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선 축구 대표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선 축구 대표팀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한반도 최초의 축구 대표팀으로, 현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신이다. 전경성축구단은 1935년 천황배와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938년 전일본삼지방대항축구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 과정에서 차별을 겪으며, 선수단 파견이 좌절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은 미래의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청소년 대표팀으로, FIFA U-17 월드컵 8강 진출 3회, AFC U-17 아시안컵 우승 2회, 난징 청소년 올림픽 은메달 획득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B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B팀은 A팀의 일정과 겹치거나 2원화 상비군 체제 운영을 위해, 또는 국제 대회 참가를 위해 수시로 구성되었으며, AFC 아시안컵 3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참가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93년 이후 연령별 대표팀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조선 축구 대표팀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연맹조선축구협회
감독현정주
주장이영민, 김용식
홈 구장경성 운동장
기록
첫 국제 경기전경성축구단 4 - 1 만주국
(일본 평양; 1934년 6월 15일, 전만주국축구단초빙국제축구전)
최다 점수차 승리전경성축구단 6 - 0 나고야 고상
(일본 도쿄 ; 1935년 6월 2일, 1935년 전일본 축구 선수권대회)
지역 컵대회
지역 컵대회 이름전일본 축구 선수권대회
지역 컵대회 출전 횟수1회
첫 지역 컵대회 출전우승 1935년
지역 컵대회 최고 성적1위 1935년
메달 기록
메달 스포츠남자 축구
메달 경기전일본 축구 선수권대회
금메달일본|축구

2. 역사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에서는 매년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를 개최했는데, 식민지였던 조선은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축구 대표팀을 구성하게 되었다.[4][5] 이것이 한반도 최초의 축구 대표팀이자 현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조선 축구 대표팀의 시작이었다.[6]

초기 대표팀은 국가 대표라기보다는 지역 대표의 성격을 가졌으며,[7] 조선축구협회는 당시 경성부경성 축구단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 선수들을 일부 포함시킨 '''전(全)경성축구단'''을 결성하여 대회에 참가시켰다.[3][8]

전경성축구단 및 조선축구대표팀은 천황배 JFA 전일본 축구선수권대회메이지 신궁 경기대회 등 일본에서 열린 주요 대회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3][12] 이후에는 '''조선축구대표'''라는 이름으로 전일본삼지방대항축구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하기도 했으며,[31][33] 만주국과의 선만대항종합경기에도 출전하는 등[34]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동경유학생 축구단, 영국이탈리아 함대 축구단 등 국내외 팀들과의 경기도 가졌다.[18][20][28]

2. 1. 초기 역사

일본 제국에서는 매년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라는 축구 대회를 개최했으며, 이 대회는 당시 일제의 6개 지방 대표팀들이 참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3] 조선은 당시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한 지방으로 분류되어, '''조선 축구 대표팀'''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4][5] 이렇게 탄생한 조선 축구 대표팀은 한반도 최초의 축구 대표팀이자 현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신으로 여겨진다.[6] 이는 국가 대표팀이라기보다는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팀, 예를 들어 마드리드주 축구 대표팀과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7]

당시 조선축구협회는 여러 예선 과정을 거쳐 조선 최고의 선수들을 선발하여 '''최초의 조선 축구 대표팀'''을 구성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 측에서 갑작스럽게 소집된 대표팀 대신, 당시 경성부축구단이자 조선 축구 대회 우승팀이었던 경성 축구단을 조선 대표로 인정하며 이 팀 선수들 위주로 출전할 것을 요구했다.[8] 이에 조선축구협회는 원래 계획을 수정하여, 경성 축구단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고 보성전문, 연희전문, 평양 축구단 소속 선수들을 일부 포함시킨 '''전(全)경성축구단'''을 결성하게 되었다.[3]

훗날 1965년의 한 기사에서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지역대표로 참가한 조선축구 팀은 사실상 우리나라를 대표한 것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9]

2. 2.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천황배)

제15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김성간 선수가 슈팅하는 장면


제15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트로피 수여식 장면


부상 당한 채금석 선수를 제외한 16명의 선수들이 도쿄에 도착해[10] 경기를 준비했다.

