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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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응모는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사장, 광산업, 조림 사업 등을 통해 활동한 인물이다. 1883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신학문을 접했다. 1922년 동아일보 정주분국장을 시작으로 언론계에 발을 들였고, 삭주 교동광업소에서 금광을 발견하여 성공적인 광산업을 이뤘다. 이후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사주로 취임, 잡지 조광을 발행하며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장학 사업, 간척 사업, 조림 사업 등 사회 공헌 활동도 펼쳤으나,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행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광복 후에는 조선일보를 복간하고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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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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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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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출생지 |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 |
사망지 | 불명 |
사망일 | 1950년경으로 추정 |
사망 원인 | 불명 |
거주지 |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경성부->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
본관 | 온양 |
별명 | 호: 계초(啓礎), 춘해(春海) |
학력 | 한학 수학 |
직업 | 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 |
배우자 | 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 |
자녀 | 딸 방재숙, 아들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 방재윤(양자) |
부모 | 아버지 방계준, 어머니 온양박씨 |
친척 | 형 방응곤 삼촌 방계묵 양손자 방일영 양손자 방우영 사돈 윤치호 |
2. 생애
방응모는 1883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사서육경을 독파하고 서당 훈장을 맡기도 했으며, 신학문, 일본어, 중국어 등을 독학했다.[15][16][17] 1901년 승계도와 결혼했으나, 아내는 생계를 위해 콩나물 장사 등을 해야 했다.[18][19]
1920년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시작으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22년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고,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33] 1923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장으로 취임하여 경영하였고,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4년 광산업에 뛰어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압록강변 최창학 소유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금맥을 발견하고 인수했다.[37] 1926년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했다.[37]
1932년 교동광산을 135만엔에 매각하고,[40]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7월,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가 되었다.[40][41] 그는 조선일보를 운영하며 인재 양성과 사회 사업에도 힘썼다. 1935년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고,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창간, 운영하였다.[42]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방응모는 조선총독부의 언론 통제 정책에 협조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38년 조선춘추회 간사, 1939년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 1939년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상담역 등으로 활동했다. 1940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조선일보는 폐간되었다.[120]
1945년 광복 후, 조선일보를 복간하고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했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7월 6일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4] 납북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며,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145][146]
2. 1. 생애 초기 (1883년 ~ 1919년)
방응모는 어려서 집중력이 뛰어났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정규 교육 대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6세까지 사서육경을 독파했고, 21세 무렵에는 잠시 서당 훈장을 맡기도 했다.[15] 1896년 독립협회 활동 소식과 형을 통해 신문물을 접한 후, 경성부에서 신문물을 직접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17세에 신학문,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학했다.[16][17]1901년 승계도와 결혼했으나, 아내는 생계를 위해 콩나물 장사 등을 해야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방응모는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부인은 남편을 믿고 기다렸다.[18][19]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기도 했지만, 기존 훈장들의 반발과 스승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사양하고 신학문을 공부하는 친구들과 교류했다.[20]
2. 1. 1. 출생과 성장
방응모는 1883년(고종 20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훗날의 정주시 고암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아버지 '''방계준(方桂準)'''과 어머니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온양 방씨의 후손이었으나[11] 평안북도로 이주한 뒤 집안은 몰락했고, 아버지 방계준은 가난한 선비로 농업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가 어렸을 때 살던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은 온양 방씨의 집성촌이었고, 소암동의 아랫마을인 족지골은 승씨 집안의 집성촌이었다. 방응모의 위로 친형 방응곤이 있었는데, 후일 조선일보의 사주가 되는 방일영과 방우영 형제의 아버지 방재윤의 생부는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이었다. 어렸을 때 그는 마을의 독장산을 자주 올랐다고 한다.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12]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13]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14]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15]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16]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17],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첫 아들은 요절했고, 둘째 아들 역시 1902년 9월 콜레라가 창궐하자 사망했다. 그는 결국 친형 방응곤의 권고로, 방응곤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인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했다. 그러나 방재윤은 후일 1940년 나무 심기 사업에 출장갔다가 입원한 병원에서 간호사가 주사를 잘못 놓아 사망하였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었고[18],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18]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19]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20]
2. 1. 2. 결혼과 가출
1901년 결혼 후 3년 만에 방응모는 집을 떠났다.[21] 당시 양반 관료, 지식인, 지역 유지들은 자녀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냈고, 여유 있는 집안도 아들 중 한 명을 일본으로 유학 보냈기에, 그도 유학을 원했지만 가정 형편상 학업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탈출하고 싶은 심정으로 방랑하였다.[21] 1901년 아내에게 말도 없이 집을 떠났는데, 부인 승계도는 그가 책을 구하러 잠시 먼 길을 간 것으로 알고 기다렸다가[23] 며칠 후 남편의 가출을 알게 되었다.[23]2년을 기다렸지만 방응모는 돌아오지 않았고, 아내 승계도는 돈을 마련하고 사람을 사서 남편의 행방을 찾았다. 당시 전국을 다니는 방물장수들이 부업으로 청탁을 잘 처리해주었는데, 승계도는 자신이 시집올 때 받은 금가락지를 주고 남편을 찾게 했다.[24] 3개월 만에 방물장수는 방응모가 함경도의 어느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고, 승계도는 사람을 사서 남편을 찾아가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24] 1903년 함경도의 서당 훈장 일을 그만두고 정주군으로 돌아왔다.
