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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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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재서는 1908년 황해도 해주 출신의 문학 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이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한국인 최초로 모교 강사로 채용되었으나 해임된 후, 친일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문예지 《인문평론》과 《국민문학》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형 집행이 정지되었다. 한국 전쟁 중 대구로 피난, 이후 《사상계》 등에 기고하며 학문 활동을 재개했고, 연세대학교, 동국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영문학 연구와 번역에 힘썼다. 그는 지성주의 문학 이론을 발전시키고, 한국 문학 비평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196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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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9년 최재서
본관해주 최씨
출생1908년 2월 11일
출생지대한제국 황해도 해주군
사망1964년 11월 16일 (56세)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립중앙의료원
국적대한제국 → 대한민국
직업문학평론가, 영문학자
활동 기간1930년 ~ 1964년
종교개신교
학력
학교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대학교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 졸업
경력
대학교동아대학교 교수
대학교연세대학교 교수
대학교동국대학교 교수
대학교한양대학교 교수
작품
주요 작품문학과 지성
과도기 조선문학
셰익스피어의 예술과 생활 질서
친일 활동
친일 활동친일반민족행위 해당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결정)
가족 관계
배우자김형남
자녀3남 (최민자, 최태응, 최영자)

2. 생애

최재서는 1908년 황해도 해주시에서 부유한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1] 1931년 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원에서 사토 기요시, 레지날드 호레이스 블라이스 등 저명한 교수들에게서 공부했다.[3]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 및 문학 강사로 채용되어 한국인 최초이자 경성제국대학 출신 최초로 모교에서 가르치게 되었으나, 다른 일본인 교수들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이후 경성 법학 전문학교와 보성 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에서 가르쳤다.[4]

1938년 『문학과 지성』을 출간하고, 1939년 문예지 『인문평론』을 창간하여 1942년까지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인문평론』에서 중일 전쟁을 옹호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5] 1939년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일본의 전시 총동원 체제 구축에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6]

1941년 친일 성향의 잡지 『국민문학』을 창간하여 1945년까지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7] 『국민문학』은 한국 문단을 강제로 통합하여 제국주의 정신에 입각한 국민 문학을 창출하려는 단체였다. 1945년 조선언론협회 상무이사, 흥아동맹 조선지부 연구원, 조선문학건설본부 발기인 겸 간사로 임명되었다.[8]

해방 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8] 한국 전쟁 발발 후 대구로 피난했으며, 1953년경부터 『사상계』에 기고하며 학문 활동을 재개했다.[9]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나, 1960년 학생들의 항의로 사임했다.[10] 이후 동국대학교 대학원 원장을 거쳐 1963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12] 1964년 11월 16일 서울특별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사망했다.[13]

2. 1. 성장 및 교육

1908년 2월 11일 황해도 해주시 해주면 북행정 72번지에서 태어났다.[31] 향리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친 후 학업에 뜻을 품고 상경,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34]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1928년 수료하였다. 같은 해 4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1931년 3월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경성제대 대학원에 진학, 1933년 3월 졸업하였다. 석사 논문은 "셸리 시적 정신의 발전"이었다.[3]

일부 이력에서 영국 런던대학교에 유학했다고 기재하나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김욱동은 이것이 문덕수 편찬 《세계문예대사전》의 오(誤)기재 혹은 이인수와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정한다.[35]

2. 2. 초기 경력 및 비평 활동

최재서는 1930년대 초중반, 영문학적 교양과 식민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조선 문화 발전이라는 목표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외국 문화 연구자보다는 조선 문단의 비평가를 자처했다.[37]

그의 비평은 서구 이론을 소개 및 해설하고 조선 문학을 분석 및 지도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서구 이론이 조선 문학 분석의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37]

최재서의 비평적 입장은 카프 해체 분위기와 맞물려 새로운 문학 건설을 위한 주도권 확보 기획의 성격을 띠었다. 그는 카프의 이념주의와 대중문학의 감상주의가 예술성이 부족하여 조선 문학 발전을 저해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대체할 방법론으로 헉슬리, 루이스 등의 이론을 변형한 풍자문학론과 심리적 리얼리즘론을 제시했다. 이는 영문학적 교양에 기반한 이론이었기에 조선 문단의 창작과는 차이가 있었으나, 당시 문단에 신선한 이론적 자극을 주고 리얼리즘 논의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37]

