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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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돈이는 북송 시대의 유학자로,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으며, 본명은 돈실이었으나 황제의 이름과 같아 돈이로 고쳐졌다. 그는 정호와 정이 형제를 가르쳤으며, 그의 사상은 주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주돈이는 『태극도설』과 『통서』를 저술하여 우주론과 도덕론을 제시했으며, 특히 '태극'과 '성(誠)' 개념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 본성의 '성(誠)'을 통해 누구나 성인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송대 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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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돈이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주돈이 (周敦頤) |
| 본명 | 주돈실 (周敦實) |
| 자 | 모숙 (茂叔) |
| 시호 | 주렴계 (周濂溪) |
| 국적 | 중국 |
| 출생 | 1017년 |
| 사망 | 1073년 (56세) |
| 학문 | |
| 분야 | 성리학, 유교 철학 |
| 사상 | 태극도설, 무극이태극 |
| 사상적 배경 | |
| 관련 학파 | 신유학 |
| 영향 | |
| 영향 받은 인물 | 정호 정이 장재 소옹 주희 |
| 주요 저서 | |
| 저서 | 태극도설 |
| 참고 | |
| 관련 항목 | 백록동서원 |
2. 생애
본명은 돈실(敦實)이라고 하였으나 그 때의 황제 북송 영종과 동명이어서 돈이(敦頤)로 고쳤다.[9] 아버지는 하주(賀州) 계령현(桂嶺縣)(현재의 황서성에 속함)의 지사(知事)였고,[9]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9] 주돈이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일가인 용도각(龍圖閣) 대학사(大學士) 정향(鄭向)의 집에서 자랐다.[9]
북송 인종(재위 1022-1063) 경우(景祐) 3년(1036년)에 그는 젊은 나이(20세)로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이어서 남안(南安)에 사법관(司法官)으로 부임하였다.[9] 그 후 주로 각 현(顯)의 지사를 역임하여 지남강군(知南康軍)을 마지막으로 57세에 세상을 떠났다.[9]
그가 남안(南安)에 있을 때에 정향(程珦)이라는 사람이 같은 관리로서 부임했다.[9] 정향은 주돈이의 인품과 학문에 경의를 표하고 친하게 교제했으며, 자신의 두 아들을 주돈이에게 보내 배웠다.[9] 이들이 정호(1032-1085)와 정이(1033-1107) 두 형제였다.[9]
1017년 현재 중국 후난성 영주시 영도현(道州 영도현)에서 태어난 주돈이는 본래 이름이 주돈석(周敦實)이었다. 학관 가문에서 자란 그는 1063년 송 인종(宋英宗)의 이름에 있는 글자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4세에 삼촌인 정상(鄭翔)에게 길러졌다. 삼촌의 도움으로 관직에 첫 발을 내디뎠다. 관료 생활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진사(進士) 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그가 역임한 직책은 다음과 같다.
| 기간 | 직책 |
|---|---|
| 1040년 | 현 지방 기록 보관원 |
| 1046년 ~ 1054년 | 여러 지역의 현령 |
| 1061년 ~ 1064년 | 지방 직원 감독관, 교육국 교수 겸 부현감 |
송나라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주돈이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평가받는다.[9] 장재(1020-1077)와 함께 주돈이의 저술인 《태극도설》과 《통서》에 나타난 깊은 사색은 정호(1032-1085)·정이(1033-1107) 형제(2정자)를 통해 이어져 송나라 시대 도학(道學)의 방향을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9][10] 주돈이의 저술은 《주자전서》 7권에 수록되어 있다.[9]
그는 죽기 1년 전 마지막 직책에서 사임했다. 1073년 장시성(江西省) 노산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후에는 은퇴 후 집 근처 연(蓮) 시냇물을 기리는 이름인 주련희(周濂溪)로 흔히 불렸다. 정이에게 "가난한 선(禪) 친구"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1200년에 원공(元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주돈이의 자손들은 오경박사(五經博士, Wǔjīng Bóshì) 칭호를 받았다.[1][2][3][4]
1452년, 맹자의 56대손 맹희문(孟希文, Meng Xiwen)과 안회의 59대손 안희혜(顔希惠, Yan Xihui)에게 오경박사 칭호가 수여되었고, 1456년에서 1457년 사이에는 주돈이의 12대손 주면(週冕, Zhou Mian), 정호와 정이 형제의 17대손 정극인(程克仁, Chen Keren)에게 같은 칭호가 수여되었다. 1539년에는 증자의 60대손 증질취(曾質粹, Zeng Zhicui)가, 1622년에는 장재의 자손이, 1630년에는 소옹의 자손이 같은 칭호를 받았다.[5][6]
성리학의 시조이자 남송의 주희에게 존경받았다. 마찬가지로 주희가 높이 평가한 정호·정이는 소년 시절 주돈이에게 배웠다고 전해진다. 생전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주희가 전개한 도통론에서 공자·맹자의 연장선상에 주돈이를 둠으로써, 유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받았다.
