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앙 1세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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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앙 1세는 포르투갈 국왕(1385-1433)으로, 사생아 출신으로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을 역임했다. 1383년 이복 형 페르난두 1세의 사망 이후 왕위 계승 분쟁(1383-1385년 포르투갈 공백기)을 겪으며 카스티야의 침공을 물리치고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영-포르투갈 동맹), 세우타를 정복하며 해외 확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주앙 1세는 학식이 풍부하고 자애로운 군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자녀들은 '빛나는 세대'로 불리며 포르투갈의 번영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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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1세 (포르투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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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
페드루 1세의 사생아로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테레사라는 여성이었다. 왕실 연대기 작가인 페르나웅 로페스에 따르면, 테레사는 갈리시아 귀족이었다. 18세기에 안토니우 카에타누 드 소자(António Caetano de Sousa)는 토르 두 톰부(Torre do Tombo)에서 16세기의 문서를 발견했는데, 그 문서에는 그녀의 이름이 테레사 로우렌수(Teresa Lourenço)로 기재되어 있었다. 1364년, 그리스도 기사단의 갈리시아 출신 단장 누누 프레이레 드 안드라데(Nuno Freire de Andrade)의 요청에 따라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1]
페르난두 1세가 1383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포르투갈은 왕위 계승 위기에 직면했다. 페르난두 1세의 딸 베아트리스가 카스티야의 후안 1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카스티야에 합병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러한 상황은 1383-1385년 포르투갈 공백기라는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3. 1383-1385년 위기와 즉위 과정
페드루 1세의 서자이자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주앙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리스본 시민들과 협력하여 베아트리스의 섭정이었던 레오노르 테레스의 총신을 제거하는 등 반(反) 카스티야 세력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385년 4월 6일, 코임브라에서 열린 포르투갈 코르테스는 주앙을 포르투갈의 왕으로 선언했다.[3] 이는 카스티야의 침공에 맞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후 주앙 1세는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 등의 활약에 힘입어 카스티야 군을 격파하고, 포르투갈의 왕위를 확고히 했다.[4]
1387년 2월 2일, 주앙 1세는 존 오브 곤트의 딸 필리파 랭커스터와 결혼하여 영-포르투갈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3]
3. 1. 왕위 계승 위기
페르난두 1세가 1383년 10월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유일한 딸이자 상속자인 베아트리스의 왕위 계승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베아트리스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결혼했지만, 포르투갈이 카스티야에 합병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중의 여론은 반대했다. 이로 인해 1383-1385년 포르투갈 공백기라는 군주가 없는 정치적 무정부 상태가 시작되었다.
1383년, 이복 형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베아트리스가 여왕으로 즉위하고, 그의 어머니 레오노르 테레스가 섭정이 되면서 레오노르와 귀족에 의한 전제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주앙 1세는 반 왕비파의 지지를 받아 포르투갈 왕국 내에서 세력을 구축했다. 전쟁에 지쳐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도시의 하층민과 기술자들의 반란이 베아트리스 즉위 전부터 각지에서 발발했고, 도시 하층민과 일부 귀족은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이익을 얻은 레오노르와 그녀의 총신인 아우렠 백작 안데이루를 악정의 원흉으로 적대시했다.
이러한 포르투갈의 혼란을 틈타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가 베아트리스의 사위라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대법관 알바루 파이스는 페드루 1세의 서자로 아비스 기사단 단장인 주앙(주앙 1세)을 설득하여, 일부 리스본 시민과 협력하여 아우렠 백작 안데이루를 살해했다. 1384년 1월 후안 1세는 베아트리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미겔 왕자(1384년 - 1385년)야말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레오노르는 산타렝까지 진군한 후안 1세에게 포르투갈의 통치권을 위임했고, 국내는 카스티야 왕국파와 주앙을 내세운 아비스파로 분열되었다.