1930년대 중반, 유럽의 지성론이 파시즘적 야만과의 대결을 표방한 것과 달리, 최재서는 조선 문단을 겨냥해 문학적 지성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지성은 작품 구성에 필수적인 작가의 지적 능력을 의미하며, 문학 전통 수련과 교양 습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자질이다. 그러나 개인의 자율적 완성에 대한 신념만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시대적 문제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에 그는 모럴론을 통해 문학과 정치의 조화 가능성을 모색하고, 기존에 수용했던 인문주의적 교양, 정신분석학이라는 과학을 뛰어넘을 새로운 원리를 찾고자 했으며, 당시 유럽에서 대두된 파시즘 문학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는 이론 차원에서 제기되었을 뿐, 실제 창작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소설양식론은 이러한 상황을 소설 기법과 형식론으로 해결하려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중편소설을 통해 단편과 장편,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조선 문단의 이분법을 해결하려 했으나, 1930년대 후반에는 장편소설을 통해 사회성과 역사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변화를 보였다.[37]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본 이념을 부정하기보다는 온전히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김남천, 임화, 이원조 등 프롤레타리아 문학 비평가들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22] 그러나 그는 낭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구성 결여를 비판했다. 최재서에 따르면, 문학적 구성은 "이념과 현실, 생각과 행동 간의 완전한 일치"를 포함한다.[23] 그는 이러한 요소들이 완전히 융합될 때 비로소 문학 작품이 온전한 구성 내에서 구축된 "건전한 문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24]

문학 비평에 관해 최재서는 비평가의 역할이 "작가와 독자 사이의 중개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5] 따라서 그는 비평가의 임무는 대중의 불만과 희망을 작가에게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이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6]

최재서는 A. C. 브래들리의 문학 이론을 소개하는 논문 "미숙한 문학"으로 문예지 ''신흥''에 등단했다. 그는 또한 "현대 지성주의 문학 이론의 구축"과 "비평과 과학: 현대 지성주의 문학 이론" 논문을 발표하면서 지성주의 문학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14]

2. 3. 인문사 설립과 《인문평론》

1937년 12월, 최재서는 대학을 떠나 인문사를 설립했다.[38] 사장으로서 최재서는 기획뿐만 아니라 교정, 서적 위탁 영업 등 다양한 실무를 직접 담당했다. 인문사의 출판물 필진은 경성제대 출신 문인·학자, 조선일보 관계자, 외국문학 전공자, 마르크스주의자 등 다양하게 구성되었으며, 영문학자 미하라 요시아키는 이를 "인민전선적 문화정치 프로젝트"라고 평가했다. 이광수와 같은 거대 출판 자본이 선호하던 선대 문인은 제외되었다.[39]

인문사는 1938년 4월부터 1941년 4월 《인문평론》 종간까지 단행본 16권, 연감 4권, 《인문평론》 통권 16호를 출간했다. 인문사가 출간한 문학서는 시국협력문학, 대중문학, 순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40]

인문사의 핵심 기획은 문학의 상업화와 속물 교양 보급에 대한 반격으로, 전작 장편소설 총서와 세계 명작 소설 총서 발간에 있었다. 최재서, 김남천, 임화를 중심으로 한 비평가 집단은 소설 발표 형식을 바꾸어 상업적 저널리즘의 공세를 막고, 새로운 장르 실험을 통해 리얼리즘을 갱신하고자 했다. 이는 작가 자신의 각성과 전환기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전망하기 위한 방책이라는 점에서 문단의 지지를 받았다.[42]

1939년 10월, 《인문평론》이 창간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득세하여 인문 정신이 위기에 처했고, 일본은 동아신질서 담론을 공식화하고 있었다. 카프 퇴조 이후 침체된 조선 평단은 올바른 시대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정치적 논리에서 파생된 동아협동체론이나 세계사의 철학을 검증 없이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간된 《인문평론》은 시대에 요구되는 인식론을 찾는 한편, 현실 재현과 역사적 전망을 담당할 서사문학 갱신의 방법론을 점검하는 장으로 기능했다.[43]

