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마쓰 마사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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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1455년 아카마쓰 도키카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키쓰의 난으로 멸망한 아카마쓰 가문을 재흥시킨 인물이다. 조로쿠의 변을 통해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아 가가 반국의 슈고 다이묘가 되었으며, 오닌의 난을 거치며 하리마, 비젠, 미마사카를 탈환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1496년 종삼위에 서위되었으나, 그해 하리마에서 급사했다. 그는 아카마쓰 가문의 중흥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으며,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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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마쓰 마사노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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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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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무로마치 시대 후기 (센고쿠 시대) |
출생 | 교토쿠 4년 2월 19일 (1455년3월 7일) |
사망 | 메이오 5년 4월 25일 (1496년6월 6일) |
어릴 적 이름 | 지로호시마루 |
이름 | 마사노리 |
계명 | 쇼센인 무토 세이운 |
묘소 | 알 수 없음 |
관위 | 종3위, 병부소보, 좌경대부 |
막부 | 무로마치 막부사무라이도코로 두인, 가가 반국 슈고, 하리마・미마사카・비젠 슈고 (후에 야마시로 슈고 보임) |
주군 | 아시카가 요시마사 → 요시히사 → 요시타네 → 요시즈미 |
씨족 | 아카마쓰 씨 |
부모 | 아버지: 아카마쓰 도키카쓰 |
형제 | 알 수 없음 |
배우자 | 정실: 이세 사다치카의 딸? |
자녀 | 무라히데, 오메시도노 (아카마쓰 요시무라 정실) |
양자 | 요시무라, 사네요시 |
2. 생애
1455년 아카마쓰 미쓰스케의 조카 아카마쓰 도키카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카마쓰 가문은 1441년 가키쓰의 난으로 멸망했기 때문에, 아버지 도키카쓰와 마사노리는 교토 겐닌지에서 양육되었다.
1454년 일족 아카마쓰 노리나오가 하리마에서 거병했으나, 이듬해 야마나 소젠에게 토벌당했다. 마사노리가 태어난 지 7개월 후인 10월에 아버지 도키카쓰가 사망했고, 어머니 또한 일찍 사망하여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마사노리의 양육은 가신 우라가미 노리무네가 맡았다.
1458년 아카마쓰 가문의 옛 신하들의 노력으로 후남조의 행궁을 습격, 어새를 탈환한 공을 인정받아, 9월에 마사노리는 아카마쓰 가문의 가독 상속을 허락받았다. 그는 가가 반국의 슈고 다이묘로서 아카마쓰 가문을 재흥시켰다(조로쿠의 변). 가키쓰의 난 이후, 산명씨(山名氏)의 세력이 강대해져 막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자, 막부는 산명씨를 견제하기 위해 아카마쓰 가문을 재흥시키려 했다.[2]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아카마쓰 가문 재흥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이는 산명종전(山名宗全)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고 여겨진다.[3]
마사노리는 새로운 영지의 지배를 정비하기 위해 일족인 우노 우에노인을 비젠에 보냈지만, 비젠 슈고인 야마나 노리유키와 교전 상태가 되었다.[4] 또한 지방의 난바씨 등이 아카마쓰 가문에 협력한 것도 있어, 막부 권력과 지방 세력에 의지한 마사노리의 새로운 영지 입부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시작되었다.[4] 이세의 영지에 관해서는, 영지가 3곳으로 분산된 데다 원격지였기 때문에, 문정 원년(1466년), 마사노리는 막부에 가가 국내의 궐소지(闕所地)와의 교체(替地)를 청원하여 인정받았다.[5] 가가 입부에 관해서는 아카마쓰 가문과 전혀 무관한 데다 전 슈고인 도가시 씨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장록 3년(1459년) 10월 입부 당시 도가시 씨의 가신, 지방의 국인(国人)에 의한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5] 가가 지배는 어려움을 극복했지만, 엣추 슈고인 하타케야마 씨의 지원도 있어, 도가시 씨의 구신(旧臣)인 이와무로 씨의 저항을 받으면서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5] 마사노리의 가가 지배에 관해서는 관련 사료가 적기 때문에 불명확한 점이 많다.[6]
