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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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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오스본은 1929년 런던에서 태어난 영국의 극작가이다. 1956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로 일약 성공하며 영국 연극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작품은 전후 영국 사회에 대한 하층 계급의 분노를 표현하며 '앵그리 영 맨'이라는 용어를 낳았다. 오스본은 이후 《연예인》, 《루터》, 《허용될 수 없는 증언》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며, 영화 각본 작업과 배우 활동도 병행했다. 그는 다섯 번의 결혼을 했으며, 말년에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1994년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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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스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0년의 오스본
1970년의 오스본
본명존 제임스 오스본
출생1929년 12월 12일
출생지풀럼, 런던, 잉글랜드
사망1994년 12월 24일 (65세)
사망지클런, 슈롭셔, 잉글랜드
직업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정치 운동가
장르사회 사실주의
키친 싱크 드라마
사조성난 젊은이
활동 기간1950년–1992년
배우자파멜라 레인
메리 우레
페넬로페 길리아트
질 베넷
헬렌 도슨
자녀1명
영향테렌스 래티건
대표작
수상
토니상 최우수 작품상루터, 1964년
아카데미 각색상톰 존스, 1964년
영국 아카데미 각본상톰 존스, 1964년
추가 정보
존 오스본 서명
존 오스본 서명

2. 초기 생애

존 오스본은 1929년 12월 12일 런던에서 태어났다.[13] 그의 아버지 토머스 고드프리 오스본은 사우스 웨일스 출신의 상업 미술가이자 광고 카피라이터였고, 어머니 넬리 베아트리스 그로브는 코크니 출신 바텐더였다.[14]

1936년, 가족은 토머스의 어머니가 이미 정착한 서리주 스톤리 북부 교외로 이사했다.[15][16] 그러나 오스본은 이곳을 문화적 황무지로 여겼으며, 한 학교 친구는 "그는 [우리]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람들로 여겼다"고 말했다.[17] 그는 아버지를 숭배했지만, 어머니를 혐오했으며,[18] 어머니를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계산적이고 무관심하다"고 묘사했다.[19]

토머스 오스본은 1940년에 사망했고, 어린 오스본에게 보험금을 남겼다. 그는 이 돈으로 데번주 번스테이플에 있는 작은 사립 학교인 벨몬트 칼리지에서 사립 교육을 받았다.[20] 그는 1943년에 학교에 입학했지만, 1945년 여름 학기에 퇴학당했다.[21] 오스본은 그 이유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방송을 듣는 것을 이유로 교장이 때린 것에 대한 반항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전 학생은 오스본이 다른 학생들과 싸우다 걸렸을 뿐 교장을 폭행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22][23] 그는 학교 자격증을 유일한 공식 자격으로 취득했다.[18]

3. 경력

런던에서 선전 미술가 아버지와 술집 웨이트리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스본은 1941년에 아버지를 여읜 후 데번의 공립 학교에 들어갔지만 퇴학당했다.[137] 그 후 배우가 되었지만, 무명으로 지냈다.[138] 1956년 5월 8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초연은 극단과 일반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킹슬리 에이미스, 앨런 실리토, 아놀드 웨스커 등과 함께 앵그리 영 맨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앵그리 영 맨'이라는 명칭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유래했다.

이후 '코미디언'(1957년), '루터'(1961년) 등의 작품을 썼지만, 인기는 점차 하락했고, 인기를 잃은 거물로 취급받는 경우도 많았다.[139] 1970년대에는 랄프 리처드슨이 출연한 《수에즈 서쪽》, 1975년작 《내 낡은 시가의 종말》, 프랭크 핀레이가 출연한 ''Watch It Come Down''을 발표했지만, 연극 역사가 필리스 하트놀은 이 시기 오스본의 작품이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64][65]

같은 시기에 발표된 ''A Sense of Detachment''(1972)는 줄거리가 없고, 노부인이 하드코어 포르노 카탈로그를 장시간 낭독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등 가장 혹평을 받은 작품이었다.[1]

1970년대에 오스본은 영화 ''겟 카터''(1971)에서 갱스터 시릴 키니어 역을 맡았고,[55][70] 이후 ''내일은 오지 않는다''(1978)와 ''플래시 고든''(1980)에 출연했다.[70]

1950년대 '분노한 젊은이' 이미지와는 달리, 오스본은 1986년부터 슈롭셔 시골 클런턴 근처 The Hurst에서 살며 점차 구식 시골 신사의 모습을 닮아갔다.[71][72] 젊었을 때 경멸했던 보수적인 영국 잡지 ''더 스펙테이터''에 일기를 쓰기도 했다.[73][74]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오스본은 두 권의 자서전 《더 나은 부류의 사람》(1981)과 《거의 신사》(1991)를 출판했다. 마지막 희곡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속편인 《데자뷰》(1992)였다.