카스티야군은 리스본을 포위했지만, 주앙 등은 이를 견뎌내 격퇴했고, 국민으로부터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레오노르 테레스는 섭정에서 물러났지만, 후안 1세에게 등을 돌린 것이 발각되어 토르데시야스의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3. 2. 아비스 기사단장 주앙의 등장
페르난두 1세가 1383년 10월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유일한 딸이자 상속자인 베아트리스의 왕위 계승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결혼했지만, 포르투갈이 카스티야에 합병될 수 있다는 우려에 여론은 반대했다. 이어서 1383-1385년 포르투갈 공백기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군주가 없는 정치적 무정부 상태였다.[1]
주앙은 페드루 1세와 테레사 사이에서 사생아로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페르나웅 로페스에 따르면, 테레사는 갈리시아 귀족이었다. 16세기의 문서에는 그녀의 이름이 테레사 로우렌수(Teresa Lourenço)로 기록되어 있다. 1364년, 그리스도 기사단의 갈리시아 출신 단장 누누 프레이레 드 안드라데(Nuno Freire de Andrade)의 요청에 따라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1383년, 이복 형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베아트리스가 여왕으로 즉위하고, 그의 어머니 레오노르 테레스가 섭정이 되면서 레오노르와 귀족에 의한 전제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주앙 1세는 반 왕비파의 지지를 받아 포르투갈 왕국 내에서 세력 기반을 구축했다. 전쟁에 지쳐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도시의 하층민과 기술자들의 반란이 베아트리스 즉위 전부터 각지에서 발발했고, 도시 하층민과 일부 귀족은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이익을 얻은 레오노르와 그녀의 총신인 아우렠 백작 안데이루를 악정의 원흉으로 적대시했다.
이러한 포르투갈의 혼란을 틈타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가 베아트리스의 사위라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대법관 알바루 파이스는 페드루 1세의 서자이자 아비스 기사단 단장인 주앙(주앙 1세)을 설득하여, 일부 리스본 시민과 협력하여 아우렠 백작 안데이루를 살해했다.
3. 3. 카스티야의 침공과 리스본 포위
1383년 이복 형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베아트리스가 여왕으로 즉위하고, 그의 어머니 레오노르 테레스가 섭정이 되면서 레오노르와 귀족에 의한 전제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주앙 1세는 반(反) 왕비파의 지지를 받아 포르투갈 왕국 내에서 세력 기반을 구축했다. 전쟁에 지쳐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도시의 하층민과 기술자들의 반란이 베아트리스 즉위 전부터 각지에서 발발했고, 도시 하층민과 일부 귀족은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이익을 얻은 레오노르와 그녀의 총신인 아우렠 백작 안데이루를 악정의 원흉으로 적대시했다.[3]
한편, 이러한 포르투갈의 혼란을 본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가 베아트리스의 사위라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대법관 알바루 파이스는 페드루 1세의 서자로 아비스 기사단 단장인 주앙(주앙 1세)을 설득하여, 일부 리스본 시민과 협력하여 아우렠 백작 안데이루를 살해했다. 1384년 1월 후안 1세는 베아트리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미겔 왕자(1384년 - 1385년)야말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레오노르는 산타렝까지 진군한 후안 1세에게 포르투갈의 통치권을 위임했고, 국내는 카스티야 왕국파와 주앙을 내세운 아비스파로 분열되었다.
카스티야군은 리스본을 포위했지만, 주앙 등은 이를 견뎌내 격퇴했고, 국민으로부터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기에 이르렀다.[4] 레오노르 테레스는 섭정에서 물러났지만, 후안 1세에게 등을 돌린 것이 발각되어 토르데시야스의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3. 4. 코임브라 의회와 주앙 1세의 즉위
1385년 4월 6일, 포르투갈 코르테스라고 불리는 왕국 평의회가 코임브라에서 열려 당시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주앙을 포르투갈의 왕으로 선언했다.[3] 이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카스티야에 대항하는 전쟁의 일환이었다. 같은 해 5월, 코임브라에서 개최된 코르테스 (신분제 의회)에서, 카스티야 군을 격퇴한 공적을 평가받아 주앙 1세는 포르투갈 왕으로 선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스티야의 왕 후안 1세 (카스티야)는 리스본을 정복하고 주앙 1세를 왕위에서 몰아내기 위해 다시 포르투갈을 침략했다. 후안 1세 (카스티야)는 프랑스 동맹 기병대를 이끌었고, 영국군은 아비스의 주앙 측에 섰다(백년 전쟁 참조). 주앙과 그의 치안관이자 유능한 지지자였던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1385년 8월 14일 결정적인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공격을 격퇴했다.[4] 같은 해 8월, 후안 1세가 다시 침공해 왔지만,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이를 크게 격파했다. 후안 1세는 퇴각했고, 카스티야군은 산타렝, 토르스 베드라스, 토르스 노바스를 포기했으며, 카스티야 편에 있던 포르투갈 귀족들이 주앙 1세에게 많은 다른 도시들을 넘겨주었다. 베아트리스 여왕은 퇴위하고, 2년여 동안 이어진 카스티야와의 전쟁, 그리고 포르투갈 내전은 종결되었다. 그 결과 포르투갈 왕위의 안정은 영구적으로 확보되었다.
