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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천하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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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천하대왕'은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일본 왕의 칭호와 그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문서이다. 중국에서 왕은 중원의 지배자를 의미했으며, 일본은 57년 후한 광무제가 왜노국 왕에게 '한위노국왕'이라는 금인을 하사하면서 왕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키미(大王)' 칭호가 사용되었고, 5세기 후반에는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이라는 칭호가 등장했다. 7세기 초에는 '천황(天皇)' 칭호가 등장하며, 덴무 천황 시기에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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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천하대왕

2. 중국 문헌에 보이는 일본 왕의 칭호

중국에서 '왕(王)'은 원래 '중원의 주인'을 가리켰다. (周) 왕조는 천하를 통치하는 유일한 '천자(天子)'로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 왕조의 신하였던 제후들이 '왕'을 자칭하면서 각지에 왕이 난립했다. 기원전 221년 중화 세계를 최초로 통일한 (秦)의 왕 영정(嬴政)은 가치가 떨어진 '왕' 대신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漢) 왕조 성립 이후, '왕'은 황제의 신하에게 주어지는 칭호(제후왕)로 굳어졌다.

일본과 관련해 '왕'이라는 칭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57년에 왜노국(倭奴國)의 왕에게 사여한 금인(金印)에 새겨진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다.

후한서(後漢書)》 안제(安帝)기 영초(永初) 원년(107년) 기사에는 '왜국왕 수승 등(倭國王帥升等)'이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왜국왕'은 지역 소국이 아닌 국가 연합의 수장으로서 '왜국의 왕'을 의미하며, 이는 왜국의 성립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2. 1. 한나라 시대의 왕 칭호

기원전 221년, (秦)의 왕 영정(嬴政)이 중화 세계를 최초로 통일하면서 가치가 떨어진 '왕' 대신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漢) 왕조가 성립된 뒤, '왕'은 황제의 신하에게 주어지는 칭호(제후왕)로 굳어졌다.

일본과 관련해 '왕'이라는 칭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57년에 왜노국(倭奴國)의 왕에게 하사한 금인(金印)에 새겨진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다.[5]

2. 2. 왜왕 칭호의 등장과 의미

중국에서 '왕(王)'은 원래 종교적 최고 권위를 의미했지만, 점차 '중원의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 변화했다. 주나라 시대에는 천하를 통치하는 유일한 존재인 천자만이 왕이라 불렸으나, 전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제후들이 왕을 자칭하며 왕이 난립하게 되었다. 기원전 221년 중화 세계를 통일한 의 왕 영정은 왕 대신 '황제'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나라 시대에 왕은 황제의 신하(제후왕)나 주변 국가의 장에게 주어지는 칭호로 굳어졌다.

일본과 관련하여 '왕'이라는 칭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57년 후한의 광무제가 왜노국의 왕에게 내린 금인에 새겨진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다.

이후 107년후한서》 안제기에는 '왜국왕 수승 등(倭國王帥升等)'이라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왜국의 성립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서로 해석된다.[6] 수승은 왜왕 및 기타 여러 명을 지칭한다.[6]

240년에서 249년 사이에 사망한 히미코에 의해 왜국의 통일된 여왕으로 인정받았으나,[7] 야마토 왕권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3. 「대왕(大王)」 표기의 성립

5세기경 야마토 왕권의 수장 칭호인 '오키미(大王)'가 성립되어 일본 국내에서 7세기 후반까지 사용되었다.

왜5왕 중 '제(濟)'로 비정되는 인교 천황지바현 이나리다이 1호분에서 발굴된 왕사명철검의 '왕'으로 보는 설이 있으나, '대왕'은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무(武)'로 비정되는 유랴쿠 천황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에 "획가다지노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라 새겨져 있고,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 고분 출토 철도 명문에는 "치천하...(治天下...)"라고 새겨져 있어, 5세기 후기에는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 칭호가 나타났다.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서기》에는 닌토쿠 천황 즉위 전기에 "대왕(大王)의 풍채는"이라는 기록이 나오지만, 닌토쿠 천황 시대부터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왕' 표기는 《일본서기》 오진키(応神紀)에 처음 보인 이래 닌토쿠키(仁德紀), 인교키(允恭紀), 유랴쿠키(雄略紀), 겐조키(顕宗紀), 게이타이키(継体紀) 등에서 발견된다.