전경성축구단은 대회 준결승전에서 일본의 니고야 상고를 6-0으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3] 결승 상대는 일본의 문리과 대학이었으며, 결승에서도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상대를 꺾고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총 전적은 12승 1패였다.[3] 이러한 뛰어난 활약 덕분에 일본에서 열린 대회임에도 당시 경기장의 관중 절반이 조선인들로 채워졌다.[3] 이후 대회의 우승배는 일본 본국이 아닌 조선으로 옮겨졌다.[11]

포지션선수
CF김성간
IF배종호, 김경한
WF박효제, 강기순
HB김병희, 김용식, 이유형
FB정용수, 박규정
GK이혜봉


2. 3. 메이지 신궁 경기 대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했던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에 전경성축구단이 조선 대표로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했다.[3] 이 대회에서 조선 대표팀은 중국 와호, 일본의 함관과 관서대학, 그리고 결승에서 게이오 BRB를 차례로 꺾으며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고, 영국 축구 협회에서 수여하는 우승배를 받았다.[12]

일본 잡지에 실린 결승전에서의 정용수 선수의 수비 장면


이 대회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 선수를 선발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에, 추기 대회와 이번 춘기 대회에서 연이어 우승한 조선팀의 올림픽 본선 진출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13] 그러나 이 대회 우승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는 논란이 있었다.[3]

2. 3. 1. 올림픽 선발 과정에서의 차별과 좌절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했던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에서 전경성축구단은 조선 대표로 출전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첫 상대인 중국 와호를 6-2로 대파하고, 이어서 일본의 함관과 관서대학을 각각 2-1, 2-0으로 꺾었다. 결승에서는 일본의 강팀 게이오 BRB마저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며, 영국 축구 협회가 수여하는 우승배를 들어 올렸다.[3][12]

우승 후, 특히 결승전에서 맹활약한 정용수 선수는 경성부로 돌아와 "이 정도면 올림픽에도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술을 사기도 했다.[3] 당시 언론 역시 일본 축구 협회추기 대회춘기 대회 성적을 올림픽 선수 선발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공언한 점, 그리고 두 대회 모두 조선 팀이 우승했다는 점을 들어 "조선튐이 대표로 세계 올림픽에 출장치 안흐면 아니될 형편이다"라고 보도하며 조선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13]

조선으로 돌아온 전경성축구단 선수단은 부산에서 부산체육회 간부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선수들은 자동차를 타고 부산도매시장에서 열린 환영회에 참석하여 부산체육회장의 환영사와 대회 결과 보고, 환담 등을 나누며 우승을 축하받았다.[14] 환영식 후에는 주장 이영민 선수가 주심을 맡아 부산 축구단과 친선 경기를 갖기도 했다.[15]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환대에도 불구하고, 1936년 3월 10일 발표된 올림픽 축구 대표팀 1차 후보 명단 25명에는 우승팀인 전경성축구단 소속 선수 중 김용식과 김영근 단 두 명만이 포함되는 결과가 나왔다.[16] 이는 일본 축구 협회가 스스로 내세웠던 선발 방침, 즉 전일본 축구 선수권대회메이지 신궁 경기대회 성적을 기준으로 한다는 원칙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다. 두 주요 대회를 모두 제패한 조선 팀에서 고작 두 명만 선발된 것은 명백한 차별이었다.[16]

더욱이 일본 축구 협회는 선수 선발 소식을 소속팀인 전경성축구단이나 조선축구협회가 아닌 선수 개인에게 직접 통보하는 방식을 택했다. 우승팀임에도 선수 선발 소식을 개인에게 통보한 것은 불공정할 뿐 아니라 팀을 경시하는 처사라며, 관계자는 일본 축구 협회의 이러한 행태를 언론에 폭로했다.[16] 전경성축구단 역시 긴급 이사회를 열어 이러한 차별적인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며 선수들을 베를린 올림픽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고, 조선축구협회를 통해 일본 축구 협회에 공식적으로 강력히 항의했다.[16]