1386년에 잉글랜드와 윈저 조약을 맺어 동맹을 맺었다. 이는 카스티야 왕국의 배후에 동맹국 프랑스가 있는 것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1387년에 카스티야 왕국과 첫 번째 휴전 협정이 맺어졌지만, 1396년부터 1397년에 걸쳐 일어난 소규모 충돌을 거쳐 수차례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1387년 2월 2일, 주앙 1세는 존 오브 곤트의 딸인 필리파 랭커스터와 포르투에서 결혼하여[3],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 결혼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영-포르투갈 동맹을 공고히 했다.
3. 5. 알주바호타 전투와 독립 수호
1385년 4월 6일,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 코르테스라고 불리는 왕국 평의회가 열려 당시 아비스 기사단장이었던 주앙을 포르투갈의 왕으로 선언했다.[3] 이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카스티야에 대항하는 전쟁의 일환이었다. 같은 해 8월, 후안 1세 (카스티야)가 이끄는 카스티야 군이 다시 침공해 왔지만, 주앙 1세와 그의 치안관이자 유능한 지지자였던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1385년 8월 14일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이들을 크게 격파했다.[4] 이 전투에서 백년 전쟁에 참전했던 영국군이 주앙 1세 측에 가담했고, 프랑스 군은 카스티야 측에 가담했다.
알주바호타 전투의 승리로 후안 1세 (카스티야)는 퇴각했고, 카스티야 군은 산타렝, 토르스 베드라스, 토르스 노바스를 포기했다. 또한 카스티야 편에 섰던 포르투갈 귀족들이 주앙 1세에게 많은 도시들을 넘겨주면서 포르투갈 왕위는 안정되었다.
1387년 2월 2일, 주앙 1세는 존 오브 곤트의 딸인 필리파 랭커스터와 포르투에서 결혼했다.[3] 이 결혼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영-포르투갈 동맹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치세
1386년 잉글랜드와 윈저 조약을 맺어 동맹을 강화했다. 1387년 2월 2일에는 이 동맹의 일환으로 존 오브 곤트의 딸 필리파와 포르투에서 결혼했다.[3]
1390년, 카스티야의 주앙 1세는 왕비 베아트리스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5] 이로써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정통 혈통의 경쟁자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주앙 1세는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며 왕국의 경제 발전과 영토 확장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1411년 카스티야 왕국과 "화목" 조약을 맺은 후,[5] 주앙 1세는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 1415년 항해왕자 엔히크와 함께 모로코 원정을 감행, 세우타를 점령했다. 이는 아프리카 해안 항해와 아프리카 내륙 무역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다.[5] 1419년에는 모로코의 반격으로부터 세우타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주앙 1세는 이 군사 행동을 십자군으로 인정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청했고,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8년 4월 4일 교황 칙서 ''Sane charissimus''를 발표하여 이를 승인했다.[6]
항해왕자 엔히크의 후원으로 아프리카 해안 탐험 항해가 조직되었다. 그 결과, 1417년 무인도였던 마데이라가, 1427년에는 아조레스 제도가 발견되어 모두 포르투갈 왕실 소유가 되었다.
당대 작가들은 주앙 1세를 재치 있고 권력 집중적인 인물이면서도 자애롭고 친절한 성품을 지녔다고 묘사한다. 종교 기사단의 수장으로서의 어린 시절 교육은 그를 중세 시대에 드물게 학식이 풍부한 왕으로 만들었다. 그의 지식과 문화에 대한 애정은 아들들에게 이어져, 이들은 포르투갈 역사가들에게 "빛나는 세대" (''Ínclita Geração'')라고 불린다.
