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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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경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1533년에 태어나 1592년 임진왜란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 여러 관직을 거쳐 동래부사로 재임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 전투에서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했으며,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저서로는 《제봉집》 등이 있으며, 시문과 글씨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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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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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고경명 |
원래 이름 | 高敬命 |
출생일 | 1533년 11월 30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광주목 압보촌 |
사망지 | 조선 전라도 금산군 와은평 벌판 |
사망일 | 1592년 7월 10일 |
거주지 | 조선국 전라도 광주목 압보촌 |
국적 | 조선 |
본관 | 장흥(長興) |
별명 |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태사(苔槎), 시호는 충렬(忠烈) |
학력 | 1558년 식년시 문과 갑과 1위(장원) |
직업 | 문신, 정치인, 작가, 의병장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김씨 부인 |
자녀 | 고종후, 고인후, 고준후, 고순후, 고유후, 고용후, 딸 노씨 부인과 안씨 부인 |
부모 | 고맹영(부) |
친인척 | 김백균(장인) |
2. 생애
1533년 광주광역시 압보촌(鴨保村)에서 태어났다.[3] 할아버지 고운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는 등 가문의 부침이 있었으나, 어릴 때부터 남다른 기량을 보여 백인걸, 송순 등 당대의 명망 높은 학자들 밑에서 수학하였다.
1552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58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며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호조, 공조, 형조의 좌랑과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사서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호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의 기회를 얻기도 했다. 1563년에는 이량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과정에 참여했으나, 이량과 가까웠던 집안 배경 탓에 연루되어 좌천되고 파직되는 등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4]
이후 여러 차례 복직과 파직을 반복하며 영암 군수, 종계변무 주청사의 서장관, 서산 군수, 동래부사 등 지방관과 중앙 관직을 역임했다. 특히 율곡 이이와 같은 인물들의 인정을 받아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으며, 1591년에는 종계변무의 성공적인 마무리에 기여한 공로로 광국공신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정철 추천 문제로 동인 세력의 공격을 받아 다시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담양에서 6천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상하려 했으나, 금산 지역의 위급함을 듣고 방향을 돌려 1592년 7월 10일 금산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향년 58세였다.
사후 그의 충절을 기려 예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등에 추증되었고, 이후 의정부 좌찬성으로 가증되었다. 1603년에는 광주에 세워진 사우에 '포충(褒忠)'이라는 사액이 내려졌으며(포충사),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 여러 곳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큰아들 고종후 역시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시문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저서로 《제봉집 (霽峰集)》 등이 전해진다.
2. 1. 초기 활동
1533년 광주광역시 압보촌(鴨保村)[3]에서 대사간 고맹영과 성균관진사 서걸의 딸 남평 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고운은 조광조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승의랑, 형조좌랑 등을 지냈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처럼 의연하였다. 휴암 백인걸이 남평현감으로 근무할 때 한번 보고는 중하게 여기고, 범상치 않은 아이임을 알아 보았다. 백인걸의 문하에서 시서와 경사 등을 수학하였다. 이후 담양군의 면앙 송순 문하에도 출입하였다.그는 젊어서 해서, 황해도에 갔다가 한 기생을 데려오려 했으나 끝내 데려오지 못했다. 그는 기생의 치마폭에 시를 남겨주고 떠났는데 "강머리에 말을 세워 이별 슬퍼 지체하니, 높은 버들가지만큼 미운 마음 이는구나, 미인은 정이 엷어 새 사람에 마음 두나, 사나이는 정이 깊어 뒷날 기약 다짐하네. 복사꽃 떨어지는 이 좋은 한식철에, 자고새 황혼시에 날아갔다 날아오네. 남포의 풀 우거지고 봄 물결은 출렁이니, 마름꽃에 정을 담아 꺾어가서 두리로다."라고 하였다. 뒤에 새로 온 황해도 관찰사가 기생의 치마에 쓰인 시를 읽고 시재를 감탄하고, 그 사연을 물어보았다. 나중에 감사가 고맹영을 만나자 당신 아들 고경명은 재주와 얼굴이 뛰어났지만, 행동에는 좋지 않은 면이 있다며 비꼬았다. 그러자 고맹영은 자기 아들의 모습은 제 어미를 닮았지만 행동은 나를 꼭 닮았다며 웃자 관찰사도 함께 웃었다 한다. 현호쇄담에 실린 내용으로 여기에 그가 지었다는 시 1수가 전언 수록되어 있다.