《인문평론》 창간호는 동아 공통의 문화를 강조했지만, 기존의 서구 보편주의에 근거한 세계문학이라는 틀이 유지되는 가운데 동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성을 모색하는 양상을 보였다. 때로는 상호 모순되는 세계성 또는 이에 대한 지향이 공존하기도 했다.[44] 최재서는 동아신질서를 비평의 원리로 수용하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이론적이고 중립적인 논조를 유지했다.[45]

1940년 6월, 독일이 파리를 함락하자 최재서와 같이 서구 문화의 전통에서 파시즘에 맞설 원천을 찾던 지식인들은 근대의 종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46] 같은 해 11월, 최재서는 연설에서 근대정신으로서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르네상스의 생명력을 잃었고, 자유주의의 문학적 해석인 개성 추구, 개성 표현도 기발한 개성과 병적인 개성, 반항적 개성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 의식 대신 일반 의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30년대 중반 주지주의 문학론과 거의 동일하지만, 일반 의식이 국민 의식으로 확실히 규정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후 비평에서 최재서는 새로운 목표를 "문화주의의 반성", "문화의 국민화"로 요약했다. 여기서 문화주의는 근대 개인주의와 낙관적 진화론의 산물로 문화적 가치의 영원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말한다. 최재서는 일반 국민들의 생활 조건과 지식인들의 개인주의적 문학 정신이 괴리되어 문학 역시 사멸 위기에 놓였으니, 국가이상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적용해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국민문화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7]

조선에서 '문화주의'는 서구의 생활 형식을 표면적으로 모방한 '문화생활'과 대비되는 것으로, 서구의 그것처럼 부정적 의미를 띠지 않았다. 최재서는 자기 땅 없이 코스모폴리탄적 대기에서 헤매던 조선의 문화주의자에게도 국민문화라는 안식처가 생겼음을 강조했다. 그는 국책 협력을 새로운 비평 과제로 천명하며, 다만 비평이 당국의 지시를 그대로 받아쓰지 말 것을 단서로 달았다. 아널드의 말처럼 당대 최고의 사상과 지식을 사회 전반에 확충, 위대한 창작 시대를 준비하는 것을 비평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과거 〈조선문학과 비평으 임무〉에서 강조된 바와 같지만, 서구의 인문주의 전통이 일본의 국민문화로 대체되었다는 차이가 있다.[48]

《인문평론》이 1941년 4월 종간된 이후, 인문사는 새로운 출판물을 내지 못하다가 《국민문학》 창간으로 전기를 맞아 주식회사로 재출발하였다.[41]

2. 4. 《국민문학》과 친일 행적

1941년 11월, 최재서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친일 성향의 잡지 《국민문학》을 창간하고 1945년 5월까지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다.[7] 《국민문학》은 일제강점기 조선 문단을 강제로 통합하여 제국주의 정신에 입각한 국민 문학을 창출하려는 목적을 가진 단체였다. 최재서는 창간호에서 국민문학을 일본의 국가 이상을 원리로 삼아 동양문학을 지도할 사명을 띤 문학으로 정의하며, 조선 문단이 국민적 입장에 서서 국민 생활과 국민적 감정에서 소재와 주제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9]

《국민문학》 창간과 동시에 문단의 공통어가 조선어에서 일본어로 바뀌었다.[50] 1942년 5·6월 합병호에서 《국민문학》은 "국어 잡지로의 전환을 결의"했는데, 이는 1942년 5월 8일 조선인 징병제 실시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최재서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징병제를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똑같은 국민의 지위를 부여하는 기회로 보았다.[51]

1943년을 전후해 《국민문학》 지면에는 일본 고전을 소개, 분석하는 글이 활발히 게재되었다. 《국민문학》은 조선 지식인의 사상 개조를 위해 일본 고전 시리즈를 기획하고, 동시에 국학·국학자, 조선 실학자에 대한 연재를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최재서는 고대를 매개로 새로운 국민문학 이론을 구상했다. 담징혜자에게서 내선일체의 논리적 근거를 추출하고, 쇼토쿠 태자를 따라 순사했던 혜자의 신념과 정신에 주목했다. 제2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한 최재서는 이 자리를 쇼토쿠 태자를 사모해 각지에서 학자, 예술가가 모여들었던 1390년 전의 역사에 견주어 묘사했다. 이후 창씨개명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직비령〉을 토대로 천황에게 귀의할 것을 결의하였다.[53]