하지만 조선 측의 정당한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최종적으로 조선 선수 중에서는 김용식 선수 한 명만이 올림픽 대표팀에 포함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조선 축구계와 선수들에게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준 사건이었다.[17]

2. 4. 기타 경기

1936년 8월, 조선축구협회가 주최하는 영국 함대 HMS ''Dorsetshire'' 축구단과 전경성선발팀과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으나[18] 강우로 인해 취소되었다.[19]

동경유학생 축구단이 조선으로 돌아오자 조선축구협회는 전경성축구단을 소집해 환영 축구 경기를 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진행된 경기였고 연습 부족으로 인해 2:6으로 패배했는데,[20] 이는 조선 대표팀의 첫 패배이자 현재 남아 있는 경기 기록 중 유일한 패배 기록이다.

조선축구협회는 대외 진출을 위해 중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 간부들과 상의하여 친선 경기를 약속했다. 이를 위해 조선의 최고 선수들을 모아 조선축구선발군을 소집할 예정이었으나[21] 이후 경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조선 대표팀이 우승한 후, 게이오 대학 축구부는 해당 대회에서 2회 연속 우승과 마지막 대회 준우승을 기록했다.[22] 이후 해외 원정으로 만주에서 치른 세 경기에서 20골을 넣고 단 1실점만 기록하며 모두 승리한 뒤,[23] 원정 마지막 상대로 조선축구협회의 초청을 받아 전경성축구단과 경기를 가졌다. 일본 본토 팀이 조선에 와서 경기를 치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게이오 대학은 조선을 방문한 세 번째 일본 본토 팀이었다.[22] 당시 게이오 대학의 니노미야(二宮) 선수와 하리마(播磨) 선수의 콤비는 유명했고,[24] 언론에서는 이 팀을 '축구계 패자'라고 평가했다.[22] 조선축구협회는 동경유학생 축구단과 경기할 OB팀을 선발하는 동시에, 게이오 대학과 경기할 팀으로 전연희전문학교와 전보성전문학교 선수들을 혼합하여 전경성축구단을 구성했다.[25][24] 당시 화제의 팀이었던 게이오 대학과의 경기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4,000명에서 5,000명에 달하는 관중이 모였다. 만약 게이오 대학이 이 경기에서 승리했다면, 일본 본토 축구팀으로서 원정 경기를 모두 이긴 최초의 팀이 될 예정이었다.[26] 하지만 전경성선발팀은 게이오 대학과 무승부를 기록하며 게이오의 연승 기록을 저지했고, 당시 기사에서는 이를 '축구계의 획기적 기록'이라고 평가했다.[27]

1938년 8월, 조선축구협회는 인천에 도착한 이탈리아 극동함대 소속 순양함 Raimondo Montecuccoli|라이몬도 몬테쿠콜리ita 호의 방문을 계기로 이탈리아 함대 축구단과 '일이친선국제축구전'이라는 이름의 경기를 열었다.[28] 이 경기는 5,000여 명의 관중 속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경기는 이탈리아 함대팀의 연습 부족으로 인해 일방적인 양상, 소위 '반코트 경기'[29]로 진행되었으며, 전경성선발팀이 13:0이라는 큰 점수 차로 승리했다. 경기 후 조선축구협회는 이탈리아 팀에게 기념품을 증정하였고, 당시 이탈리아 팀의 파티-스 감독은 조선 팀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30]

