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몬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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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 몬태나는 미국의 전미식축구 선수로, 쿼터백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몬태나는 노트르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샌프란시스코 49ers에 입단하여 1992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이후 캔자스시티 치프스에서 1993년부터 1994년까지 활동하다 은퇴했다. 그는 4번의 슈퍼볼 우승과 3번의 슈퍼볼 MVP를 수상했으며, 2번의 NFL MVP를 차지했다. 몬태나는 "조 쿨"과 "컴백 키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32번의 4쿼터 역전승을 기록했다. 2000년에는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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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몬태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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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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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쿼터백 |
등번호 | 16, 19 |
출생일 | 1956년 6월 11일 |
출생지 | 펜실베이니아주뉴 이글 |
고등학교 | 링골드 (펜실베이니아주 캐롤) |
대학교 | 노트르담 (1974–1978) |
드래프트 연도 | 1979년 |
드래프트 순위 | 3라운드, 82순위 |
선수 경력 | |
소속팀 |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 캔자스시티 치프스 () |
수상 및 업적 | |
슈퍼볼 우승 | 4회 (XVI, XIX, XXIII, XXIV) |
슈퍼볼 MVP | 3회 (XVI, XIX, XXIV) |
NFL MVP | 2회 (1989, 1990) |
NFL 올해의 공격 선수 | 1989년 |
NFL 올해의 컴백 선수 공동 수상 | 1986년 |
올프로 퍼스트팀 | 3회 (1987, 1989, 1990) |
올프로 세컨드팀 | 2회 (1981, 1984) |
프로볼 출전 | 8회 (1981, 1983–1985, 1987, 1989, 1990, 1993) |
NFL 패스 터치다운 1위 | 2회 (1982, 1987) |
NFL 패서 레이팅 1위 | 2회 (1987, 1989) |
NFL 컴플리션 퍼센티지 1위 | 5회 (1980, 1981, 1985, 1987, 1989) |
NFL 1980년대 올디케이드 팀 | 해당 |
NFL 75주년 올타임 팀 | 해당 |
NFL 100주년 올타임 팀 | 해당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올해의 스포츠인 | 1990년 |
AP 통신 올해의 운동 선수 | 2회 (1989, 1990) |
조지 할라스 상 | 2회 (1988, 1994) |
버트 벨 상 | 1989년 |
샌프란시스코 49ers 명예의 전당 | 해당 |
샌프란시스코 49ers 영구 결번 | 16번 |
전국 선수권 대회 우승 | (1977) |
코튼 볼 MVP | 1979년 |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 | 2000년 |
통계 | |
패스 시도 | 5,391 |
패스 성공 | 3,409 |
컴플리션 퍼센티지 | 63.2% |
터치다운–인터셉트 | 273–139 |
패스 야드 | 40,551 |
패서 레이팅 | 92.3 |
러싱 야드 | 1,676 |
러싱 터치다운 | 20 |
2. 생애
조 몬태나는 대학 풋볼 최고 명문 노트르담 대학교 출신으로, 테리 브래드쇼를 잇는 슈퍼볼 4회 우승 쿼터백이자 역사상 최고의 쿼터백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설적인 선수이다. 슈퍼볼 MVP도 3회 수상하였다.[36]
테리 브래드쇼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브래드쇼의 스틸러스는 '스틸커튼'이라는 별명처럼 수비와 오펜시브 라인맨의 비중이 컸던 반면, 조 몬태나의 포티나이너스는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로 대표되는 쿼터백의 현란한 패싱 공격이 돋보이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몬태나는 팀을 직접 지휘했으며, 4번의 슈퍼볼 우승 중 3번이나 MVP를 수상하며 포티나이너스의 우승이 그의 지휘 능력 덕분임을 입증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몬태나는 수많은 미식축구 게임에서 NFL의 대표 선수로 등장했다. 1990년 세가가 발매한 메가드라이브의 미식축구 게임 제목이 '조 몬태나 풋볼'일 정도였다.
몬태나의 별명은 '조 쿨(Joe Cool)'이다. 팀이 뒤지고 있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역전을 이끌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종료 51초를 남기고 역전을 이끈 1981년 NFC 챔피언십 게임의 "더 캐치"라는 전설적인 플레이와, 종료 39초를 남기고 역전 터치다운을 성공시킨 1989년 23회 슈퍼볼이다. 그는 대역전극을 끝마치고도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번쩍 치켜드는 세리머니를 보여주었다. 1990년 24회 슈퍼볼에서는 존 엘웨이의 덴버 브롱코스를 55-10으로 완파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55점과 45점 차는 슈퍼볼 역대 최고 득점 및 최다 점수 차 기록이다.