3. 1. 초기 경력 (1950-1956)

학교를 졸업한 후, 오스본은 런던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 잠시 무역 저널리즘에 종사했다.[4] 그는 순회 극단의 어린 배우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연극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곧 무대 감독과 배우로 활동하게 되었고, 앤서니 크레이튼의 지방 순회 극단에 합류했다.[5] 오스본은 극작에도 손을 댔는데, 그의 첫 작품인 ''그 안에 있는 악마''(The Devil Inside Him)를 그의 멘토인 스텔라 린든과 공동 집필했으며, 린든은 1950년 허더스필드에 있는 로열 극장에서 이 작품을 연출했다. 1951년 6월, 오스본은 파멜라 레인과 결혼했다.[24] 앤서니 크레이튼과 함께 그의 두 번째 작품인 ''개인적인 적''(Personal Enemy)을 집필했으며, 이후 크레이튼과 함께 1958년 로열 코트 극장에서 공연된 ''조지 딜런의 비문''(Epitaph for George Dillon)을 썼다. ''개인적인 적''은 그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를 제출하기 전에 지방 극장에서 공연되었다.[25]

3. 2.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1956)

배우로서 극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6)로 일약 각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 연극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47] 이 작품이 성공한 이유는 고루하고 안이한 전후 영국 사회에 대한 하층계급의 분노를 주인공 지미 포터가 폭발시켜 준 데 있는데, 형식적인 새로움은 없지만 일상적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그 언어를 생생하고 통렬한 웅변으로 쌓아올린 것은 일찍이 영국 무대에서는 볼 수 없던 일이었다.[40]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오스본이 레퍼토리 극장에서 휴 헤이스팅스의 연극 《쏘렌토 위의 갈매기》에 출연하던 중 모어컴 부두의 야외용 의자에서 17일 만에 쓴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연극이다.[26][27] 오스본은 파멜라 레인과 더비의 비좁은 숙소에서 함께 살면서 논쟁을 벌였는데, 레인은 당시 지역 치과의사와 불륜 관계였다.[28] 이 작품은 런던의 여러 에이전시에 제출되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29] 결국 런던의 로열 코트 극장에 새로 설립된 잉글리시 스테이지 컴퍼니에 보내졌다.[30]

배우 겸 매니저이자 예술 감독인 조지 데빈이 설립한 이 컴퍼니는 처음 두 작품이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었다.[31][32] 데빈은 이 연극에서 전후 시대의 새로운 정신을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을 보고 과감하게 이 작품에 투자했다.[33][34] 당시 오스본은 템스 강의 치즈윅에 있는 큐비츠 요트 선착장의 하우스보트에서 크레이튼과 함께 살면서 강둑에서 자란 쐐기풀을 먹고 있었다.[35][36] 데빈이 이 연극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오스본과 대화하기 위해 하우스보트까지 노를 저어 가야 했다.[37][38] 이 연극은 토니 리처드슨이 연출했고, 케네스 헤이그, 메리 유어, 앨런 베이츠가 출연했다.[39] 극장의 홍보 담당자 조지 피어론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홍보하면서 "성난 젊은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40]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첫날 밤에 참석한 비평가 대부분은 이 작품이 실패작이라고 느꼈다.[41] 그러나 케네스 타이넌과 해럴드 홉슨의 긍정적인 평가와 2막의 TV 방송 덕분에 관심이 생겼고, 이 연극은 리릭 극장(해머스미스)과 브로드웨이 극장으로 성공적으로 옮겨졌으며, 나중에는 모스크바까지 순회 공연을 했다.[42][43][44] 1956년 5월 8일에 초연이 이루어져 극단과 일반 관객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킹슬리 에이미스, 앨런 실리토, 아놀드 웨스커 등과 함께 앵그리 영 맨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앵그리 영 맨'이라는 명칭 자체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유래했다. 1959년 5월에는 리처드 버튼과 메리 유어가 주연을 맡은 영화 버전이 개봉되었다.[45] 이 연극으로 오스본은 명성을 얻었고,[46] 1956년 가장 촉망받는 극작가로 이브닝 스탠다드 드라마 어워드를 수상했다.[47]

