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38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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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38년~1945년)은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사건으로,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독일은 주데텐란트 병합을 시도했다. 뮌헨 협정을 통해 주데텐란트를 독일에게 할양한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붕괴되었고, 슬로바키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1939년 3월 독일은 보헤미아와 모라바를 점령하여 보호령을 수립하고,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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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38년~1945년) | |
---|---|
지도 | |
점령 | |
기간 | 1938년 ~ 1945년 |
배경 | |
주요 사건 | 뮌헨 협정 (1938년) 보헤미아와 모라바 보호령 설치 (1939년) 슬로바키아 공화국 건국 (1939년) |
점령 세력 | |
주요 세력 | 나치 독일 |
협력 세력 | 슬로바키아 공화국 헝가리 폴란드 |
점령 지역 | |
주요 지역 | 체코슬로바키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
영향 | |
주요 결과 |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홀로코스트 |
관련 사건 | |
주요 사건 | 뮌헨 협정 수데텐란트 합병 보헤미아와 모라바 보호령 설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리디체 학살 바르샤바 봉기 프라하 봉기 |
2. 히틀러의 팽창 정책과 주데텐란트 위기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유럽 열강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독일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쟁을 피하고자 했고, 독일 군부 역시 전쟁을 피하려 했다.[1]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1938년 9월 15일부터 16일까지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나 양보를 요구했다. 히틀러는 추가적인 논의 없이는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영국은 주데텐란트 주민투표 결과를 인정하도록 내각과 프랑스를 설득하기로 했다.
1938년 9월 22일, 프랑스와 영국은 주데텐란트 인구의 50% 이상을 독일에 보내는 것을 수용하는 합동 성명을 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9월 21일 마지못해 수용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만족하지 않았고, 9월 22일 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회담에서 주데텐란트의 즉각적인 합병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체임벌린의 새로운 제안은 영국 내각, 프랑스 정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모두에게 거부되었다.[2]
1938년 9월 23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얀 시로비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려 100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독일의 공격에 대비했다. 9월 24일, 프랑스도 부분 동원령을 발동했다. 전쟁을 막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체임벌린은 4강 회의 개최를 제안했고, 히틀러, 체임벌린, 에두아르 달라디에, 무솔리니가 뮌헨에서 회담을 가졌다.
1938년 9월 29일, 뮌헨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고데스베르크에서의 히틀러의 요구와 거의 같았으며, 독일군은 1938년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하고, 국제 기구가 다른 분쟁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했다.[3]
2. 1. 히틀러의 요구
1938년 3월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나치 독일은 독일인 다수가 거주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인 주데텐란트 병합을 노리고 있었다. 주데텐란트의 정치인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친(親)독일계 정당인 주데텐 독일인당은 독일인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서 자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수 민족인 독일인은 고국인 독일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고 프랑스 정부에 정치적,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는 전쟁에 대해 군사적, 정치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위기를 해결하려 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 방어에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35년 프랑스와 소련은 나치 독일의 군사적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1]
2. 2. 국제 사회의 반응
1938년 3월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나치 독일은 독일인 다수가 거주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인 주데텐란트 병합을 노리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고 프랑스 정부에 정치적,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는 전쟁에 대해 군사적, 정치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위기를 해결하려 하였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방어에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35년 프랑스와 소련은 나치 독일의 군사적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1]3. 뮌헨 협정과 그 결과
유럽 열강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독일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의 힘을 과장했지만,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쟁을 피하려 했다. 1938년 9월,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고, 주데텐란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주데텐란트 일부를 독일에 양도하는 안에 합의했지만, 히틀러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1938년 9월 29일, 뮌헨 협정이 체결되어 독일은 주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하고, 국제 기구는 다른 분쟁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었다.[3]
3. 1. 뮌헨 회담
유럽 열강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일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독일 국방군보다 우세했지만, 대규모 재무장을 하고 있는 독일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의 힘을 과장하여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쟁을 피하자고 설득했다. 무솔리니와 이탈리아는 전쟁에 대비되지 않았고, 독일의 급성장에 대해 우려했다. 독일 군부도 독일군의 실상을 알고 있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2]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1938년 9월 15일부터 9월 16일까지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나 그의 양보를 요구했다. 히틀러가 추가적인 논의 없이는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영국은 내각과 프랑스에 주데텐란트 주민들의 주민투표 결과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
1938년 9월 22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와 조르주 보네 외무장관은 런던에서 영국 외교관과 만나 주데텐란트 인구의 50% 이상을 독일에 보내는 것을 수용하기로 하는 합동 성명을 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9월 21일에 마지못해 수용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히틀러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9월 22일 고데스베르크에서 히틀러를 만났을 때 히틀러는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합병되어야 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8일까지 주데텐란트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새로운 제안을 했지만, 영국 내각, 프랑스 정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모두 이 제안을 거부했다.[2]
1938년 9월 23일, 얀 시로비 체코슬로바키아 새 정부 총리는 총동원령을 내려 1백만 명이 넘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독일의 공격에 대비했다. 9월 24일,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체임벌린은 4강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전쟁을 피하려는 체임벌린의 생각에 따라 히틀러, 체임벌린, 달라디에, 무솔리니는 뮌헨에서 회담을 가졌다.