2. 5. 광복 이후

1946년 해봉 김형익이 설립한 시사영어연구회에 관여했다. 같은 해 11월 1일 동아대학교 교수진 개편 보강을 위해 최재서를 초빙했고, 서정주가 그를 따라 부산으로 함께 내려갔다. 최재서의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동아대에서는 1947년 4월 1일부터 1948년 3월 31일까지 재직했다.[54]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소환되어 문초를 받았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54]

이상섭의 증언에 따르면 1949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십여 년 동안 연세대학교에 재직하였다. 연세대에서 최재서는 주로 문학개론, 영문학사, 영국문예비평가 등 강의를 담당하였고, 이때 쓴 강의 원고를 바탕으로 1957년 《문학원론》, 1959년 《영문학사》를 발간하였다. 연세대 재직 기간은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1949년 9월 1일부터 1960년 9월 30일까지, 《연세대학교 백년사, 1885-1985》에 따르면 1947년 9월 1일부터 1961년 3월 19일까지였다.[54]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이 점령됐을 무렵 도피생활을 하다 12월 25일 대구로 피난갔다. 전시에 최재서는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에 실린 맥아더 관련 기사를 논평, 재구성한 《매카더 선풍》, 맥아더 평전의 번역서 《영웅 매카더 장군》을 발간하였다.[54]

1960년 4·19 혁명 이후 연세대에서 교수 3인에 대한 이사회의 해임 처분을 부당하다고 항의하여 학생에 의해 동맹휴학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교수 3인에 대한 해임 즉각 철회, 이사진 개편, 당시의 총장서리 미국인 언더우드를 대신해 한국인 총장 선출을 요구했다. 이에 최재서를 비롯한 문과대학 교수 7인은 "폭력 앞에 교권이 설 수 없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 사표를 제출했으나 이사회의 권고로 이를 철회하고 출강했다. 교수 및 학생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 교수들은 강의를 중단하고, 학생들은 교수 7인의 강의를 거부했다. 이로 말미암아 최재서는 연세대를 사직하고 동국대학교로 전임하였다. 동국대에서는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1960년 10월 1일 대학원장에 임용, 1961년 10월 15일 사직하였다. 《동국대학교백년사》에서는 1960년 11월 25일 임용되었다고 전한다. 1963년 4월 한양대학교 교수에 부임, 사망할 때까지 재직하였다.[54]

광복 이후 최재서는 《사상계》를 중심으로 이론 비평 성격의 글을 기고하였다.[54] 번역가로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아메리카의 비극》, 《주홍글씨》 따위를 번역 출간하였다.[54] 이 가운데 《햄릿》은 우수한 번역으로 이름이 높다.[55]

1964년 11월 16일, 10년 동안 앓아온 지병으로 인해 국립중앙의료원에서 50세를 일기로 임종하였다.[31][56]

3. 사상

최재서는 A. C. 브래들리의 문학 이론을 소개하는 논문 "미숙한 문학"을 통해 문학 평론을 시작했다.[14] 이후 "현대 지성주의 문학 이론의 구축"과 "비평과 과학: 현대 지성주의 문학 이론" 등의 논문을 발표하며 지성주의 문학 이론을 발전시켰다.[14]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낡은 관습을 극복하기 위해 스티븐 스펜더, 허버트 리드, 어빙 베빗, T. S. 엘리엇, 올더스 헉슬리 등 다양한 학설을 소개하며 1930년대 한국 문학을 다양화했다.[17]

최재서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과 민족 문학 운동의 전통을 이어가는 시인 그룹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 둘을 융합하여 자신의 지성주의 문학 이론을 형성했다.[20]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근본 이념을 부정하기보다는 이를 온전히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낭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구성 결여를 비판했다. 최재서에 따르면, 문학적 구성은 "이념과 현실, 생각과 행동 간의 완전한 일치"를 포함한다.[23]

문학 비평에 관해서, 최재서는 비평가의 역할이 "작가와 독자 사이의 중개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5] 따라서 그는 비평가의 사명은 대중의 불만과 희망을 작가에게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이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6]

