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아서 플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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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스 아서 플로이드는 1904년 조지아주에서 태어나 오클라호마에서 성장한 미국의 무법자였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은행 강도 및 기타 범죄를 저질렀으며, "프리티 보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대공황 시기에 그는 대중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었고, 종종 "쿡슨 힐스의 로빈 후드"로 불렸다. 플로이드는 1934년 오하이오주에서 FBI 요원과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의 삶은 우디 거스리의 노래, 딕 트레이시 만화,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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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서 플로이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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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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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찰스 아서 플로이드 |
출생일 | 1904년 2월 3일 |
출생지 | 미국, 조지아주 애더즈빌 |
사망일 | 1934년 10월 22일 |
사망지 | 미국, 오하이오주 이스트리버풀 |
사망 원인 | 총상 |
직업 | 갱스터, 은행 강도 |
배우자 | 루비 플로이드 (이혼) |
자녀 | 찰스 뎀프시 플로이드 |
별칭 |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 사회의 적 No.1 척 쿡슨 힐스의 로빈 후드 |
범죄 정보 | |
혐의 | 살인, 은행 강도 |
형벌 | 15년 징역 (탈옥); 연방 요원에 의해 사살됨 |
상태 | 사망 |
2. 초기 생애
찰스 아서 플로이드는 1904년 조지아주 애더스빌에서 태어나[2] 1911년 가족과 함께 오클라호마주 아킨스로 이주하여 성장했다.[2] 그는 18세에 지역 우체국 절도 혐의로 처음 체포되었고,[2] 1925년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발생한 급여 강도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3] 3년 반 동안 복역 후 가석방되었으며,[4][5][6] 이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암흑가에서 범죄자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인 범죄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4] 이 시기부터 그는 여러 은행 강도 사건에 연루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가족
찰스 아서 플로이드는 1904년 조지아주 바토군 애더스빌의 농가에서 월터 리 플로이드와 매미 헬렌(결혼 전 성 에콜스) 사이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2][35] 그는 선량한 부모와 조부모 밑에서 평범하게 자랐다.[35]
7살 때인 1911년, 아버지가 오클라호마주의 면화밭이 돈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데리고 오클라호마주 세쿼이아군 콕슨힐스 인근의 아킨스로 이사했다.[2] 하지만 이사 후에도 가족의 가난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35]
플로이드는 15세에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각지에서 온 방랑자들이나 무법자들이 많이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부모는 아들의 변화를 알아차렸다.[36]
17세가 되던 해, 1살 연하인 루비 하드그레이브와 결혼하여 아들 찰스 "잭" 뎀프시를 낳았다.[37] 18세에는 지역 우체국에서 3.5달러 (2023년 기준 50USD 상당)를 훔친 혐의로 처음 체포되었다.[2]
2. 2. 범죄의 시작
찰스 아서 플로이드는 1904년 조지아주 바토군 애더스빌의 농가에서 월터 리 플로이드와 매미 헬렌(née 에콜스)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2][35] 선량한 부모와 조부모 아래서 평범하게 자랐다.[35] 7살이 되던 1911년, 오클라호마주 면화밭이 돈이 된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가 오클라호마주 세쿼이아군 콕슨힐스 근처 아킨스로 이사했지만, 가난한 생활은 여전했다.[36]
15세 무렵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각지에서 온 아웃로(무법자)들이 많이 일하고 있었다. 플로이드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집에 돌아왔을 때 부모는 아들의 변화를 눈치챘다.[36] 17세에는 한 살 어린 루비 하드그레이브와 결혼하여 아들 찰스 "잭" 뎀프시를 낳았다.[37]
18세 때, 플로이드는 지역 우체국에서 3.5달러를 훔친 혐의로 처음 체포되었다.[38] 하지만 재판에 나타나지 않아 불기소 처분되었다.[38] 이후 친구들과 함께 상점이나 주유소에서 돈을 빼앗는 등 범죄를 이어갔다. 3년 뒤인 1925년 9월 16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급여 수송차를 습격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3] 그는 3년 반 동안 복역한 후 가석방되었고, 그사이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캔자스주의 친정으로 돌아갔다.[4][5][6]
가석방 후 플로이드는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암흑가에서 범죄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후 몇 년간 여러 차례 은행 강도를 저질렀고, 이 시기에 "프리티 보이(Pretty Boy)"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 설명에 따르면, 오빌 드레이크라는 사람이 플로이드가 유전에서 일하기 위해 흰색 단추 셔츠와 바지를 입고 다녔기 때문에 붙였다고 한다. 작업장 동료들이 그를 "프리티 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1925년 세인트루이스 크로거 사무실 강도 사건 당시 급여 담당자가 강도 중 한 명을 "사과 같은 뺨을 가진 예쁜 소년"이라고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퐁파두르 스타일로 머리를 꼼꼼하게 손질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39] 하지만 플로이드 본인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했으며, 고향 오클라호마의 초크토 맥주에서 따온 "초크(Choc)"라는 애칭을 더 좋아했다고 전해진다.[4][40]
플로이드는 계속해서 중범죄를 저질렀다.
- 1929년: 여러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 3월 9일: 캔자스시티에서 조사를 위해 체포됨.
- 5월 7일: 부랑 및 고속도로 강도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으나 다음날 석방됨.
- 5월 9일: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부랑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 50USD와 징역 60일을 선고받음.[6]
- 1930년:
- 3월 8일: 오하이오주 애크런에서 프랭크 미첼이라는 가명으로 체포됨. 당일 저녁 강도 사건 중 살해된 애크런 경찰관 살해 혐의로 기소됨.[7]
- 5월 20일: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은행 강도 및 살인 혐의로 체포됨.
- 11월 24일: 오하이오주 실베이니아 은행 강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오하이오 주립 교도소에서 12년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송 중이던 열차에서 뛰어내려 탈옥함.[6]
- 1931년:
- 3월 25일: 불타는 차 안에서 시체로 발견된 캔자스시티 출신 밀주 판매상 왈리 애쉬와 볼 애쉬 형제 사망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됨.