제작 과정에서 당시 결혼한 오스본은 (에일린) 메리 유어와 관계를 시작했고, 1957년 유어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 파멜라 레인과 이혼했다.[48]

3. 3. 1950년대 후반 ~ 1960년대

배우로 극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1956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로 큰 주목을 받았고 영국 연극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138] 이 작품은 전후 영국의 답답한 사회에 대한 하층 계급의 분노를 주인공 지미 포터를 통해 보여주면서, 형식을 중시하던 기존의 영국 무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생하고 통렬한 표현으로 성공을 거두었다.[138]

1957년에는 뮤직홀과 연예인의 세계를 다룬 작품 연예인(演藝人)을 발표했지만, 로렌스 올리비에의 뛰어난 연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내용과 브레히트식의 비사실적인 구조를 결합하는 데 실패하여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50] 하지만, 로열 코트 극장의 예술 감독인 조지 데빈은 올리비에에게 미완성된 ''The Entertainer'' 대본을 보냈고, 올리비에는 실패한 뮤직홀 공연자 아치 라이스 역을 맡아 로열 코트와 웨스트 엔드에서 성공적인 연기를 펼쳤다.[50] ''The Entertainer''는 쇠퇴해 가는 뮤직홀 전통과 초기 로큰롤에 의한 그 쇠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1956년 11월 수에즈 위기 동안 드러난 영국 제국의 쇠퇴하는 영향력과 미국의 증가하는 영향력에 대한 논평을 제시했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52]

1959년에는 타블로이드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한 뮤지컬 폴 슬릭키의 세계를 발표했지만 실패했고,[53] 1960년에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연극 ''A Subject of Scandal and Concern''을 발표했다.[54][55] 1962년에는 ''The Blood of the Bambergs''와 ''Under Plain Cover''로 구성된 2부 연극 ''Plays for England''를 발표했다.[56]

1961년에는 마르틴 루터의 삶을 그린 사극 루터를 발표하여 대표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되찾았고, 브로드웨이로 옮겨져 토니상을 받았다.[57][58] 1964년에는 허용될 수 없는 증언을 발표했다.[57] 이 작품은 삶에 대한 환멸과 절망으로 자신을 파괴해 가는 변호사의 심리를 분석하여 단순한 사회 비판을 넘어 작가의 철학을 보여주었다.

1963년 영화 ''톰 존스''의 각본을 각색하여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59] 1965년 연극 ''나에게 조국을''은 오스트리아의 레들 사건을 바탕으로 동성애와 간첩 행위를 다루었으며, 상원 의장의 연극 검열 시스템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60]

''나에게 조국을''과 ''The Hotel in Amsterdam'' (1968년)은 모두 ''이브닝 스탠다드'' 올해의 최고 연극상을 수상했다.[61] ''The Hotel in Amsterdam''은 폭군적인 영화 제작자에게서 도망친 세 쌍의 연예인 커플이 호텔 스위트룸에 모이는 이야기를 다룬다.[62] 오스본의 전기 작가 존 헤일페른은 영화 제작자가 감독이자 제작자인 토니 리차드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63]

3. 4. 1970년대 이후

1970년대 존 오스본의 희곡에는 랄프 리처드슨이 출연한 《수에즈 서쪽》, 1975년작 《내 낡은 시가의 종말》, 프랭크 핀레이가 출연한 ''Watch It Come Down''이 포함되었다.[64] 연극 역사가 필리스 하트놀은 이 시기 오스본의 작품이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고 썼고, 그의 동료 극작가 앨런 베넷은 ''Watch It Come Down'' 초연 당시 "얼어붙는 당혹감"을 기억했지만, 리처드 엘먼은 초기 공연을 검토하면서 의도치 않은 관객의 웃음을 알아차렸다.[65][66][67]