몬태나는 슈퍼볼 네 경기에서 인터셉션(상대에게 공을 빼앗기는 것)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상대팀 선수들은 "조 몬태나가 필드에 들어서는 순간이 악몽"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1979년 NFL 드래프트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3라운드 전체 82순위로 지명된 후,[26] 1992년까지 49ers의 주전 쿼터백으로 활약하며 4번의 슈퍼볼 우승 (슈퍼볼 XVI, 슈퍼볼 XIX, 슈퍼볼 XXIII, 슈퍼볼 XXIV)을 이끌었다. 이후 캔자스시티 치프스로 이적하여 1994년까지 활약하다가 은퇴했다.[157]
아들 두 명도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는데, 장남 네이트 몬태나는 아버지 모교인 노트르담 등 여러 대학에서 쿼터백으로 뛰었으나 NFL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못했다. 둘째 닉 몬태나도 워싱턴 허스키스 등에서 후보 쿼터백으로 활동했다.
몬태나는 미식축구 선수치고는 마른 체형으로, 동료였던 제리 라이스는 "몬태나는 종아리가 없는 남자다. 새다리다"라고 놀리기도 했다. 몬태나 본인도 이를 유머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2013년 슈퍼볼에서는 섬유표백제 광고에 '기적의 얼룩'으로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 1. 유년 시절 및 대학 시절
조 몬태나는 펜실베이니아주 뉴이글에서 태어나[13] 피츠버그 남쪽 탄광 마을인 펜실베이니아주 모노가헬라에서 자랐다.[14] 몬태나 가문은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몬태나'는 이탈리아 북부 카모니카 계곡에서 유래한 '몬타니'라는 성의 미국식 형태이다.[15]어릴 때부터 스포츠에 관심을 보인 몬태나는 8살 때 아버지 도움으로 유소년 미식축구를 시작했다.[16] 아버지 몬태나 시니어는 아들이 리그 최소 연령 요건을 충족하도록 9살로 기재했다.[16] 몬태나는 야구와 농구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농구를 가장 좋아했다.[17] 몬태나 시니어는 지역 농구팀을 만들어 아들이 다양한 지역 토너먼트에서 경기하도록 했다.
몬태나는 웨이버리 초등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핀리빌 주니어 고등학교(현재 핀리빌 중학교)와 링골드 고등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17] 링골드 고등학교에서 미식축구, 야구, 농구를 했다.[14] 농구 선수로서 잠재력을 보인 몬태나는 링골드가 1973년 WPIAL Class AAA 남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고, 올스타 선수로 선정되었다.[18] 12학년 때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교에서 농구 스포츠 장학금을 제안했으나 거절했다.[7]
고등학교 미식축구팀에서 처음 2년을 백업 선수로 보낸 몬태나는 11학년 때 선발 쿼터백 자리를 얻었다.[14] 고등학교 경력 마지막 2년 동안 이 역할을 맡았고, 12학년을 마친 후 ''퍼레이드''에서 올 아메리칸 팀에 선정했다.[7] 11학년 때 모네센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22번 시도 중 12번 패스를 성공시켜 223야드를 던졌고, 3개의 패싱 터치다운과 1개의 러싱 터치다운을 기록했다.[17] 이 활약으로 노트르담을 비롯한 대학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끌었다.[14]
결국 노트르담의 장학금 제안을 수락한 몬태나는 어린 시절 우상인 테리 핸라티가 노트르담에 다녔다는 점도 고려했다.[7] 2006년, 몬태나가 졸업한 지 32년 후, 링골드 고등학교는 미식축구 경기장 이름을 "조 몬태나 스타디움"으로 변경했다.[18]
1974년 가을, 노트르담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미식축구팀은 아라 파세기안 감독이 이끌고 있었다. 파세기안 재임 기간 동안 노트르담은 1966년과 1973년에 NCAA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1974년 노트르담 정책에 따라 신입생은 1군 팀과 훈련하거나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고, 몬태나는 몇몇 신입생 팀 경기에만 출전했다.[17]
