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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저지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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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 저지는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미국의 야구 선수였다. 왼손 타자이자 투수였으며, 1루수로 주로 뛰었다.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18시즌을 뛰며 통산 2171경기에 출전해 .298의 타율, 1034타점, 2352안타를 기록했다. 1924년 월드 시리즈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은퇴 후에는 조지타운 대학교 야구팀 코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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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저지 (야구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 저지
본명조지프 이그나티우스 저지
출생일1894년 5월 25일
출생지미국 뉴욕주 브루클린
사망일1963년 3월 11일 (향년 68세)
사망지미국 워싱턴 D.C.
포지션1루수
타석좌투좌타
신장173cm
체중70kg
선수 경력
데뷔 리그MLB
데뷔1915년 9월 20일
마지막 리그MLB
마지막 경기1934년 5월 12일
소속팀워싱턴 세너터스 (1915~1932)
브루클린 다저스 (1933)
보스턴 레드삭스 (1933~1934)
수상 경력
월드 시리즈1924년 우승
통계
타율0.298
안타2,352
홈런71
타점1,034
기타
조 저지
1924년 모습

2. 선수 경력

조 저지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왼손 타자이자 투수였다.[2]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 출신이었고,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3] 66번가와 1번가 근처, 현재 록펠러 대학교 부지에서 성장했다. 12세 때 지역 우체부인 버드 해나(Bud Hannah)에 의해 유격수로 발탁되었으나, 더 자연스러운 포지션에서 뛸 수 있도록 1루수 글러브를 선물받았다.[6]

뉴욕 지역에서 세미프로 야구를 한 후, 1911년 뉴욕 자이언츠의 트라이아웃을 거쳐 1914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마이너 리그 선수로서 .300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후, 1915년에 워싱턴 세네터스로 계약이 팔렸고, 그 시즌 말에 12경기를 뛰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6] 이후 18년 동안 세네터스에서 활약하게 되며, 그의 오랜 팀 동료가 될 우익수 샘 라이스는 그보다 한 달 전에 데뷔했다.[6]

선수 경력 초반에는 데드볼 시대의 영향과 파워 히팅을 억제하는 홈 구장 그리피스 스타디움에서의 경기로 인해 기록적인 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체구(약 1.52m 약 21.59cm, 약 70.31kg)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1루수로 인정받아 5번이나 아메리칸 리그 수비율 1위를 차지했다.[6] 그는 1924년과 1925년 팀의 아메리칸 리그 우승과 월드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6]

1932년 시즌 후 세네터스를 떠나 1933년 브루클린 다저스에 합류했고, 시즌 중반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다. 1934년 초 레드삭스에서 10경기를 더 뛴 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6]

20시즌의 선수 생활 동안 조 저지는 2171경기에 출전하여 통산 타율 .298, 1034타점, 2352안타를 기록했다.[6] 그는 워싱턴 세네터스 역사상 경기 수, 타수, 안타 등 여러 주요 기록 부문에서 샘 라이스에 이어 2위에 올라 있으며, 그의 통산 .993 수비율은 오랫동안 아메리칸 리그 기록으로 유지되었다.[6]

2. 1. 메이저 리그 경력

뉴욕 지역에서 세미프로 야구를 하던 조 저지는 1911년 뉴욕 자이언츠의 트라이아웃을 거쳐 1914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6] 마이너 리그에서 .300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후, 1915년 그의 계약은 워싱턴 세네터스로 팔렸고, 그 시즌 말 12경기에 출전하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6] 훗날 그의 오랜 동료가 되는 우익수 샘 라이스는 그보다 한 달 먼저 데뷔했다.[6]

선수 경력 초반에는 데드볼 시대의 영향과 파워 히팅에 불리했던 홈 구장 그리피스 스타디움의 특성으로 인해 기록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6] 세네터스는 전통적으로 약팀이었으나, 1920년대에 2루수 버키 해리스, 유격수 로저 페킨포, 3루수 오시 블루지 등이 합류하며 강력한 내야진을 구축했고, 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시기를 맞이했다.[6] 조 저지는 이들과 함께 팀의 전성기를 이끌며 1924년과 1925년, 두 차례 아메리칸 리그 우승과 월드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6]

