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존재의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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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고 존재의 제전은 프랑스 혁명 시기,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이성의 숭배를 대체하기 위해 제안한 새로운 종교 의식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이성의 숭배의 무신론적 경향을 비판하며,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최고 존재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최고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대우주를 숭배하는 이신론적 성격의 종교를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국교로 삼으려 했다. 1794년 6월 8일 파리에서 대규모 제전이 거행되었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함께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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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정치는 프랑스 혁명 시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정치적 격변으로, 혁명 지도자들이 내전과 반혁명에 맞서 공포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처형과 과도한 폭력으로 비판받다가 로베스피에르의 몰락과 함께 종식되었다.
최고 존재의 제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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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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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명칭 | Culte de l'Être suprême |
주요 분류 | 이신론 |
정치 체제 | 프랑스 제1공화국 |
사용 언어 | 프랑스어 |
창시자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
창립일 | 1794년 5월 7일 |
해체일 | 1794년 7월 28일 |
상세 정보 | |
종교 | 이신론 |
신 | 이성 |
숭배 대상 | 지고 존재 |
목적 | 혁명 정신 고양 공포정치 정당화 |
역사적 맥락 | |
배경 | 프랑스 혁명 시기, 기독교 세력 약화 및 무신론 확산에 대한 반발 |
영향 | 프랑스 혁명 종교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쇠퇴 |
관련된 사건 | |
최고 존재 축제 | 1794년 6월 8일, 샹 드 마르스에서 개최 |
인물 | |
관련 인물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
2. 역사적 배경
프랑스 혁명은 사회 전반에 걸쳐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가톨릭에 대한 공식적인 거부가 나타났다. 초기에는 자크 에베르 등의 급진파 주도로 무신론적인 '이성의 숭배'가 등장했지만, 이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반발을 샀다.
로베스피에르는 무신론을 비판하고, 최고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사회 질서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볼테르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새로운 시민 종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3] 그는 기독교가 신을 인격적이고 형상화된 존재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신에 대한 몰이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을 참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기독교의 특성이 군중의 의식을 저급하게 만들고 프랑스인의 도덕적 타락을 야기했다고 생각했다.
국내적으로는 공포 정치 시기에 혁명 정부가 국민들의 조국애를 고취하고, 혁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적 제전이 필요했다. 최고 존재의 제전에서 숭배하는 대상은 기존 가톨릭의 인격신이 아닌 대우주(大宇宙)였는데, 이는 다른 말로 이성신(理性神)이라고도 한다. 이 개념은 고대 스토아 학파 철학 및 후기 플라톤 학파 철학에서 언급된 부동의 일자(一者)와 연결되며, 만물 생성의 원인이자 최고 원리로 여겨진다.
2. 1. 이성의 숭배
자크 에베르와 앙투안 프랑수아 모모로 등 급진주의자들이 옹호한 이성의 숭배는 대체로 무신론적인 견해를 인간 중심주의 철학으로 응축시켰다. 이성의 숭배에서는 어떤 신도 숭배하지 않았으며, 지침 원칙은 추상적인 개념인 이성에 대한 헌신이었다.[1]1793년 11월 10일, 에베르파의 주도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성의 제전'이 거행되었다.[29][30][31] 성당 내진 중앙에는 인공 산을 세우고, 그 정상에 고대 그리스풍의 신전을 세웠으며, 네 모서리에는 볼테르, 장 자크 루소, 샤를 드 몽테스키외와 같은 계몽사상가들의 흉상을 설치했다. 신전 안에서는 '자유와 이성의 여신'으로 분장한 오페라좌의 여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적인 요소가 강했다.[29][30][31]
2. 2. 최고 존재 숭배의 등장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는 이성의 숭배가 가진 무신론적 경향과 과도한 연출을 비판하고, 이신론에 기반한 '최고 존재 숭배(Culte de l'Être suprême프랑스어)'를 제창했다.[34] 로베스피에르는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이성과 덕을 통해 신을 인식하고 사회적 미덕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9] 그는 최고 존재 숭배가 프랑스 국민들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확립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믿었다.[35]로베스피에르는 기독교가 신을 인격적이고 형상화된 존재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신에 대한 몰이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을 참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기독교의 특성이 군중의 의식을 저급하게 만들고 프랑스인의 도덕적 타락을 야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파와 비슷하게 기독교를 탄압했지만, 두 파벌은 이신론과 무신론이라는 점에서만 의견이 달랐다.