1974년 12월 15일, 파세기안은 건강 문제로 사임하고,[17] 댄 데빈이 후임으로 고용되었다. 1975년 봄 훈련에서 좋은 기량을 보인 몬태나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데빈은 "조 몬태나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릴 녀석"이라고 말했다.[17]
데빈은 몬태나가 1975년에 풀타임 선발로 나설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17] 몬태나는 노스캐롤라이나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종료 5분 11초를 남기고 투입되어 1분 2초 동안 129 야드를 패스하며 21-14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다음 경기인 에어포스전에서도 4쿼터에 투입되어 30-10으로 뒤지던 경기를 31-30으로 역전승했다.[17] 데빈은 노터데임 체육부장인 무스 크라우스가 이 경기를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컴백"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17] 몬태나는 이 두 경기에서 압박감이 심한 상황에서 훌륭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7]
1976년 시즌 개막 전에 어깨가 탈구되어 시즌을 망쳤다.[129][128] 1977년, 세 번째 쿼터백이었던 그는 퍼듀 대학교와의 경기에서 종료 11분을 남기고 14-24로 뒤진 상황에서 교체 출전하여 154야드를 던져 1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성공시키는 등, 31-24로 역전 승리했다.[129][128] 다음 주부터 선발 쿼터백으로 승격된 그는 남은 9경기를 전승했고, 코튼 볼에서 랭킹 1위인 텍사스 대학교를 38-10으로 꺾어[128] 팀은 11승 1패로 전미 챔피언이 되었다.[129]
1979년 1월 1일, 휴스턴 대학교와 치른 코튼 볼에서 그는 한파로 인해 저체온증으로 고통받았다.[129] 하프타임에는 정맥 주사를 맞거나, 부용 수프를 마시며 몸을 따뜻하게 했다. 4쿼터 종료 7분 37초를 남기고 필드로 복귀한 그는 12-34에서 23점을 추가하여 35-34로 팀을 역전으로 이끌었다.[129][128][132][133]
2. 2. NFL 경력
조 몬태나는 대학 풋볼 최고 명문 노트르담 대학교 출신으로, 테리 브래드쇼를 잇는 슈퍼볼 4회 우승 쿼터백이자 역사상 최고의 쿼터백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설적인 선수이다. 슈퍼볼 MVP도 3회 수상하였다.[36]테리 브래드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브래드쇼의 스틸러스는 '스틸커튼'이라는 별명처럼 수비와 오펜시브 라인맨의 비중이 컸던 반면, 조 몬태나의 포티나이너스는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로 대표되는 쿼터백의 현란한 패싱 공격이 돋보이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몬태나는 팀을 직접 지휘했으며, 4번의 슈퍼볼 우승 중 3번이나 MVP를 수상하며 포티나이너스의 우승이 그의 지휘 능력 덕분임을 입증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몬태나는 수많은 미식축구 게임에서 NFL의 대표 선수로 등장했다. 1990년 세가가 발매한 메가드라이브의 미식축구 게임 제목이 '조 몬태나 풋볼'일 정도였다.
몬태나의 별명은 '조 쿨(Joe Cool)'이다. 팀이 뒤지고 있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역전을 이끌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종료 51초를 남기고 역전을 이끈 1981년 NFC 챔피언십 게임의 "더 캐치"라는 전설적인 플레이와, 종료 39초를 남기고 역전 터치다운을 성공시킨 1989년 23회 슈퍼볼이다. 그는 대역전극을 끝마치고도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번쩍 치켜드는 세리머니를 보여주었다.
1990년 24회 슈퍼볼에서는 존 엘웨이의 덴버 브롱코스를 55-10으로 완파했다. 샌프란시스코의 55점과 45점 차는 슈퍼볼 역대 최고 득점 및 최다 점수 차 기록이다.