2. 2. 언론, 기업 활동 (1920년 ~ 1945년)
1920년 4월 민간 신문지 개설 소식을 듣고 동아일보사 정주분국을 찾아 동아일보를 구독했다. 당시 정주읍 인구는 7~8천 명이었고, 동아일보 정주군분국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는 100여 부였다고 한다. 그는 친구 전우현과 조만식을 통해 김성수를 소개받았다.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여 인망을 쌓았다. 1922년 6월 19일[33]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오산학교 재개교를 위한 재단법인 설립 등을 계획했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같은 해 4월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김성수 등의 주도로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
정주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면서 인근 지역에 분국을 설치하고 분국장 인사에도 관여했다. 1926년 동아일보사 정주지부의 관할지인 귀성군에 동아일보사 귀성군분국이 신설되고 소월 김정식이 대표자로 임명되었다. 한편 동아일보 본사에서는 밀린 대금을 독촉했고, 대금 납부가 어려워져 계약금에서 대금을 깎았다.
계속되는 미수금 누적으로 동아일보사 본사에서 정주지국으로 본사 직원들을 조사차 파견하기도 했다.[34] 1925년 12월 23일에는 지국 운영의 어려움을 알리며 구독자들의 외상대금을 청구하는 내용을 동아일보 지방판에 싣기도 했다.[35] 그는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 통사정했고, 이때 군산 출신의 동아일보 영업국장 김철중(金鐵中)과 인연을 맺었다. 1927년 5월 26일 동아일보사 정주군지부장에서 물러나 동아일보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2. 2. 1. 동아일보 지국장 시절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 전우현이 방응모에게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소개했다. 방응모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동아일보 지국장 시절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이봉찬은 방응모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고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또한 방응모를 최창학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써주고,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37]1924년 여름, 방응모는 압록강변 최창학 소유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금맥을 발견하고 인수했다. 1927년 동아일보 정주지국 지국장에서 물러나 고문을 맡았다.
2. 2. 2. 광산업 성공과 조선일보 인수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 전우현의 소개로 광산업에 뛰어든 방응모는 선천군의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인 이봉찬의 도움으로 광산 지식과 폐광 임대 방법을 익혔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됨됨이를 알아보고 최창학에게 그를 소개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내 지원했다.[37]1924년 여름, 방응모는 압록강변 최창학 소유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 삭주 교동광업소에서 금맥을 발견하고 인수하여 경영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을 만나 1925년 아들 방재욱을 얻었으나, 아들은 1926년 4월 요절했다. 1927년 동아일보 정주지국 지국장에서 물러나 고문을 맡았다.
1926년, 동업자들이 떠나고 어려운 시기를 겪던 방응모는 친척 방상진 등의 도움으로 같은 해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했다.[37] 그는 미국산 포드 T형 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으며, 1928년 춘해장학회를 설립하고 의정부 직동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건물을 매입하여 한용운, 홍명희 등을 초대했다.[39]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135만엔에 매각했다.[40] 같은 해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7월,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가 되었다.[40][41]
2. 2. 3. 조선일보 경영과 사회 사업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한 방응모는 언론, 육영, 조림, 간척 사업 등에 뛰어들었다.[42]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여 인망을 얻었고, 삭주 지역에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1932년 6월 15일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영업국장이 되었다. 그해 11월 23일 조만식이 사장에 재선임될 때, 조선일보 부사장에 추대되었다.[44] 조선일보는 용지 구입난과 빚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증권거래소에 다니던 임경래에게 진 빚 때문에 판권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1932년 6월 1일 조선일보 기자들은 임경래를 강제로 끌어내기도 했다.