이 시대 그의 작품 중 가장 혹평을 받은 작품은 줄거리가 없고, 노부인이 하드코어 포르노 카탈로그를 장시간 낭독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A Sense of Detachment''(1972)였을 것이다. 이 연극의 일부는 관객 속에 배우를 심어놓고 항의하는 척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실제 야유를 유발하기 시작하자, 배우 레이첼 켐슨이 객석으로 뛰어들어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Financial Times''의 한 대표적인 평론에서는 "이것은 확실히 그의 연극 경력의 종말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1][68][69]

그 10년 동안 오스본은 영화 ''겟 카터''(1971)에서 갱스터 시릴 키니어 역을 맡았다.[55][70] 이후, 그는 ''내일은 오지 않는다''(1978)와 ''플래시 고든''(1980)에 출연했다.[70]

오스본의 후기 공적 이미지는 1950년대 그의 '분노한 젊은이' 모습과는 달랐다. 1986년부터 오스본과 그의 아내 헬렌은 슈롭셔 시골의 클런턴 근처 The Hurst에서 살았다.[71] 그의 삶은 점차 구식의 시골 신사의 모습을 닮아갔다.[72] 그는 젊었을 때 경멸했던 보수적인 영국 잡지 ''더 스펙테이터''에 일기를 썼다.[73][74] 그는 정원을 일반에 공개하여 지역 교회 지붕을 위한 기금을 모았고, 목사가 공동기도서를 복원하지 않으면 이 기금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오스본은 1974년경 잉글랜드 성공회로 돌아갔다).[75] 페르디난드 마운트는 성공회 의식에 대한 이러한 헌신과 지미 포터가 교회 종소리에 대해 분노하는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오프닝을 대조한다.[76] 2003년에 오스본의 저택은 아본 재단에 의해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스 공간으로 개방되었다.[77]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오스본은 두 권의 자서전 《더 나은 부류의 사람》(1981)과 《거의 신사》(1991)를 출판했다. 이 책 중 첫 번째 책에 대한 서평에서 앨런 베넷은 "매우 즐겁고, 대단한 열정으로 쓰여졌으며, 오스본은 '무죄 증거' 이후 어떤 희곡보다 더 좋은 평을 받았다"고 썼다.[1] 《더 나은 부류의 사람》은 1985년 템스 텔레비전에 의해 영화화되었으며, 에일린 앳킨스와 앨런 하워드가 그의 부모 역을, 게리 카펠린과 닐 맥퍼슨이 오스본 역을 맡았다.[78] 이 작품은 프리 이탈리아 후보에 올랐다.

오스본의 마지막 희곡은 《데자뷰》(1992)였으며, 이는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속편이었다. 그의 다양한 신문 및 잡지 기고문은 《빌어먹을 너, 잉글랜드》(1994)라는 제목의 모음집으로 출판되었으며,[79] 그의 두 권의 자서전은 《뒤돌아보기 – 결코 설명하지 말고, 결코 사과하지 마라》(1999)로 재발행되었다.[76]

4. 사생활

오스본은 많은 염문을 뿌렸으며, 아내와 애인을 자주 학대했다.[102] 그는 다섯 번 결혼했는데, 마지막 결혼을 제외하고 모두 불행한 결혼 생활이었다. 처음 네 번의 결혼은 잦은 외도와 파트너 학대로 얼룩졌다.[102] 그는 아내 셋보다 오래 살았고, 첫 번째 아내와 마지막 아내만 살아남았다.[76] 197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어진 그의 마지막 결혼은 저널리스트 헬렌 도슨과 맺어졌다.[24]

오스본은 자서전 ''A Better Class of Person''에서 첫 번째 부인 패밀라 레인에게 즉각적이고 강렬한 매력을 느꼈다고 묘사한다. 두 사람은 모두 브리지워터의 연극단원이었다.[27]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앨리슨 포터는 패밀라를 모델로 했다.[27] 레인과 오스본은 웰스에서 결혼했고, 런던 크롬웰 로드에서 결혼한 부부로서 첫날밤을 보냈다.[110] 1957년 4월, 오스본은 그의 간통을 이유로 레인과 이혼했다.[111]