1932년 시즌 후, 조 저지는 1933년 세네터스의 감독으로 자신이 아닌 26세의 유격수 조 크로닌이 임명된 것에 실망했다. 하지만 구단주 클라크 그리피스의 결정을 존중하며 팀을 떠났다.[6] 1933년에는 브루클린 다저스로 이적하여 처음으로 내셔널 리그에서 뛰었고, 시즌 중반 다시 보스턴 레드삭스로 팀을 옮겼다.[6] 1934년 레드삭스에서 10경기를 더 뛴 후 선수 생활을 마감했으며, 잠시 마이너 리그 팀인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6]

2. 1. 1. 주요 기록

조 저지는 선수 경력 초기에 데드볼 시대의 영향을 받았고, 홈 구장인 그리피스 스타디움홈런 생산에 불리하여 파워 히팅 기록에 어려움을 겪었다. 세네터스에서 뛴 18시즌 중 12시즌 동안 그리피스 스타디움은 다른 아메리칸 리그 구장보다 홈런이 적게 나왔다. 1917년, 그는 팀 전체 홈런 4개 중 절반인 2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15개의 3루타를 포함하여 .417의 장타율(AL 7위)을 기록했다. 1918년에는 팀의 총 5개 홈런 중 하나를 쳤다. 1919년에는 81개의 볼넷으로 당시 클럽 기록을 세웠다.[6]

1920년 7월 1일, 조 저지는 월터 존슨의 통산 유일한 노히터 경기에서 해리 후퍼의 라인 드라이브 타구를 잡아 마지막 아웃을 만들어내는 수비를 펼쳤다.[6] 그는 이 시즌에 개인 통산 최고 타율인 .333을 기록했으며, 이후 1930년까지 대부분의 시즌에서 .300 이상의 타율을 유지했다. 1922년에는 홈런 10개를 기록하며 당시 클럽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고, 32개의 2루타와 15개의 3루타를 추가하며 MVP 투표에서 8위에 올랐다. 또한 그해 131개의 병살타에 관여하며 당시 아메리칸 리그 기록을 세웠다.[6]

1924년 월드 시리즈 야구 경기에서 조 저지와 그의 아버지


조 저지는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1루수였다. 1923년에는 .993의 수비율로 처음 아메리칸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해 워싱턴 세네터스는 2루수 버키 해리스, 유격수 로저 페킨포, 3루수 오시 블루지와 함께 강력한 내야진을 구축하여 182개의 병살을 기록, 당시 메이저 리그 팀 기록을 세웠다. 또한 4명의 내야수 모두가 리그 병살타 1위를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6] 그는 1루수로서 작은 체구(약 1.52m 약 21.59cm, 약 70.31kg)에도 불구하고 5번이나 아메리칸 리그 수비율 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25년(.993), 1927년(.996), 1929년(.996), 1930년(.998)에도 아메리칸 리그 1루수 수비율 1위를 차지했으며, 특히 1930년에는 단 2개의 실책만을 기록했다. 그의 통산 .993 수비율은 30년 이상 유지된 아메리칸 리그 기록이었다.[6]

1924년, 세네터스는 창단 첫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도 승리했다. 조 저지는 5번 타자로 출전하여 2차전에서 결승 타점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 1925년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월드 시리즈에서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에게 패했다. 그는 이 시리즈에서 4번 타자로 출전하여 2차전 홈런, 3차전 동점타와 동점 희생 플라이 등을 기록했다.[6]

1929년 4월 경기 전 팀을 위해 엘크스 클럽으로부터 꽃을 받은 조 저지 (앞쪽 왼쪽)


조 저지는 여러 아메리칸 리그 및 팀 기록을 세웠다. 1928년에는 개인 최고인 93타점을 기록하고 MVP 투표 3위에 올랐으며, 그해 아메리칸 리그 1루수 통산 출장 경기 기록을 경신했다. 이후 통산 아웃(1929), 총 찬스(1930), 병살(1928), 어시스트(1932) 부문에서도 아메리칸 리그 기록을 차례로 경신했다. (이 기록들은 훗날 루 게릭과 미키 버논 등에 의해 깨졌다.)[6] 그는 1930년 마지막으로 뛰어난 시즌을 보내며 2루타(29개), 3루타(11개), 홈런(10개)에서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6]