1933년 1월 16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하고, 1월 18일 창립 취지서를 발표했다.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등이 참여했다. 조만식을 사장으로,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1933년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같은 날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방응모는 조선일보 인수 전부터 한용운을 적극 지원했다.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어주고, 한용운이 일제의 배급을 거부하여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으며, 1944년 한용운이 병석에 눕자 치료비도 지원했다.[45] 한용운,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46]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고,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창간, 운영하였다.[42]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했다.[42]
1933년 방응모는 동아일보 등 다른 신문사의 필진들을 스카웃했는데, 이 중 이광수는 김성수나 송진우에게 알리지 않고 이직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34년 3월 25일 이광수,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하면서 동아일보와 갈등이 생겼다.
1933년 8월 동아일보 호외는 조선일보가 평안도 자금과 인력을 중심으로 운영된다고 보도했고, 평안도 독자들이 동아일보를 떠나 조선일보로 옮겨갔다고 전했다.[64] 동아일보는 이광수와 서춘이 방응모에 의해 조선일보로 스카웃되었다고 보도했다.[65] 이에 대해 "동아일보에는 요새 담양군 사람이 세 사람이나 들어갔지. 방응모가 정주 사람만 쓰면 송진우라고 담양 사람 못쓸라구?[66]"라는 반응도 있었다.
이광수는 조선일보 부사장직에서 9개월 만에 사임했다.[67] 조선일보 내부의 '문모'라는 인물이 이광수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했으나, 방응모는 문모를 혼내고 금강산으로 보내 이광수를 데려오게 했다.[68]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져 1935년에야 조선일보 고문 겸 필진으로 복귀했다.
방응모는 "덕대 출신의 신문사 사장"이라는 멸시를 받기도 했지만,[69] 이는 일본의 감시를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70]
1933년 6월 4일 조선일보 부사장 재직 중 개인 명의로 1천 원, 회사 명의로 5백 원을 영남 수해지역에 기부했다.[71] 7월 21일 서해안 태풍으로 진남포와 평양에서 고깃배 3백여 척이 행방불명되자,[71] 방응모는 수해 구호대를 조직하고 물자를 지원했다.
1934년 6월 2일과 3일 연평도 근해 폭풍우로 조기잡이 어선 1천5백 척이 파손되고 어부 2백 명이 실종되었으며, 부상자가 140명 발생했다.[73] 방응모 명의로 1백 원, 사원 일동이 37원 45전을 모아 구호금을 보냈다.[73] 7월 21일 삼남 지방 폭우로 영산강 유역과 김해 지역이 물바다가 되자, 비행기를 동원해 수해 구제 사업을 실시하고,[74] 수몰지구에 고립된 이들에게 빵을 공수했다. 육로로 사원 10명을 급파하여 취재 활동을 지원했으며, 조선일보사 5백 원, 방응모 개인 명의 5백 원, 사원 70원 등 총 1070원의 구호금을 모금했다.[76]
1934년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무료 비행기 에어쇼를 개최하여 2천여 명의 유치원생 및 학부모, 3만 명의 관중이 모였다.
1933년 당시 방응모는 개인적으로 1만 2천여 원을 장학금으로 지출했다.[72] 1933년 12월 12일, 그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이심회'를 조직했다. 이심회는 '서중회(序中會)'로 이름을 바꾸고 회원 수 60명으로 유지되었다. 조선일보 강제 폐간 후 1940년부터 서중회의 장학재단 기능은 동방문화학원으로 이전되었다.
방응모는 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했지만, 가족에게는 검소함을 강조하여 닭 한 마리도 먹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77] 이는 그의 친구, 박봉주, 윤석중, 민관식 등이 증언했다.