- 4월 23일: 플로이드 갱단이 오하이오주 볼링그린의 순찰 경관 R. H. 캐스트너를 살해함.[9]
- 7월 22일: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연방 요원 커티스 C. 버크를 살해함.[10]
- 1932년:
- 4월 7일: 오클라호마주 매킨토시 카운티의 전 보안관 어브 켈리가 플로이드를 체포하려다 총에 맞아 부상을 입음.
- 11월: 플로이드 갱단 3명이 오클라호마주 볼리에 있는 농민 상인 은행(Farmers & Merchants Bank) 강도를 시도함.[11][41]
오클라호마주는 플로이드의 신병 확보에 6천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러나 플로이드는 범죄 행각에도 불구하고, 특히 대공황 시기에 일반 대중, 특히 오클라호마 지역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로 비춰지기도 했다. 신문들은 그가 은행을 강탈할 때 주택 담보 대출 서류를 파괴하여 가난한 농민들의 빚을 탕감해주었다거나, 가난한 가족이나 노인들에게 돈을 나눠주었다는 미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신화일 가능성도 있지만,[12] "부자에게서 훔쳐 가난한 사람에게 준다"는 로빈 후드 식의 무법 영웅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12] 이로 인해 그는 "쿡슨 힐스의 로빈 후드"라고 불리며 오클라호마 지역 주민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13]
3. 범죄 경력
찰스 플로이드는 18세 때 처음 범죄를 저지른 이후, 강도, 살인 등 여러 중대 범죄에 연루되며 악명 높은 무법자로 활동했다. 초기에는 절도와 강도 혐의로 복역했으며, 출소 후에는 더욱 대담한 범죄를 이어갔다. 특히 1930년대 초반에는 여러 건의 은행 강도와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
1933년 발생한 캔자스시티 학살 사건에서는 주요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그의 실제 연루 여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있다.[14] 당시 수사국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이 사건을 플로이드 추적의 명분으로 삼고 권한을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14]
대공황 시기,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은행을 습격해 서민들의 빚 문서를 없애주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나누어 준다는 식의 미담을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플로이드는 일부 대중 사이에서 '의적'과 같은 이미지로 인기를 얻기도 했다.
3. 1. 은행 강도
18세 때 지역 우체국에서 3.5USD(현재 약 65USD 상당)를 훔쳤으나, 재판에 나타나지 않아 불기소 처분되었다.[38] 이후 친구와 함께 상점이나 주유소에서 돈을 빼앗고, 세인트루이스에서 급여 수송차를 습격한 혐의로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이 일로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캔자스주의 친정으로 돌아갔다."프리티 보이" 플로이드라는 별명은 이 시기에 붙여졌다.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을 꼼꼼하게 손질했다는 설[39], 버튼업 칼라의 흰색 드레스 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유전 채굴 현장에서 일했다는 설, 습격당한 가게의 점원이 '사과 같은 뺨의 귀여운 소년이었다'고 증언했다는 설 등이 있다. 하지만 플로이드 본인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했으며, 고향인 오클라호마주산 초크토 맥주에서 유래한 "초크"라는 애칭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40]
출소 후 플로이드는 계속해서 중대 범죄를 저질렀다.
- 1930년: 강도 행위 중 경찰관을 살해했다. 같은 해 오하이오주에서 은행 강도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이송 중인 열차에서 뛰어내려 도주했다.
- 1931년: 밀주 판매상 형제가 살해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캔자스시티에서는 연방 수사관을 살해했다.
- 1932년: 오클라호마주에서 보안관과 총격전을 벌여 부상을 입혔으며, 같은 주 보리(Boley)의 파머스 & 머천츠 은행 강도 미수 사건에도 연루되었다.[41]
오클라호마주는 그의 신병 확보에 6천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은 플로이드가 '은행을 습격하여 주택 담보 대출 서류를 불태워 가난한 농민의 빚을 탕감했다'거나 '가난한 가족이나 노인을 보면 아낌없이 돈을 나눠주었다'는 등의 미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대공황 시기, 그는 이러한 이야기들 덕분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3. 2. 캔자스시티 학살 사건
플로이드와 아담 리케티는 1933년 6월 17일에 발생한 "캔자스시티 학살"로 알려진 총격전의 주요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으로 법 집행관 4명이 사망했다.[14] 당시 수사국 국장이었던 J. 에드거 후버는 플로이드를 추적할 더 많은 권한을 얻기 위해 이 사건을 활용했다.[14] 그러나 플로이드가 실제로 사건에 연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캔자스시티 학살 사건은 강도 프랭크 "젤리" 내시를 유니언역에 주차된 차로 호송하던 법 집행관들을 버논 밀러와 그의 공범들이 습격한 사건이었다. 이 총격전으로 캔자스시티 형사 윌리엄 그룸스,[15] 프랭크 허먼슨,[16] 오클라호마 경찰서장 오토 리드,[17] 그리고 특별 요원 레이 카프리[18]가 목숨을 잃었다. 호송 대상이었던 내시 역시 차 안에서 자신을 구출하려던 자들의 총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다른 캔자스시티 경찰관 2명은 뒷좌석에서 죽은 척하며 쓰러져 목숨을 건졌다. 총격범들이 차를 살피는 동안 역에 있던 다른 경찰관이 응사하자 그들은 도주했다. 주범으로 지목된 밀러는 1933년 11월 27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외곽에서 구타당하고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19]
사건 발생 2주 후, 수사국은 버논 밀러, 플로이드, 그리고 플로이드의 절친한 친구인 아담 리케티를 실행범으로 공식 발표했다. 플로이드와 리케티가 공범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사건 당시 캔자스시티에 있었다는 정황 증거
- 목격자들의 지목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박도 존재한다)
- 밀러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맥주병에서 리케티의 지문이 나온 점
- 플로이드와 리케티를 범인으로 지목한 암흑가의 증언
- 후버 국장이 그들의 유죄를 강력하게 주장한 점
동료 은행 강도였던 앨빈 카피스는 플로이드가 자신에게 사건 연루 사실을 자백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플로이드와 리케티의 연루에 대한 반론과 의문점도 많다.