몬태나는 슈퍼볼 네 경기에서 인터셉션(상대에게 공을 빼앗기는 것)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상대팀 선수들은 "조 몬태나가 필드에 들어서는 순간이 악몽"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1979년 NFL 드래프트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3라운드 전체 82순위로 지명된 후,[26] 1992년까지 49ers의 주전 쿼터백으로 활약하며 4번의 슈퍼볼 우승 (슈퍼볼 XVI, 슈퍼볼 XIX, 슈퍼볼 XXIII, 슈퍼볼 XXIV)을 이끌었다. 이후 캔자스시티 치프스로 이적하여 1994년까지 활약하다가 은퇴했다.[157]
2. 2. 1.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1979-1992)
몬태나는 1979년 NFL 드래프트 3라운드(전체 82번째)에서 49ers에 지명되었다. 이는 어깨가 약하고 체구가 작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49ers의 빌 월시 감독은 짧은 패스를 정확하게 연결하여 득점하는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 전술에 적합한, "민첩하고 패스가 정확한" 쿼터백을 찾고 있었고, 3라운드까지 몬태나가 남아있자 즉시 지명했다.[129] 몬태나는 첫 해에 스티브 디버그의 백업으로 23번의 패스 시도에 그쳤다.[134]1980년 시즌 후반부터 팀의 주전 쿼터백이 되었다.[129] 그해 12월 7일, 홈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린 뉴올리언스 세인츠와의 경기에서 전반전에 7-35로 크게 뒤지고 있었으나, 4쿼터에 맹추격하여 연장전 끝에 레이 워싱의 필드 골로 38-35 역전승을 거두었다.[30] 이는 몬태나가 NFL 16시즌 동안 기록한 31번의 4쿼터 역전승 중 첫 번째였다(49ers 시절 26번).[31][135][136] 이 해 몬태나는 1,795야드를 던져 15개의 터치다운 패스와 9개의 인터셉션을 기록했고, 패스 성공률 64.5%로 리그 1위를 차지했다.[32][134]
1981년 몬태나는 팀을 13승 3패로 이끌며,[33] 처음으로 프로볼에 선출되었다. 1982년 1월 10일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린 댈러스 카우보이스와의 NFC 챔피언십 게임에서는 경기 종료 4분 54초를 남기고 카우보이스에게 21-27로 뒤진 상황에서 공격을 시작, 종료 58초 전 드와이트 클락에게 던진 극적인 터치다운 패스로 28-27 역전승을 이끌었다.[35] 이 플레이는 '''"더 캐치"'''로 불리며, 49ers의 첫 슈퍼볼 진출을 이끈 역사적인 장면이 되었다.
제16회 슈퍼볼에서 몬태나는 신시내티 벵갈스를 상대로 157야드를 전진했고(패스 22번 중 14번 성공), 1개의 터치다운 패스와 1개의 러싱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26-21 승리를 이끌었다.[36] 뛰어난 활약으로 슈퍼볼 MVP에 선정되었으며,[133] 조 내머스와 함께 대학 풋볼 전국 선수권 대회와 슈퍼볼을 모두 제패한 두 명의 쿼터백 중 한 명이 되었다.
1982년에는 선수 협회의 파업으로 정규 시즌이 9경기로 단축되었고, 몬태나는 2,613야드, 17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당시 NFL 기록인 5경기 연속 300야드 이상 패스를 기록했지만, 팀은 3승 6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37][138]
1983년 몬태나는 3,910야드, 26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프로볼에 선출되었다. 팀은 10승 6패로 NFC 서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39][40][138]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디트로이트 라이언스를 프레디 솔로몬에게 역전 터치다운 패스를 성공시켜 24-23으로 꺾었지만,[41][42] NFC 챔피언십 게임에서는 워싱턴 레드스킨스에게 21-24로 패했다.[43]
1984년 몬태나는 다시 한번 훌륭한 시즌을 보내며 두 번째 프로볼에 출전했고, 팀은 정규 시즌을 15승 1패로 마감하며 당시 NFL 역사상 단일 정규 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44][45] 플레이오프에서 뉴욕 자이언츠와 시카고 베어스를 꺾고 진출한 슈퍼볼 XIX에서 몬태나는 마이애미 돌핀스와 댄 마리노를 상대로 3개의 터치다운과 331야드 패스(슈퍼볼 단일 경기 최다 기록), 59야드의 러싱을 기록하며 38-16 승리를 이끌었다.[48] 49ers의 빌 월시 감독은 경기 후 "조 몬태나는 오늘날 최고의 쿼터백이며, 어쩌면 역대 최고의 쿼터백일 것이다."라고 칭찬했다.[29]
1985년에도 몬태나의 활약으로 49ers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NFC 와일드카드 게임에서 뉴욕 자이언츠에게 패했다.[49][50]
1986년 시즌 초반 몬태나는 심각한 허리 부상을 입어 척추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의사들은 은퇴를 권유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지만,[51][52] 1986년 11월 6일에 복귀했다.[53] 복귀 경기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270야드 패스와 3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기록하며 43-17 승리를 이끌었다. 그 시즌에 단 8경기에 출전했고,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터치다운 패스보다 인터셉션 패스를 더 많이 던졌다.[53] 몬태나는 미네소타 바이킹스 쿼터백 토미 크레이머와 함께 1986년 NFL 컴백 선수상을 공동 수상했다.[55]