3. 사상 및 영향

주돈이는 오행이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다섯 가지 도덕적 원리와 직접적으로 대응한다고 보았다.
주돈이는 인성론에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과는 달리, 당나라 한유의 성삼품설과도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태극도설》과 《통서》에서 각 개인의 근본에 “태극”에 통하는 “성(誠)”이 있으며, 학문을 통해 이를 연마하면 성인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학문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송나라 시대 사대부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주돈이는 그의 조카인 정이와 정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정씨 형제는 어릴 적 주돈이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후 정주학파를 창시하여 700년 이상 중국 철학을 지배하였다. 주돈이는 정씨 형제의 저술에 그의 공헌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주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주희는 공자 이후 가장 위대한 유학자 중 한 명으로, 주돈이를 송나라의 첫 번째 위대한 성인으로 칭송하며 그의 무극 개념을 높이 평가했다.
주돈이는 생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자연과 친밀한 인물로 기억된다. 많은 유학자들은 그를 "진실성"이라는 덕목을 구현한 인물로 평가하며, 하늘의 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녔다고 믿었다. 태극도 기호는 주돈이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현재는 (변형된 형태로) 음양의 중국 개념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기호로 사용되고 있다.
주돈이는 성리학의 시조이자 남송의 주희에게 존경받았다. 주희가 높이 평가한 정호·정이 형제는 소년 시절 주돈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주희는 도통론에서 공자·맹자의 학통을 주돈이가 이었다고 주장하여 유학사에서 주돈이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3. 1. 태극도설
주돈이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태극도설》과 《통서》가 있다. 《태극도설》은 우주론을, 《통서》는 도덕론을 설명하고 있다.[11]
《태극도설》은 태극도와 도면의 설명으로 되어 있다.[12] 송대 도학(道學)에서 형이상학적 사유와 도덕론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였으며,[12] 이후 학자들은 이 책을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과 사색을 하였다.[12] 주자와 육상산의 논쟁도 《태극도설》의 첫 문장인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무극이면서 태극)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2]
『태극도설』(太極圖說, 태극도에 대한 설명)은 1175년 주희(朱熹)와 여조견(呂祖謙)이 편찬한 성리학 문집 『근사록』(近思錄)의 서두에 실렸다. 주돈이는 유교 윤리와 『주역』(易經)의 개념을 도가적 자연주의와 융합하여 "다수는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하나는 궁극적이다"라는 형이상학을 발전시켰다. 이는 형이상학과 윤리가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한 11세기 중국 최초의 저술이자, 태극도 또는 "음양 기호" 개념을 탐구한 최초의 주요 중국 저술이었다.
주돈이의 창조 이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태초에 태극(太極, 존재의 위대한 궁극)이 있었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무극(無極, 비존재의 궁극)과 동일했다. 태극 내부의 풍부한 에너지로 인해 움직이기 시작하여 양(陽, 긍정적인 우주적 힘)을 생성했다. 양의 활동이 한계에 도달하자 고요함으로 돌아갔다. 고요함을 통해 음(陰, 부정적인 우주적 힘)이 생성되었다. 고요함이 한계에 도달하자 움직임(양)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음과 양은 서로 생성했다. 그런 다음 음과 양의 결합을 통해 음과 양의 변화가 일어나고 오행(오원소)인 금, 목, 수, 화, 토가 생겨났다. 이 다섯 가지 원소는 구체적인 사물이라기보다는 물질적 원리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사물의 공통적인 기반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음과 양의 상호작용은 오행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끝없는 변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생성한다."[7]
주돈이는 인간이 이러한 모든 자질과 힘을 최고의 수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지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다.
『주역』 계사상전에 있는 "주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느니라(易有太極、是生兩儀、兩儀生四象、四象生八卦)"라는 개념과 음양사상·오행사상을 관련지어 설명하고, 창안한 도상을 제시하였다. 도상을 설명하는 글 자체는 짧아 약 250자 정도이다. 도상에 따르면, "태극"이 만물의 근원이며, 음양과 오행의 상호 작용에 의해 만물이 생성된다고 한다.