아카마쓰씨가 재흥하는 과정에서 특히 큰 공을 세운 것은 마사노리의 양육을 맡았던 우라카미 노리무네였다.[1] 1462년 10월, 교토에서 대규모 도잇키(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우라가미 노리무네를 중심으로 한 아카마쓰군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에 협력하여 진압에 공을 세웠고, 마사노리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상을 받았다. 1465년 11월, 야마시로 니시오카에서 도잇키가 일어나자, 우라가미 노리무네는 쿄고쿠씨에 협력하여 진압했다.[1] 같은 해 12월 26일, 마사노리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이름(政)을 받아 원복(성인식)을 치렀다.[2] 하리마에서는 아카마쓰 가문 재흥과 함께 아카마쓰 계열 낭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1465년 6월 12일 막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위험시하여 낭인들의 이름을 야마나 소젠에게 알리도록 명령했다.[3]
1467년 오닌의 난이 발발하자, 마사노리는 동군(호소카와 가쓰모토 측)에 가담하여 하리마, 미마사카, 비젠을 야마나 가문으로부터 탈환하였다. 하리마 탈환에는 아카마쓰 가문의 옛 신하, 낭인, 사찰,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협력했다.[2] 1471년 사무라이도코로의 수장인 도닌(頭人)에 임명되었다. 응인의 난 이후, 아카마쓰 가문 내부에서는 가독(家督)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고, 1468년 마사노리는 일족인 아리마 모토이에를 살해했다.[2] 모토이에는 아카마쓰 총령가(總領家)의 지위를 노리고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되었고, 이 사건으로 마사노리는 이후 내분에 시달리게 되었다.
1483년 (분메이 15년), 하리마를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한 마사노리는 산인 지방의 야마나 마사토요와 대립하게 되었다. 마사노리는 우라가미 노리무네에게서 후쿠오카 성 구원 요청을 받았지만, 야마나 가문의 본거지인 다지마 공격에 집착하여 마유미 고개에서 야마나 군에게 대패하고, 후쿠오카 성을 함락당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3] 이 실수로 우라가미 노리무네 등 중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마사노리는 사카이로 추방되었다.
1484년 (분메이 16년), 노리무네는 마사노리의 수호직과 가독을 박탈하고, 아리마 스미노리를 새로운 당주로 추대하려 했으나, 마사노리는 베쇼 노리하루의 도움을 받아 복귀하고,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중재로 노리무네와 화해했다.
1485년 (분메이 17년) 이후, 마사노리는 마유미 고개, 가케키 성, 가타시마, 에이가 등에서 야마나 군에게 연승을 거두었다. 1488년 (조로쿠 2년), 야마나 군은 하리마에서 철수했고, 마사노리는 하리마 등 3개국 지배를 확립하였다.
1493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메이오의 정변 직전의 정략결혼) 1496년 종삼위에 서위되었는데, 이는 쇼군 가문 이외의 무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明応일본어 5년(1496년) 4월 25일, 하리마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2세였다.[3] 종삼위에 오른 지 불과 두 달 만이었다.[3] 아들 무라히데(村秀)가 있었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일족인 시치조(七条) 가문에서 온 양자 요시무라(義村)가 가독을 이었다.[3] 마사노리는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매사냥을 나갔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숙박했던 절에서 급사했다고 전해진다.[3]
2. 1. 유소년기
1455년 아카마쓰 미쓰스케의 조카 아카마쓰 도키카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카마쓰 가문은 1441년 가키쓰의 난으로 멸망했기 때문에, 아버지 도키카쓰와 마사노리는 교토 겐닌지에서 양육되었다.1454년 일족 아카마쓰 노리나오가 하리마에서 거병했으나, 이듬해 야마나 소젠에게 토벌당했다.
마사노리가 태어난 지 7개월 후인 10월에 아버지 도키카쓰가 사망했다. 어머니 또한 일찍 사망하여, 마사노리는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마사노리의 양육은 가신 우라가미 노리무네가 맡았다.
