 또한, 아카마쓰 일족인 이나바노카미 뉴도 데이가(因幡守入道定阿)가 덴쇼 16년(1588년)에 쓴 「아카마쓰기」(赤松記)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카마쓰기」에는 쇼군의 승인("상의")을 얻고 내대신 산조 사네카즈(三條実量, 산조 사네아키라)를 통해 천황에게도 이야기가 전달되었다고 적혀 있다.[10][2] 아카마쓰 옛 가신들은 산조 사네카즈의 가신인 이와미 타로우에몬(石見太郎右衛門)을 통해 산조 사네카즈와 연결되었는데, 이 이와미 타로우에몬은 본래 아카마쓰 가문의 가객(家客)이었다는 기록이 도후쿠지 승려 태극정역(太極正易)의 일기 『벽산일록』(碧山日録) 조로쿠 3년 기록에 남아 있다.[11][3][12][4]

신새 탈환의 대가로 가문 재흥을 약속받은 아카마쓰 옛 가신들은 「호리 히데요 가미쓰키 미쓰요시 연서주진장」에 따르면 총 30명이었다. 「아카마쓰기」에 의하면, 이들은 로닌(浪人) 신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후남조 세력에 가담하는 척하며 접근했다. 그들은 요시노의 왕자들을 도와 수도 교토를 공격하겠다는 등의 거짓말로 후남조 세력의 신뢰를 얻으려 했다.

마침내 조로쿠 원년(1457년) 12월 2일 자시(오전 0시경),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아카마쓰 옛 가신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후남조 세력을 습격했다. 한 그룹은 자천왕(自天王, 사료상 '이치노미야')이 있는 요시노 오쿠키타야마(吉野奥北山)로, 다른 그룹은 충의왕(忠義王, 사료상 '니노미야')이 있는 고노 향(河野郷)으로 향했다. 가미쓰키 미쓰요시는 고노 향의 충의왕(니노미야) 습격에 참여하여 왕자를 살해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호리 히데요 가미쓰키 미쓰요시 연서주진장」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아카마쓰기」에 따르면 오쿠키타야마의 자천왕(이치노미야)은 뉴노야 다치와키사에몬(丹生屋帯刀左衛門) 형제가 살해하고 신새 탈환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퇴각하던 중 "요시노 18향 사람들", 즉 요시노 향민들의 추격을 받아 형제는 백모곡(伯母谷)에서 살해당하고 신새도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1차 신새 탈환 작전은 후남조의 두 왕자를 살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카마쓰 가문 재흥의 핵심 조건이었던 신새 탈환에는 실패로 돌아갔다.[13][5]

2. 3. 신새 탈환 작전 (2차)

조로쿠 원년(1457년) 12월의 첫 번째 습격에서 아카마쓰 가문 잔당은 후남조의 두 왕자를 살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목표였던 신새의 탈환에는 실패했다.[5]

신새 탈환은 1458년 3월에 다시 시도되었다. 이때는 아카마쓰 측의 코데라 토에몬 뇨도(小寺藤兵衛入道일본어)가 중심이 되어 야마토 국의 구니진인 고치 이에에이(越智家栄일본어) 등의 협력을 얻어 마침내 신새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작전의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서는 사건 관련자인 우에츠키 미츠요시(上月満吉일본어)가 남긴 기록("호리 히데요 우에츠키 미츠요시 연서 주진장")이나 『아카마츠기』(赤松記일본어) 등 아카마쓰 측 사료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단지 小寺藤兵衛入道不思儀の了簡廻らし|코데라 토에몬 뇨도 후시기노 료켄 마와라시일본어(小寺藤兵衛入道、大和衆越知と申す者を頼み種々の謀を廻らし|코데라 토에몬 뇨도, 야마토슈 오치토 모스 모노오 타노미 슈주노 하카리고토오 메구라시일본어)와 같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우에츠키 미츠요시가 이 두 번째 계획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아 상세한 내용을 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알려지지 않은 작전의 일부는 고후쿠지의 벳토(別当, 사찰의 총책임자)였던 쿄가쿠(経覚일본어)의 일기 『쿄가쿠 시요쇼』(経覚私要鈔일본어)[6] 조로쿠 2년 4월 16일 자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신새는 카와카미 모코쇼(川上母公所일본어)에 맡겨졌다. 이때 오가와 히로미쓰(小川弘光일본어)가 이를 인지하고, 악당을 동원해 훔쳐냈다"라고 적혀 있다.[7] 역사학자 모리 시게아키(森茂暁일본어)는 이 기록에 등장하는 오가와 히로미쓰를 "호리 히데요 우에츠키 미츠요시 연서 주진장"에 언급된 오가와 나카츠카사쇼유(小河中務少輔일본어)와 동일 인물로 보고, 고치 이에에이와 마찬가지로 야마토 국의 구니진으로 추정했다.

신새를 확보한 오가와 히로미쓰는 여러 조건과 요구를 내걸어 막부를 곤란하게 만들었으나, 결국 같은 해(1458년) 8월 30일 신새는 교토로 돌아와 조정에 반환되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후남조 세력에게 넘어간 지 약 15년 만에 신새를 되찾아온 공적을 인정하여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을 허락했고, 아카마쓰 마사노리(赤松政則)에게 가독 상속을 인정했다. 또한 그 공훈으로 다음과 같은 영지가 주어졌다.

  • 가가 국 북부 절반의 슈고 직
  • 비젠 국 닛타 장(新田荘일본어)
  • 이세 국 다카미야 보(高宮保일본어)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과 영지 부여 과정에는 당시 막부의 실력자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가 적극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확인된다.[8] 이는 정적인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을 견제하기 위해 아카마쓰 가문을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2. 4. 결과

조로쿠 2년(1458년) 3월, 아카마쓰 측은 오데라 도베 뉴도(小寺藤兵衛入道)를 중심으로 야마토 국국인 오치 이에히데(越智家栄) 등의 협력을 얻어 마침내 신새(神璽)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신새는 이후 오가와 히로미쓰(小川弘光)가 여러 조건과 요구를 내걸며 막부를 잠시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같은 해 8월 30일 무사히 교토로 돌아와 조정에 반환되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후남조 세력에 의해 약 15년 동안 교토를 떠나 있던 신새를 되찾아온 공적을 인정하여,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을 허락하고 아카마쓰 마사노리에게 가독 상속을 인정하였다. 또한, 이 공로로 아카마쓰 가문은 가가 북반국(北半国)의 슈고직, 비젠국의 닛타 장(新田荘), 이세국의 다카미야호(高宮保)를 영지로 받았다.

아카마쓰 가문의 재흥과 영지 부여 과정에는 당시 막부의 유력자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적극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확인된다.[8] 이는 가키쓰의 난 이후 세력을 크게 확장한 야마나 소젠을 견제하기 위해 아카마쓰 가문을 끌어들이려는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조

[1] 서적 堀秀世上月満吉連署注進状 帝国学士院
[2] 서적 赤松記 塙保己一
[3] 서적 碧山日録 近藤瓶城
[4] 문서
[5] 문서
[6] 서적 経覚私要鈔 帝国学士院
[7] 문서
[8] 서적 蔭凉軒日録 仏書刊行会
[9] 서적 堀秀世上月満吉連署注進状 일본 제국학사원帝国学士院
[10] 서적 赤松記 塙保己一
[11] 서적 碧山日録 近藤瓶城
[12] 문서
[13] 문서
[14] 서적 経覚私要鈔 帝国学士院
[15] 문서
[16] 서적 蔭凉軒日録 仏書刊行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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