1938년 출간된 《문학과 지성》에서 최재서는 서구 문학 이론의 기본 토대를 소개하며, 현대 지성주의뿐만 아니라 사실주의와 도덕 비평의 문학 이론에도 초점을 맞추었다.[27] "현대 지성주의의 문학 이론"과 "비평과 과학"에서는 T. E. 흄의 단절 이론과 기하학적 예술, T. S. 엘리엇의 객관적 시론과 전통적 문학 비평, 허버트 리드의 정신분석학적 문학 비평, I. A. 리차즈의 심리학적 가치 이론을 설명한다.[28]

최재서는 한국의 사실주의 문학을 농촌 지역의 가난한 현실만을 묘사하는 "불구의 문학"이라고 비판하며, 사실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아방가르드적 실체성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9] "작가와 도덕"에서는 사실주의가 일관된 방식으로 사회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데 실패하고,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없다면 도덕의 틀에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3. 1. 교양주의

최재서는 경성제대 시절 조선인으로서 자존심을 가졌지만, 그의 글에는 '조선'이라는 범주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제국대학의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57]

최재서는 영문학이라는 보편에서 벗어나 조선문학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교양은 조선 현실과 만나면서 조선을 교화하는 매개체로 전환되었다. 최재서의 필명인 '석경(石耕, 돌밭[=조선 문단]을 감)'과 '석경우(石耕牛, 돌밭 가는 소)'는 이러한 그의 교양주의적 신념을 보여준다.[57]

최재서는 외국문학을 참조하여 조선문학의 보편성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수준 낮은 외국문학 연구자들을 비판하며, 외국문학 소개가 실제 조선문학의 기준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점을 문제 삼았다. 또한, 조선 신문학 수립을 위해 서구 이론을 성급하게 차용하는 것을 경계하고, 주관을 갖고 외국문학을 수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7]

광복 후, 최재서는 1930년대에 선보였던 전통론과 교양론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는 한국문학에 전통이 없다고 보고, 서구 교양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문단에서 전통은 민족이라는 경계 속에서 논의되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큰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58]

3. 2. 비평 원리

최재서가 비평의 근거로 삼은 것은 인문주의 전통, 그중에서도 19세기 영국 비평가 매슈 아널드의 영향을 받은 근대 영미 비평이었다. 아널드는 문화를 조화롭고 일관된 것으로 보았고, 개인의 품성 함양과 공동체 유지를 위한 새로운 근거를 제시했다. 그의 이론은 20세기 , 엘리엇, 리드 등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재정비되었다.[59] 이들은 개인주의의 과도한 확장이 현대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고, 고전적 질서에서 개인을 규제할 원리를 찾았다. 낭만주의적 개성의 오류를 비판하면서도 인간 완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문학 전통 안에서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아널드의 문화 이상을 따랐다. 최재서는 고도의 예술성을 갖춘 창작이 사회 발전을 이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아널드의 개념을 이어받았다.[59]

흄과 엘리엇이 낭만주의적 개성의 확장을 고전주의적 질서로 해결하려 했다면, 리드와 리처즈는 정신분석학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비평을 개선하려 했다. 최재서는 이러한 경향들을 주지주의 혹은 주지적 비평이라는 말로 요약해 조선 문단에 소개했다.[60]

최재서는 A. C. 브래들리와 그의 문학 이론을 소개하는 논문 "미숙한 문학"을 통해 문학 평론을 시작했다.[14] 이후 "현대 지성주의 문학 이론의 구축"과 "비평과 과학: 현대 지성주의 문학 이론" 등의 논문을 발표하며 지성주의 문학 이론을 발전시켰다.[14]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낡은 관습을 극복하기 위해 스티븐 스펜더, 허버트 리드, 어빙 베빗, T. S. 엘리엇, 올더스 헉슬리 등 다양한 학설을 소개하며 1930년대 한국 문학을 다양화했다.[17]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과 민족 문학 운동의 전통을 이어가는 시인 그룹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 둘을 융합하여 자신의 지성주의 문학 이론을 형성했다.[20]

최재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근본 이념을 부정하기보다는 이를 온전히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낭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구성 결여를 비판했다. 그는 문학적 구성이 "이념과 현실, 생각과 행동 간의 완전한 일치"를 포함한다고 보았다.[23] 문학 비평에서 비평가의 역할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중개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5] 그는 비평가의 사명이 대중의 불만과 희망을 작가에게 전달하고, 대중이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26]

