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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재 (교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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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희재는 남편 박기홍과 함께 근검절약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자립 정신을 실천한 교육인이다.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민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947년 장형과의 협력으로 순수 민족 자본을 기반으로 한 단국대학교 설립에 헌신했다. 조희재는 대학 설립인가를 받은 후 이틀 만에 별세했으며, 민족애와 조국애를 바탕으로 한 단국대학교 설립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2. 생애

혜당(惠堂) 조희재(趙喜在) 여사


혜당(惠堂) 조희재(趙喜在)는 남편 박기홍과 함께 근검절약과 자립정신으로 재산을 모았다. 남편 박기홍은 서울 중구 장교동에서 장훈학교를 운영하며 윤치호 등과 함께 육영사업을 펼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희재는 남편의 유지를 이어 광복을 기다렸다.

광복 후, 조희재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통한 국가 발전을 염원하며 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항일운동 과정에서 신의를 쌓은 장형과 뜻을 모으고, 자신의 사재를 기꺼이 내놓아 단국대학교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다.[1] 대학 설립의 기본 정신은 민족애조국애에 두었으며, 이는 단군(檀君)과 애국(愛國)을 합친 '단국대학'이라는 교명에 반영되었다.

1947년 11월 1일 단국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으나, 병환 중이던 조희재는 인가 이틀 뒤인 1947년 11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대학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지는 외동딸 박정숙과 외손자 이용우에게 이어졌다.[2]

2. 1. 독립운동 지원과 장형과의 인연

조희재는 남편 박기홍과 함께 근검절약과 자립정신으로 재산을 모았다. 박기홍은 서울시 중구 장교동에서 장훈학교를 운영하며 윤치호 등과 함께 교육 사업에 힘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희재는 남편의 유지를 잊지 않고 광복을 기다렸다.

조희재는 항일운동가 장형과 오랜 친구이자 지사적(志士的) 신의를 나눈 사이였다. 그녀는 장형에게 오랫동안 항일운동 자금을 지원하며 굳건한 인연을 맺었다.

광복이 되자 조희재는 세상을 떠난 남편 박기홍의 뜻을 이어받아 대학 설립을 결심했다. 교육이 나라의 기본을 세우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며 교류했던 장형과의 신의를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사재인 토지 80만평(1953년 당시 1억환 가치)을 기꺼이 내놓아 재단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다.[1]

특히 조희재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대학 설립의 기본 정신을 민족애와 조국애에 두었다. 이러한 정신은 대학의 이름에도 반영되어, '단군(檀君)'과 '애국(愛國)'이라는 말을 합쳐 단국대학이라는 교명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7년 11월 1일, 단국대학 설립 인가를 받은 지 이틀 뒤인 1947년 11월 3일, 조희재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대학장으로 치러졌다. 그녀의 뒤를 이어 외동딸인 박정숙(학교법인 단국대학 제2대, 4대 이사장)과 외손자 이용우(제5대 이사장, 제12대 총장)가 단국대학교를 이끌었다.[2]

2. 2. 단국대학교 설립

조희재는 남편 박기홍과 함께 평소 근검절약과 자립정신으로 가산을 일구었다. 남편 박기홍은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에 있던 장훈학교를 운영하며 윤치호 등을 도와 육영사업을 펼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희재는 남편의 유지를 잊지 않고 광복을 기다렸다.

광복 후, 조희재는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교육이 인간을 완성하고 나라의 기본을 세우는 데 중요하다고 여겨, 순수 민족 자본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 지원 과정에서 교분을 맺어온 범정(梵亭) 장형(張炯)과의 신의를 바탕으로 사재인 토지 80만평(1953년 당시 1억환 가치)을 기꺼이 내놓아 재단 설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1] 장형은 조희재 부부와 항일운동을 함께하며 자금을 조달하는 등 오랜 기간 굳건한 신의를 쌓아온 친구였다.

특히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남편 박기홍의 유지를 받들어, 조희재는 대학 설립의 기본 정신을 민족애와 조국애에 두었다. 이러한 정신은 '단군(檀君)'과 '애국(愛國)'이라는 단어를 합쳐 대학 이름을 '단국대학'으로 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7년 11월 1일, 단국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으나, 당시 병환 중이던 조희재는 인가 이틀 후인 1947년 11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대학장으로 치러졌다. 조희재 사후에는 외동딸인 아정(雅庭) 박정숙(학교법인 단국대학 제2대, 4대 이사장)과 외손자인 이용우(제5대 이사장, 제12대 총장)가 그 뜻을 이어 학교 발전에 기여했다.[2]

2. 3. 단국대학교 설립 정신

광복 후 조희재는 남편 박기홍의 유지를 이어받아 교육이 인간을 완성하고 나라의 기본을 세우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순수 민족 자본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며 교분을 쌓았던 장형과의 신의를 바탕으로 자신의 사재를 기부하여 재단 설립의 기반을 마련했다.[1]

특히 대학 설립의 기본 정신을 민족애조국애에 두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대학의 이름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檀君한국어)과 나라 사랑을 의미하는 애국(愛國한국어)이라는 두 단어를 합하여 단국대학으로 결정되었다.