4. 1. 잉글랜드와의 동맹 강화
1387년 2월 2일, 주앙 1세는 존 오브 곤트의 딸인 필리파 랭커스터와 포르투에서 결혼했다.[3] 이 결혼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영-포르투갈 동맹을 공고히 했다. 1386년에는 잉글랜드와 윈저 조약을 맺어 동맹을 강화했는데, 이는 카스티야 왕국의 배후에 있는 동맹국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4]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왕자들은 모두 뛰어난 인물로 성장했다.
4. 2. 카스티야와의 관계
1385년 코임브라에서 열린 코르테스 (신분제 의회)에서 주앙 1세는 카스티야 군을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아 포르투갈 왕으로 선출되었다.[5] 같은 해 8월, 후안 1세가 다시 침공했지만,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베아트리스 여왕은 퇴위하고, 2년여 동안 이어진 카스티야와의 전쟁 및 포르투갈 내전은 종결되었다.[5]카스티야 왕국의 배후에 동맹국인 프랑스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여 1386년 잉글랜드와 윈저 조약을 맺어 동맹을 강화했다.[5] 1387년에는 카스티야 왕국과 첫 번째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396년부터 1397년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한 후 여러 차례 휴전 협정이 갱신되었다.[5]
1387년 2월 2일,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존 오브 곤트의 딸 필리파와 포르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5] 이 결혼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뛰어난 왕자들이 태어났다.
1390년, 카스티야의 주앙 1세는 왕비 베아트리스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5] 이로써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정통 혈통의 경쟁자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주앙 1세는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며 왕국의 경제 발전과 영토 확장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1411년, 카스티야 왕국과 "화목" 조약을 맺어 측면의 위협을 제거한 후,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5]
4. 3. 세우타 정복과 해외 확장
1387년 2월 2일,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존 오브 곤트의 딸 필리파와 포르투에서 결혼했다. 1390년, 카스티야의 주앙 1세는 왕비 베아트리스 사이에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정통 혈통 경쟁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후 주앙 1세는 평화롭게 통치하며 왕국의 경제 발전과 영토 확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1411년, 카스티야 왕국과 "화목"을 맺어 측면의 위협을 제거하자, 적극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다. 1415년 포르투갈의 세우타 정복과 1419년 모로코의 반격으로부터 세우타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은 중요한 군사적 행동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아프리카 해안의 항해와 아프리카 내륙으로부터의 무역로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레콩키스타의 습격과 공격으로 양측 모두 포로가 생겼으며, 그들은 몸값을 지불하거나 노예로 팔렸다. 포르투갈 왕실은 이러한 관행을 북아프리카로 확대했다. 세우타 공격 이후, 국왕은 교황에게 이 군사 행동을 십자군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판결은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합법적으로 노예로 팔 수 있게 해줄 것이었다.[5] 주앙의 요청에 따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8년 4월 4일 교황 칙서 ''Sane charissimus''를 발표하여,[6] 무어인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영토를 국왕에게 확정했다. 항해왕자 엔히크의 후원 아래,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기 위한 항해가 조직되었다. 이로 인해 1417년에는 무인도인 마데이라가, 1427년에는 아조레스 제도가 발견되었으며, 모두 포르투갈 왕실의 소유가 되었다.
당대의 작가들은 주앙을 재치 있는 사람이자 스스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데 매우 열정적이지만 동시에 자애롭고 친절한 태도를 지녔다고 묘사한다. 종교 기사단의 수장으로서의 어린 시절 교육은 그를 중세 시대에 드물게 학식이 풍부한 왕으로 만들었다. 지식과 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의 아들들에게 전해졌으며, 그들은 종종 포르투갈 역사가들에 의해 "빛나는 세대"라고 불린다. 에두아르두는 미래의 국왕이자 시인이자 작가였고,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는 당대 가장 학식이 풍부한 공작 중 한 명이었으며, 비제우 공작인 항해 왕자 엔히크는 과학과 항해술 발전에 많은 투자를 했다. 1430년, 주앙의 유일한 생존 딸인 이사벨은 선량공 필리프와 결혼했으며, 그의 영토에서 매우 세련된 궁정 문화를 누렸으며, 용담공 샤를의 어머니였다.