1987년 몬태나는 13경기에서 31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기록하며 커리어 최고 기록을 세웠다.[56] 또한 불완전 패스 없이 가장 많은 연속 패스 시도 기록(22회)을 세웠고,[57] 3,054야드를 패스했으며, 패서 레이팅 102.1을 기록했다.[58] 49ers는 NFL 최고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지만, 플레이오프 디비전 라운드에서 미네소타 바이킹스에게 패했다.[59] 1987년 시즌 전에 빌 월시는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쿼터백이었던 스티브 영을 영입했다.[60]
1988년 몬태나는 스티브 영과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출전 시간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레이더스에게 홈에서 패하며 6승 5패를 기록, 플레이오프 진출이 불투명해졌으나, 몬태나는 다시 선발 자리를 되찾아 팀을 10승 6패, NFC 서부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62] 플레이오프에서 미네소타 바이킹스와 시카고 베어스를 꺾고 슈퍼볼 XXIII에 진출했다.[63][64] NFC 챔피언십 경기에서 시카고의 솔저 필드에서 기온이 -8 °C[65]에 강풍이 부는 가운데 288야드와 3개의 터치다운을 던지며 28-3으로 승리했다.[62] 슈퍼볼 XXIII에서 몬태나는 당시 슈퍼볼 기록인 357야드와 2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36번의 패스 중 23번을 성공시켰다. 49ers는 경기 종료 3분 20초를 남기고 벵갈스에 16-13으로 뒤쳐졌지만 몬태나는 92야드를 전진시켜 경기 종료 34초를 남기고 존 테일러에게 역전 터치다운 패스를 던졌다.[66][67]
1989년 몬태나는 3,521야드를 던지고 26개의 터치다운, 8개의 인터셉션을 기록하여 당시 NFL 역사상 단일 시즌 최고 패서 레이팅을 기록했다.[70] 또한 227야드와 3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으며, NFL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팀은 정규 시즌을 NFL 최고 기록인 14승 2패로 마쳤고,[68] 2번의 패배는 총 5점 차였다.[69] 필라델피아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4쿼터에 4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던지며 역전승을 이끌었다.[71] 플레이오프에서 미네소타 바이킹스와 로스앤젤레스 램스를 꺾고 진출한 슈퍼볼 XXIV에서 297야드를 던지고 슈퍼볼 기록인 5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는 동시에 15야드를 러싱하며 49ers가 덴버 브롱코스를 55-10으로 꺾으면서 슈퍼볼 MVP를 세 번째로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74] 이는 슈퍼볼 역사상 단일 팀 최고 점수차이자 가장 일방적인 점수였다.[75]
1990년 몬태나는 다시 한번 49ers를 NFL에서 최고의 정규 시즌 기록(14-2)으로 이끌었다.[77] 그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의해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되었다. 애틀랜타 팰컨스와의 경기에서 476야드(49ers 단일 경기 기록)와 6개의 터치다운 패스(그 중 5개는 제리 라이스에게)를 던졌다. 3,944야드와 26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지만, 커리어 하이인 16개의 인터셉션도 기록했다.[106] 49ers는 NFL 팀 최초로 3연속 슈퍼볼 우승을 노렸지만, NFC 챔피언십 게임에서 뉴욕 자이언츠에게 패했다. 몬태나는 레너드 마셜에게 색을 당하면서 흉골, 오른손 골절 및 뇌진탕을 일으켜 부상으로 경기에서 빠졌고, 경기는 자이언츠가 15-13으로 승리했다.[85]
1991년 프리 시즌 경기에서 팔꿈치 부상을 당해[155] 1991 시즌 전체와 1992 시즌 대부분을 결장했다.[86] 1992년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인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와의 ''먼데이 나이트 풋볼'' 경기에서 후반전에 투입되어 승리를 확정지었다.[87] 그러나 이 시점에서 스티브 영이 선발 쿼터백으로 자리 잡았고, 플레이오프에서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몬태나는 49ers 유니폼을 입고 더 이상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댈러스 카우보이스와의 NFC 챔피언십 경기에서 영과 스티브 보노에 이어 세 번째 쿼터백으로 49ers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몬태나가 건강을 회복하고 경기에 나설 준비가 되자, 쿼터백 논란이 일어났다. 스티브 영은 몬태나가 부상으로 결장한 2년 동안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으며, 많은 팬들과 선수들은 스티브 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영은 백업 선수로만 기용된다면 경기에 뛰고 싶어하지 않았다.[88]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태나가 "프랜차이즈의 얼굴"이며 그가 그렇게 남아있는 것이 옳다는 강한 여론도 있었다. 라커룸에 균열이 생겼고, 몬태나는 결국 트레이드를 요청했다.[89]
2. 2. 2. 캔자스시티 치프스 (1993-1994)