최고 존재의 제전에서 숭배하는 대상은 기존 가톨릭의 인격신이 아닌 대우주(大宇宙)였는데, 이는 다른 말로 이성신(理性神)이라고도 한다. 이 개념은 고대 스토아 학파 철학 및 후기 플라톤 학파 철학에서 언급된 부동의 일자(一者)와 연결되며, 만물 생성의 원인이자 최고 원리로 여겨진다. 이 원리는 오로지 순수사유, 즉 인간의 합리성과 지식에 대한 갈망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인간이 순수사유를 통해 신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35]
이러한 점에서 최고 존재의 제전은 당시의 유신론에 대한 도전이자, 인간의 이성과 신을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사유와도 맞닿아 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몽매주의와 정념에 빠진 프랑스 군중이 대우주의 원리를 숭배함으로써 도덕성을 회복하고 자유와 평등을 제일의 신념으로 가질 수 있다고 여겼고, 이것을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국교로 삼으려 했다.[35] 최고 존재 숭배에 관한 법령이 선언된 이후, 산악파 정부는 각 교회당을 국유 재산으로 몰수하고, 모두 이성 숭배를 위한 ‘이성의 교당’으로 만들었다.[35]
프랑스 혁명 당시, 자크 에베르와 앙투안 프랑수아 모모로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이성의 숭배라는 새로운 사상을 옹호했다. 이는 무신론적인 견해들을 인간 중심주의 철학으로 응축시킨 것이었으며, 어떤 신도 숭배하지 않고 추상적인 개념인 이성에 헌신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1]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이러한 신성 거부에 경악했다. 그는 가톨릭을 싫어했지만, 특히 무신론을 혐오했다.[2] 그는 최고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사회 질서에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라는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3] 로베스피에르는 이성의 숭배가 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스캔들적인 장면"과 "야생의 가면극"을 연출한다고 비판했다.[4] 1793년 말, 그는 이성의 숭배와 그 옹호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하고,[5] 자신의 혁명적 종교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1794년 5월 7일, 국민 공회는 로베스피에르가 고안한 최고 존재 숭배를 프랑스의 시민 종교로 승인했다.[6][7][8]
로베스피에르는 이성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유일한 목적은 덕이라고 믿었다. 그는 단순한 유신론을 넘어, 더 합리적인 신성함에 대한 새로운 헌신을 추구했다. 최고 존재 숭배의 주요 원칙은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불멸에 대한 믿음이었다.[9] 이러한 믿음은 시민 의식적이고 공공적인 덕을 섬기는 데 사용되었으며,[10] 이러한 덕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충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11] 그는 살아있는 신과 더 높은 도덕률에 대한 믿음이 "정의를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존재"이며, 공화주의 사회에 필수적이라고 말했다.[12]
1794년 5월 7일, 국민공회는 최고 존재 숭배를 제정했으며, 공화력 2년 플로레알 18일의 ''최고 존재 숭배 제정 법령'' 첫 조항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13]
- 프랑스 국민은 최고 존재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인정한다.
- 그들은 최고 존재에 대한 최고의 봉사는 인간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 그들은 이러한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악한 믿음과 폭정에 대한 혐오, 폭군과 배신자를 처벌하고, 불행한 사람을 돌보고, 약자를 존중하며, 억압받는 사람을 옹호하고,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선행을 하고, 누구에게도 부당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꼽는다.
그는 최고 존재, 진실, 정의, 정숙, 우정, 검소함, 충실함, 불멸, 불행 등을 위한 축제를 봉헌했다. 최고 존재 숭배는 장 자크 루소가 ''에밀'' 4권에서 제시한 사보이 사제의 신조를 기반으로 했다.