- 공격 당시 범인 중 한 명이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고 알려졌으나, 플로이드의 시신에서는 해당 상처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 그들을 범인으로 지목한 암흑가 증언은, 반대로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다른 암흑가 증언에 의해 신빙성이 상쇄된다.
- 플로이드 가족과 리케티 본인은 플로이드가 다른 많은 범죄는 인정했지만, 이 사건만큼은 일관되게 부인했다고 주장했다.
- 플로이드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수사관들에게도 학살 연루 사실을 부인했다고 전해진다.
- 캔자스시티 경찰은 1933년 6월 30일 미주리주 스프링필드에서 발송된 "친애하는 여러분 - 저는 - 찰스 플로이드 - 캔자스시티에서 발생한 경찰관 학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찰스 플로이드"라는 내용의 엽서를 받았으며, 경찰은 이 엽서가 실제 플로이드가 보낸 것이라고 믿었다.
- 플로이드가 연루된 다른 범죄들과 비교했을 때 캔자스시티 학살 사건은 성격이 다르다는 점, 당시 갱단들이 범죄를 과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플로이드가 유독 이 사건만 부인했다는 점, 수사국이 제시한 증거와 목격자 증언의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점 등이 의문점으로 지적된다.
- 2002년에 출판된 학살 관련 서적에서는 탄도 검사 결과를 근거로, 사망자 중 일부는 무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았던 법 집행관들의 아군 오사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20]
이처럼 플로이드와 리케티가 실제로 캔자스시티 학살 사건의 범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역사 연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3. 3. "공공의 적 1호"

J. 에드거 후버 BOI 국장은 존 딜린저가 사망한 후 플로이드를 "공공의 적 1호"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멜빈 퍼비스가 이끄는 지방 경찰과 F.B.I. 요원들은 검사관 사무엘 P. 코울리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플로이드 추적에 나섰다.
플로이드와 그의 동료 아담 리체티는 1934년 10월 18일 뉴욕주 버팔로를 떠났으나, 다음 날 새벽 3시경 오하이오주 웰스빌 근처에서 짙은 안개 속에서 차량이 전신주에 부딪혀 고장났다.[22][26] 10월 19일 새벽, 길가에 누워 있는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주민의 신고로 웰스빌 경찰서장 존 H. 펄츠와 경찰관 그로버 포츠, 윌리엄 어윈이 출동했다. 리체티는 경찰을 보고 숲으로 도망쳤고, 포츠와 어윈이 그를 추격하여 체포했다. 한편, 펄츠 서장이 플로이드에게 접근하자 플로이드는 즉시 총을 발사했다. 이어진 총격전에서 펄츠는 발에, 포츠는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며, 플로이드는 숲으로 도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저격수 출신인 지역 경찰관 체스터 C. 스미스(1895년 2월 14일 – 1984년 10월 23일)까지 합류하여 수색을 벌였으나 플로이드를 잡지 못했고, BOI 요원 팀도 급파되어 추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10월 22일, 플로이드는 오하이오주 이스트 리버풀까지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여 친구 찰스 조이가 운영하는 당구장에서 음식을 구했다. 당구장을 나선 직후 그는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도보로 도주를 시도했다. 곧 그는 추격하는 경찰관들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며, 이후 사망했다. 그가 사살된 장소는 이스트 리버풀 외곽의 한 옥수수 밭이었다.[14][19] 그러나 누가 그를 쐈고 정확히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관련된 BOI 요원, 지역 경찰, 민간인들의 설명이 각기 다르다.[1]
사망 경위에 대한 엇갈린 주장
- BOI의 공식 설명: 당시 현장에 있었던 특별 요원 윈프레드 E. 홉턴에 따르면, 플로이드와의 마지막 총격전에는 BOI 요원들(홉턴, 사무엘 K. 맥키 주니어, 데이비드 E. 홀, 퍼비스)만이 참여했으며 지역 경찰은 나중에 도착했다.[1]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요원들이 오하이오주 클라크슨 남쪽 지역을 수색하던 중 옥수수 창고 뒤에서 움직이는 차를 발견했고, 그 차에서 플로이드가 내렸다. 플로이드가 .45 구경 권총을 꺼내자 요원들이 발포했고, 플로이드는 "나는 끝났어. 두 번이나 맞았어."라고 말했다고 한다.[19]
- 당시 언론 보도: 뉴스 보도에 따르면, 플로이드가 옥수수 창고에서 나와 차를 향해 기어가다가 나무가 우거진 능선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주하려 하자 퍼비스가 "멈춰!"라고 외쳤고, 플로이드가 계속 달리자 "쏴!"라고 명령했다. 플로이드는 여러 발의 총에 맞고 쓰러졌으며, 수갑이 채워졌다. 그는 "누가 너에게 제보했어?"라고 물었으며, 캔자스시티 학살에 대한 질문에는 답을 거부했지만 "나는 플로이드야... 에디는 어디 있어?"라며 아담 리체티를 찾았다고 한다. 그는 "두 번 맞았어."라고 말했으며, 퍼비스는 그의 마지막 말을 공개하지 않았다. 플로이드에게서는 시계와 장식품이 발견되었는데, 각각에는 그가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10명을 의미하는 10개의 홈이 파여 있었다고 전해진다.[19][23] 그의 마지막 은행 강도(사망 4일 전) 몫은 120USD였다고 한다.[23]