협상은 1938년 9월 29일에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아돌프 히틀러, 네빌 체임벌린, 베니토 무솔리니,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고데스베르크에서의 제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일군은 1938년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할 예정이었고, 국제 기구는 다른 분쟁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했다.[3]
3. 2. 뮌헨 협정의 내용
1938년 9월 29일, 아돌프 히틀러, 네빌 체임벌린, 베니토 무솔리니,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뮌헨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은 고데스베르크에서의 제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일군은 1938년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국제 기구는 다른 분쟁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하였다.[3]3. 3. 협정의 영향
유럽 열강들은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그들은 독일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독일 국방군보다 우세했지만, 대규모 재무장을 진행 중인 독일에게 뒤처진다고 생각했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의 힘을 과장하여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쟁을 피하자고 설득했다. 무솔리니와 이탈리아는 전쟁에 대비되지 않았고, 독일의 급성장을 우려했다. 독일 군부 역시 독일군의 실상을 알고 전쟁을 피하려 했다.[2]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1938년 9월 15일부터 16일까지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나 양보를 요구했다. 히틀러는 추가 논의 없이는 군사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고, 영국은 내각과 프랑스에 주데텐란트 주민 투표 결과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
1938년 9월 22일,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는 런던에서 영국 외교관과 만나 주데텐란트 인구의 50% 이상을 독일에 할양하는 것을 수용하는 합동 성명을 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9월 21일 마지못해 수용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만족하지 않았고, 9월 22일 고데스베르크에서 히틀러를 만났을 때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8일까지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새로운 제안을 했지만, 영국 내각, 프랑스 정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모두 거부했다.[2]
1938년 9월 23일, 얀 시로비가 이끄는 새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려 1백만 명이 넘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독일의 공격에 대비했다. 9월 24일,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체임벌린은 4강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히틀러, 체임벌린, 달라디에, 무솔리니는 뮌헨에서 회담을 가졌다.
협상은 1938년 9월 29일에 타결되었다. 히틀러, 체임벌린, 무솔리니, 달라디에는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고데스베르크에서의 제안과 거의 같았다. 독일군은 1938년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하고, 국제 기구는 다른 분쟁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했다.[3]
4. 체코슬로바키아의 붕괴
1938년 9월 29일, 뮌헨 협정에 따라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슬로바키아와 자카르파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치 지역임을 선언했다. 자카르파탸는 1938년 11월에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8년 11월, 슬로바키아 내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모든 정당(공산주의자 제외)은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흘린카의 슬로바키아 인민당 - 슬로바키아 국민통합당"을 결성했는데, 이는 슬로바키아에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39년 1월, 슬로바키아 정부는 슬로바키아 국민통합당, '독일당'(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정당), '통합 헝가리당'(슬로바키아 내 헝가리인 정당) 외 모든 정당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4]
4. 1. 제1차 빈 중재
1938년 11월 2일 제1차 빈 중재에 따라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남슬로바키아와 남자카르파탸(카르파티아 루테니아,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헝가리에 양도할 것을 강요했다.4. 2. 슬로바키아의 독립과 나치 독일의 개입
1939년 2월부터 나치 독일 사절들은 슬로바키아 정치인들을 설득하여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였다. 1939년 3월 9일, 체코 군대가 슬로바키아를 점령하면서 요제프 티소는 총리직을 잃었다.[4]1939년 3월 13일, 아돌프 히틀러는 티소를 베를린으로 초대하여 즉시 독일의 '보호'하에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이 헝가리와 폴란드가 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토를 병합하도록 두겠다고 위협했다. 티소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와 슬로바키아 총리 카롤 시도르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음날 슬로바키아 의회를 소집하여 독립을 결정하기로 합의하였다.[4]
1939년 3월 14일,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의 수반이었던 요제프 티소가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나치 독일은 이를 승인했다. 같은 날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도 독립을 선언했지만, 1939년 3월 16일 헝가리에 의해 점령 및 합병되었다.[5] 1939년 3월 16일에는 독일군이 슬로바키아에 진주하면서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4. 3.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 수립
1939년 3월 15일 에밀 하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나치 독일의 보호국으로 규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멸되었다. 이 문서에는 사실상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5] 같은 날, 독일군이 보헤미아, 모라바에 군대를 진주하면서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이 수립되었다.[5]5. 역사적 평가와 교훈
1938년 9월 29일 체결된 뮌헨 협정은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합병을 승인했다. 이는 서방 국가들이 독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유화 정책을 펼쳤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음을 보여준다. 슬로바키아와 자카르파탸는 자치를 선언했고, 1938년 11월 2일 제1차 빈 중재를 통해 남슬로바키아와 남자카르파탸는 헝가리에 양도되었다.[4]
1939년 3월 14일, 요제프 티소는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했고, 나치 독일은 이를 승인했다. 1939년 3월 15일, 에밀 하하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나치 독일의 보호국으로 규정하는 문서에 서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는 사실상 소멸되었다.[5]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국제 사회가 침략 행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특히,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의 주권이 희생되는 현실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조
[1]
서적
Hitler: Volume I: Ascent 1889–1939
[2]
서적
Czechoslovakia between Stalin and Hitler: The Diplomacy of Edvard Beneš in the 1930s
https://books.google[...]
1996-05-23
[3]
서적
Third Axis Fourth Ally
[4]
뉴스
Forced displacement of Czech population under Germans in 1938 and 1943
http://www.radio.cz/[...]
Radio Prague
[5]
문서
League of 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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