프랑스 혁명이 절정에 달하고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가 확립된 공포 정치 시기에, 그는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며 가톨릭 교회 제도를 파괴하려 했다. 동시에 그는 공포 정치는 미덕에 기초해야 한다는 이상도 가지고 있었으며, 기독교를 대체할 도덕을 찾고 있었다. 또한, 국내 불안정성이 심화되었고 혁명 정부는 조국애에 호소하여 혁명의 위기를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를 대체할 이성 숭배를 위한 제전이 필요했던 혁명 정부는 1793년 11월 10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성의 제전'을 열었다.[29][30][31] 이는 에베르파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매우 무신론적인 성격을 띠었다.[29]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제전이 무신론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31] 그는 '새로운 인간', 즉 공화주의적인 시민을 창조하기 위한 공교육의 일환으로 제전을 바라보았다.[31] '단일하고 불가분'해야 하는 프랑스 공화국의 기반은 도덕성을 갖춘 민중 안에 있으며,[31] 그 도덕성은 신앙심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로베스피에르는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31] 기독교의 '신'을 대체하는 '최고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31] 그리하여 1794년 5월 7일의 법령에 따라 6월 8일에 튈르리 궁전과 샹 드 마르스 공원을 중심으로 '최고 존재의 제전'이 거행되었다.[29][30][31] 그 중심이 된 것은 로베스피에르파였으며, 이신론적 성격이 짙었다.[32][31] 이 제전의 사상적 배경으로는 장 자크 루소의 '시민 종교' 주장이 있다고 여겨진다.
3. 최고 존재 숭배의 내용
최고 존재 숭배는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가톨릭을 대체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종교 형식이다.[34] 로베스피에르는 드니 디드로의 영향을 받은 에베르파의 무신론에 반대하며, 이신론(理神論)적 입장을 취했다.[34]
로베스피에르는 그리스도교가 신을 인격적이고 형상(形像)을 가진 존재로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을 참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교가 프랑스인의 도덕적 타락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최고 존재는 기존 가톨릭의 인격신이 아닌 대우주(大宇宙), 즉 이성신(理性神)이었다. 이 개념은 스토아 학파와 신플라톤주의에서 언급된 부동의 일자(一者)와 유사하며, 만유 산출의 원인이자 최고 원리로 여겨진다. 이 원리는 순수사유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인간의 합리성과 지식에 대한 갈망을 통해 얻어진다. 로베스피에르는 인간이 순수사유를 통해 신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35]
최고 존재 숭배는 유신론에 대한 도전이자 무신론적 사유와도 맞닿아 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군중이 대우주의 원리를 숭배함으로써 도덕성을 회복하고 자유와 평등을 최고의 신념으로 가질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국교로 삼으려 했다.[35]
산악파 정부는 최고 존재 숭배 법령 선언 후, 각 교회당을 국유 재산으로 몰수하고 '이성의 교당'으로 만들었다.[35] 로베스피에르는 이성이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유일한 목적은 덕이라고 믿었다. 그는 유신론을 넘어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불멸을 믿는 최고 존재 숭배를 통해 시민 의식적이고 공공적인 덕을 추구했다.[9][10] 이러한 덕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충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11]
1794년 5월 7일, 국민공회는 최고 존재 숭배를 제정했다. 공화력 2년 플로레알 18일의 ''최고 존재 숭배 제정 법령''은 프랑스 국민이 최고 존재와 영혼 불멸을 인정하며, 최고 존재에 대한 최고의 봉사는 인간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13] 또한 사악한 믿음과 폭정에 대한 혐오, 폭군과 배신자 처벌, 불행한 사람을 돕는 것 등을 중요한 의무로 규정했다. 최고 존재 숭배는 장 자크 루소가 ''에밀''에서 제시한 사보이 사제의 신조를 기반으로 했다.