우리가 조선튐과 대전하기는처음인만치 큰 기대를가지고 응전 하였는데 조선튐은 예상이상의 강튐이였섯다 민활한 ''댓슈''와 강한 ''슈ㅅ튕'' 은 금년에도 세계선수권을 차지한우리나라 최강튐에 비하야 손색이 업다고생각한다 우리는 항상해상생활을 해기때문에 연습이업서서 오늘 참패를하얏스나 승부초월하야 이가티 스포–츠를 통하야 ''엔조이'' 하는것을유쾌하게 생각한다 더욱이 고국에도라가서도 조선축구계가 이가티 강하다는것을것을 전하겠다

2. 5. 전일본삼지방대항축구대회

일제 강점기에 열린 제1회 전일본삼지방대항축구대회 全日本三地方對抗蹴球일본어에 조선 대표팀이 소집되었다. 선수 선발은 3지방대항축구전의 성적을 참고하였다. 이때부터 전경성축구단과 조선축구대표를 혼용하지 않고 '''조선축구대표'''라는 이름만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31]

이 대회에서 조선 대표팀은 일본의 올림픽 대표 선수들이 여럿 포함된 관서 대표와 관동 대표를 상대했다.[32] 특히 결승전에서는 관동 대표를 3대 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일본 본토에서 열린 축구 대회에서 다시 한번 정상에 서는 쾌거를 이루었다.[33]

대회에서 우승한 조선 대표팀 선수들


단체 사진

2. 6. 선만대항종합경기

조선과 만주국이 여러 스포츠 종목에서 겨루는 대회인 선만대항종합경기가 열렸으며, 축구 종목도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축구 대표팀은 만주국 대표팀과 경기를 치렀다.[34] 1938년에 열린 이 대회에서는 조선이 총 8개 종목에서, 만주국이 5개 종목에서 우승하였다. 축구 경기는 3대 3 무승부로 끝났다.[35]

조선 축구 대표팀과의 경기에 참가한 만주국 대표 선수들

3. 의미와 평가

비록 국제 축구 연맹`(FIFA)`에 가입되지 않아 FIFA가 주관하는 공식 경기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일본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 속에서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대표팀을 구성하여 활동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당시 식민 지배를 하던 일본 제국의 주요 축구 대회 3곳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것은 민족의 자긍심을 크게 높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해방 이후, 조선 축구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선수들 다수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초기 멤버로 활동했기 때문에, 조선 축구 대표팀은 현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실질적인 전신으로 여겨진다.

4. 명칭

일본 제국은 매년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를 개최했으며, 이 대회에는 당시 일제의 6개 지방 대표팀이 참가했다.[3] 조선 역시 일제의 한 지방으로 분류되어 '''조선 축구 대표팀'''으로서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4][5] 이렇게 탄생한 조선 축구 대표팀은 한반도 최초의 축구 대표팀이자 현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신으로 여겨진다.[6] 이는 국가 단위가 아닌 지역 대표팀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마드리드주 축구 대표팀과 유사하다.[7]

당시 조선축구협회는 예선 등을 거쳐 조선 최고의 선수들을 선발하여 '''최초의 조선 축구 대표팀'''을 구성하려 했다. 하지만 일제 측은 갑작스럽게 소집된 대표팀 대신, 당시 경성부축구단이자 조선 축구 대회 우승팀인 경성 축구단을 조선 대표로 인정하며 이들만으로 출전할 것을 요구했다.[8] 이에 조선축구협회는 계획을 변경하여 경성 축구단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고 보성전문, 연희전문, 평양 축구단 선수들을 보강하여 조선 대표팀인 '''전(全)경성축구단'''을 결성했다.[3] 훗날 1965년의 한 기사에서는 "지역대표로 참가한 조선축구 팀은 사실상 우리나라를 대표한 것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9]

'전(全)경성축구단'이라는 명칭에서 온전할 전(全) 자는 '전체'를 의미하는 한자이다. 이 명칭은 조선 대표팀으로 전경성축구단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경성 축구단이나 그 창단 전부터 경성 전체를 대표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38] '전경성축구단'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출전 1년 전인 1934년, 조선축구협회 주최로 열린 만주국과의 경기부터이다. 다만 이 당시의 전경성축구단이 조선축구협회가 선발한 대표팀인지, 단순히 경성 축구단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2] 같은 해 조선축구협회 주최로 열린 동경유학생 축구단과의 경기에서도 전경성축구단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39]