1938년 출간된 《문학과 지성》에서 최재서는 서구 문학 이론의 기본 토대를 소개하며, 현대 지성주의뿐만 아니라 사실주의와 도덕 비평의 문학 이론에도 초점을 맞추었다.[27] "현대 지성주의의 문학 이론"과 "비평과 과학"에서는 T. E. 흄의 단절 이론과 기하학적 예술, T. S. 엘리엇의 객관적 시론과 전통적 문학 비평, 허버트 리드의 정신분석학적 문학 비평, I. A. 리차즈의 심리학적 가치 이론을 설명한다.[28]

최재서는 한국의 사실주의 문학을 농촌 지역의 가난한 현실만을 묘사하는 "불구의 문학"이라고 비판하며, 사실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아방가르드적 실체성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9] "작가와 도덕"에서는 사실주의가 일관된 방식으로 사회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데 실패하고,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없다면 도덕의 틀에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4. 저서 및 역서

연도제목출판사비고
1938《문학과 지성》인문사[63]
1938《해외서정시집》인문사[63]
1939《조선문예연감》인문사공편 [63]
1940《조선작품연감》인문사공편 [63]
1943《전환기의 조선문학》인문사일문 [63]
1944《신반도문학선집1·2》인문사편, 일문 [64]
1951《매카―더 선풍》향학사[64]
1957《문학원론》춘조사[63]
1958《영미명저역주총서 1》한일문화사[65]
1959《영미단편소설감상》한일문화사공편 [63]
1959《영문학사 제1편 고대·중세》동아출판사[65]
1959《영문학사 제2편 르네쌍스편》동아출판사[65]
1960《영문학사 제3편 셰익스피어》동아출판사[65]
1961《최재서평론집》청운출판사[63]
1962《문예사조사》어문각공저 [65]
1963《증보 문학원론》춘조사[65]
1963《교양론》박영사[64]
1963《셰익스피어 예술론》을유문화사[63]
1963'Shakespeares Art as Order of Life''Vantage Press[65]
1977《인상과 사색》연세대학교 출판부[64]



연도제목출판사비고
1939-1940《루소와 낭만주의》개조문고상·하, 일문 [63]
1952《영웅 매카―더장군》일성당서점[65]
1953《주홍글씨》을유문화사[64]
1954《햄맅》연희춘추사[65]
1955《포우 단편집》한일문화사[65]
1959《아메리카의 비극》박영사[63]
1963The Golden Treasury한일문화사[65]



최재서는 1938년 문학 평론집인 《문학과 지성》을 출간했다. 이 책은 "현대 지성주의의 문학 이론", "비평과 과학"을 비롯한 19편의 논문과 "언어의 협상 가능성과 정직성", "전통과 교리"와 같은 20편의 단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재서는 이 책에서 서구 문학 이론의 기본 토대를 소개하며, 현대 지성주의뿐만 아니라 사실주의와 도덕 비평의 문학 이론에 초점을 맞추었다.[27]

"현대 지성주의의 문학 이론"과 "비평과 과학"에서 최재서는 현대 영국의 문학 이론을 소개하는데, 이는 후에 그의 지성주의 이론의 핵심 주장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이 논문들은 T. E. 흄의 단절 이론과 기하학적 예술, T. S. 엘리엇의 객관적 시론과 전통적 문학 비평, 허버트 리드의 정신분석학적 문학 비평, 그리고 I. A. 리차즈의 심리학적 가치 이론을 순서대로 설명한다.[28]