1552년(명종 7년) 진사시와 생원시 2등(二等) 18위(23/100)에 동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진사시에는 1등 4위(4/100)으로 합격했다. 1558년(명종 13년) 명종이 성균관에 유생들을 시험할 때 수석을 차지하여 바로 직부전시에 명을 받았다.
2. 2.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1558년(명종 13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1등, 즉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고, 연이어 호조 좌랑, 공조 좌랑, 형조 좌랑, 사간원 정언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559년(명종 14년)에는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었고, 1560년(명종 15년) 봄에는 다시 사간원 정언을 맡았다가 형조 좌랑을 거쳐 병조 좌랑 겸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었다.1561년 봄 사간원 헌납이 된 뒤 사헌부 지평, 홍문관의 부수찬과 부교리를 역임했다. 다시 사간원 헌납으로 임명되었다가 그해 가을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암행어사로 평안도 지역을 살폈다. 그해 겨울 부교리를 지내고 1562년(명종 17년) 봄, 병을 이유로 성균관 전적에서 울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1563년에는 교리가 되었다. 같은 해(명종 18년),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논의에 교리로서 참여하여 이량을 공격했다. 그러나 부친 고맹영과 장인 김백균이 이량과 가까운 사이였기에 이에 연루되어 다시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아 결국 파직되었다. 사헌부에서는 고경명이 이량 제거 논의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장인 김백균에게 언문 편지로 몰래 알린 행위가 지극히 간사하고 변덕스럽다고 비판하며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4]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571년(선조 4년) 선조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다시 등용하려 했으나, 사림파 언관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1581년(선조 14년)에는 동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직되어 영암 군수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공식 기록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종계변무 주청사 김계휘가 파견될 때, 율곡 이이 등의 추천으로 서장관에 임명되어 연경(현재의 베이징)에 다녀왔다. 훈구파 가문 출신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이이와 같은 인물들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관직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때 성균관 직강 겸 사헌부 지평의 직책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1582년(선조 15년) 서산군수로 자리를 옮겼고,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임명된 이이의 추천으로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후 종부시 첨정을 지냈으며, 사신으로 만난 명나라 관리들과 시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1583년에는 한성부 서윤이 되었다가 한산군수를 거쳤고, 그해 말 문장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 정랑에 추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광주의 집으로 돌아갔다. 1584년(선조 17년) 종부시 첨정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사복시 첨정을 거쳐 연말에는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 1585년(선조 18년) 군자감 정이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그 해 순창군수로 부임했는데, 재직 중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회복했다는 일화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전해진다. 1588년 순창군수 재직 중 파직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승문원 판교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그해 여름 내섬시 정이 되었고, 대신들의 추천으로 다시 승문원 판교가 되어 지제교와 춘추관 편수관직을 겸임했다. 당시 여러 정치 세력들이 그를 영입하려 했으나, 그는 거리를 두며 관직에만 충실하려 했다. 1590년 가을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다. 1591년(선조 24년) 봄 동래 부사로 재직 중 종계변무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광국공신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여름, 서인 세력이 실각하고 동인이 좌의정 정철을 탄핵할 때, 고경명이 정철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라는 이유로 공격받자 결국 관직을 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2. 3. 임진왜란과 최후
1592년(선조 25) 초, 고경명은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을 예측했다고 전해진다. 그해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이 한성을 점령했다는 소식과 선조가 의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자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과 광주목사 권율 등이 이끄는 관군 5만 명이 수천 명의 왜군에게 용인 등지에서 크게 패하자, 고경명은 격문을 돌려 6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을 모집했다. 5월 29일에는 함께 의병을 일으킨 양대박(梁大樸), 유팽로(柳彭老) 등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양대박은 전주로 가서 2천 명의 의병을 추가로 모집했다.1592년 6월 1일, 고경명은 의병을 이끌고 담양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했다.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하여 큰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 경상도 방면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막도록 지시했다. 이후 6월 22일 충청도 여산(礪山)을 거쳐 6월 27일 은진(恩津)으로 이동했다. 이때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호남으로 진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군대를 연산(連山)으로 옮겼다. 원래 고경명은 광주와 장흥 등지에서 모은 6천여 의병을 이끌고 선조가 있는 의주로 가려 했으나, 금산의 관군과 의병이 왜군에게 전멸당하고 군수마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에서 군대를 정비한 뒤 금산으로 방향을 돌렸다.