- 체스터 스미스의 주장: 은퇴한 이스트 리버풀 경찰서장 체스터 스미스는 1979년 ''타임'' 지 인터뷰에서 다른 주장을 펼쳤다. 그는 자신이 먼저 플로이드에게 고의로 부상을 입혔으며,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나는 퍼비스가 그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내 .32 윈체스터 소총으로 그를 쓰러뜨렸다." 스미스에 따르면, 플로이드가 쓰러진 후 스미스가 무장 해제시키자 퍼비스가 다가와 플로이드에게 질문을 했고, 플로이드가 욕설을 하자 허먼 홀리스 요원에게 "그에게 쏴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홀리스는 기관단총으로 플로이드를 근거리 사격하여 살해했다고 스미스는 주장했다. 그는 FBI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고 덧붙였다.[24]
- 홉턴의 반박: 이에 대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BOI 요원 윈프레드 E. 홉턴은 1979년 11월 ''타임'' 지에 보낸 반박 편지에서 스미스의 주장을 부인했다. 그는 이스트 리버풀 경찰은 플로이드가 치명상을 입은 후에 도착했으며, 스미스가 언급한 허먼 홀리스 요원은 아예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25] 다른 자료들 역시 홀리스는 그날 현장에 없었다며 스미스의 주장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26] 홀리스의 FBI 공식 기록에도 이 사건 참여 내용은 없다.[27] 홉턴은 또한 자신이 직접 플로이드의 시신을 이스트 리버풀로 옮겼다고 밝혔다.[28]
사건 후 J. 에드거 후버는 10월 29일자 메모에서 조수 에드워드 앨런 탬에게 플로이드의 시계에 새겨진 10개의 홈을 사진으로 기록한 후 개인 소지품을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29]
4. 도주와 죽음
존 딜린저가 사망한 후, J. 에드거 후버 BOI 국장은 플로이드를 "공공의 적 1호"로 지정했다.[14][19] 멜빈 퍼비스가 이끄는 FBI 요원들과 지방 경찰의 추적 끝에 플로이드는 1934년 10월 22일 오하이오주 이스트 리버풀 근처 농장에서 사살되었다.[14][19] 그의 사망 경위를 둘러싸고는 당시 현장에 있던 FBI 요원들과 지역 경찰관들의 주장이 엇갈려 논란이 있다.[1][24][25]
4. 1. 도주 생활
캔자스시티 학살 사건 직전, 플로이드와 애덤 리체티는 파니타와 로즈 베어드 자매와 교제하기 시작했다. 플로이드는 파니타와 '샌더스 부부'로, 리체티는 로즈와 '브레넌 부부'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뉴욕주 버펄로의 한 아파트에 숨어 지냈다.[42] 이들은 조용히 생활하며 가끔 이웃 아이들에게 과자나 잔돈을 주어 나쁜 평판은 없었다.[43]1934년 7월 존 딜린저가 사망하자 수사국은 플로이드를 '공공의 적 No.1'으로 지정했다. 수사 강화가 두려워진 플로이드는 고향인 오클라호마로 도망가자고 제안했고, 로즈에게 돈을 주어 포드 세단을 사오게 했다. 10월 18일, 네 사람은 출발했지만 오하이오주 웰즈빌 근처에서 짙은 안개를 만나 차가 미끄러져 전봇대에 부딪혔다. 견인차를 불렀지만, 여성들은 마을에 있는 편이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견인차에 태워 보내고 플로이드와 리체티는 길가에서 기다리기로 했다.[44]
날이 밝을 무렵, 차를 타고 지나가던 한 남자가 길가에서 총을 들고 자고 있는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을 수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관 두 명이 도착하자 두 사람은 숲으로 도망쳤지만 총격전이 벌어졌고, 리체티가 어깨에 총을 맞고 체포되었다.[45]
4. 2. 오하이오에서의 총격전
J. 에드거 후버 BOI 국장은 존 딜린저가 사망하자 플로이드를 "공공의 적 1호"로 지정했다. 멜빈 퍼비스가 이끄는 지방 경찰과 FBI 요원들은 검사관 사무엘 P. 코울리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1934년 10월 22일 오하이오주 이스트 리버풀의 한 옥수수 밭에서 플로이드를 사살했다.[14][19] 플로이드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관련된 인물들 간의 설명이 엇갈린다.
플로이드와 동료 아담 리체티는 10월 18일 뉴욕주 버팔로를 떠났으나, 다음 날 새벽 3시경 짙은 안개 속에서 차가 전화 기둥에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했다.[22]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차가 고장 나, 함께 있던 여성 동료들을 보내 견인차를 불렀다. 그들은 여성들이 견인차 기사를 따라 마을로 가서 차가 수리될 동안 기다리게 할 계획이었다.[26]
10월 19일 새벽, 조 프라이먼과 그의 사위 데이비드 오한론은 길가에 정장 차림의 두 남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의심스러워 오하이오주 웰스빌 경찰서장 존 H. 펄츠에게 신고했다. 펄츠 서장은 그로버 포츠, 윌리엄 어윈 경관과 함께 현장으로 출동했다. 리체티는 경찰을 보자 숲으로 도망쳤고, 포츠와 어윈이 그를 추격했다. 펄츠 서장은 플로이드에게 접근했으나, 플로이드는 즉시 총을 꺼내 발사했다. 이어진 총격전에서 펄츠는 발에, 포츠는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플로이드는 숲으로 달아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출신인 지역 경찰관 체스터 C. 스미스(1895년 2월 14일 – 1984년 10월 23일)의 합류 후, 경찰은 추격을 재개하여 리체티를 체포했지만 플로이드는 놓쳤다. 수색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인근 지역 경찰과 BOI 요원 팀이 즉시 파견되었다.