3. 2. 통서
주자의 설에 의하면 《통서》는 본래 《역통》(易通)이라고 호칭되어 《태극도설》과 병행하여 쓰여졌다고 한다.[11]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우주론을 논술하고 있으며 《통서》에서는 도덕론을 설명하고 있다.[11]
도덕론으로서의 《통서》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것은 성(誠)이다.[11] 주돈이는 성을 현상(現象) 세계의 모든 변화 교체에 잠재하는 참된 기능이라고 하는 동시에 그것을 인간에 있어서의 도덕의 근본 규범으로 간주하였다.[11] 《통서》는 주자에 의해 주해되면서 송대 성리학의 준거해야 할 고전이 되었다.[11]
《통서》(通書, 포괄적인 책 또는 주역(周易)을 관통하다)는 유교 교리에 대한 재해석이었다. 이는 성리학 윤리의 기반이 되었다. 이는 성인(聖人)이 예(禮), 인(仁), 의(義), 지(智), 신(信), 정(靜), 성(誠)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우수한 인간이라고 명시했다. 성(誠)은 도덕적 본성의 기반이므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자아를 완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통서》는 원리, 본성, 운명을 함께 이야기했는데, 이는 유교 사상의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그는 자연에 대한 도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돈이가 풀을 너무 사랑해서 베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인간이 자연의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무위(無爲)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개념을 강화한다. 주돈이는 삶의 가장 좋은 특징은 더러운 물에서 자라는 순수한 연꽃과 같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기서 연꽃은 군자의 자연적 상응물이다. 그는 도교, 불교, 유교에서 많은 사상을 끌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통서》는 《태극도설》을 바탕으로 도덕 등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주돈이는 “태극(太極)”을 유학의 중요 경전인 《중용》(中庸)에서 제시되는 “성(誠)”과 연결시켰다. 사람의 근본에 “성(誠)”이 있는 상태는 사람의 근본에 “태극(太極)”이 있는 상태와 같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사람의 근본에 “성(誠)”이 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주변 상황을 적절히 판단하지 못하면 잘못된 행동을 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사람이 사소한 징후를 앞두고 그 후에 일어날 전개를 정확히 예측·판단하고 적절한 선행을 하려면, 학문을 통해 자신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성인의 길로 통한다고 설파했다.
4. 저서
주돈이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태극도설》과 《통서》가 있다. 주자의 설에 의하면 《통서》는 본래 《역통》(易通)이라고 호칭되어 《태극도설》과 병행하여 쓰여졌다고 한다.[11]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우주론을 논술하고 있으며 《통서》에서는 도덕론을 설명하고 있다.[11]
《태극도설》은 태극도와 도면의 설명으로 되어 있다.[12] 송대의 도학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사유와 도덕론의 기본적 방향을 제시하였다.[12] 그 후의 학자는 거의 이 책을 읽고 여러 가지의 해석이나 사색을 하고 있다.[12] 주자와 육상산(陸象山)의 논쟁도 《태극도설》의 맨 처음에 나오는 문장인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무극이면서 태극)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사상을 집약하여 이루어졌다.[12]
도덕론으로서의 《통서》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것은 성(誠)이다.[11] 주돈이는 성을 현상(現象) 세계의 모든 변화 교체에 잠재하는 참된 기능이라고 하는 동시에 그것을 인간에 있어서의 도덕의 근본 규범으로 간주하였다.[11] 《통서》는 주자에 의해 주해되면서 송대 성리학의 준거해야 할 고전이 되었다.[11]
『태극도설』(太極圖說, 태극도에 대한 설명)은 1175년 주희(朱熹)와 여조견(呂祖謙)이 편찬한 성리학 문집 『근사록』(近思錄)의 서두에 실렸다. 주돈이는 유교 윤리와 『주역』(易經)의 개념을 도가적 자연주의와 융합하였다. 그는 "다수는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하나는 궁극적이다"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을 발전시켰다. 이는 형이상학 또는 우주론과 윤리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 11세기 중국 최초의 저술이자, 태극도 또는 "음양 기호" 개념을 탐구한 최초의 주요 중국 저술이었다.
『통서(通書)』(『포괄적인 책』 또는 『주역(周易)을 관통하다』)는 유교 교리에 대한 재해석이었다. 이는 성리학 윤리의 기반이 되었다. 이는 성인(聖人)이 예(禮), 인(仁), 의(義), 지(智), 신(信), 정(靜), 성(誠)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우수한 인간이라고 명시했다. 성(誠)은 도덕적 본성의 기반이므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자아를 완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애련설」은 『구문진보』에 수록되어 한문 교재로 잘 알려져 있다.