2. 2. 조로쿠의 변과 아카마쓰 가문 재흥
1458년(조로쿠 2년), 아카마쓰 가문의 옛 신하들의 노력으로 후남조의 행궁을 습격, 어새를 탈환한 공을 인정받아, 9월에 마사노리는 아카마쓰 가문의 가독 상속을 허락받았다. 그는 가가 반국의 슈고 다이묘로서 아카마쓰 가문을 재흥시켰다(조로쿠의 변).가키쓰의 난 이후, 산명씨(山名氏)의 세력이 강대해져 막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자, 막부는 산명씨를 견제하기 위해 아카마쓰 가문을 재흥시키려 했다.[2]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아카마쓰 가문 재흥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이는 산명종전(山名宗全)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고 여겨진다.[3]
2. 3. 가가 반국 지배
마사노리는 새로운 영지의 지배를 정비하기 위해 일족인 우노 우에노인을 비젠에 보냈지만, 비젠 슈고인 야마나 노리유키와 교전 상태가 되었다.[4] 신다 쇼의 삼석, 후지노, 요시나가는 포함되는지 여부를 놓고 소송까지 일어났으나, 막부에서 기각되었다.[4] 또한 지방의 난바씨 등이 아카마쓰 가문에 협력한 것도 있어, 막부 권력과 지방 세력에 의지한 마사노리의 새로운 영지 입부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시작되었다.[4]이세의 영지에 관해서는, 영지가 3곳으로 분산된 데다 원격지였기 때문에, 문정 원년(1466년), 마사노리는 막부에 가가 국내의 궐소지(闕所地)와의 교체(替地)를 청원하여 인정받았다.[5] 가가 입부에 관해서는 아카마쓰 가문과 전혀 무관한 데다 전 슈고인 도가시 씨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장록 3년(1459년) 10월 입부 당시 도가시 씨의 가신, 지방의 국인(国人)에 의한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5] 가가 지배는 어려움을 극복했지만, 엣추 슈고인 하타케야마 씨의 지원도 있어, 도가시 씨의 구신(旧臣)인 이와무로 씨의 저항을 받으면서도 어쨌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5]
마사노리의 가가 지배에 관해서는 관련 사료가 적기 때문에 불명확한 점이 많다.[6] 슈고다이에는 고데라 가문이 임명되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5]
2. 4. 우라가미 가문의 대두와 하리마 탈환 운동
아카마쓰씨가 재흥하는 과정에서 특히 큰 공을 세운 것은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양육을 맡았던 우라카미 노리무네였다.[1] 우라가미씨는 가키쓰의 난 이전부터 아카마쓰 가문의 중신으로, 비젠 슈고다이나 슈고 직속의 부교인을 역임했다. 우라가미 노리무네는 단순한 슈고다이가 아니라 슈고 직속의 부교인으로서,[1] 즉 실무 관료로서 아카마쓰 가문 내에서 그 지위와 권세를 높여 갔다.1462년 10월, 교토에서 대규모 도잇키(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우라가미 노리무네를 중심으로 한 아카마쓰군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에 협력하여 진압에 공을 세웠다.[1] 그 공으로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로부터 상을 받았다. 1465년 11월, 야마시로 니시오카에서 도잇키가 일어나자, 우라가미 노리무네는 쿄고쿠씨에 협력하여 진압에 기여했다.[1] 같은 해 12월 26일,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이름(政)을 받아 원복(성인식)을 치렀다.[2]
아카마쓰 가문의 옛 본거지인 하리마에서는 아카마쓰 가문 재흥과 함께 아카마쓰 계열 낭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465년 6월 12일에는 막부가 이러한 움직임을 위험시하여 죄과를 불러올 것 같은 하리마 낭인들의 이름을 야마나 소젠에게 알리도록 명령할 정도였다.[3]
2. 5. 오닌의 난과 하리마 탈환
1467년 오닌의 난이 발발하자,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동군(호소카와 가쓰모토 측)에 가담했다. 마사노리는 하리마, 미마사카, 비젠을 야마나 가문으로부터 탈환하였다. 하리마 탈환에는 아카마쓰 가문의 옛 신하, 낭인, 사찰,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협력했다.[2] 1471년에는 사무라이도코로의 수장인 도닌(頭人)에 임명되었다.2. 6. 하리마 지배와 내분
응인의 난 이후, 아카마쓰 가문 내부에서는 가독(家督)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다. 1468년 마사노리는 일족인 아리마 모토이에를 살해했다.[2] 모토이에는 아카마쓰 총령가(總領家)의 지위를 노리고 마사노리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마사노리는 이후 내분에 시달리게 되었다.모토이에는 원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측근 중 한 명이었고, 실각 후에는 셋쓰 아리마 씨의 가독을 동족에게 빼앗겼다. 모토이에가 아시카가 요시미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모토이에 살해 후 요시미가 서군에 투항한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은 당시 권력 다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2]
2. 7. 야마나 마사토요와의 전투
1483년 (분메이 15년), 하리마를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한 마사노리는 산인 지방의 야마나 마사토요와 대립하게 되었다. 마사노리는 우라가미 노리무네에게서 후쿠오카 성 구원 요청을 받았지만, 야마나 가문의 본거지인 다지마 공격에 집착하여 마유미 고개에서 야마나 군에게 대패하고, 후쿠오카 성을 함락당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3] 이 실수로 인해 우라가미 노리무네 등 중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마사노리는 사카이로 추방되었다.1484년 (분메이 16년), 노리무네는 마사노리의 수호직과 가독을 박탈하고, 아리마 스미노리를 새로운 당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마사노리는 베쇼 노리하루의 도움을 받아 복귀하고,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중재로 노리무네와 화해했다.