금산에서 그는 방어사 곽영(郭嶸)과 합류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 금산성이 견고하여 쉽게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고경명은 곽영과 함께 8백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전투 중 곽영의 부하 장수 김성헌 등이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고, 금산의 왜군은 광주와 흥덕에서 온 증원군과 합류하여 더욱 강력해졌다. 1592년 7월 10일, 고경명은 와은평(臥隱坪) 일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군 주력 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전투 중 그는 말에서 떨어졌고, 부하 안영과 유팽로가 급히 달려와 부축하려 했으나 뒤쫓아온 왜군의 칼에 맞아 함께 전사했다. 성을 지키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 역시 의병들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고경명의 시신은 전투 직후 바로 수습되지 못하고 40여 일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여러 차례 여름비를 맞았음에도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생전의 모습과 같아 보는 이들이 모두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2. 4. 사후
1592년 10월 전라남도 화순현 흑토평(黑土坪) 언덕에 매장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년) 3월 9일 전라남도 장성현 오동리(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430-2번지)로 이장되었다. 사망 직후 선조의 왕명으로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 禮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다.다섯째 아들 고유후는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던 중 병을 얻어 탈상 후 1년 만에 사망했다. 한편, 살아남은 아들 고순후는 1591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아버지 고경명의 순국으로 특별히 채용되어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큰아들 고종후 역시 아버지의 상중에 복직하여 다시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서 싸우다가 패하자 1593년 6월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했다. 고종후도 사후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당시 순찰사는 고경명이 어두운 밤에 행군하다가 군사가 무너져 죽은 것이 아니냐며 이전의 혐의를 들어 의심하기도 했으나, 후임 순찰사로 부임한 이정엄(李廷馣)이 다시 조사하여 그의 정확한 사망 정황을 확인하였다. 1595년(선조 28년) 여름에는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1601년에는 문하생인 사헌부 감찰 박지효와 지역 유림들이 사우를 지어달라고 상소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집안과 유림 등의 도움으로 광주에 사우가 세워졌고, 1603년 조정에서는 '포충(褒忠)'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이후 다시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1605년(선조 38년)에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및 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고경명은 시·글씨·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제봉집 (霽峰集)》, 《서석록 (瑞石錄)》, 《유서석록 (遊瑞石錄)》 등이 있다.
3. 가족 관계
- 증조부 : 고자검(高自儉)
- 할아버지 : 고운(高雲)
- 아버지 : 고맹영(高孟英)
- 어머니 : 남평 서씨 서걸(徐傑)의 딸
- 부인 : 울산 김씨 김백균(金百筠)의 딸
- 장남 : 고종후(高從厚) - 호 준봉(隼峰), 시호 효열(孝烈)
- 손자 : 고부립(高傅立)
- 손자 : 고부언(高傅言)
- 차남 : 고인후(高因厚) - 호 학봉(鶴峯), 시호 의열(毅烈)
- 손자 : 고부림(高傅霖)
- 손자 : 고부천(高傅川) - 문과 급제
- 손자 : 고부집(高傅楫)
- 손자 : 고부량(高傅良)
- 삼남 : 고준후(高遵厚) - 요사(夭死)
- 사남 : 고순후(高循厚) - 호 정헌(靜軒), 사헌부 감찰
- 오남 : 고유후(高由厚) - 호 청사(晴沙), 판결사
- 육남 : 고용후(高用厚) - 태인 현감
- 장녀 : 광주 박씨 박숙(朴橚)에게 출가
- 외손자 : 박충렴(朴忠)
- 딸 : 노씨 부인
- 딸 : 안씨 부인
4. 저작
고경명은 문인으로서 뛰어난 문장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글을 남겼다. 대표적인 문집으로는 《제봉집》이 있으며, 무등산 기행 기록인 《서석록(瑞石錄)》과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을 통해 그의 유려한 필치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사회상과 개인적인 교류를 보여주는 고경명 간찰도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4. 1. 저서
- 《제봉집》
- 《서석록(瑞石錄)》
- 《유서석록(遊瑞石錄)》
4. 2. 작품
- 고경명 간찰
5. 평가 및 의의
(내용 없음)
6. 관련 유적 및 문화재
7. 기타
월정 윤근수는 그가 시를 잘 짓는다고 평가했다. 그의 시문 중 몇 편이 현대까지 전해진다.
8. 관련 인물
참조
[1]
웹사이트
백인걸
http://people.aks.ac[...]
[2]
문서
백인걸
[3]
문서
압촌마을
[4]
간행물
헌부에서 울산 군수 고경명의 파직을 청하다
명종실록
1563-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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