와카야마현 스다 하치만 신사 소장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에는 "계미년...대왕년...(癸未年...大王年...)" 명문이 있어, '대왕' 칭호가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계미년은 383년, 443년, 503년, 623년 등 여러 해석이 있는데, 443년(인교 천황), 503년(부레쓰 천황)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명문에 이체자(異体字)가 많고 해석되지 않은 문자도 많아, '대왕' 표기 시작 연대는 불분명하다.

수서동이왜국(東夷倭國)조의 600년 제1차 견수사 상주문에 나오는 왜왕 다리사비고 호칭 '아배계미(阿輩雞彌)'는 '오키미'(大王)를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607년 제2차 견수사 상표문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라고 되어 있어 대외적으로는 '천자' 칭호가 쓰였지만, 국내에서는 '대왕'이나 '치천하대왕' 칭호가 쓰였다.

《만요슈》에는 '대왕' 표기가 가장 많고(57곳), '왕', '황', '대왕', '대황'이 있으나 모두 '오키미'로 읽는다.

3. 1. 오키미(大王) 칭호의 의미와 사용

'오키미'(大王일본어)는 '키미'(君)에 존칭 접두사 '오(大)'를 붙여 만든 것으로, 위대함과 특별한 고귀함을 나타낸다. 5세기경 야마토 왕권의 수장(왕)의 칭호인 '''대왕'''(大王, 오키미)가 성립되었고, 680년대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의 편찬이 시작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12] 초기에는 통일 왕권의 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사이타마현의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과[8] 구마모토현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도 등에서 '오키미' 칭호가 확인된다.[9] 특히 에다후나야마 고분 출토 철도 명문은 해독이 어려웠으나,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이 발견되면서 재검토되어 "치천하획가다지노대왕"(治天下獲加多支鹵大王)으로 판독되었다. '획가다지노'(獲加多支鹵)는 유랴쿠 천황의 이름인 '와카타케루'로 읽히며, 5세기 후반에 '치천하대왕' 칭호가 사용된 최초의 사례로 여겨진다.[9]

일본서기에는 닌토쿠 천황 즉위 전기(4세기 말~5세기 초)에 "대왕의 풍채"(大王風姿)라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지만, 이것이 닌토쿠 천황 시대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왕' 표기는 오진 천황 기록부터 닌토쿠 천황, 인교 천황, 유랴쿠 천황, 겐조 천황, 게이타이 천황 등의 기록에 나타난다.

와카야마현 스다 하치만 신사 소장의 인물화상경에는 "계미년 8월 일 십 대왕년"(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이라는 명문이 있어, '대왕' 칭호가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0] 그러나 계미년은 383년, 443년, 503년, 623년[11] 등 여러 해석이 있어, '대왕' 표기의 정확한 사용 시기는 불분명하다.

만요슈에는 '대왕'(大王) 표기가 가장 많고(57곳), 모두 '오키미'(オオキミ/オホキミ)로 읽는다. '키미'에 권위를 더한 '대군'(大君) 표현은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의 와카 등에서 보인다.

3. 2. 오키미 칭호 사용의 시대적 배경

왜의 5왕 중 '제(濟)'로 비정되는 인교 천황 시기인 5세기 중반에 이미 '오키미'(大王)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지바현 이나리다이 1호 고분에서 출토된 왕사명철검(王賜銘鐵劍)의 "왕사□□경□"이라는 명문의 '왕'을 인교 천황으로 보는 설이 있으나, '대왕'은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무(武)'로 비정되는 유랴쿠 천황의 경우,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 명문에 "획가다지노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라 새겨져 있고, 구마모토현 에다후네야마 고분 출토 은상감명 대도 명문에는 "치천하획□□□노대왕(治天下獲□□□鹵大王)"이라 새겨져 있어, 5세기 후기에는 일본 국내에서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서기》에는 닌토쿠 천황 즉위 전기(卽位前紀)에 "대왕(大王)의 풍채는"이라는 기록이 등장하지만, 이것이 닌토쿠 천황 시대에 실제로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왕' 표기는 《일본서기》에서 오진키(応神紀)에 처음 보인 이래 닌토쿠키(仁德紀), 인교키(允恭紀), 유랴쿠키(雄略紀), 겐조키(顕宗紀), 게이타이키(継体紀) 등에서 발견된다.

