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끄리 왕조는 1782년 딱신 왕조의 멸망 이후 짜끄리 장군이 방콕을 수도로 정하면서 시작된 태국의 왕조이다. 짜끄리 왕조는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압박 속에서도 독립을 유지했으며, 20세기 중반에는 사회주의 정권의 등장에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했다. 라마 9세 시대에는 입헌 군주로서의 권위를 확립했고, 2016년 라마 10세가 즉위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짜끄리 왕조는 국왕, 왕비, 왕족으로 구성되며, 왕실 재산은 왕실 재산 관리국에서 관리한다. 왕위 계승은 1924년 왕위 계승법과 2017년 헌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또한, 짜끄리 왕조는 다양한 분가 가문을 가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태국의 왕조 - 수코타이 왕국 수코타이 왕국은 13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중반까지 태국 북부에 존재했던 왕국으로, 람캄행 대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삼고 수코타이 문자를 창제하는 등 문화적으로 발전했으나, 이후 쇠퇴하여 아유타야 왕국에 병합되었으며, 현재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20세기 태국 - 루앙프라방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은 1707년 란쌍 왕국의 분열로 시작하여 1946년 라오스 왕국에 통합될 때까지 존재했던 국가이다.
20세기 태국 - 라따나꼬신 왕국 라따나꼬신 왕국은 1782년 방콕 건설 이후 짜끄리 왕조 초기의 시암을 지칭하며, 잦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서구 열강과의 교류로 식민 통치를 피했으나, 정치 개혁 미흡으로 1932년 쿠데타로 절대 왕정이 종식되었다.
19세기 태국 - 루앙프라방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은 1707년 란쌍 왕국의 분열로 시작하여 1946년 라오스 왕국에 통합될 때까지 존재했던 국가이다.
19세기 태국 - 라따나꼬신 왕국 라따나꼬신 왕국은 1782년 방콕 건설 이후 짜끄리 왕조 초기의 시암을 지칭하며, 잦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서구 열강과의 교류로 식민 통치를 피했으나, 정치 개혁 미흡으로 1932년 쿠데타로 절대 왕정이 종식되었다.
1782년, 딱신 왕조가 망하고, 짜끄리 장군이 수도를 방콕으로 정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 톤부리 왕조의 왕 탁신은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군사력으로 태국 전역을 유지했으나, 만년에 정신 이상을 보였다. 그 가운데 관료인 싼 백작이 탁신 왕을 사찰에 유폐하고 섭정에 취임했다. 이는 화교 출신 '''마하 캇사삿숙 공작'''(후의 라마 1세)이 캄보디아 원정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싼 칰사리 백작은 왕위까지 노렸지만, 급보를 받고 귀환한 마하 캇사삿숙 공작에 의해 섭정에서 물러났다.
짜끄리 왕조의 문장. 수다르사나 (비슈누의 힘의 상징인 원반형 무기인 차크람) 안에 있는 트리슈라 (시바가 가진 삼지창)
라마 1세는 톤부리 왕조에서 파격적인 출세를 하여, 태국사에서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공작의 지위를 받았다. 그의 카리스마는 탁신에 뒤지지 않았고, 싼 칰사리 백작의 반란군을 제압한 후, 관료들에게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짜끄리 왕조가 성립되었다. 전 왕 탁신은 라마 1세에게 처형당하고 톤부리 왕조는 멸망했다.
이 왕조의 체제는 절대 왕정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왕의 위광이 미치는 지역은 방콕과 그 주변 지역뿐이었다. 지방 정치는 중앙에 충성을 맹세하는 지방의 호족 또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사에게 맡겨졌고, 그 행정은 실질적으로 방임 상태였다.
2. 2. 라마 2세, 라마 3세, 라마 4세 시대
라마 2세와 라마 3세는 시인이었으며, 라마 4세(몽꿋 왕)는 불교 개혁과 서양 문호 개방에 공적이 있다.[1] 이 시대에는 왕이 수십 명의 아내와 자녀를 두었기 때문에 왕족의 수가 많아져 권력이 분산되었다.[1] 중앙 정부에서는 귀족의 권력이 강했고, 전시 중 외에는 왕의 권력이 일반적으로 약했다.[1] 왕의 특권은 부와 문화의 중심이라는 것뿐이었다.[1] 특히 이 시대에는 유력 귀족인 분낙 가문이 왕족과의 혼인으로 큰 힘을 얻어, 왕의 승인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1]
2. 3. 라마 5세 시대: 차크리 개혁
라마 5세(쭐랄롱꼰 대왕)는 왕권과 국력을 높이기 위해 차크리 개혁이라는 근대화 정책을 실시했다. 서양을 본받아 국내의 교통·통신을 정비하고 중앙 정부 지배의 기초를 다졌다. 이 시대에 라오스, 캄보디아와 남부 일부 지역은 각각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남은 영토를 사수하기 위해 태국을 중앙 집권 국가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각지의 왕을 폐지하여 각 현을 중앙 정부의 지배 하에 두었다. 한편, 중앙에 만연했던 분나크 가문은 노예 해방 등의 정책으로 재력을 잃고, 관료제 도입으로 행정적인 지배력을 거의 상실했다. 라마 5세는 스스로 문무 관료의 장이 되어 귀족 정치에서 벗어난 절대 군주제를 거의 완전히 실현했다.