Joe Montana영어는 1993년 4월, 캔자스시티 치프스로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8위 지명권과 트레이드되었다.[157] 이 트레이드는 마커스 앨런이라는 스타 로스앤젤레스 레이더스 러닝백을 자유 계약으로 영입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92] 몬태나와 앨런, 두 명의 전 슈퍼볼 MVP의 합류는 캔자스시티에서 많은 언론의 관심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93] 몬태나는 캔자스시티 치프스와 3년간 1000만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다.[91]치프스는 몬태나에게 세 개의 등번호를 제시했다. 노터데임 대학교 시절의 3번, 리틀 리그와 1979년 트레이닝 캠프에서 착용한 19번, 그리고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쿼터백 렌 도슨이 착용했던 팀의 영구 결번인 16번이었다. 도슨은 몬태나에게 16번을 착용해 주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19번을 착용했다.[157] 치프스 단장 칼 피터슨은 1993년 오프 시즌 동안 새로운 공격 코디네이터 폴 해켓의 지휘 아래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를 실행하기 위해 선수들을 영입했다. 해켓은 한때 몬태나의 49ers 쿼터백 코치를 지냈으며, 당시 감독 마티 셔튼하이머에게 보고했다.[94]
1993년 몬태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프로볼에 선출되었고, 1970년 이후 처음으로 팀에 플레이오프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버팔로 빌스와의 AFC 챔피언십 게임까지 팀을 이끌었다. 1993 시즌 일부 경기에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치프스가 22년 만에 처음으로 디비전에서 우승하면서 마지막 프로볼에 선출되었다.[92] 몬태나는 1993-94 NFL 플레이오프에서 두 번의 역전승을 이끌었다. 피츠버그 스틸러스와의 와일드카드 경기에서 4번째 다운에서 7야드 터치다운 패스를 던져 경기를 연장전으로 이끌었고,[95] 휴스턴 오일러스와의 경기에서는 2쿼터에 28점을 획득, 통산 29번째 4쿼터 역전승을 거두는 3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기록했다.[96]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캔자스시티는 버팔로 빌스에 30-13으로 패했고,[97] 몬태나는 3쿼터 세 번째 플레이에서 뇌진탕을 겪어 데이브 크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93년 치프스는 13승을 거두며 시즌 최다 승리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98]
1994년 몬태나는 14경기에 출전하여 2주차에 옛 소속팀인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를 24-17로 꺾었다.[126] 1994년 몬태나는 두 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 선발 출장했다.[99] 존 엘웨이와 덴버 브롱코스와의 고전적인 대결에서 몬태나와 치프스는 ''먼데이 나이트 풋볼''에서 31-28로 승리했다.[100] 2주차에는 몬태나가 그의 전 팀인 샌프란시스코 49ers와 스티브 영을 상대로 잊을 수 없는 경기를 펼쳤는데, 많은 기대를 모았던 이 경기에서 몬태나와 치프스는 24-17로 49ers를 꺾었다. 덴버 브롱코스와의 먼데이 나이트 풋볼에서는 패스 393야드, 경기 종료 직전의 터치다운 패스를 포함한 3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31-28로 승리했다.[126] 이 해에 그는 역대 5번째로 패스 획득 통산 40,000야드를 달성했고,[122]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128] 몬태나는 팀을 9-7의 성적으로 이끌었고,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와일드카드 플레이오프 라운드에서 마이애미 돌핀스와 댄 마리노에게 27-17로 패했다.[101] 시즌 종료 후, 1995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몬태나는 애로우헤드 스타디움의 "믿을 수 없는 함성"을 치프스 홈 구장으로 기억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캔자스시티는, 이기는지 지는지와 상관없이, 팬들의 열정이 대단합니다. 수년 동안, 그 경기장은 한 번도 빈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곳의 사람들은 당신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그 팀과 조직을 지원합니다. 그리고 정말 시끄럽습니다. 50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매주 소리를 지릅니다. 그 팬들은 NFL 최고의 팬 중 하나이고, 분명히 가장 어려운 경기장 중 하나입니다." 마티 셔튼하이머 감독은 애로우헤드에서 첫 경기를 치르기 전에 몬태나를 따로 불러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함성에 대비하라고 말했다. 몬태나는 "마티, 저는 네 번의 슈퍼볼에서 뛰었어요. 어디든 다 뛰어봤다고요."라고 회상했다. 마티는 "기다려봐."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을 사로잡는 것은 경기장에서 국가를 부를 때, '그리고... 치프스의 홈!'이라고 말할 때입니다. 여전히 팔에 털이 곤두서게 만듭니다."[102]
치프스에서의 2년 동안 그는 선발로 17승 8패, 패스 성공률 60%, 29TD, 13INT의 성적을 기록했다.[157] 치프스에서 몬태나의 후계자는 나이너스에서도 백업 쿼터백이었던 스티브 보노가 맡았다.