오스본은 1956년 메리 유어와 관계를 시작했다. 그는 유어의 안정적인 가정 환경과 그녀의 가족 관계에 대해 질투심을 느꼈다. 양쪽 모두에게 외도가 있었고, 유어는 결국 오스본을 떠나 로버트 쇼에게 갔다. 오스본은 그녀가 자신을 떠난 후 그녀를 방문하여 쇼에게서 얻을 네 명의 아이 중 첫째를 임신했을 때 그녀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묘사했다. 그녀의 1975년 이른 죽음에 대해 "운명은 그녀를 클라이드 강의 잔잔한 물결에 의해 더 잘 억제될 수 있었던 삶으로부터 그렇게 무의미하게 끌어냈다."라고 말했다.[114]

오스본은 페넬로페 길리엇과 7년 동안 함께 지냈고, 그중 5년은 결혼 생활을 했으며, 그의 유일한 친자녀인 놀란의 부모가 되었다.[119] 오스본은 딸과 학대적인 관계를 가졌고, 그녀가 17세가 되자 집에서 내쫓았으며, 그 후 다시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120] 둘 다 알코올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결혼 생활의 갈등으로 오스본은 그녀 몰래 여러 번 바람을 피웠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미래 아내인 질 베넷과의 관계였다.

오스본은 배우 질 베넷과 9년간 불안정한 결혼 생활을 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상호 학대로 변질되었다.[69] 베넷은 1990년 자살했다.[69][102] 그는 베넷에 대해 "그녀는 내가 만난 가장 사악한 여자였다"고 말하며 그녀의 자살에 공개적으로 경멸을 표했다.[124]

헬렌 도슨은 과거 옵저버의 예술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였다. 오스본의 이 마지막 결혼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전의 어떤 결혼보다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4년 사망할 때까지 도슨은 오스본의 유산을 보존하고 홍보하기 위해 노력했다.[128] 오스본은 빚에 허덕이며 사망했고, 도슨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미안해"였다.[129]

5. 정치적 성향 및 사회적 관점

존 오스본은 자서전 ''A Better Class of Person''에서 학생 시절 사회주의에 대한 정서적 매력을 느꼈고, 가장 친한 친구들과 함께 "모두 지역 노동당 회의에 참석"했다고 묘사했다.[90] 그는 젊은 언론인 시절 사무실에 정기적으로 ''데일리 워커''(현 모닝 스타)를 가져감으로써 동료들을 소외시키기도 했다.[91][92] 1957년에는 선언이라는 선집에서 군주제를 비판하며 "왕실을 '국민의 쓰레기'"라고 칭했다.[93]

그는 크리스마스 섬 폭발과 영국 언론의 맹목적인 지지 반응에 항의했다.[94] 1959년 핵군축 운동(CND)에 가입했고, 1960년대 초에는 핵무기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 불복종에 참여한 100인 위원회의 회원이었다.[18][95]

1961년 베를린 장벽 건립 직후, 좌익 잡지 ''트리뷴''에 "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고하여 핵 확산 책임자들을 비판하며 "젠장, 영국"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96][97] 이 편지는 논란을 일으켰는데, 보수 언론인 페레그린 워스트혼은 우려를 표명한 반면, 노동조합원 잭 존스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나 환호해야 한다"고 옹호했다.[98][99][97]

그러나 오스본은 노동당 대표 휴 게이츠켈과 보수당 총리 해럴드 맥밀런을 모두 비난하며, "두 괴물 중 하나에게 강간을 당하는 것보다 불임이 낫다"고 언급하며 다음 선거에서 노동당에 투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00][97][101] 그의 연극 ''현재 시간''(1968)에는 여성 노동당 의원을 조롱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102] 비평가들은 ''수에즈 서쪽''에서 제국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를 발견했으며,[57][69] 1970년대에는 에녹 파월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103] 전기 작가 마이클 래트클리프는 "그는 자유주의적이고 조직적이지 않은 우파로 흘러갔다"고 평가했다. 데이비드 헤어는 "열정에서 편견으로 넘어갔다"고 비판했다.[18][104] 여러 평론가들은 오스본의 작품에서 초창기부터 보수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지적했다.[105][76][103] 1957년, 케네스 타이넌은 ''The Entertainer''에서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과거에 대한 "깊이 잠재된 향수"를 발견했다.[106]

6. 사망

1987년 심각한 간 부전을 겪은 후 오스본은 당뇨병을 앓게 되어 하루에 두 번 인슐린 주사를 맞았다. 1994년 12월 24일, 슈롭셔주 크레이븐 암스 인근 클런턴에 있는 자택 더 허스트에서 당뇨병 합병증으로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1] 그는 슈롭셔주 클런에 있는 성 조지 교회 묘지에 묻혔다. 2004년에 사망한 그의 마지막 부인 헬렌 도슨도 그의 옆에 묻혔다.