2. 4. 별세

당시 병환중이었던 혜당은 1947년 11월 1일 대학 설립인가를 받은 이틀 후 1947년 11월 3일에 끝내 유명을 달리하였다. 장례는 대학장으로 치러졌다. 혜당이 세상을 떠난 후 무남독녀였던 아정(雅庭) 박정숙(朴正淑, 학교법인 단국대학의 2대, 4대 이사장)과 외손자인 이용우(李庸友, 5대 이사장, 12대 총장)가 뒤를 이었다.[2]

3. 단국대학교 설립의 배경과 의의

단국대학교의 설립은 독립운동,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의 독립정신 계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설립자인 범정 장형독립운동가로서, 일제강점기 서간도와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만주 지역 독립군과 연계하여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가 추진한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신익희와 함께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3]

1947년 신익희임시정부김구 노선을 떠나자, 장형은 이를 임시정부김구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고 국민대학과 결별하였다. 그는 임시정부김구의 독립정신을 올곧게 계승하는 새로운 대학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가 박기홍의 부인인 혜당 조희재 여사가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대학 설립을 위해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기꺼이 내놓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4] 장형은 이를 기반으로 1947년 11월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다.[3]

'단국'이라는 교명은 당시 임시정부김구가 추진하던 통일국가 수립을 지지하며 남북통일에 기여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장도빈, 안호상, 안재홍 등과의 논의를 통해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하며,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인식하에 단군의 건국 정신을 기리자는 의미를 더해 '단국'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단순히 단군을 기리는 것을 넘어, 남북통일과 통일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3][5]

단국대학교는 설립 배경과 과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뚜렷한 정체성과 의의를 지닌다.[3]

3. 1. 민립대학설립운동과의 연관성

일제강점기였던 1922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교육령에 따라 관립 경성제국대학 설립이 추진되자, 이에 대응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민족 교육과 민족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는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전개했다.[3]

1922년 11월, 이상재, 현상윤, 한용운, 이승훈, 허헌, 송진우, 장덕수, 이갑성, 남궁훈, 홍덕유 등 각계 인사들은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했다. 1923년 3월 29일에는 발기인 1,170명 중 460여 명의 대표가 모여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한 민족의 지식욕을 충족시킬 만한 대학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이므로 민립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사업계획을 통과시켰다. 이후 안동, 논산 등에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으나,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광복이 되기까지 민립대학 설립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3]

광복 후, 독립운동 세력은 대학 설립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환국 후 국내에서 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임시정부는 내무부 산하 행정연구위원회에 대학 설립을 맡겼고, 내무부장이었던 신익희가 책임을 지고 '국민의 대학' 설립을 목표로 대학 설립기성회를 조직했다. 기성회는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을 고문으로, 외무부장 조소앙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으며, 회장은 신익희가 맡았다. 국내 교육, 법조, 행정, 언론 등 각계 인사 40명으로 이사진을 구성했는데, 독립운동가였던 장형도 이사로 참여했다.[3]

대학 설립 실무는 회장 신익희와 이사 장형이 주도했다. 그러나 5천만원의 설립 기금 모집 계획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때 장형은 독립운동 시절 동지였던 박기홍의 부인 조희재로부터 5만 평의 토지를 기증받아 이를 기본 재산으로 하여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 임시 기성회가 발족할 수 있었다.[3] 하지만 이후 국민대학 측 기록에는 조희재의 토지 기증 문제나 장형의 재단 설립 기여 활동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당시 상황과 관련된 기록을 찾기 어렵다. 이는 당시 관련 인물들 간의 감정적 갈등이 상당했음을 시사한다.[3]

장형신익희임시정부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 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이를 김구와 임시정부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다. 장형은 국민대학이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국민대학과 결별하고,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새로운 대학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것이 단국대학교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3]

장형은 국민대학 재단 이사장을 사임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인연이 있는 조희재 여사와 뜻을 모았다. 조희재 여사는 남편 박기홍의 유지를 받들어 대학 설립에 적극 찬성하며 자신이 소유한 2640000m2(약 80만 평, 당시 가치 1억 환 상당)의 토지를 기꺼이 내놓았다.[4] 장형은 이 토지를 기반으로 1947년 9월 15일 재단법인 단국대학 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같은 해 11월 1일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광복 후 최초의 정규 4년제 사립대학인 단국대학교를 설립했다.[3][4]

단국대학교 설립 당시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구, 설립자 장형. 뒷줄 왼쪽부터 장도빈, 설립자 조희재의 장녀 박정숙. (개교일: 1947년 11월 3일)