와카야마현 스다하치만 신사 소장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에는 "계미년 팔월일십대왕년남제왕재의자사궁시사마염장수견개중비직예인금주리이인등취백상동이백한작차경(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鏡)"(후쿠야마 도시오 설)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대왕', '남제왕(男弟王)' 등의 표현을 볼 수 있다.

거울이 제작된 계미년(癸未年)에 '대왕' 칭호가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계미년에 대해서는 383년, 443년, 503년, 623년 등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이 중 443년(인교 천황), 503년(부레쓰 천황) 설이 유력한데, 443년 설을 따르면 5세기 중반 인교 천황 때 '대왕' 표기가 사용된 것이 된다. 그러나 명문에 이체자(異体字)가 많고, 해석되지 않은 문자도 많아 명문 내용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여, '대왕' 표기가 정확히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수서동이왜국(東夷倭國)조에 기술된 600년 제1차 견수사 상주문에 "왜왕의 성은 아메이고 자는 다리사비고이며 호는 아배계미이다(俀王姓阿毎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라고 한 것에서 왜왕 다리사비고의 호칭 '아배계미(阿輩雞彌)'가 '오키미'(大王)를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607년 제2차 견수사가 올린 상표문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서쪽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니 무량하신지(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라고 되어 있어 대외적으로는 '천자(天子)'라는 칭호가 쓰인 것으로 보이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대왕'(오키미)이나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이라는 칭호가 쓰이고 있었다.

《만요슈》에는 '대왕(大王)' 표기가 가장 많고(57곳), 그 밖에 '왕(王)', '황(皇)', '대왕(大王)', '대황(大皇)'이 있는데 모두 '오키미'(オオキミ/オホキミ)로 읽는다. '왕(王)'만 떼어서 '키미(キミ)'로 읽은 사례는 보이지 않으며, '키미'에 권위를 더한 군주를 의미하는 '군(君)'을 붙인 '대군(大君)'은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가 읊은 "야스미시시 와가 오오키미(やすみしし我が大君…)" 등 여러 곳에서 보인다. 하시모토 타쓰오는 기키(記紀)에 등장하는 가요나 《만요슈》의 다른 와카를 고찰하여, 와카 속 침사(枕詞)인 '야스미시시(やすみしし)'란 '전 세계를 통치한다'는 뜻으로, '천황(天皇)'과 마찬가지로 도교 교리에 따라 창안된 호칭이라 주장하였다.[12]

4. 「천황(天皇)」 표기의 성립

7세기 초, 쇼토쿠 태자가 세운 호류사 금당 약사여래상의 광배명에는 스이코 천황 15년(607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이라는 칭호가 보인다. 그러나 이 명문 자체에 스이코 천황 때보다 후대의 표현과 서체가 사용되었고, 불상의 제작 기법도 623년에 제작된 석가삼존상보다 후대에 해당한다는 설이 있어 의문이 제기된다.

「천황(天皇)」이라는 단어는 중국 도교(道敎)에서 「우주의 최고 신」을 가리키는 「천황대제」(천제)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천황」 표기가 성립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스이코 천황 16년 9월조에 「동쪽의 천황이 삼가 서쪽의 황제에게 말한다」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통설.
  • 천수국수장의 「긴메이 천황」이라는 표기.
  • 《회풍조》 서문에서 지토 천황 이후에 대해서만 「천황」 표기가 사용되고 있음을 들어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으로 규정되어 쓰였다는 설.