1932년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갯벌 간척 사업을 위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했다.[43] 간척 사업은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진행되었다.[43]
1936년 동방문화학원(후의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2. 2. 4. 일제 강점기 후반의 친일 행적 논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은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등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바꾸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는 반대했지만, 방응모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큰 손해를 본 것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서춘을 지지했다.[98]1938년 2월, 방응모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으며,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
1939년 2월, 방응모는 조선인의 군사동원을 위한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7월에는 영국 타도를 주장하며 전국적인 배영운동을 벌이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상담역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3월 잡지 《조광》의 발행인으로 취임했다.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는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으나, 방응모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바꿀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40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에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방응모는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폐간하였다.[120]
2. 3. 광복 이후 (1945년 ~ 1950년)
1932년 경성에서 조선일보 인수를 준비할 무렵, 방응모는 전국에 간척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현 화성시 노하리) 일대의 갯벌은 일본인 기술자들도 실패한 곳이었으나,[53] 방응모는 1935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간척지 매립 허가를 받았다.[54]방응모는 금광을 판 자금 중 일부를 노하리의 간척 사업에 투자했다.[55] 1935년 늦은 봄부터 서포리와 노하리 쪽의 산을 깎아 둑을 메우는 일을 시작했다.[56] 같은 해, 방응모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의 간석지 325정보(9만 5천 평)를 조성했다.[57] 1935년 조선총독부의 매립 허가 후, 방응모의 고향 정주군에서 17 가구가 이주해 왔다.[58] 1937년 제방 공사가 완공된 이후 저수지, 배수로 공사 등이 4,5년간 계속되었고, 방 농장이란 이름의 농장이 마련되었다.[58]
염분이 빠지면서 농사가 잘 되기 시작했고, 7년간 흉작이 없었다.[61] 1938년 10월 팔탄면 유지와 소작인들은 방응모 송덕비를 세웠다.[62] 간척 사업으로 얻은 땅에서 벼 1천 2백 가마가 생산되었고, 소작인은 2백20여 호에 이르렀다.[63]

2. 3. 1. 조선일보 복간과 정치 활동
1945년 8.15 광복 후, 방응모는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건준을 탈퇴하자 함께 탈퇴하였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여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하였다.11월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131]
1945년 12월 23일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32]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133]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3월 1일 미군정은 방응모를 경성일보사 관리인으로 위촉했다.[136]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137]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월 15일 서울역에 마중나가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및 중앙상무위원[138], 9월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8월 10일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선정되어 상을 받았다.[139]
2. 3. 2. 한국 전쟁 중 납북과 사망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방응모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7월 6일 납북되었다.[4] 납북 후 행적은 "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4]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45][146]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 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주변에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1950년 7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 자택에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
3. 사회 공헌
1933년 여름, 조선일보 기자 오재동이 입수한 일본인이 찍은 구포 지역 수해 현황 필름을 바탕으로, 방응모는 수해 구제 활동을 계획했다. 그는 동아일보 지국장 시절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조직했던 경험을 살려 구호 모임을 조직하고 지원했다. 1933년 6월 4일 조선일보 부사장으로서 개인 명의로 1000KRW, 회사 명의로 500KRW을 영남 수해지역에 기탁했다.[71]
같은 해 7월 21일 서해안 지방에 태풍이 발생하여 진남포와 평양에서 고깃배 3백여 척이 행방불명되는 등 동해안까지 피해가 발생하자, 방응모는 수해 구호대를 조직하여 활동과 물자를 지원했다.[71] 11월에는 이광수와 함께 2주간 일본 언론계를 시찰하고 돌아와 보성전문학교 전국웅변대회에 후원금을 기탁하기도 했다.
1934년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신문사 비행기를 이용해 무료 에어쇼를 개최했다. 이 에어쇼는 제6회 서울 유치원 원유회 축하 비행으로, 2천여 명의 유치원생과 학부모, 3만 명의 관중이 모였다.