일각에서는 이 시기의 전경성축구단과 일제의 요구로 경성 축구단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표팀으로서의 전경성축구단을 별개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전경성축구단을 단순한 경성 축구단과는 다른 선발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 같은 해 경평대항축구전에 참가한 팀은 '전경성축구단'이 아닌 평범하게 '''경성 축구단'''으로 불렸다.[40]
  • 선발팀 편성 전인 4월, 전경성축구단이 중국 상해의 동화군과 경기할 때 '''전경성선발군'''이라고 소개되었다.[41]
  • 전경성축구단이 만주국을 4대 1로 이긴 경기에 대해, 이후 조선만주국의 대회인 선만대항종합경기 기록에서 제1회는 조선이 4대 1로 이겼다고 기록했다.[35]


한편, 전경성축구단은 일제의 대회 원칙상 경성 축구단의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경성 축구단이라는 이름 그대로 불리기도 했다.[16]

이후 선발된 대표팀은 전경성축구단과 조선축구대표라는 명칭을 혼용하지 않고, 점차 '''조선축구대표'''라는 이름만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31]

5. 경기 결과

승리무승부패배경기 취소


5. 1. 1935년

부상 당한 채금석 선수를 제외한 16명의 선수들이 도쿄에 도착해[10] 제15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를 준비했다.

전경성축구단은 대회 준결승전에서 일본의 니고야 상고를 6-0으로 대파하며 결승에 진출했다.[3] 결승 상대는 일본의 문리과 대학이었고, 결승전에서도 6-0이라는 압도적인 실력 차로 승리하며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총 전적은 12득점 1실점이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일본에서 열린 대회였음에도 당시 경기장의 관중 절반이 조선인들로 채워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3] 대회 우승배는 일본 본국이 아닌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11]

'''당시 선수 명단'''

포지션선수
CF김성간
IF배종호, 김경한
WF박효제, 강기순
HB김병희, 김용식, 이유형
FB정용수, 박규정
GK이혜봉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했던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에서도 전경성축구단이 조선 대표로 출전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대회 첫 상대로 중국 와호를 6-2로 이겼고, 이후 일본의 함관을 2-1, 관서대학을 2-0으로 꺾었다.[3] 결승에서는 일본의 강팀 게이오 BRB마저 2-0으로 누르고[44] 우승하며 두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었고,[3] 영국 축구 협회에서 수여한 우승배를 들었다.[12]

연이은 우승 이후, 결승전에서 활약한 정용수 선수는 경성부에 돌아와 "이 정도 반응이면 올림픽에도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술을 사는 등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3] 당시 언론 역시 두 대회(전일본 축구 선수권대회메이지 신궁 경기대회) 모두 조선이 우승했고 선수들에 대한 호평이 많았기에 '조선튐이 대표로 세계 올림픽에 출장치 안흐면 아니될 형편이다.'라고 보도하며 올림픽 출전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13] 하지만 이러한 압도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실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조선 선수 중 김용식 단 한 명만이 선발되는 데 그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3]

'''주요 경기 결과'''

날짜대회라운드상대팀결과장소비고
1935년 6월 2일제15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준결승名古屋 商高|나고야 상고jpn6–0 승[3]메이지신궁 경기장, 도쿄
1935년 6월 2일제15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결승文理科 大学|문리과 대학jpn6–0 승[3][42]메이지신궁 경기장, 도쿄김성간 (3골), 최성손 (2골), 배종호 (1골)[43]
1935년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예선瓦湖|와호zho6–2 승[3]일본 제국
1935년 11월 2일메이지 신궁 경기대회?函館|함관jpn2–1 승[3][44][45]호산 학교 운동장, 일본 제국
1935년 11월 3일메이지 신궁 경기대회결승慶應 BRB|게이오 BRBjpn2–0 승[3][44]신궁 외원 경기장, 일본 제국최성손 (1골), 김영근 (1골)[46]