2. 4. 라마 6세 시대
라마 6세(와치라웃 왕)는 부왕이 구축한 절대 왕권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책을 펼쳤다. 짜끄리 왕조 사상 처음으로 유학생이었던 그는 애국심을 강조하였고, 스아파단(청년 자경단) 등 애국주의에 기반한 정책을 펼쳤으나 재정 낭비가 심하여 관료들의 불신을 샀다.[1]
라마 6세는 화교 정책에 변화를 주었다. 라마 5세 때까지 우대받던 화교들이 폭리를 취하자, 그는 '동양의 유대인'이라는 논문을 통해 화교를 비판했다. 한편으로는 화교의 태국 동화를 꾀하며 속지주의를 도입했다.[1]
또한, 라마 6세는 후계자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왕위 계승을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의 근대화, 고등 교육 실시, 성청 정비 등 재정적인 측면 이외의 내정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높아,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1]
2. 5. 라마 7세 시대: 1932년 태국 입헌 혁명
라마 7세(쁘라차티폭)는 유학을 통해 서양식 교육을 받았으며, 라마 5세와 라마 6세가 "민주주의는 태국의 풍토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민주주의에 대해 적극적이었다. 라마 6세의 재정 낭비로 인해 관료들의 대폭적인 인원 정리가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관료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라마 7세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헌법을 공모하고 발표하려 했으나, 왕족 세력의 반대로 헌법 공포를 포기했다.
이에 관료 세력은 크게 반발했고, 관료인 쁘라딧마누탐 남작은 육군 세력의 파혼폰파유하세나 백작, 육군 소령 피분송크람 남작과 공동으로 1932년 태국 입헌 혁명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짜끄리 왕조의 절대 왕정은 붕괴되었다.[2]
2. 6. 라마 8세 시대
짜끄리 왕조의 왕은 단순한 괴뢰로 취급받았다. 라마 8세 때에는 그 권위가 완전히 실추되었고,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과의 우호의 상징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라마 8세는 종전 후, 수수께끼의 변사를 맞이하게 되었다[8]。
2. 7. 라마 9세 시대: 5월의 암흑
1992년 5월의 암흑 당시 라마 9세는 수친다 크라프라윳과 짬롱 시무앙의 조정 역할을 했다. 이 모습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는데, 두 사람이 국왕 앞에서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은 국민들에게 "태국 국왕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부에서는 정치 개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국왕의 평가는 매우 높아져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짜끄리 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국왕다운 왕이 되었다.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금기시되어 왔던 왕실 비판과 왕실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점차 기세가 꺾였다. 왕실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더욱 공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일부 정예화된 활동가를 제외하고는 사태가 수습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현재 태국 왕족은 짜끄리 왕조의 분가인 '''마히돌 가문'''(ราชสกุลมหิดล|랏차사꾼 마히돈th)에 속한다. 마히돌 가문은 마히돌 아둔야뎃 왕자와 스리나가린드라 공주에 의해 창설되었다. 마히돌 왕자는 쭐랄롱꼰 국왕과 그의 부인 사왕 바다나 왕비의 아들이었으며, 와치라웃 국왕과 프라자디폭 국왕의 이복 형제였다. 아난다 마히돈 국왕(마히돌 왕자의 장남)이 사망한 후, 1946년에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왕자의 차남)이 왕위에 올랐다. 1949년에 국왕은 그의 사촌인 시리킷 끼띠야꼰과 결혼했다. 푸미폰 국왕은 2016년 10월 13일에 그의 아들 와치라롱꼰에게 공식적으로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와치라롱꼰은 2016년 12월 1일에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1924년 왕위 계승법과 2017년 태국 헌법에 따르면, 왕위 계승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왕위 계승과 관련된 용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P: 왕자와 공주 (Prince and Princess)
C: 차오파 (Chao Fa)
M: 몸 차오 (Mom Chao)
X: 왕위 계승에서 제외
왕위 계승 순위에서 제외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결혼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한 공주와 그 후손
왕실 직함을 포기한 왕족
현재 왕위 계승 순위는 다음과 같다.
1. 디팡콘 라싸미초티 왕자 (국왕의 막내아들)
4. 2. 부왕
짜끄리 왕조에는 다른 인도차이나의 상좌부 불교 국가와 마찬가지로 부왕(Uparaja|우파라자영어) 제도가 있었다. 부왕은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보통 국왕의 동생이나 아들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왕이 국왕이 된 것은 라마 2세 단 한 명뿐이며, 부왕 주변은 반 국왕파 등의 소굴이 되는 경우가 많아 폐해가 많았다. (예: วิกฤตการณ์วังหน้า|완나 사건th)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라마 5세 때를 마지막으로 부왕은 임명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서양을 본떠 섭정과 왕태자 제도가 도입되었다.
[1]
서적
A History of Southeast Asia: Critical Crossroad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21-11-28
[2]
웹사이트
King Vajiralongkorn of Thailand is crowned in elaborate ceremony
https://www.theguard[...]
2019-05-04
[3]
서적
Thailand's Political History: From the 13th Century to Recent Times
https://books.google[...]
River Books
2021-11-28
[4]
간행물
Announcement of the appointment of Prince Vajirunhis to the Crown Prince of Siam (Thai)
http://www.ratchakit[...]
Royal Thai Government Gazette
1886-03-01
[5]
간행물
The Investiture of Crown Prince Maha Vajiravudh (Thai)
http://www.ratchakit[...]
Royal Gazette
1895-01-20
[6]
간행물
Royal Decree announcing the Investiture of Crown Prince Maha Vajiralongkorn (Thai)
http://www.ratchakit[...]
Royal Gazette
1972-12-28
[7]
웹사이트
ราชกิจจานุเบกษา, พระบรมราชโองการ ประกาศ พระราชทานนามสกุลสำหรับเชื้อพระวงศ์พระบรมราชวงศ์ชั้น 5, เล่ม 46, ตอน 0ก, 9 มิถุนายน พ.ศ. 2472, หน้า 21.
https://web.archive.[...]
2019-02-26
[8]
문서
(This description is illegal in Thailand)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