최재서는 한국의 사실주의 문학을 농촌 지역의 가난한 현실만을 묘사하는 "불구의 문학"이라고 비판하며, 사실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아방가르드적 실체성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9] "작가와 도덕"에서 최재서는 그의 도덕 비평 이론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며, 사실주의가 일관된 방식으로 사회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데 실패하고,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없다면 도덕의 틀에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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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Literature and Intellect [문학과 지성] Yonsei University Publisher 1977
[3] 서적 A Study on Korean Modern Literature I [한국근대문학사상연구 1] Iljisa [일지사] 1999
[4] 서적 Pro-Japan Collaborators Dictionary: ㅇ to ㅎ [친일인명사전: ㅇ~ㅎ] Institute for Research in Collaborationist Activities [민족문제연구소] 2009
[5] 논문 “War Literature [전쟁문학]” 1940
[6] 간행물 Report of the Inspection of Collaborations for Japanese Imperialism IV-1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IV-18] Presidential Committee for the Inspection of Collaborations for Japanese Imperialism 2009
[7] Ibid
[8] 학위논문 “A Study on Choi Jae-seo Literary Criticism after Liberation [해방 후 최재서 문학비평 연구]” Seoul National University Graduate School 2016
[9] Ibid
[10] Ibid
[11] Ibid
[12] Ibid
[13] 서적 Thoughts on My Brother, Choi Jae-seo Modern Literature Publications 2011
[14] 논문 “Choe Jae-seo's literary theory of Intellectualism and contemporary chaos [최재서의 주지주의 문학론과 현대의 혼돈]” 2020
[15] 논문 “Ch’oe Chae-sŏ’s “Theory of National Literature” during the New Order Period [신체제 시기 최재서의 ‘국민문학론’]” 2010
[16] 뉴스 “Choi Jae-seo's Hamlet Translation Said to be the Best out of 573 Others [‘햄릿’ 번역은 최재서 작품이 만점…번역본 573종 평가]” Dong-Ah Ilbo [동아일보] 2004-02-15
[17] 서적 Literary Ideology and Critical Intellect [문학적 이념과 비평적 지성] Taehaksa [태학사] 1993
[18] 논문 “The Epistemological Background of Choi Jae-Suh's Criticism [최재서 비평의 인식론적 배경]” 1992
[19] 뉴스 “Theory of Satire [풍자문학론]” Chosun Ilbo [조선일보] 1935-07-14
[20] 논문 “The Epistemological Background of Choi Jae-Suh's Criticism” 1992
[21] Ibid
[22] 서적 A Study on Korean Modern Literature I Iljisa 1999
[23] 논문 “Inexperienced Literature [미숙한 문학]” 1941
[24] Ibid
[25] 서적 Literature and Intellect Yonsei University Publisher 1977
[26] Ibid
[27] Ibid
[28] 서적 Literary Ideology and Critical Intellect Taehaksa 1993
[29] 서적 Literature and Intellect Yonsei University Publisher 1977
[30] 서적 천재와 반역 : 최재서 연구 민음사 2024
[31] 서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IV-1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32] 서적 친일인명사전: ㅇ~ㅎ 민족문제연구소 2009
[33] 저널 최재서 비평 연구 https://www.riss.kr/[...] 韓國外國語大學校 大學院
[34] 서적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현대문화출판 2011
[35] 서적 천재와 반역 : 최재서 연구 민음사 2024
[36] 웹인용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최재서 https://terms.naver.[...] 2004-02-25
[37] 저널 최재서 비평의 문화 담론 연구 https://www.riss.k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0
[38] 저널 세계문학의 번역과 근대 조선의 교양주의- <<해외서정시집>>(1938)을 중심으로 - https://www.riss.kr/[...] 배달말학회
[39]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40]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41]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42]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43]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44] 저널 최재서 비평의 문화 담론 연구 https://www.riss.k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0
[45] 저널 최재서 비평의 문화 담론 연구 https://www.riss.k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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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48]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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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서적 親日文學作品選集 1 실천문학사
[53]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54] 저널 해방 후 최재서 문학비평 연구 https://www.riss.kr/[...]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6-02
[55] 뉴스 ‘햄릿’ 번역은 최재서 작품이 만점…번역본 573종 평가 https://www.donga.co[...] 2004-02-15
[56] 서적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현대문화출판 2011
[57] 저널 최재서 비평의 문화 담론 연구 https://www.riss.k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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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60] 서적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 : 1930~40년대 한국문학비평, 제도, 서사 소명출판 2023
[61] 서적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현대문화출판 2011
[62] 서적 印象과 思索 延世大學校 出版部 1977-08-31
[63] 서적 최재서의 국민문학과 사토 기요시 교수 null 2009
[64] 저널 작가연구자료 null 2008
[65] 저널 해방 후 최재서 문학비평 연구 https://www.riss.kr/[...]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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