5. 2. 1936년

1936년 8월, 조선축구협회가 주최하는 영국의 영국함대(HMS Dorsetshire) 축구단과 전경성선발팀과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18] 하지만 강우로 인해 취소되었다.[19][47] 이 경기는 일본 제국 경성부에 위치한 신궁 외원 경기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5. 3. 1937년

1937년 전경성축구단 경기 결과
날짜장소상대팀점수 (전경성 vs 상대)결과득점자 (전경성)비고
1937년중국 상해중국? – ??[21]
1937년 7월 23일일본 제국 경성부 경성 운동장동경유학생 축구단2 – 6이봉호 (3), 이영민 (74)심판: 권정규[48][49]


5. 4. 1938년

1938년 8월, 조선축구협회는 인천에 입항한 이탈리아 극동함대 소속 순양함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호의 축구단과 '일이친선국제축구전'이라는 이름의 경기를 주선했다.[28] 경성 운동장에서 열린 이 경기는 5,000여 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경기는 연습이 부족했던 이탈리아 함대팀을 상대로 전경성선발팀이 일방적으로 경기를 주도하며 13:1이라는 큰 점수 차로 승리했다.[30] 경기 후 이탈리아 팀의 파티-스 감독은 "조선팀은 강하다"고 평가하며 조선 축구의 수준을 인정했다.[30]

같은 해, 일제강점기 하에서 일본 본토에서 열린 제1회 전일본삼지방대항축구대회에 조선 대표팀이 참가했다. 3지방대항축구전의 성적을 바탕으로 선수들이 선발되었으며, 이때부터 '전경성축구단'과 혼용되던 명칭 대신 '조선축구대표'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31] 이 대회에서 조선 대표팀은 일본 올림픽 대표 선수들이 여럿 포함된 관서 대표팀과 관동 대표팀을[32] 차례로 꺾었다. 특히 결승전에서는 관동 대표팀을 3:0으로 완파하며 우승을 차지해, 일본 본토에서 열린 축구 대회에서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33]

또한, 조선과 만주국 간의 종합 스포츠 교류전인 선만대항종합경기에도 축구 종목이 포함되어 만주국 대표팀과 경기를 가졌다.[34] 1938년 8월 20일 경성 운동장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조선 대표팀은 만주국 대표팀과 3:3으로 무승부를 기록했다.[35]

날짜대회상대팀장소결과비고
1938년 8월 12일일이친선국제축구전이탈리아 극동함대경성 운동장13:1 승전경성선발팀 명의[30]
1938년 8월 20일제2회 선만대항종합경기만주국경성 운동장3:3 무[35]
1938년1938년 전일본삼지방대항축구대회 준결승일본 관서 대표도쿄3:1 승[50][51]
1938년1938년 전일본삼지방대항축구대회 결승일본 관동 대표도쿄3:0 승우승[33][51]


6. 선수 명단

조선 축구 대표팀의 선수 명단은 조선 축구 대표팀 선수 명단 문서를 참고하라.

7. 대회 기록

대회우승 횟수우승 연도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1회1935[52]
메이지신궁 경기대회1회1935[53]
전일본삼지방대항축구대회1회1938


