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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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손왕은 백제의 왕족으로, 진사왕의 아들이자 근구수왕의 손자이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오진 천황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왕인과 함께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파하여 유학을 널리 알린 인물로 묘사된다. 일본에서는 그를 지종왕으로도 불렀으며, 후손에서 학자 왕진이 등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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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손왕 | |
---|---|
진손왕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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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석 (昔) |
이름 | 진손 (辰孫) |
재위 기간 | 291년 ~ 346년 |
신장 | 7척 |
부왕 | 흘해 이사금 |
배우자 | 아내 박씨(阿內朴氏) |
자녀 | 석우로 |
생애 | |
즉위 전 | 석씨 왕족 출신으로, 흘해 이사금의 아들 |
왕위 계승 | 291년에 왕위에 오름 |
업적 | 농업 장려 및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힘씀. |
사망 | 346년에 사망 |
능묘 | 미상 |
가족 관계 | |
부왕 | 흘해 이사금(訖解尼師今) |
배우자 | 아내 박씨(阿內朴氏) |
아들 | 석우로(昔于老) |
기타 | |
관련 인물 | 허황옥 (불교 전래 관련 설화) |
2. 생애
진손왕은 진사왕의 아들이자 근구수왕의 손자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제16대 진사왕 다음은 진손왕으로, “진손왕, 오진 조에 도래”로 되어 있다.[4] 그 다음은 태아랑왕이고, ‘해양군-오정군’으로 이어진다.[4] 할아버지 근구수왕이 백제 왕으로 있을 때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백제로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근구수왕은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왕인을 《논어 (論語)》 10권과 《천자문 (千字文)》 1권을 가지고 건너가게 하였다.[5] 이후 귀국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그는 왕인과 함께 서적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하여 유풍(儒風)을 일으켰다 하며 오진 천황 재위기간 중 귀화하였다 한다. 진손왕의 후손은 아들 태아랑왕이 닌도쿠 천황의 근시가 되고 가계는 해양군과 해양군의 아들 오정군, 미사 등으로 이어졌다.[6]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파하였다 하여 일본에서는 그를 다른 이름으로 지종왕(知宗王)으로도 부른다. 그의 후손에서는 왕진이(王辰爾) 등의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증손자 오정군의 세 아들인 미사(味沙), 진이(辰璽), 마여군(麻呂君) 등은 일본 조정으로부터 관야조신(菅野朝臣)에 임명되었다.
진손왕은 왕인 등을 동행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다. 한때 진손왕이 왕인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속일본기》와 《일본서기》, 《신찬성씨록》에는 각각 다른 인물로 규정하고 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왕인은 중국 사람으로 할아버지 때에 백제로 귀화한 귀화인의 후손이라 한다.[3][7][8]
3. 가계
근구수왕은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백제로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요청하자, 손자인 진손왕과 왕인에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주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하였다.[5]
3. 1. 왕인과의 관계 및 평가
근구수왕은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백제로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요청하자, 손자 진손왕과 왕인에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주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하였다.[5] 진손왕은 이후 귀국했다는 기록이 없어 일본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진손왕은 왕인과 함께 서적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하여 유풍(儒風)을 일으켰으며, 오진 천황 재위 기간 중 귀화하였다고 한다.[6] 일본에서는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파한 진손왕을 지종왕(知宗王)이라고도 부른다.
진손왕은 왕인 등을 동행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한때 진손왕이 왕인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속일본기》, 《일본서기》, 《신찬성씨록》에는 각각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왕인은 중국 사람으로 할아버지 때에 백제로 귀화한 사람의 후손이라고 한다.[3][7][8]
3. 2. 일본 기록 관련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진손왕은 제16대 진사왕의 다음 왕이며, “진손왕, 오진 조에 도래”하였다고 한다.[4] 태아랑왕은 진손왕의 뒤를 이었으며, ‘해양군-오정군’으로 이어진다.[4] 근구수왕이 백제 왕으로 있을 때,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보내 학자와 서적을 요청하자, 근구수왕은 손자 진손왕과 왕인에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주어 일본으로 보냈다.[5] 진손왕이 귀국했다는 기록은 없어 일본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진손왕은 왕인과 함께 서적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하여 유풍(儒風)을 일으켰으며, 오진 천황 재위 기간 중 귀화하였다고 한다. 진손왕의 후손으로는 아들 태아랑왕이 닌도쿠 천황의 근시가 되었고, 가계는 해양군과 그의 아들 오정군, 미사 등으로 이어졌다.[6]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파하여 일본에서는 지종왕(知宗王)으로도 불린다. 그의 후손 중에는 왕진이(王辰爾) 등의 학자들이 있었다.
진손왕의 증손자 오정군의 세 아들인 미사(味沙), 진이(辰璽), 마여군(麻呂君) 등은 일본 조정으로부터 관야조신(菅野朝臣)에 임명되었다.
진손왕은 왕인 등을 동행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한때 진손왕이 왕인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속일본기》, 《일본서기》, 《신찬성씨록》에는 각각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왕인은 중국 사람으로 할아버지 때에 백제로 귀화한 인물의 후손이다.[3][7][8]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진이는 선부를 헤아려 기록한 공로로 선사의 씨성을 하사받았고, 왕진이의 조카인 담진은 백저사, 왕진이의 동생인 왕우는 진사의 씨성을 하사받았다.[1] 이후 각각 련을 하사받았으며, 선사는 미야하라 숙네, 진사는 관야 아손, 백저사는 갈정련의 씨성을 하사받았다.[1] 이들의 조상이 응신조 때 일본에 온 진손왕이라는 전승도 있지만, 이는 창작이며, 실제로는 왕진이로부터 시작된 씨족으로 여겨진다.[1]
참조
[1]
간행물
渡来系氏族事典
新人物往来社
2006-02
[2]
서적
《문화재 비화》
돌베개
1996-02-01
[3]
서적
《왕인의 달》
한국문학도서관
1997
[4]
서적
《일본 속의 한국문화》
조선일보출판국
1986
[5]
웹인용
왕인 (王仁 ; ?
http://mtcha.com.ne.[...]
2008-07-01
[6]
웹사이트
http://baekje.chungn[...]
[7]
뉴스
한국 고대사회 外來人의 존재양태와 사회적 역할
https://cms.dankook.[...]
단국대학교
2017-07
[8]
뉴스
5호16국·남북조 상쟁기 이주민과 고구려·백제
http://contents.nahf[...]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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