리체티는 체포 당시 자신을 리처드 잠보니라고 밝혔고, 함께 있던 남자는 친구 제임스 워렌이며 돈은 카드 게임에서 땄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에게 총을 쏜 이유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했다.[46] 펄츠 서장은 이들이 지명 수배 중인 아담 리체티와 찰스 아서 플로이드임을 확신하고 수사국(BOI)에 알렸다.[47]
한편, 도주한 플로이드는 지나가던 차를 탈취했으나 운전사의 기지로 연료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차에서 내리게 되었다. 이후 꽃집 배달 차량에 올라탔지만 검문을 피해 다시 숲으로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보안관이 꽃집 직원 2명을 플로이드의 공범으로 오인하여 발포했고, 한 명이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며칠 후 멜빈 퍼비스 수사관이 이들을 찾아와 플로이드 일당의 보복 가능성을 언급하며 언론 인터뷰를 자제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48]
10월 22일, 플로이드는 오하이오주 이스트 리버풀까지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여 친구 찰스 조이가 운영하는 당구장에서 음식을 구했다.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당시 현장에 있던 BOI 요원, 지역 경찰, 민간인의 진술이 엇갈린다. 공통된 내용은 플로이드가 당구장을 나선 직후 법 집행관들과 마주쳤고, 도보로 도주하려다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누가, 몇 발을, 어떤 순서로 쏘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다르다.[1]
사망 경위에 대한 상반된 주장
- BOI 공식 설명 (윈프레드 E. 홉턴 요원 주장 기반): 홉턴, 사무엘 K. 맥키 주니어, 데이비드 E. 홀, 퍼비스 등 BOI 요원 4명과 이스트 리버풀 경찰서의 네 명의 요원(허먼 H. 로스 주니어, 체스터 C. 스미스, 글렌 G. 몽고메리)이 오하이오주 클라크슨 남쪽 지역을 수색하던 중, 옥수수 창고 뒤에서 움직이는 차를 발견했다. 플로이드가 차에서 내려 .45 구경 권총을 꺼내자 BOI 요원들이 발포했다. 플로이드는 "나는 끝났어. 두 번이나 맞았어."라고 말했다고 한다.[19] 홉턴은 BOI 요원들만이 총격전에 참여했고 지역 경찰은 플로이드가 치명상을 입은 후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1][25]
- 당시 언론 보도: 플로이드가 옥수수 창고에서 나와 나무가 우거진 능선을 향해 도주했다. 퍼비스가 "멈춰!"라고 외쳤으나 플로이드가 계속 달리자 "쏴!"라고 명령했고, 플로이드는 네 발의 총에 치명상을 입었다. 수갑이 채워진 플로이드는 "누가 너에게 제보했어?", "나는 플로이드야... 에디는 어디 있어?" (아담 리체티를 지칭)라고 물었다. 그는 "두 번 맞았어."라고 말했으며, 퍼비스는 플로이드의 마지막 말을 공개하지 않았다.[23] 플로이드의 소지품 중에는 시계와 장식품이 있었는데, 각각 플로이드가 죽였다고 '''주장되는''' 열 명의 사람을 위한 열 개의 홈이 있었다.[19]
- 체스터 스미스 전 이스트 리버풀 경찰서장 주장 (1979년 타임 인터뷰): 스미스 자신이 먼저 플로이드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32 윈체스터 소총으로 플로이드를 쓰러뜨렸으며,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나는 퍼비스가 그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내 소총으로 그를 쓰러뜨렸다." 스미스에 따르면, 플로이드가 쓰러진 후 퍼비스가 다가와 "그 남자에게서 떨어져. 그와 얘기하고 싶어."라고 명령했다. 퍼비스가 잠시 플로이드에게 질문한 뒤 욕설을 듣고는 허먼 홀리스 요원에게 "그에게 쏴라"고 명령했고, 홀리스가 기관단총으로 플로이드를 근거리 사격하여 살해했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FBI가 사건을 은폐했다고 주장하며, "물론 그랬지, 그들이 그런 식으로 죽은 것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야."라고 답했다.[24]
- 윈프레드 E. 홉턴 요원 반박 (1979년 타임 편지): 홉턴은 스미스의 주장을 반박하며, 자신을 포함한 BOI 요원 4명만이 현장에 있었고 지역 경찰은 나중에 도착했다고 재차 강조했다. 또한 플로이드가 먼저 요원들을 향해 발포했고, 요원 2명이 거의 즉시 그를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스미스가 홀리스 요원이 퍼비스의 명령으로 플로이드를 사살했다고 주장한 데 대해, 홉턴은 홀리스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고 반박했다.[25] 다른 자료들 역시 스미스의 주장에 신빙성이 부족하며 홀리스는 당시 현장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26][27] 홉턴은 자신이 직접 플로이드의 시신을 이스트 리버풀로 운반했다고 덧붙였다.[28]
10월 29일, J. 에드거 후버는 조수 에드워드 앨런 탬에게 플로이드의 시계에 새겨진 10개의 홈(플로이드가 살해한 사람 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후, 개인 소지품을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29]
플로이드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오하이오주 이스트 리버풀의 스터지스 장례식장에서 잠시 '''공개된''' 후 오클라호마로 운구되었다. 그의 시신은 오클라호마주 샐리소에 '''공개 전시되었다'''. 장례식에는 2만 명에서 4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 오클라호마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장례식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오클라호마주 에이킨스에 묻혔다.[30]
4. 3. 최후
J. 에드거 후버 BOI 국장은 존 딜린저 사망 후 플로이드를 "공공의 적 1호"로 지정했다.[14][19]
플로이드와 애덤 리체티는 1934년 10월 18일 뉴욕주 버팔로를 떠났으나, 다음 날 새벽 3시경 짙은 안개 속에서 차가 전화 기둥에 미끄러져 고장 났다.[22]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두 여성 동행자를 보내 견인차를 부르도록 했다.[26] 10월 19일 새벽, 길가에 누워 있던 두 남자를 수상히 여긴 운전자 조 프라이먼과 그의 사위 데이비드 오한론이 오하이오주 웰스빌 경찰서장 존 H. 펄츠에게 신고했다. 펄츠 서장과 경찰관 그로버 포츠, 윌리엄 어윈이 현장에 도착하자 리체티는 숲으로 도망쳤고, 플로이드는 즉시 총을 꺼내 펄츠 서장에게 발포했다. 총격전 끝에 펄츠는 발에, 포츠는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고 플로이드는 숲으로 달아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저격수 출신인 지역 경찰관 체스터 C. 스미스의 도움을 받아 경찰은 리체티를 체포했지만 플로이드는 놓쳤다. 수색 소식이 퍼지면서 주변 지역 경찰과 BOI 요원 팀이 동원되었다.