5. 평가
주돈이의 자손들은 오경박사(五經博士) 칭호를 받았다.[1][2][3][4] 1452년, 맹자의 56대손 맹희문과 안회의 59대손 안희혜에게 오경박사 칭호가 수여되었고, 1456년에서 1457년 사이에는 주돈이의 12대손 주면, 정호와 정이 형제의 17대손 정극인에게 같은 칭호가 수여되었다. 1539년에는 증자의 60대손 증질취가, 1622년에는 장재의 자손이, 1630년에는 소옹의 자손이 같은 칭호를 받았다.[5][6]
주돈이는 정이와 정호 두 조카를 제자로 두었는데, 이들은 어릴 적 주돈이에게서 잠시 수학하였다. 이후 형제는 정주학파를 창시하였고, 이 학파는 700년 이상 중국 철학을 지배하였다. 주돈이는 정씨 형제의 저술에 그의 공헌에 대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5. 1. 긍정적 평가
주돈이는 주희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주희는 공자 이후 가장 위대한 유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주희는 주돈이가 특히 무극 개념을 강조한 점을 들어 송나라의 첫 번째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생전에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자연과 친밀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많은 유학자들은 그가 "진실성"이라는 덕목을 구현한 인물이라고 믿었다. 그는 하늘의 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태극도 기호의 최초의 주요 대중화에도 주돈이의 공이 있는데, 이 기호는 (변형된 형태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음양의 중국 개념을 나타내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기호로 알려져 있다.[2]
성리학의 시조이자 남송의 주희에 의해 존경받았다. 마찬가지로 주희가 높이 평가한 정호·정이 형제는 소년 시절 주돈이에게 사사했다고 전해진다. 생전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주희가 전개한 도통론에서 공자·맹자의 연장선상에 주돈이를 둠으로써, 유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부여받았다.[3]
인간 본래의 성질에 대한 인성론은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에서 보이듯이 고대부터 많이 논의되어 왔다. 당나라의 한유는 성삼품설(사람을 상지, 중인, 하우로 나눈다는 생각)을 지지하고, 이 설에 근거하여 도덕론을 전개했지만, 주돈이의 생각은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태극도설』, 『통서』에서 각 개인의 근본에 “태극”에 통하는 “성(誠)”이 있다는 것, 각 개인의 학문을 통한 연찬이 성인의 길로 통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은 성삼품설과 달리, 모든 사람이 학문을 통해 성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견해는 기존의 귀족을 대신하여 송대부터 새롭게 흥기하는 사대부의 의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4]
6. 기타
1452년, 맹자의 56대손 맹희문(孟希文)과 안회의 59대손 안희혜(顔希惠)에게 오경박사 칭호가 수여되었고,[1][2][3][4] 1456년에서 1457년 사이에는 주돈이의 12대손 주면(週冕), 정호와 정이(정이형제)의 17대손 정극인(程克仁)에게 같은 칭호가 수여되었다. 1539년에는 증자의 60대손 증질취(曾質粹)가, 1622년에는 장재의 자손이, 1630년에는 소옹의 자손이 같은 칭호를 받았다.[5][6]
주돈이는 정이와 정호 두 조카에게 유학을 가르쳤는데, 이들은 훗날 정주학파를 창시하여 700년 이상 중국 철학을 지배하였다. 주돈이는 정씨 형제의 저술에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정주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주희는 공자 이후 가장 위대한 유학자로 꼽히는데, 주돈이의 무극 개념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송나라의 첫 번째 성인이라 칭송했다.
주돈이는 생전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자연과 가까운 인물로 기억된다. 많은 유학자들은 그를 "진실성"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평가하며, 하늘의 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녔다고 믿는다. 태극도 기호(음양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짐)를 대중화한 것도 주돈이의 업적이다.
「애련설」은 『구문진보』에 수록되어 한문 교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은 맑은 날씨의 바람과 달처럼 깨끗하고 상쾌한 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칭송하며 “인품이 매우 높고, 마음씨가 시원하여 광풍제월과 같다”라고 극찬한 데서 유래했다(『송사』 주돈이).[8]
참조
[1]
서적
Present Day Political Organization of Chin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04-15
[2]
웹사이트
P.494-5. Present Day Political Organization of China
http://www.forgotten[...]
2016-04-17
[3]
웹사이트
Present day political organization of China
https://archive.org/[...]
[4]
서적
Men of Letters Within the Passes: Guanzhong Literati in Chinese History, 907-1911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5]
학술지
The Ritual Formation of Confucian Orthodoxy and the Descendants of the Sage
https://www.research[...]
1996-08
[6]
학술지
The Ritual Formation of Confucian Orthodoxy and the Descendants of the Sage
https://www.jstor.or[...]
Cambridge University Press,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1996
[7]
서적
Arrington, 1999
[8]
웹사이트
光風霽月
https://dictionary.g[...]
[9]
백과사전
주돈이
[10]
백과사전
서명
[11]
백과사전
통서
[12]
백과사전
태극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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