3. 1. 최고 존재의 제전
1794년 6월 8일, 로베스피에르의 주도로 파리에서 대규모 '최고 존재의 제전'이 거행되었다. 이 제전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연출을 맡았으며, 튈르리 궁전과 샹 드 마르스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31] 제전에서는 '무신앙'을 상징하는 괴물상을 불태우고 '예지(최고 존재)'의 상을 등장시키는 등, 이신론적이고 상징적인 연출이 이루어졌다.[31] 로베스피에르는 "미덕의 사제"로서 연설을 통해 최고 존재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악행과 전제군주에 맞서 싸울 것을 맹세했다.[31]아침 8시, 퐁뇌프의 대포 소리를 신호로 수십만 명의 관중이 모였다. 떡갈나무 가지를 든 남자들과 장미꽃을 든 여자들의 행렬이 튀일리 궁전 정면을 향해 행진했다.[31] 국민 방위대가 배치된 가운데, '무신앙'을 상징하는 괴물상이 불태워지자 '예지(최고 존재)'의 상이 나타났다.[31] 로베스피에르는 "최고 존재"에게 경의를 표하며 "내일부터 악행과 전제군주와 싸울 것"을 맹세한 후 샹 드 마르스까지 행진했다.[31]
이 제전은 자크 르네 에베르와 조르주 당통을 숙청한 로베스피에르의 지시에 따라 치밀하게 계획된 시민 종교 의식이었다.[31] 이들은 기독교의 신을 부정하면서도 종교 의식의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30]
최고 존재의 제전은 새로운 정치 문화를 창조하려는 혁명 운동의 정점을 보여준다. 민중 운동의 에너지를 통제하여 시민 도덕의 질서에 맞추려는 의도였다.[31] 그러나 이 제전은 혁명 운동을 지탱하던 아래로부터의 에너지를 억누르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31] 제전 개최 약 2개월 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는 실각하고 단두대형에 처해졌으며, 이와 함께 문화 혁명도 급속히 쇠퇴했다.[31]
4. 최고 존재 숭배의 영향과 쇠퇴
최고 존재 숭배는 로베스피에르의 권력 강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그의 독단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탈기독교화 과정이 반전되기 시작하면서 로베스피에르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14][15]
프레리알 20일 2년 (1794년 6월 8일), 오순절 휴일에 맞춰 최고 존재에 대한 국가적 축제가 열렸다. 프랑스 공화력의 휴식일(décadi)마다 기념 행사가 의무화되었으며, 파리에서는 자크 루이 다비드와 프랑수아 조제프 탈마가 조직한 대규모 행사가 파리 샹 드 마르스에서 열렸다.[6][16] 로베스피에르는 이 행사를 주도하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과시적으로 드러냈다.[17][18]
목격자들에 따르면, 로베스피에르는 "최고 존재의 제전" 동안 기쁨에 넘쳐 미덕, 자연, 자연신 숭배 신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샹 드 마르스에서 두 번의 연설을 통해 그리스도나 무함마드가 아닌 최고 존재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강조했다.[20] 그러나 일부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신이 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조제프 푸셰는 그의 몰락을 예견했다.[21] 바디에는 카트린 테오의 음모를 보고하며 로베스피에르를 조롱하기도 했다.[22]
최고 존재 숭배는 반성직자들과 다른 정치적 파벌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로베스피에르의 과대망상을 의심하게 했다.[23][24] 결국 최고 존재의 제전은 테르미도르 반동과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에 기여했다.[18] 마담 드 스탈은 이때부터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25][26]
1794년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면서 최고 존재 숭배는 공식적인 승인을 잃고 사라졌다.[27] 1802년 4월 8일, 나폴레옹은 ''18 게르미날 법, 10년''을 통해 최고 존재 숭배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28]
최고 존재의 제전은 퐁뇌프의 대포를 신호로 시작되었으며, 수십만 명의 관중이 튀일리 궁전 정면을 향해 행진했다. "무신앙"을 상징하는 괴물상이 불태워지고 "예지(최고 존재)"의 상이 나타났으며, 로베스피에르는 "미덕의 사제"로서 "최고 존재"에게 경의를 표했다.[31] 이는 자크 르네 에베르와 조르주 당통을 숙청한 로베스피에르의 지시에 따라 치밀하게 짜여진 시민 종교 의식이었다.[31]
최고 존재 숭배는 새로운 정치 문화 창조라는 점에서 혁명 운동의 정점을 나타냈지만, 민중 운동의 에너지를 억누르는 결과를 가져왔다.[31]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함께 최고 존재 숭배는 급속히 쇠퇴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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