2. 3. 은퇴
1995년 4월 18일, 몬태나는 샌프란시스코의 저스틴 허만 플라자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이 행사는 지역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으며, 존 매든, 에디 데바톨로 주니어 등이 연설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몬태나의 활약상과 전 49ers 팀 동료들과의 인터뷰도 상영되었다. 몬태나가 출전한 4번의 슈퍼볼 우승 중 3번의 우승을 함께 했던 빌 월시가 이 행사의 사회를 맡았다.나이너스 시절의 등번호 16번은 1997년 12월 15일 덴버 브롱코스와의 경기 하프타임에 영구 결번되었다.[158]
2000년,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6년, 나이너스의 새로운 본거지인 리바이스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제50회 슈퍼볼에서 코인 토스를 맡았다.[159]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조 몬태나는 뛰어난 정신력과 넓은 시야, 정확한 패스 컨트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스크램블이나 패스 스로우 어웨이로 전환하는 뛰어난 판단력을 가진 쿼터백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경기 막판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역전을 이끌어내는 능력으로 "조 쿨(Joe Cool)"과 "컴백 키드(Comeback Kid)"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10]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시절 동료였던 랜디 크로스는 "몬태나보다 강한 어깨, 주력, 신체 능력을 가진 쿼터백은 많았지만, 경기에 이기고, 터치다운을 올리고, 챔피언이 되는 면에서 몬태나 이상의 쿼터백은 없었다."라고 평가했다.[128]
그의 대학 시절 기록은 다음과 같다.
노트르담 파이팅 아이리시(Notre Dame Fighting Iris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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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 출장 경기 수 | 패싱 | 러싱 | ||||||||||
성공 | 시도 | 성공률 | 야드 | 평균 | 터치다운 | 인터셉션 | 레이팅 | 시도 | 야드 | 평균 | 터치다운 | ||
1975 | 7 | 28 | 66 | 42.4 | 507 | 7.7 | 4 | 8 | 101.4 | 7 | −5 | −0.7 | 2 |
1976 | 부상으로 출전하지 않음 | ||||||||||||
1977 | 9 | 99 | 189 | 52.4 | 1,604 | 8.5 | 11 | 8 | 134.4 | 9 | 32 | 3.6 | 6 |
1978 | 11 | 141 | 260 | 54.2 | 2,010 | 7.7 | 10 | 9 | 124.9 | 72 | 109 | 1.4 | 6 |
통산 | 27 | 267 | 515 | 52.0 | 4,123 | 8.0 | 25 | 25 | 125.4 | 88 | 131 | 1.5 | 14 |
은퇴 당시 몬태나의 쿼터백 레이팅은 92.3으로 스티브 영에 이어 NFL 역대 2위였다.[122] 그는 117승 47패(승률 71.3%)의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으며, 4쿼터에만 31번의 역전승을 이끌어냈다.[122][123][128][163] 2000년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때, 존 매든은 그를 역대 최고의 쿼터백으로 평가했다.[123]
4. 개인 생활
몬태나는 세 번 결혼했다. 1974년, 노터데임 대학교 2학년 때 고향의 연인 킴 모세스와 결혼했지만 3년 후 이혼했다.[17] 1981년, 캐스 카스티요와 결혼했고, 1984년에 이혼했다.[117] 1985년, 쉐이크 광고를 함께 찍은 배우이자 모델인 제니퍼 월리스와 결혼했다. 슬하에 두 딸과 두 아들, 네 자녀를 두고 있다.[166] 아들 네이트는 웨스트버지니아 웨슬리안 대학교 출신 미식축구 선수이며, 다른 아들 닉은 툴레인 대학교에서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2008년, 몬태나는 첫 번째 아내가 노터데임 대학교 시절 자신의 편지와 기념품을 팔아 저작권과 사생활을 침해했다며 그녀와 댈러스의 경매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118]
몬태나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다.[119] 그는 말을 소유하고 있으며, Montagia라는 레이블로 와인을 생산한다.[120] 메이크어위시 재단(Make-A-Wish Foundation)과 자주 함께 일한다.[121]
5. 기타