1934년 6월 2일과 3일 사이, 연평도 근해에서 큰 폭풍우로 조기잡이 어선 1천5백 척이 파손되고 어부 2백 명이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방응모는 100KRW, 사원 일동은 37.45KRW을 모아 구호금을 현지에 보냈다.[73] 7월 21일에는 삼남 지방에 폭우가 쏟아져 영산강 유역과 김해 지역이 물바다가 되자, 비행기를 동원해 수해 구제 사업을 펼쳤다.[74] 고립된 이들에게는 비행기로 빵을 공수하기도 했다. 육로로는 사원 10명을 급파하여 취재 활동을 벌였으며, 방응모는 직접 기자들을 독려했다.[75] 조선일보사는 500KRW, 방응모 개인 명의로 500KRW, 사원 일동이 70KRW을 모아 총 1070KRW의 구호금을 모금했다.[76]
방응모는 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했지만, 가족에게는 검소함을 강조했다.[77] 그의 검소한 생활은 그의 친구, 박봉주 (이화여대와 동국대학교 교수 역임), 윤석중 (아동문학가), 민관식 (국회의장) 등이 증언했다.
3. 1. 장학 사업
1935년 조선일보 15주년 기념 및 새 사옥 낙성을 기념하여 신문 문화 전람회를 12일간 개최하였다. 그해 6월 11일 고속윤전기를 수입해온 뒤, 새 사옥 부지를 마련하여 6월 12일부터 7월 6일까지 태평로 1가에 새 사옥을 건립, 낙성하였다.1936년 소년잡지 소년지를 발간하면서 필진으로 윤석중 등을 영입했다. 윤석중은 일본 유학 시 방응모로부터 월 30JPY의 장학금을 지원받았다.[83]
그는 이념이나 출신과 상관 없이 장학생을 선발했는데, 지원 사유가 타당하면 바로 학비를 지급했다. 1940년 폐간 때까지 월 60JPY씩 70여 명에게 매월 학교로 송금해서 찾아 쓰게 했다.[84] 이 중에는 김기림, 문동표, 박치우, 백석, 이원조, 이갑섭, 정근양 등이 있어 서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방응모는 장학사업을 추진하여 고학생들을 후원, 지원하기도 했다. 계초의 장학사업인 서중회는 1934년부터 시작해 1950년 한국전쟁까지 계속되었다.[155]
3. 2. 조림 및 간척 사업
1932년 방응모는 경성에서 조선일보 인수를 준비하며 전국에 간척지를 물색했고, 화성시 노하리 일대의 갯벌을 주목했다. 이곳은 일본인 기술자들도 실패한 곳이었다.[53] 1935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간척지 매립 허가를 받았다.[54]교동 금광을 판 자금 중 500000KRW을 투자하여,[55] 1935년 늦은 봄부터 서포리와 노하리 쪽의 산을 깎아 흙을 운반하여 둑을 쌓는 공사를 시작했다.[56] 같은 해, 정주군에서 17가구가 이주해왔다.[58] 1937년 제방 공사가 완료된 후, 저수지 및 배수로 공사, 정지 작업, 염분 제거 작업 등이 수년간 계속되었다.[58] 간척지에 '방 농장'을 만들고 임삼진에게 관리를 맡겼다.[59]
염분이 제거되면서 농사가 가능해졌고, 7년간 흉년이 없었다.[61] 1938년 10월에는 팔탄면 주민과 소작인들이 방응모 송덕비를 세웠다.[62] 간척지에서 벼 1천 2백 가마가 생산되었고, 소작인은 220여 호에 달했다.[63]
1935년 4월 12일, 방응모는 조선총독부에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 국유림 조림 사업을 신청했다.[85]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은 4개월 후인 8월 27일에 조림 사업을 허가했다.[86]
조선총독부 임정 103호 문서에 따르면, 함경남도 영흥군 단속산, 월음령, 칠십령, 향산리 등의 국유림에 8~10년간 조림하는 계획이었다.
방응모는 영흥군 선흥면 성리 외 12개 리의 임야 조림을 위해 계초사임업부를 설립하고 아들 방재윤을 책임자로 임명했다.[87] 함경남도 영흥군 선흥면 성리로부터 12개 리에 걸쳐 32400000m2에 달하는 면적에 조림사업을 진행하였다[88] 1936년부터 조선소나무, 낙엽송, 오동나무 등을 심었다. 묘목이 부족하면 경기도 수원의 묘목상에서 구입하거나, 영흥군 도량리에 토지를 매입하여 직접 길렀다.[88]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조림 사업에 95039KRW을 투자했고, 일본 스미도모사 임업부가 300000KRW에 매수를 제안했으나 거절했다.[90][91]
1939년, 조선총독부 농림국장은 사업 부진을 이유로 간섭했지만, 방응모는 계속 조림사업을 추진했다. 1940년 5월까지 10807ha에 329만 2002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70000KRW이 투자되었다.[92] 조선총독부는 1941년에도 사업계획서 제출을 요구하며 간섭했지만,[93] 방응모는 스미도모 사 매각 요구를 거절하며 조림지를 지켰다.