1932 시즌 후 세네터스를 떠나 1933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었고, 1934년 레드삭스에서 10경기를 더 뛴 후 은퇴했다.[6]

20시즌의 선수 생활 동안 조 저지는 2171경기에 출전하여 통산 타율 .298, 1034타점, 2352안타, 433개의 2루타, 158개의 3루타, 71개의 홈런, 1184득점, 958볼넷, 213도루, .378의 출루율을 기록했다.[6] 그는 워싱턴 세네터스/미네소타 트윈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경기 출장(2084), 타수(7663), 안타(2291), 득점(1154), 타점(1004), 2루타(421), 3루타(157), 총 루타(3239)에서 샘 라이스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홈런은 구스 고슬린에 이어 2위, 희생 번트(249개)는 1위를 기록하고 있다.[6] 그의 1루수 통산 출장 경기(2084)와 병살(1543) 기록은 은퇴 당시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각각 제이크 벡클리와 찰리 그림에 이어 3위, 그림에 이어 2위에 해당했다.[6]

3. 선수 은퇴 후

선수 은퇴 후 저지는 1936년부터 1958년까지 조지타운 대학교 야구팀 코치를 맡았으며, 오시 블루지 감독 아래 1945년과 1946년 두 시즌 동안 워싱턴 세네터스 코치를 맡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코치직을 수행했다. 1946년의 근무로 저지는 신설된 연금 제도 자격을 겨우 갖추게 되었으며, 그의 초기 250USD 투자는 그가 63세가 된 후 월 510USD의 연금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했다. 1947년 시즌 후 그는 세네터스의 감독직을 제안받았지만, 과도한 이동을 원치 않아 거절했다.

저지의 아들 조셉 저지는 작가이자 편집자가 되었으며, 특히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활동했다. 그의 손자 마크 저지는 논픽션 작가이자 보수주의 평론가이다. 마크는 2004년에 할아버지에 대한 책 ''빌어먹을 세네터스''를 썼다.[4]

저지는 워싱턴 D.C. 체비 체이스 지역에 있는 자택 밖에서 눈을 치우다 심근 경색으로 6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메릴랜드 실버 스프링에 있는 게이트 오브 헤븐 묘지에 묻혔다.[5]

4. 사생활

아들 조셉 저지는 작가이자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특히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일했다. 손자인 마크 저지는 논픽션 작가이자 보수주의 평론가로 알려져 있으며, 2004년 할아버지에 대한 책 ''빌어먹을 세네터스''를 썼다.[4]

1947년 시즌 후 워싱턴 세네터스의 감독직을 제안받았지만, 과도한 이동을 원치 않아 거절했다.

저지는 워싱턴 D.C. 체비 체이스 지역에 있는 자택 밖에서 눈을 치우다 심근 경색으로 6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5] 메릴랜드 실버 스프링에 있는 게이트 오브 헤븐 묘지에 묻혔다.[5]

5. 사망

저지는 워싱턴 D.C. 체비 체이스 지역에 있는 자택 밖에서 눈을 치우던 중 심근 경색으로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메릴랜드 실버 스프링에 있는 게이트 오브 헤븐 묘지에 묻혔다.[5]

6. 기타


  • 월터 존슨의 룸메이트였던 조 저지는 1927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타격 연습 도중 저지가 친 라인 드라이브 타구에 존슨이 발목을 맞아 부러졌고, 이 부상으로 존슨은 사실상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6]
  • 1955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괜찮아, 신사들''에 등장하는 조 하디 캐릭터는 조 저지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뮤지컬의 작가인 더글러스 왈롭이 1940년대에 저지의 딸 도로시와 교제했던 사실 때문이다.[6]

참조

[1] sabrbio Joseph Wancho 2020-01-22
[2] 웹사이트 Joe Judge Statistics and History https://www.baseball[...] 2020-01-22
[3] 뉴스 Joe Judge First Started to Hit by Knocking Home Runs Into the East River https://bklyn.newspa[...] 1929-05-29
[4] 간행물 When Washington's Senators won the world series (book review) 2003-07-14
[5] 뉴스 Judge's Funeral Services Today 1963-03-14
[6] 서적 Damn Senators: My Grandfather and the Story of Washington's Only World Series Encounter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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