이처럼 단국대학교의 설립은 일제강점기 민족 교육을 염원하며 추진되었으나 좌절되었던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정신과 맞닿아 있으며, 특히 독립운동가였던 장형독립운동가의 유족인 조희재 여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3. 2.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

광복 후 임시정부는 환국 직후 국내에서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 행정연구위원회에서 대학 설립을 맡았으며, 내무부장 신익희가 책임을 지고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을 고문으로, 외무부장 조소앙을 명예회장으로 하는 대학 설립기성회를 조직했다. 독립운동가였던 장형은 이사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기성회는 대학 설립 기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장형독립운동 시절 동지였던 박기홍의 부인 조희재로부터 토지 5만 평을 기증받았고, 이를 기본 재산으로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 임시 기성회가 발족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국민대학 측 자료에는 조희재의 토지 기증과 장형의 기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당시 상황과 관련된 입장 차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장형신익희임시정부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한국민주당 측에 합류하자 이를 임시정부김구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고 국민대학과 결별하였다. 그는 임시정부김구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 설립을 결심했다.

조희재는 남편 박기홍의 유지를 받들어 장형의 새로운 대학 설립 계획에 찬성하며, 자신이 소유한 토지 2640000m2 (약 80만 평, 당시 가치 1억 환 상당)를 기부했다.[4] 이 기부를 바탕으로 장형1947년 11월 1일 임시정부김구의 정신을 잇는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다.

3. 3. 신익희와의 갈등과 단국대학교 설립



장형은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한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신익희와 함께 국민대학 설립을 주도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환국 직후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내무부장 신익희 책임 하에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대학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장형은 이 기성회에 독립운동가로서 참여하여 신익희와 함께 실무를 이끌었다.

그러나 1947년 신익희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를 떠나 이승만 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장형은 이를 임시정부김구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장형국민대학이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별하고, 임시정부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새로운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때 독립운동 시절 동지였던 박기홍의 부인 조희재 여사가 장형의 뜻에 동참하였다. 조희재는 남편 박기홍의 유지를 받들어 대학 설립을 위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2640000m2(약 80만 평)을 기증하였다.[4] 이 토지는 단국대학교 설립의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장형은 이 토지를 기반으로 1947년 9월 15일 재단법인 단국대학 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같은 해 11월 1일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광복 후 최초의 정규 4년제 대학인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 '단국'이라는 교명은 장형김구 등이 추진하던 통일국가 수립 노선을 지지하며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통일 염원을 담아 결정한 것이다.[5]

3. 4. 김구와의 관계와 단국대학교 설립 이념

장형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으며, 김구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홍일로부터 '국내에 들어가 김구를 도우라'는 조언을 듣고 귀국한 장형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하였다.[3] 그는 김구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였고, 김구가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이사장을 맡아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김구의 뜻을 도왔다. 건국실천원양성소에서의 인연은 김정실, 엄항섭, 양주동 등과 함께 인재 교육에 뜻을 모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3]

단국대학교 설립은 이러한 장형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는 임시정부 주도의 국민대학 설립에 참여했으나, 함께 했던 신익희임시정부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 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이를 임시정부김구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 국민대학과 결별하고 임시정부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새로운 대학 설립을 결심하게 되었다.[3]

'단국'이라는 교명 역시 임시정부김구가 추진하던 통일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데서 나왔다. 장형은 대학 설립을 추진하며 '학교 이름은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장도빈, 안호상, 안재홍 등은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하며,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단군의 건국 정신을 고취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를 받아들여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단순히 단군을 기리는 것을 넘어, 단군의 건국 정신을 바탕으로 남북통일과 통일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3][5] 즉, '단군'의 건국 정신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합쳐 '단국대학교'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다.[5]

4. 가족

조희재에게는 무남독녀 박정숙이 있었다. 아정(雅庭)이라는 호를 가진 박정숙은 단국대학교 설립에 참여하였고, 이후 단국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며 대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1982년에는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박정숙은 2013년 6월 20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선영이다.

박정숙의 아들은 이용우 단국대학교 석좌교수이며, 며느리는 고주자이다. 손자로는 이준석 단국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 교수가 있으며, 손녀는 이윤정이다.[6]

참조

[1] 문서 대한민국 화폐단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53-02-24
[2] 뉴스 단국대 총장에 이용우 교수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2-04-30
[3] 논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단국대학교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10
[4] 문서 넓이 단위 네이버 단위변환
[5] 뉴스 "“독립정신 계승한 단국대, 명문사학의 길을 걸어오다”" http://www.dhnews.co[...] 대학저널 2013-08-05
[6] 뉴스 박정숙 학교법인 단국대 전 이사장 http://news.unn.net/[...] 대학신문 201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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