7. 작품 세계

존 오스본은 배우로서 경력을 시작하여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1956)를 통해 영국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64] 이 작품은 전후 영국의 경직된 사회에 대한 하층 계급의 분노를 주인공 지미 포터를 통해 표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이를 강렬하고 통렬한 웅변으로 승화시킨 점은 이전 영국 무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였다.

이후 발표된 <연예인(演藝人)> (1957)은 뮤직홀과 연예인의 세계를 다룬 작품으로, 로렌스 올리비에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내용과 브레히트식의 비사실적인 구조의 결합 실패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또한, 저널리즘의 잘못된 가치와 그 속의 공허한 인간들을 비판한 뮤지컬 <폴 슬릭키의 세계> (1959)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스본은 브레히트류의 사극 <루터(Luther)> (1961)를 통해 작가로서의 명성을 회복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허용될 수 없는 증언> (1964)은 삶에 대한 환멸과 절망으로 자신을 파괴해 가는 변호사의 심리를 분석한 작품으로, 단순한 사회 비판을 넘어 작가의 철학적 성장을 보여주었다.

오스본은 <애국자> (1965)에서 동성애자 스파이의 파멸을 다루었으며, <현재> (1968)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암스테르담의 호텔> (1968)은 <현재>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2년 공연된 <초연감(超然感)>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그의 끊임없는 창조적 에너지를 보여주었다.

1970년대 오스본의 희곡에는 랄프 리처드슨이 출연한 ''수에즈 서쪽'', 1975년작 ''내 낡은 시가의 종말'', 프랭크 핀레이가 출연한 ''Watch It Come Down'' 등이 있다.[64] 연극 역사가 필리스 하트놀은 이 시기 오스본의 작품이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65]

오스본의 작품 중 가장 혹평을 받은 작품은 ''A Sense of Detachment''(1972)로, 노부인이 하드코어 포르노 카탈로그를 낭독하는 장면 등이 등장하여 논란이 되었다.[1][68][69]

오스본은 말년에 두 권의 자서전 ''더 나은 부류의 사람''(1981)과 ''거의 신사'' (1991)를 출판했다. 그의 마지막 희곡은 ''데자뷰''(1992)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속편이었다.

다음은 존 오스본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제목종류연도비고
The Devil Inside Him연극1950스텔라 린든과 함께
The Great Bear연극1951자유시, 미공연
개인적인 적연극1955앤서니 크레이튼과 함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연극1956
연예인연극1957
조지 딜런을 위한 비문연극1958앤서니 크레이튼과 함께[134]
폴 슬리키의 세계연극1959
A Subject of Scandal and ConcernTV1960
루터연극1961
밤버그의 피연극1962
평범한 은폐 아래연극1962
톰 존스각본1963
무죄 증거연극1964
나를 위한 애국자연극1965
A Bond Honoured연극1966로페 데 베가La fianza satisfecha를 각색한 단막극
The Hotel in Amsterdam연극1968
Time Present연극1968
더 차지 오브 더 라이트 브리게이드각본1968무명[135]
무죄 증거각본1968자신의 희곡을 각색
올바른 전망TV1970
West of Suez연극1971
A Sense of Detachment연극1972
The Gift of FriendshipTV1972
헤다 가블러연극1972입센 각색
A Place Calling Itself Rome연극1973코리올라누스 각색, 미공연
Ms, Or Jill And JackTV1974
The End of Me Old Cigar연극1975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연극1975와일드 각색
Almost A VisionTV1976
Watch It Come Down연극1976
Try A Little Tenderness연극1978미공연
Very Like A WhaleTV1980
'Youre Not Watching Me, Mummy''TV1980
더 나은 계층의 사람1981자서전 1권
더 나은 계층의 사람TV1985위의 TV 버전.[1]
신이 턴브리지 웰스를 썩게 하소서!TV1985
아버지연극1989스트린드베리 각색
Almost a Gentleman1991자서전 2권
데자뷰연극1992
잉글랜드, 나의 잉글랜드TV1995오스본의 각본은 그가 사망할 당시 미완성이었으며, 찰스 우드가 완성했다.[136][55]