이 중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으로 규정되어 쓰였다는 설이 근래에는 유력하다. 공적인 표기로서의 「천황」을 쓰게 된 것은 덴무 천황 때일 가능성이 높다.

4. 1. 천황 칭호의 기원과 의미

'천황'은 중국 도교에서 '우주의 최고신'을 가리키는 '천황대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서기스이코 천황 16년(608년) 조항에 '동쪽의 천황이 삼가 서쪽의 황제에게 말한다'라는 기록이 '천황' 표기의 첫 등장으로 여겨진다.[13]

덴무 천황 때 군주의 공적인 표기로 '천황'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674년 당나라 측천무후가 '황제'를 '천황'으로 개칭한 것을 모방한 것으로 추측된다. '천황(대제)'은 중국 고대 우주의 최고신 천제의 이름으로 도교 사상과 관계가 깊고, 정치에서 도교적인 색채가 짙었던 덴무 천황이 도교적인 '천황'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16]

'천황'이라는 표기는 일본어로 훈독하면 '스메라미코토(スメラミコト)', '스메로키(スメロキ)'인데, '스메루(スメル)'는 '통치하다(統べる, 스베루)'의 와전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고대 특수 가나 표기법에서 부인되었으며 현재도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17][18]

4. 2. 천황 칭호 사용의 배경과 확산

덴무 천황 시기에 '천황' 칭호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당나라 측천무후674년 '황제'를 '천황'으로 개칭한 것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다. '천황(대제)'은 중국 고대 우주의 최고신인 천제의 이름으로 도교 사상과 관계가 깊으며, 정치에서 도교적인 색채가 짙었던 덴무 천황이 도교적인 '천황'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으로 '천황' 칭호를 공식화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스카쿄 유적에서 발굴된 목간 조각은 덴무 천황 10년(681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황자'라는 표기가 쓰였다는 것은 그 이전에 '천황'이라는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로 거론된다.

만엽집》에서는 '천황'을 '스메라미코토(スメラミコト)' 또는 '스메로키(スメロキ)'로 훈독하며, 과거의 역대 천황이나 황조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24]

참조

[1] Kotobank Tenka (Kotobank) https://kotobank.jp/[...]
[2] Kotobank Okimi (Kotobank) https://kotobank.jp/[...]
[3] 서적 岩波日本史辞典 岩波書店 1999
[4] Kotobank Okimi 2,3 (Kotobank) https://kotobank.jp/[...]
[5] Kotobank Wa-no-Na-no-Kokuo-In (Kotobank) https://kotobank.jp/[...]
[6] Kotobank Suisho (Kotobank) https://kotobank.jp/[...]
[7] Kotobank Himiko (Kotobank) https://kotobank.jp/[...]
[8] Kotobank Okimi (Kotobank) https://kotobank.jp/[...]
[9] Kotobank Eta Funayama kofun (Kotobank) https://kotobank.jp/[...]
[10] 문서
[11] 문서
[12] 서적 岩波日本史辞典 岩波書店 1999
[13] 서적 訓読日本書紀. 下 https://dl.ndl.go.jp[...] 岩波書店
[14] 간행물 「天皇」号成立推古朝説の系譜 : もう一つの邪馬台国論争的状況 https://doi.org/10.1[...] 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 2021-09-28
[15] 간행물 天皇号の成立年代 https://hdl.handle.n[...] 金沢大学文学部史学科日本史学研究室 2021-09-28
[16] 문서
[17] 문서
[18] 웹사이트 万葉神事語辞典「すめかみ」 http://jmapps.ne.jp/[...] 國學院大學研究開発推進機構 2022-02-26
[19] 문서
[20] 웹사이트 万葉神事語辞典「すめろき」 http://jmapps.ne.jp/[...] 國學院大學研究開発推進機構 2022-02-26
[21] 문서
[22] 서적 大宝律令制定前後における日中間の情報伝播 吉川弘文館
[23] 서적 大宝律令制定前後における日中間の情報伝播 吉川弘文館
[2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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