이틀간 숲과 농장을 헤매며 약 12km를 이동한 플로이드는 10월 22일 점심 무렵, 오하이오주 이스트 리버풀 근처 한 농가에 도착했다.[49] 덥수룩한 수염에 더러워진 정장 차림이었던 그는 음식을 구걸했지만 거절당했다. 다시 3km 정도를 걸어 오후 3시경 미망인 엘렌 콩클 부인의 농가에 도착했다. 플로이드는 다람쥐 사냥을 하다 길을 잃었다고 둘러댔지만, 부인이 의심하자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식사비를 지불하겠다고 말했다.[50] 신문을 읽지 않아 플로이드 사건을 몰랐던 부인은 돼지고기 찹, 감자, 푸딩, 파이, 커피를 내주었고, 플로이드는 "왕의 만찬 같다"며 1USD 지폐를 접시 밑에 두고 갔다.[51]
오후 4시경, 콩클 부인의 오빠가 플로이드를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클락슨까지 태워주기 위해 T형 포드에 태웠다. 차가 출발하려던 순간, 멜빈 퍼비스가 이끄는 BOI 요원 4명과 지역 경찰 3명이 탄 시보레 두 대가 농장으로 들어섰다.[52][53] 플로이드는 두 정 가지고 있던 콜트 .45 중 한 정을 뽑아 "나를 찾으러 왔군. 차에서 떨어져!"라고 말하며 차에서 뛰어내렸다. 잠시 어느 쪽으로 도망갈지 망설이는 듯했지만 숲 쪽으로 지그재그로 달아났다. 요원들은 권총, 라이플, 엽총, 톰슨 등 총 93발을 발포했고, 약 140m 거리에서 2~4발을 맞은 플로이드는 쓰러졌다.[54] 요원들은 수갑을 채워 그를 근처 사과나무 아래로 옮겼다.[55] 플로이드는 "두 발이나 맞았어", "아담(리체티)은 어디 있나?", "나는 플로이드다, 누가 밀고했어?", "이제 끝이다, 빌어먹을" 등의 말을 남기고 총에 맞은 지 약 15분 후에 사망했다.[56]
플로이드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당시 현장에 있던 BOI 요원, 지역 경찰, 민간인의 진술이 엇갈린다.[1]
- BOI 공식 발표: 퍼비스가 이끈 BOI 요원 4명과 이스트 리버풀 경찰 4명이 수색 중 플로이드를 발견했다. 플로이드가 .45 구경 권총을 꺼내자 요원들이 발포했고, 플로이드는 "나는 끝났어. 두 번이나 맞았어"라고 말했다.[19] 특별 요원 윈프레드 E. 홉턴은 BOI 요원만이 마지막 총격에 참여했고 지역 경찰은 나중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1]
- 당시 언론 보도: 플로이드가 옥수수 창고에서 나와 도주하려 하자 퍼비스가 "멈춰!"라고 외쳤고, 플로이드가 계속 달리자 "쏴!"라고 명령하여 사살했다. 플로이드는 "누가 너에게 제보했어?", "나는 플로이드야... 에디는 어디 있어?"라고 물었으며, "두 번 맞았어"라고 말했다. 퍼비스는 플로이드의 마지막 말 전문을 공개하지 않았다.[23]
- 체스터 스미스(이스트 리버풀 경찰) 주장: 1979년 타임지 인터뷰에서 자신이 먼저 플로이드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밝혔다. "나는 퍼비스가 그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내 .32 윈체스터 소총으로 그를 쓰러뜨렸다." 스미스에 따르면, 자신이 플로이드의 무장을 해제하자 퍼비스가 다가와 잠시 심문한 후 허먼 홀리스 요원에게 "그에게 쏴라"고 명령했고, 홀리스가 기관단총으로 플로이드를 근거리 사격하여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스미스는 FBI가 사건을 은폐했다고 말했다.[24]
- 윈프레드 홉턴(BOI 요원) 반박: 1979년 타임지에 보낸 편지에서 스미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플로이드가 사살될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지역 경찰은 플로이드가 치명상을 입은 후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플로이드가 먼저 요원들에게 발포했고, 요원 두 명이 거의 즉시 그를 사살했다고 말했다. 홉턴은 스미스가 언급한 허먼 홀리스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25] 다른 자료 역시 홀리스가 그날 현장에 없었다며 스미스의 주장을 불신한다.[26] 홀리스의 FBI 프로필에도 이 사건 참여 기록은 없다.[27] 홉턴은 플로이드의 시신을 자신의 차로 이스트 리버풀로 옮겼다고 덧붙였다.[28]
플로이드의 소지품 중에는 체인이 달린 은색 회중시계, 현금 122USD, 장전된 탄창, 열쇠, 성냥, 사과 2개 등이 있었고 오른손에는 카메오 반지를 끼고 있었다. 손톱과 이는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으나, 지문은 사포 같은 것으로 문질러 훼손되어 있었다.[57] 다른 기록에 따르면, 시계에는 플로이드가 살해한 10명을 의미하는 10개의 홈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19] 후버는 10월 29일 메모에서 조수 에드워드 앨런 탬에게 이 홈을 기록하기 위해 시계 사진을 찍은 후 유품을 플로이드의 어머니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29]
플로이드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오하이오주 이스트 리버풀의 장례식장에서 잠시 공개된 후 오클라호마로 보내졌다. 오클라호마주 샐리소에서 다시 공개되었고, 장례식에는 2만 명에서 4만 명의 인파가 몰려 오클라호마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장례식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오클라호마주 에이킨스에 묻혔다.[30]
5. 대중적 이미지와 유산
플로이드의 대중적 이미지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는 대공황 시기 일부 대중에게 의적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의 노래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Pretty Boy Floydeng)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을 통해 낭만적으로 그려지기도 했다.[31] 반면, 만화 딕 트레이시의 악당 캐릭터 플랫탑 존스는 플로이드를 모델로 삼는 등[32]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했으며[14], 그의 범죄 행각은 여러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5. 1. "쿡슨힐스의 로빈 후드"
플로이드가 "프리티 보이"(Pretty Boyeng)라고 불리게 된 것은 세인트루이스에서 급여 수송차를 습격한 혐의로 3년간 복역하던 무렵이다. 그의 외모나 차림새 때문이라는 여러 설이 있다.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을 꼼꼼하게 손질했다는 설[39], 버튼업 칼라의 흰색 드레스 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유전 채굴 현장에서 일했다는 설, 혹은 강도 사건 피해자인 가게 점원이 '사과 같은 뺨의 귀여운 소년이었다'고 증언했다는 설 등이 전해진다. 하지만 정작 플로이드 본인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했으며, 고향인 오클라호마산 초크토 맥주에서 유래한 "초크"(Choceng)라는 애칭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40]출소 후 플로이드는 계속해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 1930년: 강도 행위 중 경찰관을 살해했다. 이후 오하이오주에서 은행 강도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이송 중인 열차에서 뛰어내려 도주했다.