1485년 (분메이 17년) 이후, 마사노리는 마유미 고개, 가케키 성, 가타시마, 에이가 등에서 야마나 군에게 연승을 거두었다. 1488년 (조로쿠 2년), 야마나 군은 하리마에서 철수했고, 마사노리는 하리마 등 3개국 지배를 확립하였다.
2. 8. 종삼위 서위
1493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메이오의 정변 직전의 정략결혼) 1496년 종삼위에 서위되었는데, 이는 쇼군 가문 이외의 무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2. 9. 최후
明応일본어 5년(1496년) 4월 25일, 하리마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2세였다.[3] 종삼위에 오른 지 불과 두 달 만이었다.[3]아들 무라히데(村秀)가 있었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일족인 시치조(七条) 가문에서 온 양자 요시무라(義村)가 가독을 이었다.[3]
마사노리는 원래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기분 전환 삼아 매사냥을 나갔다가 예상보다 병세가 악화되어 숙박했던 절에서 급사했다고 전해진다.[3] 마사노리가 승진 직후 급사하였기 때문에, 도보죠 와나가(東坊城和長)는 "마사노리가 신분에 맞지 않는 높은 벼슬을 하였기에 하늘의 벌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3]
3. 사후
마사노리가 급사하면서, 아카마쓰 가문은 후계자 문제를 겪었다. 서자 무라히데가 있었으나, 불과 4세였기 때문에 일족 시치조 가문에서 요시무라를 양자로 들여 가독을 잇게 했다.
마사노리가 급사하고 요시무라가 어렸기 때문에 아카마쓰 가문에서는 우라가미 가문과 벳쇼 가문 간의 권력 다툼이 발생했다.[1]
4. 인물·일화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쇼군가인 아시카가씨 이외의 무가로서는 처음으로 삼위에 오른 인물이다. 노와 사루가쿠를 장려하는 등 뛰어난 문화인이었으나, 사루가쿠 배우를 가신으로 삼으려 하여 가문 내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6] 다이묘로서는 드물게 도공으로서도 일류였으며, 명공 오사후네 무네미쓰(長船宗光)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후세에 몇몇 명도를 남겼는데, 그 대부분은 가신에게 하사하였다.[6] 와카와 렌가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5. 가계
- 아버지: 아카마쓰 도키카쓰
- 할아버지: 아카마쓰 요시마사
- 증조할아버지: 아카마쓰 요시노리 (아카마쓰 가문 제7대 당주)
- 정실: 이세 사다치카의 딸 (이름 미상)
- 딸: 고메시 (아카마쓰 요시무라의 정실)
- 계실: 도쇼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딸)
- 양자: 아카마쓰 요시무라 (아카마쓰 가문 제10대 당주, 시치죠 마사스케의 친아들)
- 양녀: 소메시 (요시무라의 정실)
- 측실: (이름 미상)
- 서자: 아카마쓰 무라히데 (우노 마사히데의 양자)
- 양자: 아카마쓰 신류
6. 편휘를 받은 인물
- 아카마쓰 노리사다
- 우라가미 노리나가
- 우라가미 노리무네 (노리나가의 동생)
- 우라가미 노리카게 (노리무네의 아들)
- 우라가미 노리쿠니 (노리무네의 아들 혹은 동생)
- 고데라 노리토키 (고데라 도요토키에서 개명)
- 구시바시 노리이 (노리타다, 1432년 ~ 1486년)
- 구시바시 노리타카 (노리이의 아들, 이가의 동생으로 여겨짐)
- 나카무라 노리히사 (미사쿠 슈고다이)
참조
[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2]
논문
「三魔」-足利義政初期における将軍近臣の動向
戒光祥出版
[3]
서적
2022
[4]
서적
2022
[5]
간행물
京都最古の禅寺 建仁寺
京都国立博物館
[6]
웹사이트
赤松政則刀
http://www.city.h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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