8. 유산 및 영향

오스본은 어린 시절 자신의 집을 "책이... 거의 완전히 무시되는 곳"이라고 묘사했다.[80] 그가 꼽은 역할 모델 중 한 명은 문학가가 아닌 대중적인 연예인이었다. 오스본은 코미디언 맥스 밀러의 열렬한 팬이었으며,[81][82] 그와 그 사이에 유사점을 발견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권위적으로 말했듯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영향"이 아니라, 음악 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The Entertainer''에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했다.[84]

오스본의 작품은 영국 연극을 변화시켰다.[85] 그는 연극을 다시 예술적으로 존경받게 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전 세대의 형식적인 제약을 벗어던지고, 대중의 관심을 다시 언어, 연극적 수사, 그리고 정서적 강렬함으로 돌렸다. 그는 젊은 시절에 '어떤 경우에도 가시를 걷어차는 것이 내 의무'라고 결심했다.[86] 그는 연극을 평범한 사람들이 계급 장벽을 허물 수 있는 무기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희곡이 진정한 기쁨과 고통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데이비드 헤어는 추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스본은 연극계에 실제로 변화를 가져왔고, 에드워드 올비마이크 리와 같은 극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작품과 같은 진정성과 독창성은 규칙보다는 예외로 남을 것이다. 이는 오스본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헤이링 아일랜드에서 햄릿 역할을 했던 사람보다 연극의 저속함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88] 1992년 그는 영국 작가 협회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1][89]

9. 작품 목록

존 오스본의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연극, TV, 각본, 책을 포함한다.

제목종류연도비고
The Devil Inside Him연극1950스텔라 린든과 함께
The Great Bear연극1951자유시, 미공연
개인적인 적연극1955앤서니 크레이튼과 함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연극1956
연예인연극1957
조지 딜런을 위한 비문연극1958[134]앤서니 크레이튼과 함께
폴 슬리키의 세계연극1959
A Subject of Scandal and ConcernTV1960
루터연극1961
밤버그의 피연극1962
평범한 은폐 아래연극1962
톰 존스각본1963
무죄 증거연극1964
나를 위한 애국자연극1965
A Bond Honoured연극1966로페 데 베가La fianza satisfecha를 각색한 단막극
The Hotel in Amsterdam연극1968
Time Present연극1968
더 차지 오브 더 라이트 브리게이드각본1968무명[135]
무죄 증거각본1968자신의 희곡을 각색
올바른 전망TV1970
West of Suez연극1971
A Sense of Detachment연극1972
The Gift of FriendshipTV1972
헤다 가블러연극1972입센 각색
A Place Calling Itself Rome연극1973코리올라누스 각색, 미공연
Ms, Or Jill And JackTV1974
The End of Me Old Cigar연극1975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연극1975와일드 각색
Almost A VisionTV1976
Watch It Come Down연극1976
Try A Little Tenderness연극1978미공연
Very Like A WhaleTV1980
'Youre Not Watching Me, Mummy''TV1980
더 나은 계층의 사람1981자서전 1권
더 나은 계층의 사람TV1985위의 TV 버전.[1]
신이 턴브리지 웰스를 썩게 하소서!TV1985
아버지연극1989스트린드베리 각색
Almost a Gentleman1991자서전 2권
데자뷰연극1992
잉글랜드, 나의 잉글랜드TV1995오스본의 각본은 그가 사망할 당시 미완성이었으며, 찰스 우드가 완성했다.[136][55]



아래는 오스본의 주요 희곡 목록이다.


  •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 1956)
  • 『연예인』(The Entertainer, 1957)
  • 『루터』(Luther, 1961)
  • 『무죄 증거』(Inadmissible Evidence, 1964)
  • 『나를 위한 애국자』(A Patriot for Me, 1965)

9. 1. 영화

제목연도역할비고
첫사랑1970마이다노프
회장의 아내1971버나드 하우
겟 카터1971시릴 키니어[55][70]
내일은 없다1978라인[70]
플래시 고든1980아보리안 사제[7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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