- 1931년: 밀주 판매상 형제가 살해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캔자스시티에서는 연방 수사관을 살해했다.
- 1932년: 오클라호마주에서 보안관과 총격전을 벌여 부상을 입혔다. 같은 해, 오클라호마주 보리(Boley)의 파머스 & 머천츠 은행 강도 미수 사건에도 연루되었다.[41]
오클라호마주는 그의 신병 확보를 위해 6000USD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은 플로이드에 대한 미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은행을 습격하여 주택 담보 대출 서류를 불태워 가난한 농민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거나, '가난한 가족이나 노인을 보면 아낌없이 돈을 나누어 주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이러한 보도 덕분에 대공황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대중 사이에서 플로이드는 의적과 같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5. 2. 대중문화 속의 플로이드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는 1939년에 플로이드의 삶을 낭만적으로 그린 저항가요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Pretty Boy Floydeng)를 썼다.[31] 이 노래는 플로이드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 관대함을 묘사하며, 집을 압류하는 은행가들을 무법자에 비유하여 둘 다 강도 행위라고 비판했다. 가사 중에는 "여행을 하다 보면 여러 부류의 무법자를 만날 것이다. 어떤 이는 여섯 자루 총으로 당신을 강탈하고, 어떤 이는 만년필로 당신을 강탈한다"(Some will rob you with a six-gun, And some with a fountain peneng)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은행 강도와 사회 구조적 문제를 동시에 비판하는 내용이다.[75] 거스리의 노래는 이후 많은 음악가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유명 만화 딕 트레이시의 악당 캐릭터인 플랫탑 존스는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를 모델로 만들어졌다.[32] 만화에서 플랫탑은 오클라호마의 쿡슨 힐스를 패러디한 "크룩스턴 힐스" 출신의 프리랜서 총잡이로 묘사되며, 그가 캔자스시티 학살에 연루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14]
플로이드의 삶은 여러 소설과 코믹스의 소재가 되었다.
- 윌리엄 커닝햄의 소설 『예쁜 남자』(Pretty Boyeng, 1936)는 플로이드의 이야기를 다룬 초기 작품 중 하나로, 사실과 허구를 섞어 플로이드를 로빈 후드와 같은 의적으로 묘사한다. 이 소설은 2014년에 재출간되기도 했다.
- 래리 맥머트리와 다이아나 오사나는 플로이드의 삶을 소설화한 『예쁜 남자 플로이드』(Pretty Boy Floydeng, 1995)를 공동 집필했다.[33]
- 존 스타인벡의 1939년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등장인물 마 조드는 플로이드를 여러 차례 언급하며, 그를 대공황이라는 사회적 비극 속에서 불행한 길을 걷게 된 젊은이로 묘사한다. 마 조드는 플로이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는 예쁜 남자 플로이드를 알았어. 그의 엄마도 알았고.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어. 그는 분명 끔찍했어. 좋은 아이가 그래야 하듯이... 그는 나쁜 짓을 했고, 그들은 그를 상처 입혔지, 그를 잡아서 상처 입혔고 그는 분노했어. 그리고 다음에 그가 한 나쁜 짓은 분노한 상태였고, 그들은 그를 또 상처 입혔지. 그리고 곧 그는 격분했어. 그들은 그에게 해충처럼 쏘아댔고, 그는 맞서 쐈지. 그러고는 코요테처럼 그를 쫓았지, 그는 으르렁거렸지, 마치 늑대처럼 사나웠지. 그리고 그는 분노했지. 그는 더 이상 소년도 남자도 아니었고, 그냥 분노로 가득 찬 존재였어.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상처 입히지 않았어. 그는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았어. 결국 그들은 그를 쫓아가 죽였지. 신문에서 그가 얼마나 나빴는지 뭐라고 말하든 - 그게 바로 현실이었어.[34]
- 플로이드는 베이비 페이스 넬슨, 머신 건 켈리와 함께 코믹 북 시리즈 『예쁜, 베이비, 머신(Pretty, Baby, Machine)』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플로이드의 이야기는 여러 차례 영화와 TV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연도 | 제목 (원제) | 플로이드 역 배우 | 비고 |
---|---|---|---|
1957 | 수사국 무장하라 (Guns Don't Argueeng) | 더그 윌슨 | |
1960 |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 (Pretty Boy Floydeng) | 존 에릭슨 | |
1965 | 갱왕 딜린저 (Young Dillingereng) | 로버트 콘래드 | |
1970 | 프리티 보이에게 총알을 (A Bullet for Pretty Boyeng) | 파비안 포르테 | |
1973 | 딜린저 (Dillingereng) | 스티브 케널리 | |
1974 |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 이야기 (The Story of Pretty Boy Floydeng) | 마틴 쉰 | TV 영화 |
1975 | 캔자스시티 학살 (The Kansas City Massacreeng) | 보 홉킨스 | TV 영화 |
1987 | 베른 밀러 이야기 (The Verne Miller Storyeng) | 앤드루 로빈슨 | |
2009 |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eng) | 채닝 테이텀 | 존 딜린저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잘못 묘사됨 |
2016 | The Last Run of Pretty Boy Floydeng | 브라이언 본 | 다큐멘터리 |
- | Good side of a Bad maneng | 에밀 허쉬 | 제작 연도 미상 |
5. 3. 아내와 아들
찰스 플로이드가 감옥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아내 루비와 아들 잭은 캔자스주 커피빌에 있는 조부의 농가로 이사했다. 아들 잭 뎀프시 플로이드(1924-1999)는 당시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69]조부모는 소작농으로 매우 가난했으며, 나무 판자로 지어진 집은 틈새를 신문지로 막아야 할 정도였다. 수도도 없었고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에서 조부모,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장작 난로로 추위를 견뎌야 했지만, 농작물과 강에서 잡은 물고기 덕분에 굶주리지는 않았다.