참조

[1] 문서 '명칭' 문단 참고
[2] 뉴스 4... 1 전경성틤에 전만주국패북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4-06-15
[3] 뉴스 경성축구단, 일제강점기 일왕배를 제패하다 https://storyfunding[...] storyfunding 2023-07-15
[4] 뉴스 조선대표의 축구진용 십칠명 픽업 편성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5-05-18
[5] 뉴스 세계올림픽 축구예선에 조선대표튐 편성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5-10-10
[6] 뉴스 "[서형욱] '한반도 더비' 경평 축구의 부활을 꿈꾸며" https://n.news.naver[...] 서형욱 칼럼 2018-04-30
[7] 문서 마드리드 팀은 실제로 스페인 국가대표팀 대신 여러 국제대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차이점은 존재한다
[8] 뉴스 일본종합축구에 경축만 출장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5-05-25
[9] 뉴스 한국축구 70 연 11 해외원정 상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65-03-10
[10] 뉴스 경성축구단동경에 일팔일노소미로 출발예정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5-05-25
[11] 뉴스 종합축구결승에 경축팀 우승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5-06-04
[12] 뉴스 결승에 강적분쇄 경성축구우승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5-11-04
[13] 뉴스 세계올림픽 축구에 조선선수 전형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5-12-05
[14] 뉴스 경축 환영회 작야 부산서 개최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5-11-07
[15] 뉴스 경축 환영축구 부산서 성황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5-11-08
[16] 뉴스 일본 축구협회의 대표선발불공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5-03-20
[17] 뉴스 축구 실력 전형할 호자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6-07-30
[18] 뉴스 영함축구튐 전경성과 일전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6-08-04
[19] 뉴스 강우로 영함축구 중지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6-08-05
[20] 뉴스 유학생축구대승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7-07-24
[21] 뉴스 조선축구선발군 상해 항항에 원정개화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6-06-15
[22] 뉴스 축구계패자 경응군을마즈며 고봉오기 혼연한 팀웍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8-08-09
[23] 뉴스 만주원정중의 경응축구삼승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8-08-07
[24] 뉴스 경승대전경성 축구전예상기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8-08-11
[25] 뉴스 경응과 대항할 전경성축구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8-07-31
[26] 뉴스 경대대경성축구 예상기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8-08-11
[27] 뉴스 경승대전경성 열전 무승부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8-08-12
[28] 뉴스 이함대축구전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8-08-11
[29] 문서 당시 기사에서는 '원싸이드께임'이라고 표현했다.
[30] 뉴스 전경성군에게 이태리튐 참패 일이교환축구성황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8-08-13
[31] 뉴스 조선축구대표 근일발표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8-11-16
[32] 뉴스 관동관서격파코 조선국 축구제패!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8-12-27
[33] 뉴스 억센 조선의 기개와 용맹! 전일본축구정복 3대0으로 관동패퇴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8-12-27
[34] 뉴스 만주대도전축구예상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9-08-18
[35] 뉴스 조선팔종목제패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9-08-22
[36] 뉴스 삼지역축구에 출장할 조선대표 결정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9-11-15
[37] 뉴스 삼지역전출장금지는 어긋난 가혹한 처벌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9-12-02
[38] 뉴스 대전경성축구 평양설욕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3-09-23
[39] 뉴스 유학생환영축구 경성승첩 일대영접전으로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4-07-22
[40] 뉴스 제이회춘기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4-03-28
[41] 뉴스 동화군을 격퇴한 전경성군의 수훈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5-04-23
[42] 뉴스 경축우승까지 제패전황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5-06-06
[43] 뉴스 압도적우세리에 경축수제패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5-06-04
[44] 뉴스 경성축구 또 쾌승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5-11-03
[45] 뉴스 경축신승 해북도대표전에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5-11-03
[46] 뉴스 고향에 호 선물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5-11-05
[47] 뉴스 영함축구튐 전경성과 일전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6-08-04
[48] 뉴스 전경성축구진용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37-07-23
[49] 뉴스 유학생축구대승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7-07-24
[50] 뉴스 전일본삼지방대항축구대회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8-11-19
[51] 뉴스 관동관서격파코 조선국 축구제패!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8-12-27
[52] 기사 경성축구단 천황배 전일본축구대회 우승 관련 기사 http://ikfhs.tistory[...]
[53] 웹인용 경성축구단 메이지신궁 경기대회 우승 관련 기사 http://ikfhs.tistory[...] 2022-01-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