1941년 봄, 1318명을 동원하여 35만 7700그루를 심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간섭은 심해져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매년 나무 심는 계획서를 제출해야 했다.[94] 임업사업부와 조림 사업은 1945년 광복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3. 3. 향토문화 조사 사업
1936년 방응모는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95]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이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맺고 1936년부터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원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96]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97]4. 논란과 비판
방응모는 일제 강점기 여러 친일 행적으로 인해 논란과 비판을 받고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33년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JPY을 군에 헌납했다.
- 1935년 친일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 1937년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의 중국 침략을 옹호하는 강연을 했다.
- 1940년대부터 《조광》에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 1942년 6월에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찬성 글을 《조광》에 발표했다.[147]
- 애국금차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해방 이후 여러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다만, 조선일보 경영 이전의 활동이 거의 없고, 납북 후 본인이 해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친일파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방응모의 후손들은 그를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하기도 하며,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149][150]
1943년 박설산이 학도병 징집을 피하고자 발가락을 절단했을 때, 방응모가 그를 돕고 뒤를 보살폈다는 일화도 있다.[151]
2010년 방응모 관계자와 조선일보 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법원은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 활동은 친일 행위에서 제외했지만, 나머지 활동은 친일 행위로 인정했다.[152] 2012년 서울고법은 방우영이 낸 소송에서도 방응모의 친일 행위를 인정했다.[153]
4. 1. 친일반민족행위 논란
방응모는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 체제에 협력한 다수의 기록과 활동이 있다. 1933년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JPY을 군에 헌납하였다. 1935년 친일 잡지 《조광》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을 멸망시켜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147]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 명단에도 포함되었다.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해방 이후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그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조선일보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이 많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에는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세력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든다.[149][150]
1943년 12월 28일,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 징집을 기피하고자 발가락을 절단했을 때, 방응모는 그를 걱정하며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151]
4. 1. 1.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취소 소송 패소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과 조선일보 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법원은 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은 친일행위 판단에서 취소했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152]법원은 방응모가 1933년 조선일보 사장 취임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했고,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으로 강연했으며,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한 점을 친일 행위로 인정했다.[152]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응모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응모에게 적용된 모든 행위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153]
1심과 2심 재판부는 방응모가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153]
5. 가계
구 분 | 내용 |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 |
어머니 | 온양 박씨 |
형 | 방응곤(方應坤) |
배우자 | 승계도 (슬하 2남 요절)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 (슬하 아들: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 (슬하 장녀: 방재숙(方在淑))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 (슬하 3남: 방재선(方在善, 1944년 ~), 방재효(方在孝, 1946년 ~), 방재규(方在奎, 1948년 ~))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 방정오(方政吾, 1978년)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 |
참조
[1]
뉴스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
http://news.kukmin.t[...]
2015-04-16
[2]
뉴스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
http://news.kukmin.t[...]
2015-04-23
[3]
뉴스
한홍구 "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
https://news.naver.c[...]
2015-04-13
[4]
뉴스
"김일성 장군 만세" 외쳤던 조선일보 1950년 6월28일 호외
https://news.naver.c[...]
2015-03-04
[5]
뉴스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https://news.naver.c[...]
2012-01-13
[6]
뉴스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https://news.naver.c[...]
2014-11-03
[7]
뉴스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https://news.naver.c[...]
2002-03-12
[8]
뉴스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
http://news.chosun.c[...]
[9]
뉴스
'방응모 한독당 재정부장' 보도는 <조선>의 전형적인 역사 날조 사례
https://news.naver.c[...]
2002-04-21
[10]
뉴스
김구 띄우다 이승만으로 갈아탔던 조선일보의 '흑역사'
https://news.naver.c[...]
2014-11-08
[11]
인물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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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영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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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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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주·대학총장 등 일제말 지도층 치부 ‘낱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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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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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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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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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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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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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조선일보 역사 읽기' 책은…
http://www.chosu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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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http://weekly.chosun[...]
주간조선
200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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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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