잭은 5살 크리스마스 무렵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태어난 직후 헤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첫 만남이었다. 잭은 아버지가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매력적인 모습이었으며, 마치 영화배우 같았다고 기억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많은 선물과 장난감을 가져다주었다.
아버지가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주변 누구도 아버지를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플로이드는 이후에도 여러 번 가족을 찾아왔는데, 항상 한밤중에 몰래 와서 장난감과 돈을 주었다. 강아지를 데려온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새벽 3시에는 돼지를 가져와 "근처에서 차 타이어를 점검하는데 이 돼지가 나를 째려보며 발로 찼다"고 말해 가족들을 웃게 했다. 어머니는 바로 돼지고기 요리를 했고, 아버지는 돼지 주인을 찾아 돈을 주라며 조부에게 10USD 지폐를 맡겼다.
잭은 아버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플로이드는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금품을 빼앗지 않았고, 식사를 대접받거나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돈을 건넸다고 한다. 은행 강도 중 데리고 나온 인질에게 사과하고 위스키를 대접한 뒤 풀어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잭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플로이드 가족은 약 반년 동안 아칸소주 포트스미스의 셋집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0] 그들은 집세를 항상 은화로 미리 냈고, 자선 사업에 기부하기도 해서 동네에서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71]
학교에서는 잭이 지명 수배범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본명인 찰스 뎀프시 플로이드 대신 '잭 해밀턴'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게 했고, 이후 잭이라는 이름을 계속 쓰게 되었다.[72] 아내 루비는 이웃들에게 "남편은 세일즈맨이라 캔자스주를 돌아다니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5. 4. 아들의 증언
찰스 플로이드의 아들 잭 뎀프시 플로이드(1924-1999)는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69]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간 후, 어머니 루비와 아들 잭은 캔자스주 커피빌에 있는 할아버지의 농가로 이사했다. 잭은 당시의 생활을 이렇게 회상했다.
"할아버지는 소작농으로 매우 가난했다. 집 벽은 두께 2cm 정도의 나무 판자였고, 할머니는 신문지와 밀가루, 물을 섞어 만든 풀로 판자 틈새를 메워 바람을 막았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장작 난로로 추위를 견뎌야 했다."
"수도는 없었고, 지붕 낮은 집에는 부엌과 방 두 개뿐이었다. 그 방 두 개에 침대를 놓고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가난했지만 농작물이 있었고 근처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굶주리지는 않았다."
잭이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다섯 살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태어난 직후 헤어졌기에 사실상 첫 만남이었다. 잭은 아버지를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몸짓이나 말투 등 모든 것이 매력적이어서 마치 영화배우 같았다"고 기억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기념품, 선물, 장난감 등을 많이 가져다주었다.
잭은 아버지가 범죄자라는 사실을 들었지만, 주변 누구도 아버지를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여러 번 가족을 찾아왔고, 올 때마다 장난감과 돈을 주었다. 강아지를 데려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항상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찾아왔다.
어느 날 새벽 3시에는 돼지를 가지고 나타나 "근처에서 차를 세우고 타이어를 점검하는데, 이 돼지가 나를 째려보며 발길질을 했다"고 말해 가족들을 웃게 했다. 어머니는 바로 돼지고기 요리를 했고, 그날은 마치 크리스마스 만찬처럼 푸짐한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돼지 주인은 근처 사람일 테니, 찾으면 돈을 주라"며 할아버지에게 10달러 지폐를 맡겼다.
잭은 아버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에게서 금품을 빼앗은 적이 없으며, 누군가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거나 길에서 타이어 수리를 도왔을 때는 반드시 돈을 건넸다고 한다. 은행 강도 중에 데리고 나온 인질에게 사과하고 위스키를 대접한 뒤 풀어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증언했다.
잭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플로이드 가족은 약 반년 동안 아칸소주 포트스미스의 셋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0] 이때 플로이드는 집세를 항상 은화로 선불했고 자선 사업에 기부하기도 해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71]
학교에서는 지명 수배범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본명인 찰스 뎀프시 플로이드 대신 '잭 해밀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후로 잭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72] 어머니 루비는 주변 사람들에게 "남편은 세일즈맨이라 캔자스주를 돌아다니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6. 일화
플로이드에게는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 오클라호마의 한 교회를 방문하여 거액을 기부했지만, 수배 중이었음에도 아무도 그를 신고하지 않았다.
- 한 시골 학교에 겨울철 난방 연료를 지원하기도 했다.
-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정기적으로 교회에 다녔으며, 아버지의 기일에는 반드시 묘소를 찾았다고 한다[73]。
- 은행 강도 후 금고에 있던 서류에 불을 질러, 주택 대출 및 압류 관련 서류를 태워버림으로써 많은 농민들을 빚과 부채에서 해방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일화들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당시 신문들은 그를 '쿡슨힐스의 로빈 후드'라고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을 적으로 여기던 대공황 시대에 플로이드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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