조 몬태나는 중요한 순간에 침착함을 유지하는 능력으로 "조 쿨(Joe Cool)"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경기 후반 역전승을 여러 번 이끌어 "컴백 키드(Comeback Kid)"라는 별명도 얻었다.[110]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동료들은 그의 가늘고 작은 종아리를 보고 "버드 레그스(Bird Legs)"라고 불렀다.[111][112] 캘리포니아(골든 스테이트)에서 뛰었기 때문에 "골든 조(Golden Joe)"라고 불리기도 했다.[113] NFL 경력 초기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별명 공모전에서 "빅 스카이(Big Sky)"라는 별명이 선정되었고, 다른 참가자는 "조 몬태나"라는 이름 자체가 별명처럼 들린다며 "데이비드 W. 깁슨(David W. Gibson)"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몬태나는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해 자신의 로커에 새기기도 했다.[114][115]
몬태나는 NFL 네트워크의 ''조의 다이너(Joe's Diner)'' TV 광고에서 자신의 이름과 중간 이름을 따서 만든 가명인 "조 클리포드(Joe Clifford)"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116]
- 노트르담 대학교 시절 제4회 재팬 보울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 버블 경제 시기인 1990년대 초, 미쓰비시 전기의 AV 기기 광고에 출연하여 "어떤 몬태나", "조우 판단"이라는 대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노트르담 재팬 보울 2009 특별 친선 대사로 선정되었지만, 2009년 6월 26일, 마이크 고릭과 함께 가족 사정을 이유로 방일을 중단했다.[170][171][172]
- 메가 드라이브 전용 소프트웨어로 "조 몬태나 풋볼", "조 몬태나 II 스포츠 토크 풋볼"이 발매되었다. "조 몬태나 III"의 발매도 예정되었으나, 최종적으로 현지화가 중단되었다. 메가 CD판 "조 몬태나 풋볼"도 현지화가 중단되었다. 그의 게임화 작품 일본어판 이식은 3 작품으로 실현되었고, 5 작품으로 좌절되었다.[173]
6. 수상 및 기록
조 몬태나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캔자스시티 치프스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기록을 남긴 전설적인 쿼터백이다.
- 슈퍼볼에 4번 출전하여 모두 승리하였고, 슈퍼볼 MVP를 3회 수상했다.[109]
- 1989년과 1990년에는 리그 MVP를 2회 연속 수상했다.
- 1986년에는 NFL 컴백 선수상을 수상했다.
- 프로볼에 8회 선정되었고, 올-프로에는 6회 선정되었다.
- NFL 네트워크가 선정한 ''The Top 100: NFL's Greatest Players''에서 4위에 올랐으며, 이는 쿼터백 중 가장 높은 순위였다.
몬태나는 슈퍼볼에서 인터셉션 없이 122번의 패스를 시도하여 83번을 성공, 1,142야드를 전진시키고 11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127.8의 역대 최고 패서 레이팅을 기록했다.[109] 또한, 슈퍼볼에서 인터셉션 없이 가장 많은 패스 시도(122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정규 시즌 통산 300야드 이상 패스 경기를 39번, 400야드 이상 패스 경기를 7번 기록했다.[122] 은퇴 당시 그의 쿼터백 레이팅은 92.3으로, 스티브 영(96.8)에 이어 NFL 역대 2위였다.[122] 몬태나는 선발 출전하여 117승 47패(승률 71.3%)를 기록했으며, 4쿼터 역전승을 31회 이끌었다.[122][123][128][163]
1989년 로스앤젤레스 램스와의 경기에서는 458야드를 패스하며 먼데이 나이트 풋볼 기록을 세웠으나, 이 기록은 2011년 톰 브래디에 의해 경신되었다. 몬태나는 NFL 역사상 유일하게 95야드 이상 터치다운 패스를 2회 성공시킨 선수이다.[164]
그의 등번호 16번은 1997년 12월 15일, 덴버 브롱코스와의 '먼데이 나이트 풋볼' 경기 하프타임에 포티나이너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
연도 | 경기 | 팀 | 패스 | 결과 | ||||||
---|---|---|---|---|---|---|---|---|---|---|
성공 횟수 | 시도 횟수 | 성공 확률 | 획득 야드 | TD | Int | 레이팅 | ||||
1981 | 제16회 | SF | 14 | 22 | 63.6 | 157 | 1 | 0 | 100.0 | 승 26–21 |
1984 | 제19회 | 24 | 35 | 68.6 | 331 | 3 | 0 | 127.2 | 승 38–16 | |
1988 | 제23회 | 23 | 36 | 63.9 | 357 | 2 | 0 | 115.2 | 승 20–16 | |
1989 | 제24회 | 22 | 29 | 75.9 | 297 | 5 | 0 | 147.6 | 승 55–10 | |
통산 | 83 | 122 | 68.0 | 1,142 | 11 | 0 | 127.8 | 4승 0패 |
6. 1. 수상
횟수횟수
확률
야드
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