4. 4. 항해 지원과 탐험 시대의 개막
1386년 잉글랜드와 윈저 조약을 맺어 동맹을 강화했다. 1387년 2월 2일에는 이 동맹의 일환으로 존 오브 곤트의 딸 필리파와 포르투에서 결혼했다.[5]1411년 카스티야 왕국과 화친 조약을 맺은 후, 주앙 1세는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 1415년 항해왕자 엔히크와 함께 모로코 원정을 감행, 세우타를 점령했다. 이는 아프리카 해안 항해와 아프리카 내륙 무역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다.[5]
주앙 1세는 이 군사 행동을 십자군으로 인정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청했고,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8년 4월 4일 교황 칙서 ''Sane charissimus''를 발표하여 이를 승인했다.[6]
항해왕자 엔히크의 후원으로 아프리카 해안 탐험 항해가 조직되었다. 그 결과, 1417년 무인도였던 마데이라가, 1427년에는 아조레스 제도가 발견되어 모두 포르투갈 왕실 소유가 되었다.
당대 작가들은 주앙 1세를 재치 있고 권력 집중적인 인물이면서도 자애롭고 친절한 성품을 지녔다고 묘사한다. 그의 지식과 문화에 대한 애정은 아들들에게 이어져, 이들은 포르투갈 역사가들에게 "빛나는 세대" (''Ínclita Geração'')라고 불린다.
5. 빛나는 세대와 자녀들
1387년 2월 2일, 주앙 1세는 포르투에서 랭커스터 공작 존 1세의 딸인 랭커스터의 필리파와 결혼했다.[7] 이 결혼으로 "빛나는 세대"라고 불리는 여러 명의 유명한 왕자와 공주(infante)들이 태어났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랭커스터의 필리파 (1360년 3월 31일 – 1415년 7월 19일; 1387년 2월 2일 결혼) | |||
인판타 블랑셰 | 1388년 7월 13일 | 1389년 3월 6일 | |
인판트 아폰수 | 1390년 7월 30일 | 1400년 12월 22일 | |
에두아르두 왕 | 1391년 10월 31일 | 1438년 9월 13일 | 포르투갈의 왕으로 즉위했다. |
인판트 페드루 | 1392년 12월 9일 | 1449년 5월 20일 | 코임브라 공작. 알파로베이라 전투에서 사망. |
인판트 엔히크 | 1394년 3월 4일 | 1460년 11월 13일 | 항해왕자(Henry the Navigator)로 알려짐. 비제우 공작이자 그리스도 기사단의 단장. |
인판타 이자벨 | 1397년 2월 21일 | 1471년 12월 11일 |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공작 부인이 됨. |
인판트 주앙 | 1400년 1월 13일 | 1442년 10월 18일 | 왕국의 콩스타블이자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할아버지. |
인판트 페르난두 | 1402년 9월 29일 | 1443년 6월 5일 |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 페스에서 포로로 사망. |
이네스 피레스 (1350년경–1400?) | |||
아폰수 | 1377년 8월 10일 | 1461년 12월 15일 | 사생아이며 초대 브라간사 공작. |
베아트리스 | 1380년경 | 1439년 11월 | 사생아. 아룬델 백작 토마스 피츠알란과 결혼하여 아룬델 백작 부인이 됨. 이후 헌팅던 백작 존 홀랜드와 결혼하여 헌팅던 백작 부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엑서터 공작이 됨. |
참조
[1]
문서
Rendered as ''Joam'' or ''Joham'' in Archaic Portuguese
[2]
웹사이트
John I, king of Portugal
https://www.britanni[...]
1998-07-20
[3]
서적
Spain and Portugal
https://books.google[...]
J. D. Morris
1906
[4]
웹사이트
Portugal
http://www.newadvent[...]
The Catholic Encyclopedia
1911-07-27
[5]
서적
Go-betweens and the Colonization of Brazil: 1500–160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exas Press
[6]
간행물
Prince Henry of Portugal and the African Crusade of the Fifteenth Century
https://archive.org/[...]
[7]
서적
Rainhas medievais de Portugal.
[8]
문서
John I, King of Portugal
Britannica
[9]
문서
Peter I, King of Portugal
Britannica
[10]
서적
Historia genealogica da casa real portugueza
https://archive.org/[...]
Lisboa Oc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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